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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1894년(고종 31)∼1966년)
순종의 계비. 본관은 해평.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의 딸.
1894년 본관 해평(海平)인 윤택영(尹澤榮)의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1906년(광무 10) 13세로 순명효황후에 뒤를 이은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순종황제께서 즉위하시자 황후가 되셨습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 어전회의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황제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국권피탈 후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로 강칭(降稱)되고, 1926년 순종황제께서 후사 없이 붕어하신 후 불교에 귀의하여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
이 사진은 많이 소개되어 보셨던 사진일 겁니다. 1907년 영친왕이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것은 아실 겁니다. 그 이후 영친왕은 1911년 7월 친어머니인 "황귀비 엄씨"가 돌아가시자 일시 귀국하고, 다시 사관학교를 마치자 1918년 영친왕께서 일본에서 일시 귀국하셨는데 경운궁(오늘날 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실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입니다. 맨 왼쪽이 영친왕, 옆이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 순입니다. 영친왕께서는 1897년 대한제국 출범해에 출생하셨으므로 영친왕은 이때가 21세입니다. 이 다음해에 고종황제께서 의문의 독살을 당하셨습니다.
▶덕혜옹주, 그 옆이 영친왕비(이방자), 순정효황후, 순종, 영친왕, 진왕자
1907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영친왕은 1920년 4월 내선일체라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일왕족인 "나시모토"의 딸 "마사코(方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1921년 첫 아들 진(晉)왕자를 낳았고 영친왕비(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는데 이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체로 인해 진 왕자가 숨지게 되죠. 독살설이 돌았습니다. 맨 왼쪽이 귀국한 덕혜옹주, 그 옆이 영친왕비(이방자), 옆은 "순정효황후" "순종황제" 옆이 영친왕입니다. 그 옆 시종이 안고 있는 아이가 "진왕자"입니다.
▶가운데 일본인 옆이 순정효황후
얼마전 언론에 소개되었던 사진인데 언제 무슨 연유로 이러한 사진을 찍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운데 일본인 옆에 계신 분이 "순정효황후"라고 합니다. 이러한 황실 생활을 뒤로 한 채 나라가 망한 후 몇몇 상궁과 함께 황후께서는 6.25 때도 꿋꿋이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셨고, 북한군이 낙선재를 들어왔을 때도 호통을 쳐서 내보낸 일화가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계속 버티다가 1.4 후퇴 직전 부산으로 피란을 가셨습니다. 그 전에 인민군들의 협박으로 인해 걸어서 할 수 없이 "운현궁"으로 잠시 쫓겨가 있기도 하셨습니다. 그때 관리인이었던 "김택수"씨가 적극적으로 황후를 보호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황후께서 붕어하신 1966년 2월3일 신문기사를 보면...궁녀들은 윤황후의 손때묻은 가구와 궁중의복, 보석류 등을 인민군들이 모조리 쓸어가버릴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황후께서는 궁핍한 생활 가운데서도 황실의 체통을 지키며 피난생활을 하셨습니다.먹을 거리가 없어 죽이 되지도 못하는 것으로 연명을 하셨어도 절대 내색 한번 안하셨다고 합니다.
▶순정효황후, 이재면 부인
다음 사진은 부산 피난시절의 사진입니다. 왼쪽이 순정효황후 윤씨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흥왕비 (고종황제의 형님이신 이재면 "흥친왕"의 비이죠)입니다. 피난중 끼니도 잇기 어려운 생활을 지내고 전쟁 후 귀경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창덕궁이 국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정릉의 "修仁齊"에서 몇몇 상궁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시게 됩니다.
결국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어 허정 내각수반의 허락하에 오재경 공보처장(舊 구황실 재산관리 사무총국장)의 노력으로 윤 황후께서는 황후를 끝까지 따르는 상궁들과 함께 다시 낙선재로 돌아오실 수 있게 됩니다.
