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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제치하(日帝治下) 36년 사(史)
ⓛ 서울의 잔영(殘影)
1910년 일제는 이 땅을 한일합병(韓日合倂)이란 명분으로 강제로 병합(倂合)하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듯이 “조선,,은 모든 기록에서 이조(李朝)로 바뀌고 대한(大韓)은 조선(朝鮮)으로 한성(漢城)은 경성(京城)(게이쪼오)로 우리 국토(國土) 형상(形象)을 뜻하는 호랑이는 토끼로 독도(獨島)는 죽도(竹島)로 바뀌었고 1919년에는 전국의 모든 행정구역을 부(府), 군(郡), 면(面), 리(里), 동(洞)으로 폐치(廢置) 분합(分合)하였고 이때 서울의 동명도 일인들이 폐치 분합하였다, 광복 후 우리말로 서울 동명(洞名)을 바꿀 때 일부는 그대로 사용(使用)하고 있는 곳도 있다,
1930년 그때만 해도 서울 곳곳에는 조선조의 숨결이 살아 움틀 거리고 있었다, 비록 일본에 의해 나라의 권세가 빼앗기기는 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핏 속에는 수천 년 이어온 문화민족으로서의 궁지와 자존 그리고 분노, 수치와 함께 설욕과 광복으로의 비장한 각성이 오히려 더해가고만 있었다, 그것은 1년전인 1929년에 화산이 터지듯 폭발한 광주학생사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서울거리 여기저기에는 일장기가 휘날리고 관청(官廳)을 비롯한 요소에는 일본인 들이 득실거리고 충무로(당시 본정(本町)를 비롯한 그들 중심거주 지역에는 일본제국 군복차림의 군인들과 일본 옷을 입은 일인들이 활보하고 있었지만 서울 장안의 심장부인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대문 안에는 한복차림의 조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거리 곳곳, 골목마다 그런대로 변함없는 조선 사람들의 삶터인 것만은 분명했다, 더욱이 남대문, 배오개(동대문) 시장 등 큰 시장에는 조선 사람들의 사람냄새, 음식(飮食)냄새 그리고 조선말 그것도 서울토박이들의 아름다고 유수(流水)하고 자상한 말씨가 오가는 어찌 보면 조선조시대의 관습과 생활양식이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는 듯했다,
어처구니없이 오백년 조선왕조가 무너져 이 나라 왕조궁성(王朝宮城)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 앞은 육중한 돌로 구성된 이른바 『조선총독부 지금은 철거 되었다』건물이 그야말로 복마전(伏魔殿)이 되어 높고 넓게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안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갇혀진 모든 것과 역사는 잠시 숨을 죽이고 훗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듯 서울사람 모두의 눈과 가슴에는 한 결 같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이때만 해도 광화문(光化門) 네거리에서 오른쪽에는 육조(六曹) 건물이 건재(健在)하고 있었다, 이 네거리에서 남대문을 향해 좌우에는 민족대변지인『동아일보』와『조선일보』가 마치도 이 겨레의 파수꾼처럼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었다, 그 후 숱한 치욕(恥辱)과 고난(苦難)을 겪게 되지만 좌절(挫折)에 빠졌던 우리에게 다시없는 믿음이요, 등불이며 길잡이였다,
