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09.24.PM7시)
유마경 방편품
불신(佛身)은 법신이다/ 법신의 출처
벌써 불자님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신다.
7시 수업시간이다. 여러분들 수업시간에 이렇게 빨리 빨리 입장하셨다. 고맙고 반갑다.
*
오늘도 이 좋은 시간 마련해서 비록 비대면이지만 여러분은 영상을 보고, 저는 여러분들의 이름을 얼굴을 대하듯 본다.
오늘은 여기 화분을 하나 모셔놓고 공부를 하려고 한다.
‘문수선원사경반’ 문수선원에서 사경반이 공부를 아주 잘하고 계시는데 오늘 축하난을 보내 주셨다.
‘염화실TV 개국을 축하합니다’ 이 축하난을 자랑삼아 놓고 공부한다.
무상스님이 ‘화분 놓고 하니까 또 보기 좋더라’라고 한 말씀 해주셨다. 불상도 좋지만 화분은 또 화분대로 보기가 좋더라고 하셨는데 상당히 그림이 괜찮은 것 같다.
스님들이 줄줄이 이렇게 들어오니까 좋다.
사부대중이 다 동참했다. 거사님들 보살님들 비구스님들 비구니 스님들 아이구 좋다.
좋은 회상이 이루어졌다.
코로나 덕택에 또 이런 소식이 있다.
이런 도리를 우리는 잘 활용해서 누린다.
오늘 한마음 선원에서 스님들이 인사를 왔는데 ‘한사찰 1TV 개설’을 내가 적극 권장했다. 오늘 포교원에다가도 명령을 내렸다. 포교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빨리 서둘러라. 한 사람, 사찰마다 TV개설을 해서 전부 TV 하나를 가지고 있고 아침 8시 되면 그 사찰 뉴스도 하고 할 것이 얼마나 많으냐? 부처님 말씀 전하고 그 사찰 소개도 하고 등등 그 사찰 신도님들 근황도 이야기 하고 전부 영상으로 이렇게 소통을 하는 시대가 드디어 쉽게 도래 했는데 빨리 이것을 이용해야 된다’
한마음 선원에서 온 스님에게도 말하니 ‘이미 하고는 있는데 실시간 방송을 안한다’고 해서 ‘실시간이 중요하다.
콘텐츠를 잘 장만해라. 뉴스시간도 넣고 부처님 말씀 시간도 넣고 그 절의 특징 시간도 넣고, 신도회 활동도 사이사이 조금씩 넣으면 할 거리가 얼마나 많으냐?’ 고 제가 그런 말씀도 하고 포교원에도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포교원장은 ‘아이 우리 포교원부터 해야 되겠네’ 도대체가 서울에 앉아가지고 ‘아 그것 참 괜찮겠다. 우리 포교원부터 해야되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는 시대에 따라간다고 발을 벗고 따라가도 아주 힘들게 겨우겨우 헐떡거리면서 따라가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서울에 앉아가지고 포교일선에서, 한국불교 포교를 전담하고 있는 부서에서 낮잠을 자고 있더라.
내 말이 먹혀들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사찰마다 TV채널 하나씩 다 가지고 거기서 뉴스시간도 있고 법문 시간도 있고 의식시간도 있고 기도시간도 있고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 프로그램을 짜서 필요할 때마다 방송하면 좋겠다.
신도님들 축원 읽어 주는 것도 여기 TV앞에, 카메라 앞에 앉아서 주지스님 혼자 축원을 읽어주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하루 종일 읽어주어도 좋다. 백 명이고 천명이고 얼마든지 읽어 줄 수가 있다. 이런 도리가 있다. 우리가 빨리 활용해야 한다.
*
이제 공부에 들어가서, 어제까지 유마경은 ‘이 육신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육신은 무상한 것이 사실이다.
건강한 사람이 길거리에 나갔다가 차 사고가 나서 다칠 수도 있고, 어디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가 있고, 지나가다가 공사하는 기구가 날아와서 거기 맞아서 다치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그런 경우들, 생각지도 않던 상황들이 많이 벌어지는가?
이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속수무책이다. 워낙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다.
