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허씨 중앙대종회 편집자료
○ 본관지(本貫地) 하양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시의 북부에 위치하는 읍. 옛 이름(地名)은 하주·화성이다.
고려 성종 때에 하주(河州), 1018년(현종9)에 하양(河陽)으로 개칭하고 현(縣)이 되었으며 뒤에 경부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선조 34년(1600)에 대구부에 이속되었으나 숙종 때 다시 현으로 되어 한사동(翰沙洞) 관아를 세웠고 1742년(영조 18)에 이를 금락리(琴樂里)로 옮기고 화성현(花城縣)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32)에 하양군(河陽郡)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남쪽으로 금호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팔공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뛰어난 자연환경 조건으로 경부고속도로, 대구선 철도, 대구~포항간 산업도로 등 사통팔달로 연계된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되어 있다. 읍의 동쪽으로 와촌면·진량읍과 맞닿고, 서쪽으로 대구광역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북쪽에는 환성산(807.2m)이 솟아있어 산지를 이루고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가 형성되었다. 금호강 유역에는 평야가 발달했다.
대도시 근교 과수농업이 활발하다. 복숭아·자두·대추 등이 전국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유물·유적으로 사기리 환성사 경내에 환성사대웅전(보물 제562호)과 금호서원·남호서원 등이 있다. 남서부 일대에 경부고속도로, 대구선 철도가 지나가고, 북부에 대구-포항산업도로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행정구역은 16개리 39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면적 48.61㎢, 인구 27,275(2015현재).
조선 세종조 좌의정 문경공 허조선생을 비롯한 역사에 빛을 남긴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 교육도시로 주요 3개 대학과 중고등학교 2개교, 초등학교4개교가 있다. 주요 문화재로 보물 562호로 지정된 환성사 대웅전, 천연기념물 거북돌 스트로마톨라이트, 경산의 삽살개 외 11점의 문화재와 하양향교, 금호서원, 전통사찰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는 전통문화의 고장이기도 하며, 대도시 근교 과수와 묘목이 전국 생산량의 70%이상을 차지하는 도농복합형의 도시이다.
河陽許氏 譜系圖(尹淸卿所製)
許康安 戶部郎將 河州刺史 (始祖) - 許皇后의 33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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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忠 (佐尹公 1036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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綽麟 (大將軍公1055生)
│ 愼 ( 戶部主事公1093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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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通 (中郞將公1138生) (5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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赫富 (兵部主事公 1169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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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諝 ( 禮部主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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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 (大護軍公 : 從3品 檢校大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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綏 (判典客寺事公 : 正二品吏曹判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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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呂平章事公 允忠 (副使公) 允昌(正郞公(從一品 議府贊成追贈) (10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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寬 判書公 天珪 (留後公) 貴龍上護軍公(正一品 議政府領議政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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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제6파)判事公 之惠(제5파)貞純公 之信(제4파)參議公 倜(제3파)中樞府使 稠(제2파)議政府左議政 周(제1파)漢城府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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季達 叔達 孟達 認 諶 誡 咸 訥(사온서령) 詡,刑曹禮曹判左參贊 誠 (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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慥 集賢殿修撰 哲堅 (14世)
시조(始祖) 허강안(許康安)
하양 허씨(河陽 許氏)의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허황옥(許黃玉)의 33세손이다.
고려(高麗) 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어 하주(河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본관(本貫)을 하주(河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지명(地名)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改貫)하였으며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안(許康安)의 손자 작린(許綽麟)이 고려(高麗)에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허신(許愼)은 호부주사(戶部主事)·동정(同正)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8세 허유(許裕)가 검교대호군으로 문성공 안향(安珦)과 통혼을 하고 아들 수(許綏)는 고려의 정2품관인 판전객시사로 고위직에 출사하고, 아들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장자 허윤창(許允昌)은 도관정랑으로 세종 때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고, 차자 허윤충(許允忠)은 밀직부사이고, 3자 허윤여(許允呂)는 광평시랑평장사로 그의 아들 허관(許寬)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장손인 11세 허귀룡(許貴龍)은 개성부윤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들 삼형제가 모두 재상이 되었는데 장자 허주(許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다 조선 개국 후에는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시호가 간숙(簡肅)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허성(許誠)은 경사(經史)에 밝아,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권근(權近)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공양왕(恭讓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법전화 하는데도 노력하였다. 조선전기 통치강령 예제(五禮儀)와 법제(續六典)를 찬정하고, 이조판서를 3번이나 역임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아 후일 사육신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돌아가신 후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허조(許稠)의 아들 13세 허후(許珝 )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단종 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영조에 의해 신원이 회복되고 정간(貞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허후(許詡)의 아들 14세 허조(許慥)는 집현전 수찬으로 사육신 이개(李塏)의 매부이자 김문기(金文起)의 사돈이다. 성삼문 이개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자결하니 세조가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 고하며 박팽년 유성원의 시신과 같이 거열효수하고 아들형제도 연좌로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조에 의해 신원 회복과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증되고 아버지와 함께 정려가 내리고,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3대(代)가 모두 사육신(四六臣)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힌다.
