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장에는 입다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굉장한 용사였다. 그는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2 길르앗의 본처도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자라서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의 아들이므로, 우리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을 수 없다."
3 그래서 입다는 자기의 이복형제들을 피하여 도망가서, 돕이라는 땅에서 살았는데,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다.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며 큰 용사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지만 출신이 좋지 못했습니다. 첩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어머니는 창녀였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홀대를 당했고 결국은 쫓겨나서 건달패의 두목이 되었답니다.
입다가 이렇게 가문에서 쫓겨나 비적떼의 두목이 된 사이에 아람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다급해진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와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입다는 전체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는 조건을 걸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후 입다와 암몬족속의 왕 사이에 사절단이 오가면서 영토분쟁이 시작됩니다.
영토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자기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암몬의 입장에서 보면 암몬이 옳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옳습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전쟁이 시작되는데 결과는 입다가 지휘하는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이어서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좀 길지만 30~40절을 보겠습니다.
30 그 때에 입다가 주께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신다면,
31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그 사람은 주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번제물로 그를 드리겠습니다."
32 그런 다음에,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 건너가서, 그들과 싸웠다. 주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시니,
33 그는 아로엘에서 민닛까지 스무 성읍을 쳐부수고, 아벨그라밈까지 크게 무찔렀다. 그리하여 암몬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에, 소구를 치고 춤추며 그를 맞으려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의 딸이었다. 그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35 입다는 자기 딸을 보는 순간,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이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왜 너란 말이냐! 주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36 그러자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이미 주께서는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하여 주셨습니다."
37 딸은 또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처녀로 죽는 이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38 입다는 딸더러 가라고 허락하고,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어 보냈다. 딸은 친구들과 더불어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슬퍼하며 실컷 울었다.
39 두 달 만에 딸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께 서원한 것을 지켰고,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생겼다.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애도하여 나흘 동안 슬피 우는 것이다.
창세기를 강해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기록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본문은 인신제의, 그러니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당시의 풍습으로부터 이스라엘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흔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들의 고민이 담긴 설화가 성서 안에 들어온 흔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흔적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서원을 받으시고 그대로 실행하게 하신단 말인가, 라는 고민을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풍습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야만적인 문화지만, 고대인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자기들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신들이 감동해서 풍요로운 수확물로 보답해주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같은 환경 같은 처지에 살면서 그런 문화적 해석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유목민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농경문화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인신제의를 잔인한 야만문화로 인식하기 어려웠던 시대,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보았던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가면서, 그 시대 이웃민족들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적지 않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록자의 기록 의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이해 없이 문자 그대로 읽으면,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이삼천 년 전의 원시시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는 그렇게 원시시대에 갇혀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12장에는 입다의 승리를 시기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에게 시비를 걸어오면서 입다가 속한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을 하여 에브라임 지파 사람 42,0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같은 민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우리도 그랬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그렇게 싸웠고, 백제와 고구려가 그렇게 싸웠습니다. 아니, 불과 70년 전, 한국전쟁 때 남과 북도 그렇게 싸웠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렇습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존재다. 그 말이 맞을 겁니다. 인간은 천사인가 악마인가, 천사에 가까운가 악마에 가까운가, 이런 식으로 하나의 답을 찾으려고 하면,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사성과 악마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에 올바른 지식도 쌓아야 하고 마음훈련도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하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악마성을 몰아내고 천사성을 키워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2장 후반부에는 소사사들의 명단이 이어집니다. 입산, 엘론, 압돈, 이렇게 세 명의 사사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민족과의 전쟁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소사사들처럼 비교적 평화의 시기에 백성들의 재판문제를 담당한 사사들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