여러분들 참 잘도 버티면서 잘도 위급한 것들을 피해 가면서 여기까지 조심스럽게 잘들 오셨다.
이 세상 모두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들인가?
특히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떤 스님은 ‘노스님들은 그거 걸려서 병원에 갔다 하면 다시는 절에 들어오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크게 근심을 하고 가신 분도 있다. 그런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육신은 그와 같이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고 무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유마거사가 어떤 분인가?
그런 이야기만 하고 말 분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은 ‘불신(佛身)은 법신이다’ 이런 제목하에 또 설법을 하신다.
제가 평소에도 다른 경전 말씀을 할 때 ‘사람은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 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마음이고 하나는 육신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과 육신 두 가지가 있다. 육신 떠나서 마음이 있을 수가 없고, 마음 떠나서 육신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면서 이것이 다른 존재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것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것이기도 하고 아주 복잡 미묘한 관계다.
우리는 ‘마음은 주인공, 육신은 그 주인공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는 객’ 그리고 ‘육신이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수다’ 이렇게 쉽게 비유를 해서 설명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해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마음과 육신, 육신과 마음, 우리 불자들은 특히 그 분야에 대해서 잘 아신다. 또 잘 알아야 된다.
그 부분을 잘 알아야 된다.
마음에 치우쳐서도 안되고 또 육신에만 치우쳐서도 안되고 마음과 육신의 조화를 잘 이루어 가면서 그야말로 외줄을 타듯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
지금 오신 분들은 ‘꽃이 갑자기 뭐냐?’ 할텐데 문수선원 사경반에서 ‘염화실TV 개국을 축하합니다’ 하고 보내온 꽃이다. 기분이 좋아서 벌써 두 번째 자랑한다.
*
육신을 넘어서 우리는 불신을 알아야 되고 법신을 알아야 된다. 불신은 곧 법신이다. 불신과 법신을 여기서는 달리 나눠놓고 있지 않다.
부처의 몸, 진리의 몸, 불신의 몸.
석가모니 부처님도 불신이 있고 육신이 있었다.
육신은 80세에 열반하셔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분이 남긴 업적 때문에 지금까지 더욱 왕성하게 부처님의 위신력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런 법신도 있다. 진리의 몸이면서 또한 정신세계다.
여기서는 불신과 법신, 불신은 곧 법신이다 하면서 유마거사께서 쭉 설명해 나간다.
우리가 육신에 치우칠 것도 아니고 너무 또 법신에 치우칠 것도 아니고 마음에 치우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교의 생명은 이 마음자리다.
이 마음자리는 불교의 생명이고 우리 사람의 진정한 생명이다. 이 진정한 생명, 마음을 놓치면 안된다.
마음을 한 순간이라도 잊어버리거나 도외시 하면 그것은 좀 깨어있는 사람도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고 불자는 더욱 아니다 라고 할 수가 있다.
불자들이 절에 들어오자 마자 처음 만나는 말이 무엇인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가 다 우리 한 마음에 달렸다. 오직 우리 한마음이 전부 좌지우지하고 알아서 한다.
내가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요즘 자기계발서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시대인데 그 내용 전체가 한마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다. 마음이 주인공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이런 현상은 여러분들 생각하는 그 생각의 흔적이다. 생각이 길을 내놓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부 마음의 도리를 가지고 자기계발서를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법신의 존재, 또는 불신, 부처의 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아셔야 된다.
7. 불신(佛身)은 법신(法身)이다
제인자(諸仁者)여 차가환염(此可患厭)이라 당락불신(當樂佛身)이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불신자(佛身者)는 즉법신야(卽法身也)라
“여러분이여, 이 몸은 가히 근심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마땅히 불신(佛身)을 좋아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佛身)이란 곧 법신(法身)이다.”
진리의 몸이다. 불신은 깨달음의 몸이고 깨달음의 경지이고 법신이란 진리의 경지다. 그것은 둘이 아닌데 표현을 하자니까 그렇다.
8. 법신의 출처
종무량공덕(從無量功德)과 지혜생(智慧生)하며
“법신이란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것이 법신의 출처다. 진리의 몸의 출처.