황후의 맨 왼쪽에 계시는 분이 "오재경"입니다. 입을 굳게 닫으신 당당한 모습은 황후로서의 위엄과 체통을 분명히 느끼게 해줍니다. 어떠한 일제와 북한군,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도 한번도 굽히지 않으셨던 모습... 윤황후는 72세를 일기로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양주 유릉(裕陵)에 꿈에도 그리던 순종황제와 합장되셨습니다.당시 황후를 끝까지 모셨던 성옥염 상궁이 사경을 헤맬 때 중앙일보 실렸던 2001년
3월 9일자 신문기사를 소개합니다. 이 분들의 이러한 정신이 바로 우리나라를 지탱했던 버팀목이었습니다.(중앙일보 2001. 3. 9일자)
◇마지막 상궁-사경 헤멘다-성옥염씨
"저 세상에서도 윤비(尹妃.순종황후)를 모실 수 있도록 그 분의 위패가 있는 백운사에서 49재(齋)를 지내주오."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궁(尙宮)인 성옥염(成玉艶.82)씨가 지난 1월 미리 남긴 유언이다. 지난해 9월 말기 신부전증으로 서울 강남병원에 입원,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다. 신장기능은 완전히 상실됐고 고혈압.뇌졸중.빈혈까지 겹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 주 2회 혈액투석을 받으면서 음식물 섭취도 콧구멍으로 연결된 튜브에 의존하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병원측은 "현재로선 가망이 없다" 며 "의식이 남아 있던 1월초 간병인에게 유언을 남겼다" 고 말했다. 成씨가 숨지면 조선왕조의 궁녀(宮女)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윤비와 함께한 30
19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5세의 나이로 창덕궁 침방(針房) 내인으로 입궁한 그다. 그때부터 김명길(金命吉.83년 작고).박창복(朴昌福.81년 작고) 두 상궁과 함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30여년간 "마지막 왕비" 윤비를 모셨다. 윤비의 의복담당이었던 그는 막내여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차분한 성격과 꼼꼼한 일처리로 윤비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6.25 때는 윤비와 함께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했고, 전쟁 직후엔 이승만 정부가 낙선재를 국유지로 만드는 바람에 정릉 별장에서 윤비를 모시기도 했다. "윤비는 61년 낙선재로 돌아와 피아노 연주와 불경 읽기로 소 일하셨지. 늘 내게 "비록 왕조는 망했지만 궁녀로서의 체통과 권위를 지켜야 한다" 고 가르치셨어." 成씨는 상궁 시절을 이렇게 주변에 회상했다고 한다.
◇"궁녀의 지조" 지킨 여성
윤비가 66년 세상을 뜨자 그는 궁중 법도대로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궁녀는 궁 밖으로 나오더라도 시집을 가면 안된다" 는 원칙을 지켜 홀몸으로 여생을 살았다. 70년대 초 조카인 명오(明悟)스님이 주지로 있던 서울 보문사의 시자원(施慈院)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돌봐왔다. 보문사의 인태(仁太.52)스님은 "예의범절이 바른 成씨가 항상 다른 노인들의 귀감이 됐고, 매년 윤비의 위패가 있는 강릉의 백운사를 찾아 불공을 드렸다" 고 전했다. 1997년 시자원이 지하철공사로 헐려 갈 곳이 없어진 成씨는 그해 12월 무의탁 노인들이 기거하는 서울 노원구 중계복지관에 들어갔다. 成씨를 돌봐온 김소연(金素娟.33)간호사는 "成씨가 치매로 고생하긴 했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했었다" 고 소개했다.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자인 김용숙(金用淑.78)전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조선조 마지막 상궁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안타깝다" 고 말했다.