서울의 네 성(城)을 연이은 성벽(城壁)도 성안은 대충 지금의 종로구를 중심으로 하여 동대문, 서대문, 성 내외, 산기슭, 그리고 청계천 양변에는 서민층들이 대거 살고 있었고 경북궁 둘레에는 과거 고관대작들과 양반 들이 사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운집(雲集)해 있었고 종로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는 전(廛)(상점)들이 양편에 이어져 있는 요즘 상가(商街)인 셈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던 것은 각종학교가 여기적기에 자리 잡음으로써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던 일이다, 물론 초등학교(당시는 보통학교 후에 심상소학교, 국민학교로 변함)가 일정구역마다 있었지만 모두 소위 공립학교로서 일인들이 운영(運營)했으므로 그들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에 주력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에 의해 (더러는 미국선교사) 많은 사립고등교육기관이 생겨나 서울시내 곳곳에 특히 산기슭이나 문밖(교외)에 크게 세워져 조선 사람들에게 큰 희망(希望)을 주게 된 것이다,
당시의 보성전문(현 고려대), 연희전문(현 연세대), 명륜전문(현 성균관대), 불교전문(회화전문~현 동국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숙명여전(현 숙명여대), 중앙보육(현 중앙대)을 비롯하여 배재, 보성, 중앙, 양정, 휘문 등 남자고등보통학교(요즈음 중, 고)와 이화, 숙명, 진명, 배화, 동덕 등 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은 오늘날 백년(百年)안팎의 긴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는 민족사학으로 눈부시게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1930년대의 서울의 이들 각급학교은 조선 젋은이들에게 꿈과 선망(先望)이 되었으며 각 학교마다, 특별(特別)한 전통(傳統), 교풍(校風) 그리고 스포츠 등을 통해 서울 사람들과 늘 애환(哀歡)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서울시내 한복판은 우리들 삶이 본거지였지만 일본 관청가이기도 했으므로 말 못할 어려움과 껄끄러움이 적지 않았다,
그 시대 우리들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우리가 일찍이 겪어보지 않던 이(異)민족과 함께 두 개 국어, 두 개 문화권이 병존(竝存)이라는 비극적 사항에 있으므로 해서 겪어야할 수치와 분노는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충무로, 장충동, 용산, 원효로 일부, 남산기슭 그리고 관리들은 총독부 근처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었다, 특히 청계천을 경계로 (지금의 중구쪽) 충무로, 을지로(당시 황금정(黃金町)쪽은 일인들 종로 쪽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계천 경계지역인 주변은 그야말로 두 언어 문화권의 접경지역으로서 직접 대조적인 여러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지금의 청계로 5가 근처에 있었던 『만전다리』(방아다리 근처)를 놓고 종로 쪽은 한복차림의 조선사람 동네에서 된장찌개, 김치, 마늘냄새가 감돌고, 가야금 창 소리, 이난영, 고복수의 유행가(流行歌) 소리가 들리는가하면 다리 건너 반대쪽(현 중구)은『기모노』(일본 여자옷)차림의 일본사람 동네에서는 방정맞은 개다(일본 나막신) 다꾸왕(단무지), 덴뿌라, 생서구이 냄새가 풍기고『사미센; 고도 금(琴)』(일본 악기) 가락과『옌까』(일본 유행가) 노래가 들려오곤 했다,
이런 생활풍경(生活風景)은 어린이들에게는 자못 신기하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고 굴욕적인 심정을 일게 했다, 더욱이 가끔 일어났던 조선인과 일본인들 양측 젊은이들, 혹은 학생들, 어른들인 역사(力士)들 (어는 의미에서는 주먹패들)의 패싸음 은 그야말로 양 민족대결을 의미하는 심각한 실력승패의 장인 샘이다, 그러기에 우리 측 어린이들까지 주먹을 불끈 쥐개끔 했다,