이것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 공덕을 지어야만 법신이 살아난다거나 지혜가 있어야만 불신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불신, 본래 법신이 있다.
우리에게는 본래신(本來身)이 있다. 본각(本覺)이 있듯이 본래신이 있다. 본래신 그것이 참마음 자리다.
차별없는 참사람 자리가 바로 본래신이다. 그것이 불신이고 법신인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본래 법신이고 본래 불신인데 본래 법신과 본래 불신이 불신다워지고 법신다워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한다?
무량공덕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되고 뒤에 쭉 소개하는 조건들 그것이 있어야 잠자고 있던 부처의 몸이 살아서 활동한다. 작용한다.
그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그것이 법신이라 하더라도 죽은 법신이다. 죽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크게 제 값을 못하는 법신이 된다. 그런 문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기를 법신은 무량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긴 것이다.
종계(從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생(解脫知見生)하며
“또 법신이란 계와 정과 혜와 해탈과 해탈지견으로부터 생겨났다.”
이것이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다.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거기에 향(香)자를 붙여서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우리가 부처님에게 와서 부처님께 예배할 때 절만 하는 것은 좀 부족한 예배다. 불경을 외우면서, 몸으로서는 예배를 하면서, 생각으로 그 불경을 마음에 아주 깊이 새기면서 절을 한자락 한다면 제대로 하는 것이 되는데 그때 외우는 불경이 예불문이다.
예불문 첫 구절이 무엇인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것이 불교 전체이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라고 잘 아실 것이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은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해탈을 하자는 것이다.
나만 해탈을 하고 말것인가? 아니다. 남도 해탈을 하게 해야 그것이 해탈지견이 되는 것이다.
해탈을 성취한 사람의 지혜다.
해탈을 성취한 사람의 지혜는 바로 남을 해탈케 해야 그것이 완벽한 해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오분향, 다섯 낱말 안에 불교가 다 들어 있다.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그래서 중생제도까지 이 속에 다 들어 있다.
자기 수행은 계정혜 삼학으로 하고 그 계정혜 삼학의 완성이 해탈이고, 해탈하고 나서 중생제도는 해탈지견으로써 한다는 뜻이다.
아주 완벽한 가르침이다.
유마거사께서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법신이 살아난다. 법신다와진다. 불신다와진다고 하였다.
본래 있는 불신, 본래 있는 법신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불신 노릇을 하고 법신 노릇을 하려면 이 삼학과 오분법신이 완전히 성숙되고 나의 것이 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종자(從慈)ㆍ비(悲)ㆍ희(喜)ㆍ사생(捨生)이며
“법신은 자ㆍ비ㆍ희ㆍ사로부터 생겨났으며”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자(慈) 사랑할 자(慈)자, 남을 불쌍히 여길 비(悲)자, 중생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하는 희(喜)자, 사(捨)는 평등 모든 사람들을 다 평등하게 봐야 한다는 사(捨)자 차별을 버려라 하는 사(捨)자다.
차별과 분별을 버리고 평등하게 보라는 사(捨)자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불신과 법신이 생겨난다.
우리 마음이 제대로 부처마음, 불심이 되려면 진짜 불심이 되려면 이러한 것을 갖춰야 잠자는 불심에서 살아있는 불심이 된다는 것이다.
종보시(從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유화(柔和)와 근행정진(勤行精進)ㆍ선정(禪定)ㆍ해탈(解脫)ㆍ삼매(三昧)와 다문( 多聞)ㆍ지혜제바라밀생(智慧諸波羅蜜生)이며
“법신은 또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유화와 근행정진과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다문과 지혜 등 온갖 바라밀로부터 생겨났으며”
여기 육바라밀은 다 잘 아실 것이다. 거기에 더해 삼매 다문 선정도 잘 닦아야 된다. 다문 많이 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경전 많이 읽어야 되고 많이 들어야 된다.
