사도행전강해15(사도행전15:1-11)
오늘은 사도행전15장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할례에 대한 문제가 기록된 곳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남자의 표피를 제거하는 포경수술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할례가 처음 나온 곳은 창세기17:10절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증표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 할례의 시초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인들은 청소년기 전에 주로 남자의 성인식에서 할례의식을 행하고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이 할례의 원래는 부정을 제한다라는 의미에서 남자들에게 행해졌는데
말이 부정을 제한다는 의미지만, 사실은 물이 귀해서 자주 씻지 못하는 중동지역에서는 남자의 표피가 비위생적이어서 남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질병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잘라내는 것이 위생적으로 좋기때문에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언약의 징표로 반드시 할례를 거행하게 하신 것이
지금까지 이슬람과 유대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유대기독교인들에게는 문제가 안되었던 이 할례가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며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 중에서는 특히 로마사람이나, 유럽 사람들은
물이 풍부해서 목욕문화가 일찍이 발달되어
할례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할례받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받지 않은 이런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면서
이 할례라는 종교적 전통 때문에 유대기독교인들과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입장이었고
이방기독교인들은 할례는 유대문화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런 문제로 이방기독교인과 유대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 이방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교회 안에는 이런 비슷한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어온 전통적인 신앙이,
때로 새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과의 마찰이 있을수 있다라는 겁니다.
과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어런겁니다.
세례를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안받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 아니다 구원은 세례와 상관없다.....
그런데 이 할례의 문제는 세례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고, 분쟁거리였습니다.
지금이야 이 할례 문제가 별문제가 안되지만 이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로 구원관과 연계해서
구원을 받느냐 못받느냐로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한한 모든 권한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받았다. 안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만이고 교만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어기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투거나
서로 옳으냐 그러냐를 따져서 비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이 문제가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그 은혜스러운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방선교의 요람이요, 이방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이 좋은 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두란노교회가 성도가 적어서 그럴지 몰라도
아니, 성도가 적어도 언제나 분쟁은 있을 수 있다라는걸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로 서로 의견이 다르고 대립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쟁할 수도 있다는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수도 있겠다...그러려니 하십시오.
가끔 서로 마음이 안맞거나, 신앙이 안맞다고,
심지어 요즘은 교회안에 정치적견해가 서로 안 맞다고 척을 지거나
삐져서 교회를 뛰쳐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그런 유치한 신앙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의식이 성숙하고 성장한 성도들이 되세요. 마음이 넓은 성도들이 되세요.
포용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넓은 아량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소한 일로 싸우면 안됩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되죠.
왜 그런 사소한 일에 목숨거냐고요.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려느니 하세요.
종교적 관점이 좀 다를 수 있어요. 그러면 그려느니 하세요.
그런거 가지고 뭘 싸워요. 진리의 문제라면 피터지게 싸워야 합니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순교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본질적거 아니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아니면 그러려니 하세요.
그리고 교회에 그런 사소한 일에 분쟁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세요.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성인군자가 모인 곳이 아니예요. 그러면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걸 인정하면 싸울 일 없습니다. 서운해 할 일도 없어요. 그러려니 하세요.
그리고 서로 의논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면서
결론을 찾아가세요. 그리고 결론이 어려울때는 이 목사를 찾아오세요.
그리고 담임목사가 중재안을 내면 순종하고 따르세요.
그런데, 정말 이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일이고, 진리에 역행하는 일인데도
담임목사가 따르라고 강요하면 피하지 말고, 다른 교회로 도망가지 말고,
담임목사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어내리고 쫓아내세요. 그게 맞아요.
그러나 이게 진리의 문제, 하나님의 뜻과는 정면으로 배치하는 일이 아니면
그냥 담임목사를 신뢰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르세요. 그게 맞아요.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교회 지도자를 세운겁니다.
오늘도 보세요. 이 할례의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그 훌륭한 안디옥교회에서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예루살렘 공회로 이 문제를 이관시켜서 묻지 않습니까?
그때, 예루살렘 공회가 많은 토론과 기도 끝에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얻는거지 할례로 얻는건 아니다...
그렇게 결론내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안디옥 교회에 돌려 보냅니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한번 보세요.
만일 할례가 반드시 구원받는 조건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많은 나라에서 예수 믿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사실, 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유대기독교에서 세계기독교가 되는 놀라운 사건이 돼요.
그런데 중요한게 있어요. 오늘 본문을 한번 보세요.
이 할례 문제로 안디옥 교회가 분쟁에 휩싸여서 쪼개졌다는 말이 나옵니까?
다~ 순종합니다.
자기들의 의사대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유대기독교인들이 끝까지 저항하지 않아요.
교회 지도자를 신뢰하고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롭잖아요.
이게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고, 성숙한 모습이예요. 이게 상식적인거죠.
우리도 언젠가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그때 오늘 제 설교를 꼭 기억하세요.
요즘, 가끔 교회마다 자기하고 뜻이 안맞다고,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툭하면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너무 유치한 신앙이예요. 또 그렇게 교회를 뛰쳐 나간 사람들을
다른 교회에서 자꾸 받아주니까 이게 버릇이 된 거 같아요. 그러면 안돼죠.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도 받아주면 안돼요.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안붙잡잖아요. 왜요?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예요. 다른데서 또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좀 성숙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마음이 좀 넉넉하고 넓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두란노교회가 그런 성숙하고 마음이 넓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