이런 속에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빈곤해지기만 했다, 그것은 일본인이 야금야금 우리의 상권을 침범해 옴으로써 자연 그런 추세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기울어져 가기만하는 우리의 생활실태 속이지만 서울 각계 각처에서는 뜻있는 인사들이 모요 이 민족의 역사와 전통성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힘겹고 끈질긴 활동이 쉼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1931년에는『조선어학회』를 설립시켜 한글을 보다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널리 펴기 위한 사업이 전개되었으며 문학 분야에서도 당시 심한 경제불황임에도『시문학』(30년도) 문예월간 (31년도)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또한 서울토박이인 어떤 부호는 날로 소멸되거나 일본으로 유출되어가는 우리 문화재수집에 거금을 써가며 온 힘을 기울이는 애국애족의 일도 있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상화(尙火)의 시)....암울해가기 만하는 식민지 조선~서울도 어김없이 아침이오고 밤이 가고 일월, 춘하추동은 한강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일제치하 36년까지의 역사는 곧 파란만장한 숱한 변화와 격동으로 이어져온 우리민족의 현대사이며 서울사람들 모두의 인간사(人間史)이기도 한 셈이다,
② 서울의 아침
아침은 하루를 연다, 하루를 여는 서울의 소리도 떠들썩하고 움직임도 활력이 넘친다, 꼭두새벽부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바삐 뛰는 물장수, 딸랑딸랑 거리는 두부장수 종소리에 서울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게 마련이다,
부엌에 묻어놓은 큰 검은 독 속에 물을 퍼붓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물이 한 곬으로 모이듯이 팔도 생산물을 실은 숱한 수례들이 사대문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달가닥거리는 소리, 시장에서는 물건을 흥정, 거래하는 소리가 시끄럽고 또한 외각에서 시내 안으로 서로 연결되는 전차(電車)의 땡땡거리는 소리가 온 장안 새벽공기를 둟고 퍼지기 시작한다, 이제나 그제나 약수터를 찾는 발길도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삼청동과 남산 약수터 동대문밖 용두동의 찬우물(제기역 부근에 있는 찬 우물은 물맛이 좋아 물장수들이 길어다가 도성 안에서 팔면 다른 어는 곳의 물보다도 장사가 잘되어 부자가 되었다고도 전해온다,) 그리고 마포의 복지우물 등이 가장 유명했다,
조금 이어져서 아침 찬에 대려고 새우젓, 조개젓, 생선장수가 한차례 지나간다, 이것들은 날 밝기 전에 인천, 마포강을 통해 들여온 싱싱한 것들이다, 그리고 더러는 까까머리 소년(少年)들이 들통을 들고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침에 국 꿇이기가 번거롭고 또한 사내들의 주체(酒滯)를 풀어주기 위해 설렁탕이나 술국을 사러가고 오는 심부름을 하는 소년들이다, 사가지고 올 때는 의례 들통뚜껑을 엎어 올려놓고 그 위에는 소금, 고춧가루, 후추가루, 잘게 썰은 파들이 조금씩 얹어 있고 들통 사이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새어 나오며 그 냄새가 또한 구수하다,
그때 1930년대 초만 해도 이른 아침에는 좀처럼 여염(閭閻)집의 여인들은 집 밖에서 볼 수가 없었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연인들은 처내라고 하는 치마를 눈만 내어놓고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서울 사람들은 유달리 내외가 심했다, 기껏해야 일하는 어린 계집애들이 구멍가게에 오가는 모습만이 보일뿐이다, 구멍가게는 요즘으로 말하며 미니슈펴라고나 할까, 왠 만한 찬거리, 채소 과일, 과자, 잡화(雜貨)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으며 거의가 외상거래여서 많은 서민들이 단골이 되어 있었다, 자연히 가게주인은 그 동네 사정에 환하여 집 찾는 사람은 의례 가게주인 신세를 지게 되었다, 가게에는 조금만한 수첩(手帖)이 집집마다 있고 가게에는 장부(帳簿)가 비치(備置)되어 있었으며 그 청산(淸算)은 통상(通常) 한 달에 한 번씩 이였다,