이런 영상을 통해서라도 요즘은 얼마든지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되니까 영상을 통해서라도 많이 듣고, 또 책을 책방에 쫓아가서 ‘유마경이 어떤 게 있는가? 무비스님의 유마경이 뭔가’하고 당장에 가서 사서 읽고, ‘스님, 왜 그렇게 해석합니까? 이게 해석이 더 좋은데요.’ 스스로 그렇게 따지기도 하고 비판도 하고, 도반들 하고 논강도 해야한다. 우리 불자들은 그런 적극성이 좀 부족하다.
요즘에 어떤 종교단체에서 학습한다고 삼삼오오로 모여서 학습하는 곳에서 코로나가 막 번지고 그런 일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유화(柔和) 근행정진(勤行精進)선정(禪定)해탈(解脫)삼매(三昧) 다문(多聞) 많이 공부하는 것, 많이 듣고 많이 학습하는 것 그런 지혜(智慧) 이런 바라밀(波羅蜜) 그런 것들이 바라밀이 된다.
그런 것이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
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다리다.
그런 것으로부터 불신이 생기고 법신이 생긴다.
종방편생(從方便生)이며 종육통생(從六通生)이며 종삼명생(從三明生)이며
“법신은 또 방편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육신통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삼명으로부터 생겨났으며”
하여튼 유마거사가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그 설법이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것도 낱낱이 세세하게 설명도 안한다.
유마경 수준쯤 되었는데 사전적인 용어 해설을 언제 하고 중간에 틈을 주고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종삼심칠도품생(從三十七道品生)이며
“37도품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종지관생(從止觀生)이며
“지와 관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지, 관 요즘 사마타와 위파사나 그것이 지관이다.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종십력(從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십팔불공법생(十八不共法生)이며
“10력ㆍ4무소외와 18불공법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열 가지 힘, 네 가지 두려움 없음,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 이러한 것으로부터 본래 갖추고 있는 불신이 불신다와지고 본래 갖추고 있는 법신이 법신다와진다는 뜻이다.
종단일체불선법(從斷一切不善法)하고 집일체선법생(集一切善法生)이며
“일체 선하지 않은 법은 끊어버리고, 일체 선한 법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생겨났으며”
불선법은 끊어버리고 선법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다.
칠불통계(七佛通戒)에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라.
악을 짓지 말라는 말도 사실은 필요치 않다. 선을 행하라. 선을 열심히 짓는 사람이 악을 지을 까닭이 없다.
문장이 갖춰지도록 앞의 말을 넣었을 뿐이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만고에 아주 유명한 칠불통계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엄격하게 말하면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잘함으로 해서 본래 잠자고 있던 불신이 깨어나고 본래 잠자고 있던 법신이 깨어나는 것이다.
종진실생(從眞實生)이며
“진실로부터 생겨났으며”
진실로부터 생겨났으며, 진실도 참 중요하다.
진정성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진정성 그것으로부터 법신이 생겨났으며
종불방일생(從不放逸生)이며
“방일하지 않음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잠자고 있는 불신을 깨워서 불신답게 하려면, 잠자고 있는 법신이 법신답게 하려면 방일하지 않게 해야 된다고 유마거사께서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몸 가지고 있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한구절이라도 들어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 정말 성인의 말씀다운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그것이 길이 난다. 그것이 습관이 된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길이 안나는데 사람이 하는 일은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것을 ‘길이 난다’고 표현한다. 아주 좋은 표현이다.
자꾸 해야 길이 난다.
처음에는 저 들판에 사람이 한 사람도 지나간 흔적이 없다가 한 사람 지나가고 두 사람 지나가고 세 사람 지나가고 하면 그만 거기에 발자국이 생기고 길이 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뒤에 오면 바로 그 길로 사람들이 걸어간 그 길로 지나간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전부 그렇게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길이 난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볼 일이 아니고 함부로 들을 일이 아니다.
마지 못해서 TV에서 뉴스도 보고 이런 저런 재밌는 것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것도 선택해가면서 보고 들어야 한다.
보는 것이 전부 우리 아뢰야식에 저장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저장이 된다는 것은 곧 길이 난다는 뜻이다. 그것이 익숙해진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도 있는데 그것 역시 같은 원리에서 나온 말이다.
종여시무량청정법(從如是無量淸淨法)하야 생여래신(生如來身)하나니라
“이와 같은 한량없는 청정한 법으로부터 여래의 몸이 생겨났느니라.”