(중앙일보.정현목 기자)
이구, 순정효황후, 이방자여사, 줄리아여사
황실가족 사진을 소개합니다. 영왕과 영왕비 이방자 여사 사이의 외아들인 "이구", 그리고 윤 황후, 영왕비 이방자 여사, 이구의 부인이었던 줄리아 여사 사진입니다. 참고로 줄리아 여사는 전주이씨 종친들의 엄청난 반대로 말미암아 이혼을 하게 되죠
그리고.. 또 한가지.순종황제의 장인이자 윤 황후의 부친인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이 자신의 딸 윤황후(尹皇后)가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었던 재실이 1966년 남산골공원이 조성되면서 박영효가옥·순정효황후 윤씨 친가(親家) 등과 함께 한옥마을로 옮겨졌기에 지금도 남산 한옥마을에 가면 황후의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고, 복원된 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977년 9월 5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동대문구 제기동 224에 있었으며 현재의 제기동이라는 동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남산한옥마을"에 가면 윤황후께서 돌아가시기 몇 년전에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진이지요.
황후의 인품과 기개, 품위가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1960년 당시.. 오재경 공보처장의 노력으로 다시 윤황후께서 낙선재로 돌아오시게 된 당시 배경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 이은"이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김을한 기자가 당시 신문에 오랜기간 연재했던 내용을 한국일보사에서 책으로 펴낸 "인간 이은"에는 당시 황후의 낙선재로 다시 들어가실 수 있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人間 李垠 (인간 이은) " (김을한 저)(한국일보사 刊) 중에서... p.317 ~ ]
윤황후께서 낙선재로 돌아오시던 상황... 舊皇室財産管理事務總局(구황실재산관리사무총국)은 정부와 국회가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 제3대 국회에서 통과 제정된 "舊皇室財産處理法"에 의하여 창설된 기관인데, 역대의 책임자가 소위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열중해서" 항상 좋지 못한 소문이 끊일 새가 없었다. 사실상의 구황실의 주인공이라고 할 영친왕은 일본에서 남의 원조를 받아 근근 살아갈 때에도 구황실 사무총국에서는 그런 것은 아랑곳 없다는 듯이 구황실 소유의 재산을 팔아먹는 데만 눈이 벌개서 여러 가지 추잡한 사건이 속출하였던 것이다.여기서도 이대통령의 인사정책이 얼마나 졸렬하였던가를 잘 알 수 있게 하거니와, 구황실의 재산을 둘러싸고 개인이나 단체의 이권경쟁이 치열하여 사회의 여론이 비등하자, 이대통령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오재경씨를 새로이 총국장에 임명하였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몇 달 전의 일인데, 오재경씨는 이대통령이 발탁, 등용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성실하고 청결하여 일찍이 공보부장관, 대한여행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에도 이렇다 할 스캔들이 없었으며, 사무에 능통하고 인정이 있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유명하였다. 구 황실 사무총국장에 취임한 오재경씨는 이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되던 날 바로 貞陵 修仁齊로 가서 윤대비께 문안을 드렸다. 윤대비는 구황실의 마지막 황후일뿐더러 구황실의 사실상의 주인이시므로 구황실의 일을 맡아 보는 사무총국장이 대비마마께 문안을 드리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전 책임자들은 경무대에만 눈이 팔려서 정작 구황실의 주인 어른들에게 대하여는 아무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무시하는 태도까지 취하였으므로 오국장의 윤대비 예우는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오국장은 자주 윤대비를 가 뵈옵게 되었으며, 갈 때마다 새로 나온 생선이나 과일 등을 사다 드렸다고 하니, 평생에 고독하고 인정에 굶주렸던 그 노부인이 얼마나 기뻐하고 도 위안을 받았을까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후 허정씨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오재경씨는 평소에 마음먹었던 일을 즉시 실행에 옮겼으니, 그것은 윤대비의 창덕궁 황궁이었다. 1960년 즉, 1.4 후퇴 직전에 부산으로 피난하기 위하여 창덕궁 낙선재를 나온 이후 다시는 창덕궁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정릉 수인제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시는 대비마마가 너무나 가엾기 때문이었다. 정릉 수인제는 백락승이라는 실업가가 해방 후 이대통령에게 선사한 집인데, 백씨는 이대통령에게 정치 헌금을 많이 하고 그 대신 홍삼 등 이권도 많이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황실의 황후가 그 집을 사용할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그것은 1960년 5월 4일의 일이었다.허정 내각수바의 허가를 받은 "오재경"국장은 이창석 차장을 대동하고 정릉 수인제로 가서 윤대비께 문안을 드리고,"오늘은 마마를 모시러 왔습니다." 라고 아뢰니, 벌써 그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윤대비와 대비를 모시고 있던 상궁들은 熱淚(열루 : 뜨거운 눈물)가 방타하여 눈을 뜨지 못하였다. 창덕궁을 나온 지 곡 10년만의 일이매 어찌 아니 그러하랴? 윤대비는 오국장, 이차장과 여러 상궁들의 호위를 받으며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리운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오니 낙선재는 벌써 오국장이 손수 지휘를 해서 마치 새집과 같이 깨끗이 단장을 해 놓았었다. 그럼으로 해서 윤대비는 "오국장, 오국장"하고 오재경씨를 세상에서도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알고 최후의 숨을 거둘 때까지 그를 제일 신임하였다는 것이다........