물장수는 대개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 사람이며, 집집이 수도(水道)가 없고 공동수도를 북청 사람이 관리(管理)하고 있다, 물을 길어다주곤 그 집 기둥에다 정(正)자를 써놓는 셈법으로 달마다 계산을 했으며 집집마다, 순위(順位)를 정해 한 달의 한 끼를 대접(待接)하게 되는데 대개 물장수는 아들을 공부 시키면서, 대리고 가니 차림 밥상에다 밥 한 사발을 더 놓으니 {물장수밥), 찬은 먹고 난후 늘 바닥이 나 있어서 물장수 밥상이란 말이 생겨났다, 또한 북청 물장수는 아들공부가 끝나면 고향(故鄕)으로 가는데 공동수도를 절대(絶對)로 다른 사람에게는 팔지를 않고 북청사람에게 팔았다, 하여 지독한 사람을 보고 북청 물장수란 말이 생겨났다,
이른 아침 조선 사람들만이 사는 동네에서는 가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이 일어나 모두를 경악(驚愕)과 분노(忿怒) 그리고 자괴심(自塊心)에 빠뜨리곤 했다, 흔치는 않지만 일인들 주택이 간혹 조선사람 동네에 한 두체 끼여 있었다, 워낙 아침목욕을 좋아하는 일인들이라 새벽 목욕당 길에 오르는데 거의 나체(裸體)가 되어 길에 나타나는 것이다, 성인남자가 몸에다 이른바『훈도시』(반츠의 일종인데 주요부분만을 손수건만한 천으로 간신히 가린다)하나만 달랑 걸치고, 게다(일본나막신)를 신고 수건은 어깨에다 걸치고 활보(闊步)하는 것이다,
걷다보면 그 천이 흔들리어 속까지 들여다 보이이기 일쑤다, 그러니 이 장면(場面)을 먼저 본 집의 남자 주인이나 할머니들이 질 겁을 하면서 “저런 짐승만도 못한 놈 봤나?” 혀를 차며 놀라 각기 자기 집 문단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의 아녀자(兒女子)들은 얼굴과 손 외에는 맨살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므로 더욱 충격(衝激)은 컸을 것이다, 잠시 대문 빗장을 잡고 여인들의 출입을 유보(留保)시키고 했다,
오전 8시를 전후(前後)해서 서울의 골목 거리는 각급학교(各級學校)로 등교(登校)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그때는 웬만한 거리는 걷는 것이 습관화(習慣化)되어 있었다, 일인들이 만들어낸 소위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등 우리 청소년들의 기상(氣像)을 꺽고 자기 비하(卑下) 열등감(劣等感)을 심어주려는 교육이 경주됐지만 오히려 우리의 청소년들은 식민지 백성답지 않게 당당했던 것 같다, 동대문은 청량리에서 오는 전차 뚝섬 쪽에서 오는 기동차 종점이고 여기서 서대문 노량진 가는 방향을 가러 타는 곳 이여서(노리가이) 등교 길에 늘 복잡한 곳이다, 그래서 한국학생과 일본학생들이(현재 동대문을 둘러싸인 성벽 안에 마당에서) 가끔 패싸움을 하던 곳이다,
등교 길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여러 다리 밑의 진풍경(珍風景)은 흥미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여기저기 다리기둥에는 까맣거나 빨간 페인트로 {사탕(蛇湯}살모사.....등 뱀 이름이 막 갈겨 써 있고 다리 사이 가마니로 벽을 이룬 움집에서는 거린 차림의 사람들이(넝마주위 별명 양아치)들락날락거리고 개천가에는 여기저기 쓰레기(요즘 말로 재활용쓰레기) 묶음이 쌓여 있다, 그런데 구수한 음식냄새가 다리 위까지 풍기어 오고 있다, 직경 1미터쯤 되어 보이는 크고 시거먼 가마솥 뚜껑에서 나오는 냄새이다, 하나는 국솥이고 하나는 밥솥이다, 장작불이 작열하게 가마 밑에서 열을 뿜는다,
밥솥에는 어린 걸인들이 구걸해온 각종 밥과 여러 가지 찬들이 한꺼번에 부어지고 거기에다 큰 정종 병에 각기 들어있는 간장 참기름, 그리고 큰 깡통 그릇에 담겨있는 고춧가루, 깨소금 등이 마구 뿌려진다, 한 장정이 큰 부삽으로 이리저리 휘저으며 범벅을 시킨다, 또 한 솥 속에는 배추 시금치 따위 풍성귀가 잔뜩 들어간 된장국이 마구 끓어댄다, 밥 국이 다 되면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질서정연(秩序整然)하게 위로는 70대 노인(老人)으로부터 아래로는 7~8세 어린 꼬마 애들까지 차례로 나누어진다, 아침 성찬(盛饌)을 드는 장면이 가히 가관(可觀)이다,