마지막에 불방일(不放逸)을 권했다. 방일하지 말라.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희들 방일(放逸)하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부처님은 최후로 열반에 드시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고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 있다. 부지런히 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없다.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부지런히 하는 사람에게는 당해낼 재주가 없다.
천재도 99프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금생에 비록 머리가 약간 둔하다 하더라도 부지런히 하면 차츰차츰 그 녹이 닦여지고 죽을 때까지만 그렇게 하면 다음생에는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날 수가 있다.
제인자(諸仁者)여 욕득불신(欲得佛身)하야 단일체중생병자(斷一切衆生病者)ㄴ댄 당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라
“여러분이여, 불신(佛身)을 얻어서 일체중생의 병고를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여러분들이여, 불신(佛身)을 얻어서 일체중생의 병고를 끊고자 한다면 결국은 불신이 불신다워지고 내 속에 있던 법신이 법신다와지면 무엇을 한다? 일체중생의 병고를 끊는 일을 한다.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대승불교의 특징이 드러난다.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는 것도 결국은 중생들의 병고를 제거해 주는 것, 그것을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서 보리심을 마땅히 발해야 한다.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자기 자신은 제도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부터 먼저 제도할 마음을 내라. 그것이 보살정신이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성불이 더이상 필요하겠으며 달리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진정한 어머니는 자기는 굶으면서 자식은 먹이는 것이라고 내가 가끔 말씀드린다. 참 어렵게 살 때 찬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고 자식에게는 ‘나는 저 부엌에서 먹었으니 너나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이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보살의 마음이란 곧 그와 같다는 것이다.
불신을 얻어서 일체 중생의 병고를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어라. 최상의 깨달음,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자기는 제도받지 못했으나 남을 먼저 제도하는 그런 마음을 내라.
여시(如是)하야 장자유마힐(長者維摩詰)이 위제문질자(爲諸問疾者)하사 여응설법(如應說法)하야 영무수천인(令無數千人)으로 개발아욕다라삼먁삼보리심(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케하니라
이처럼 장자 유마힐이 여러 문병하러 온 여러 사람을 위하여 잘 맞추어 법을 설해서 셀 수 없는 천만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게 하였다.
유마거사께서 병고에 시달리는데 그 병고란 무엇인가?
바로 이 육신의 병고이지 마음의 병고가 아니다.
그래서 육신의 허망함을 이야기 하고 어차피 허망한 육신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 허망한 육신을 딛고, 그것을 사다리로 해서 법신, 불신 그것을 쟁취하도록 하라. 불신과 법신을 찾아서 나의 것을 삼도록 하라 하는 내용이다.
유마거사는 병고라는 방편을 통해서 문병을 온 사람들에게 만고에 빛나는 가장 멋지고 의미 있고 수준 높은 설법을 하신 것이다.
이 설법을 듣는 사람들은 당시의 현전대중이나 후대의 사람들이나 무수한 사람이 모두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고, 귀가 먹은 사람들은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되고, 언어장애인은 말을 하게 되고, 마음이 답답하던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이 툭 터져서 저 드넓은 하늘과 같이 되고, 천지만물은 각각 그 살 곳을 얻게 되었다.
제가 유마경 강설책에 그렇게 적어 두었다.
이 육신과 법신, 육신과 불신, 들을 때는 그럴 듯하고 있는 듯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 육신이 죽으면 다지’ 싶은 생각도 하고 ‘육신이 있을 때 마음이 있지’ 이런 생각도 한다. 상당한 불교의 공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수행, 마음 닦는 일을 하지 않아놓으면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것 한 가지만 말씀 드려 보겠다.
저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몸이 상당히 불편한 사람이다. 특히 근래에는 다리가 아주 많이 불편해서 100미터 200미터도 겨우겨우 지팡이 두 개를 짚고 걸어간다.
1미터를 가도 지팡이 두 개를 짚고 걸어갈 정도고, 방안에서도 늘 신을 신고 살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닌다.