허조(許稠)의 동생 척(許倜)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府使)로 질(姪) 허후(許詡)에 연좌되어 사직하였고,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다. 그 뒤 병조참의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허부(許溥,1663 癸卯生):문과 숙종19년(169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허계(許誡, ?~1502 연산군 8): 성종때 문신 문과 세조5년(1459) 식년시 정과(丁科),
허유(1749 己巳生):문과 영조50년(1774) 식년시 병과(丙科),
허평(許坪,1716 丙申生):문과 영조20년(1744) 식년시 병과(丙科),
허후(許詡 ?~ 1453):문과 세종8년(1426)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허수(許洙,1587 丁亥生):문과 광해군2년(1610) 알성시 을과(乙科),
허국(1812 壬申生):문과 순조29년(1829) 정시 을과(乙科),
허성(許誠,1382 壬戌生):문과 태종2년(1402)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허후(1382 壬戌生):문과 세종18년(1436) 중시 을과(乙科),
허보(許輔,1382 壬戌生):문과 중종11년(1516) 식년시 을과(乙科) 등 모두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문과 13명, 무과 5명, 사마시 21명 등 39명이다.
집성촌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는 남한에 총 5,081가구 16,344명 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경산군 하양읍 부호리, 대곡리, 와촌면 동강리, 계전리, 용전리, 영천시 신녕면 일원, 대구시 파동, 전북 고창군. 진안군, 정읍시 일원, 안천면 삼락리,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 경남 합천군 일원이 집성촌이다.
사적지
정산서원(井山書院)
제1파 간숙공파 (시호는 간숙공으로 허조의 형이시다)
시조 12세손 휘는 주(周), 자는 백방(伯方), 호는 숙재(肅齋)
시호는 간숙공(簡肅公) 1359 - 1440
주세거지 : 개성, 용담, 함양
정산서원(井山書院) 함양에 있으며 간숙공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간숙공은 이성계의 전제 개혁에 참여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판 한성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강직한 성품으로 공과 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금호서원(琴湖書院)
경상북도 문화자료 제 449호
소재지: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
조선 세종조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文敬公 許稠: 1369~1349)선생을 봉향하는 서원이다. 선생의 호는 경암(敬庵)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시다. 조선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사례의를 찬정하여 석전의식을 개정하였다.
이 서원은 효종 4년(1653) 영남유림에서 금호동(현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숙종10년(1684)에 위판이 봉안되었다. 경종4년(1724)에 사이동(현 하양읍 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정조14년(1790)에 사액되었다. 그리고 고종8년(1871)에 서원 정비령으로 훼철되었고 고종38년(광무 5년 : 1901)에 훼철원지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1923년 현 위치에 서원이 복원되었다.
좌의정 허조(許稠) 묘비
공민왕 4년(1369) ~ 세종21년(1439) 증조는 허수, 조부는 도관정량 허윤창, 아버지는 판도판서 허귀룡,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의 따님 흥양이씨, 배위는 완사부윤 박경(朴經)의 따님 영해박씨 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공양왕 2년(1390)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시승이 되었다. 그 뒤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좌보궐·봉상시승으로 지제교를 겸하여 예악제도 바로 잡는데 힘썼다.
태종 조에도 많은 예악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이러한 일은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 시피하였다. 뒤에 다시 이조참의·병조참의·평안도순찰사·한성부윤·예문관제학·예조참판·제조·개성유후사 유후·경기도관찰사·공안부윤·예조판서·이조판서가 되었다.
세종 20년(1438)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영집현전춘추관사·세자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左議政)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졸(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