일제하 서울에는 걸인(乞人)이 무척 많았다, 산기슭이나 다리 밑은 거의가 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리 밑에 사람들은 누구하나 놀고먹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독신(獨身)들이다, 뱀 장수, 막노동, 휴지 깡통 줍기 등 시간별로 일을 나가고 돌아와서는 재활용품 쓰레기을 정리작업(整理作業) 한다, 다만 음식구걸은 어린아이들 몫이다, 어린아이들은 깡통을 손에 걸고 집집마다, 돌며 문전(門前)에서 밥 한술 줍쇼 하면 구걸(求乞)한 그 모습(模襲)을 볼 수 있는 풍경(風景)은 서울에 함께 사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렇듯 청계천 아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그 시대에서만이 있었던 불쌍한 이 땅 가난한 민초(民草)들의 실상(實狀)이 아닐 수 없었다,
③ 서울의 낮
서울은 감싸고 있는 삼각산(三角山), 북한산(北漢山), 인왕산(仁王山),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그 정기(精氣)를 장안(長安)에 듬뿍 뿜어 사람들의 기를 생동케 하고 한강(漢江)물은 그 오래됨과 정결함으로 사람들의 의욕의 갈증을 풀어주며 피를 끓게 하여 내일의 활력을 일게 해 주었다,
집집마다 사내들이 직장이나 일터로 나가고, 자녀들이 학교로 등교한 후 아낙네들이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대층 집안을 치고 좀 쉬려고 할 무렵부터 서울의 골목길에는 각종 장수들이 행렬이 이어지게 된다, 가장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솔가지를 실은 소마차가 새벽부터 청량리 쪽으로부터 문안으로 들어오고 청량리역 마장동쪽에는 나무시장이 있어 장작을 손 수례에 싣고 문안으로 들어와 나무를 판다, 그때 주 연료는(땔감) 장작이었다, 나무장수 뒤에는 흔히 도끼와 톱을 지닌 장작 패는 이가 뛰 따랐다, 이어서 기름, 소금 건어물, 그릇, 옷감 야채...별의별 장수들이 각기 상품이름 을 붙여“o o 사아려..하며 나타났다, 그 때 주부(主婦)들은 웬만한 것은 집 안에서 사드린 수 있는 여건(餘件)이었던 것이다,
종로를 비릇한 상가는 이미 이른 아침에 거의 문을 열었지만 상거래는 대강 낮에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앞서 각종 상품을 공급하는 거관들이 자전거나 오동마차(당나귀가 끌고 뒤에는 나무로 짠 큰 괴짝처럼 꾸민 소형 화물차인 샘이다,)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여러 상점을 들락날락거렸다, 종로는 일찍이 조선조로부터 나라에서 인정한 유일한 상설시장 시전(市廛)으로서 각종 물품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포목점(布木店)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종이 유가, 신발(구두)...양복, 잡화, 서적 양품, 악기...등 최신 최고급을 내세울 만한 유명 상품이 골고루 집결되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지금은 찾아 사먹기 조차 어렵게 된 서울전통음식점이 여기저기 산재 있기도 했다, 설렁탕, 장국밥, 대구탕, 추어탕, 술국, 냉면집 등이 서로 역사와 특미(特味)을 내세우며 고객유치(顧客誘致)에 경쟁(競爭)을 하였다, 가게 앞에는 곡마단(曲馬團)(서커스)처럼 빛깔 있는 큰 천에다 광고문(깃발)을 써 휘날리게 했다 특히 재미있는 광경은 대낮 점심시간 전후해서 음식을 나르는 배달부의 묘기(妙技)였다, 자전거를 탄 젊은이가 음식 십여 그릇(그릇마다, 파란 빛깔 칠을 한 양철로 만 든 뽀족 하게 생긴 뚜껑을 덮었다,)을 놓은 긴 목판을, 또한 여러 개 겁쳐 차곡차곡 얹어놓은 것을 한 손으로 떠받치고 한 손으로는 자전거 손잡이로 운전하면서 달려가는 것이다, 서커스를 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은 가히 곡예(曲藝)이며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또한 매일 대낮 종로거리에는 누가 