그런데 저는 꿈을 자주 꾼다. 여러분도 꿈을 자주 꾸시리라고 보는데 꿈에서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
저는 꿈에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
내가 꿈 이야기를 가끔 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꿈에서도 아픕니까?’ 묻는다. 꿈에서는 아픈 적이 없었다.
그러면 꿈꾼 사람하고 생시에 아픔을 지고 사는 나하고는 분명히 별개의 사람이다. 별개의 사람이 아니고야 그렇게 지금 세월이 얼마인가? 18년 동안 이렇게 고통을 겪고, 한 번도 안아픈 적이 없었는데, 꿈속에서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을 수가 있는가?
꿈에서 산을 가면 산을 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길을 가고, 등산을 가면 나도 같이 등산을 한다. 그런데 한 번도 불편한 적이 없었고 아픈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것을 면밀하게 아주 그것을 확인하려고, 깊이 생각해 보고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보고 꿈깨고 나서는 꼭 그것을 되뇌어 본다.
확인하려고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아픈 적이 없었다.
하나도 불편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뭔가?
분명히 나는 나인데 나 아닌 나다.
그것이 사실은 진아(眞我) 참나다. 그것이 진짜 나다.
생시에 아픈 것은 가짜 나, 유마거사가 말한 허망한 나, 무상한 나, 파초와 같은 나 그런 나이다.
꿈속에서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법신이고 불신인 것이다. 그것이 참마음 자리다. 그것이 차별없는 참사람, 그것이 진아다.
그래서 보조 지눌같은 스님들은 진심직설(眞心直說)이라고 해서 참마음을 바로 이야기 한다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다. 진심직설. 참마음, 사람사람의 참마음에 들어서 가감없이 곧바로 드러내서 이야기 하는 대목에 보면 그런 내용이 아주 적나라 하게 잘 나타나있다.
아무리 잠을 안자고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아무리 굶어가면서 먹지않고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이 사실은 부정할 길이 없다.
이 참나에 대한 사실은 부정할 길이 없다.
꿈속에서는 한 번도 불편하지 않고,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아주 훨훨 날 때는 날고 하는 그런 내가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것을 제대로 우리가 드러내서 활발발 하게 사용을 하려면 앞에서 유마거사가 제시한 여러 가지 조건들 육바라밀이라고 할까, 오분법신향이라고 할까 등등 삼심칠조도품이라고 할까 아주 화려한 설법이 되어놔서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도 이중삼중으로 물 흐르듯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러한 조건을 통해서, 진정한 법신이 법신다와지고 불신이 불신다와지는 조건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다.
오늘 ‘불신(佛身)은 법신이다’ 하는 제목하에 제가 이야기 해 놓고 봐도 속이 시원하다.
이런 부분 없이 육신만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기로 하면 그 육신의 한계에 젖어서 살기 때문에 참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정말 답답하고 죽을 맛이다.
정말 죽을 맛이다. 그러나 이렇게 숨구멍이 있다.
무엇이 숨구멍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아주 태연하게 당당하게 자신있게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이러한 공부를 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 좋은 시간 여러분들과 함께 해서 고맙다.
*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날로 더욱더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항상 굴러가서
어리석고 답답한 중생들의 미망을
하루 빨리 깨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들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
동참하신 분들을 좀 살펴보겠다.
오늘은 제일 많이 들어왔을 때가 90명 가까이 들어왔고 재생 횟수가 150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평균시청시간도 상당히 높아졌다. 22분 36초가 되었다.
이렇게 끝마치고 나니까 좀 섭섭하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금토일 3일간은 또 방학이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학창시절엔 손꼽아 기다리던 반공일(토요일)과 방학과 명절이 이제는 정말로 밉네요.
그러나 재방이 있어서...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_()()()_
_()()()_
코로나시대에 맞는 포교의 방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옥련암 법선스님께서 상식을 깨뜨려야 발전이 있다고 하셨어요.
틀 안에 갇혀서 '이래야된다. 저래야된다'는 상식을 깨뜨리신 우리 큰 스승님, 무한 존중 존경, 찬탄드립니다.
보살님도 고맙습니다.
_()()()_
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
_()()()_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
고맙습니다.._()()()_
_()()()_
_()()()_
_()()()_
_()()()_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