이상 "인간 이은"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윤황후께서는 낙선재로 돌아오신 후 3명의 상궁과 5명의 여직원 등 9명으로 당시돈으로 한달에 17만원의 정부가 주는 보조금으로 생활하셨습니다.낙선재에서 황후께서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불경을 읽고, 9시에 아침식사, 그 후 조간신문을 읽으시고 창덕궁을 산책하시거나 또는 천수경(千手經)을 외우고 오후 2시경에 간식을 하시고, 오후 5시반~6시 사이에 저녁식사, 석간신문 보시고 텔레비젼 뉴스 잠깐 보시고 좌선도 하시고 10시에 취침을 하셨다고 합니다. 황후께서는 1966년 2월3일 오후7시10분경 창덕궁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붕어하셨습니다.이날 윤황후께서는 저녁을 드신 후 오후6시께 목욕을 하시고 나오다 현기증을 일으키시며 "어지럽다"는 한마디만 남기시고 쓰러져 성옥염 상궁의 부축을 받고 거실인 복헌"으로 옮겨져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였으나 김해수 내과의사가 도착하기 직전 운명을 하시게 됩니다.이 즈음에 황후께서는 저혈압이 있으셔서 평소 외출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국장으로 치러졌으나 평소 장례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게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에 따라 11일장(葬)으로 치러졌습니다. 사진은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는 장의 행렬입니다.
▶ 순정효황후 장례식
미리 남겨놓으셨던 순정효황후의 유언전문을 소개합니다. (당시 각 일간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당시 신문에 유서가 사진으로 실려있고 전문도 실려 있습니다.)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에 귀하며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25 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70여세 되오니 佛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어 내 뜻을 표하노니 생전에는 재산이 없어 마음대로 못한 일이 허다하다. 사후의 일만은 내가 결정하니 뜻을 받들어 처리해주면 나에게 보답은 다한 것이며 생전에 낙선재에서 세월은 흘렀으나 내 뜻은 그것이 아니었으니 형편에 따라 장례일은 하되 염불소리 외는 조용히 하며 소리내 우는 자는 내 뜻을 어기는 자이며 부탁이니 장례 후에는 유언대로 도인스님께 영가를 태우고 일주년에 마치게 하며, 만일 관리국 사무실에서 일주년 부담을 안한다면 나에게 뜻있는 사람들은 부의를 할 듯하니 그것으로 하며 부의의 남은 것이나 또는 내게 돌아오는 재물이 있으면 수족같이 부리던 상궁들도 조반석죽이라도 마련해주고 재차 말하노니 부디 낙선재에서는 고연(주:빈소를 말함)할 생각말고 신신 부탁하노니 사사로운 욕됨이 없게 처리하길 부탁하나니. 을사년춘절순정효황후."
이 기사뒤에 가십난에는 이런 말이 써 있었습니다.
실제 정부에서 황실재산을 전부 국가에 귀속시켜버려 상궁들에게 돌아갈 재산이 없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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