붙여준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서울깍두기,,라 불리우는 괴신사(愧紳士)의 등장이다, 당시 심심치 않은 화제 거리가 되었다, 40 전후가 되어 보이는 키가 헌칠한 멋쟁이 신사인데 늘 흰 중절모에 아래위 흰 양복차림, 흰 구두에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스테기(단장)를 한 손으로 휘드르며 아무 볼일 없이 종로거리를 여러 차래 왔다 갔다 하다가는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무엇 하는 이며 어디 살고 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언제 서울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는지도 영영 모르고 말았다,
서울거리에서 또 하나의 진풍경(珍風景)을 볼 수 있었다, 주인공은 짤달막한 키에 둥근 안경을 끼고 낡은 중절모를 쓴 백계로인(白系露人)이 (러시아 혁명 때 도망 나온 귀족이란 설도 있었다,) 낮 서너시쯤이 되면 서대문 근처 골목에 또는 동대문밖 부근 골목에 나타나곤 했다, 그는 아코디언을 매고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지만 경쾌한 매로디이 음악(音樂)을 연주하고 다니면서 화장품(주로 여자용 크림을 팔고 다녔다)을 팔고 다녔다, 크림은 큰 통에서 꺼내어 아이스크림처럼 주걱으로 떠서 조금만 그릇에 넣어 주면서 팔았다,
이 노인이 나탄 나면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에워쌌다, 그것은 그 때만해도 보기 힘든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서양 사람이 신기했고 그저 더듬더듬 서틀게 하는 조선말이 재미있었고 악기에서 나오는 가락이 흥겨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개 여염집 여인들은 내외를 했기 때문에 화장품을 사자마자 자기 집 마당 안으로 황급히 사라지곤 했다, 러시아인 크림 장수는 광복 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군이 미국 양노원으로 대리고 갔다는 설도 있다,
서울의 낮 동네의 주인은 복덕방(福德房) 영감이다, 그들은 그런 데로 유식한 편이며 세상물정에 밝았으며 요즈음 말로 정보통이다, 집 매매거래 방 전세, 월세 알선 등에서 나오는 구문으로 생계를 유지 했지만 그곳에는 늘 장기판이 벌어졌고 이른바『문제인사』들이 모이는 그 세대의 여론조성충(?)의 집합장소이며 시대 비판(批判) 논쟁(論爭) 그리고 그 시대의 애환(哀歡)이 깃들기도 한 곳이기도 했다,
또한 서울의 골목 안에는『솜틀집』이 번성했다, 꼬불꼬불하기로 유명한 서울의 골목들은 오후가 되면 어린이들의 상설놀이터가 되었다, 제기차기 자치기, 말 타기 야도(일본말 집) 잡기 놀이 패싸움, 공치기 등 여자아이들은 소꼽
장난 공치기 줄넘기 등으로 흥겨롭게 놀고 하는 것이다, 그때 어린이들은 좀 거치고 힘들고 옷이 더러위지는 놀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서울 큰 거리 라디오 방『전파상회』스피커에서는 1934년에 히트한 고복수(高福壽)의 손목인(孫牧人)작곡『타양살이』유행가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곤 했다, 이렇게 서울의 낮도 하루하루 이어져가고 있을 무렵 1932년 바깔세상에서는 어마어마한 큰 사건이 터지고 있었다, 1월에는 이봉창(李奉昌)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지다 실패했고 중국 상해 공원에서는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일본 천황생일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 대장은 즉사케 하는 등 항일(抗日) 거사가 잇따랐다,
자연히 한반도 내에서 일본관헌들의 조선 사람들에 대한 눈초리는 더욱 매서워 가기만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1933년 서울에서는 서울 토박이인 이상(李箱) 조용만(趙容萬)을 비릇한 몇 사람이 모여 순예술파적인 문학을 수립하고자 구인회(九人會)라는 문학 그릅을 만드는가 하며 1934년에는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술단체인 그 유명한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기도 했다,
서울의 각 가정은 그 살림규모가 크고 작고 간에 온종일 주부들의 일의 연속이었다, 그 중 제일 힘들고 큰 일이 식구들의 빨래이다, 그 때만해도 거의 한복을 입었으므로 때가 잘 타는 흰옷을 자주 갈아입게 하기 위해서는 늘 일이 밀리곤 했다, 더러는 빨래거리를 모아서 가까운 개천이나 산기슭 빨래터를 찾아 빨았다, 큰 살림집은 지게에다 솥까지 지고 갔다, 양잿물에 삶아빨거나 물감을 들이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가족들이 총동원되고 점심까지 싸가지고 가서 아예 종은 햇살에 빨래를 말려가지고 오기도 했다, 이것은 모처럼 아낙네들의 바깔 바람을 쐬는 소풍 기분을 내는 나들이기도 했다,
서울사람들은 각별히 밑반찬, 마른음식을 좋아하는 식성인지 주부들은 낮이며 마당에다 돗자리를 깔고 무말랭이 깻닢, 호박, 가지 따위를 말리고 뺄랫 줄에는 민어알(어란) 양념한고기(육표)나 여러 생선을 소금을 뿌려 작은 채반에 않히고 모기장 천 따위를 쒸위 묶어 매달아 말린다,
큰집이나 작은집이나 장독대 밑이나 단장 아래 조금만이라도 공간(空間)이 있으며 거기에다 채송화, 분꽃, 봉선화, 나팔꽃등을 심어 얼마간이나마 전원(田園)분위기를 내기 좋아했고 강아지도 한두 마리 기르는 것을 즐겼다, 그즈음 이른 새벽에는 변을 보러 나온 개들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닭도 취미로 한두 마리 기른 습관도 있었다,
오후 한가한 시간대에 마루에는 고부간이나 모녀가 마주앉아 똑딱똑딱 다듬이질을 하면서 담소하고 옆에는 간난 아이가 솔솔 잠을 달게 자고, 마당에는 강아지도 축 늘어져 오수에 빠지고 닭이 몇 마리 여기저기에서 모이 쫓고 웽웽거리는 파리떼소리가 들리는... 이런 서울의 낮 한때는 각 여염집에서 흔이 볼 수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했다 그 무렵 바깔골목에서는 엿장수, 나물장수등과 굴뚝 뚫어 하며 괭가리로 쾅 울리고...아궁이 고쳐...싯칼 갈아요...된장파시오...심심지않게 장수나 일을 맡겨달라는 호객소리가, 이어져갔다,
그 때만해도 대가족제이어서 조부모로부터 여러 형제, 손자까지, 몇몇 며느리도 한집에 사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나 재래식 살림양식에서 의식(衣食)에 기울여지는 여자의 손길, 그칠 줄 모르는 일거리, 그리고 어려운 어른 모시기 유아(幼兒)등 그때 여인들의 삶은 인고(忍苦)의 나랄이었다, 그렇다고 가장들의 삶도 편안할리 없었다, 일제하에서의 조선 사람들의 일자리는 흔치 않았다, 이른바 공직(일본 관청)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대개는 사업 종사하거나 막일에 붙어살어야만 하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 가운데 다행스럽게 그것도 요즘말로 고급인력 지식인을 수용할 수 있는 직장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몇 전문학교와 여러 고보(중고교)의 교수, 교사직이었다, 이곳에는 그 당시 쟁쟁한 학자 예술인 그리고 덕망 있는 민족지도자들이 군거하고 있었으니 그 분들의 생계도 유지됐지만 내일에의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높은 지식의 전수는 물론 올바른 민족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인간교육을 배풀 수 있었다는 것을 참으로 축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관헌들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계층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때 보통학교(총등학교)앞을 지나가노라면 담 안 교실에서 들여오는 조선어 배우는 소리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가-,, 장음을 내며 길게 이상한 가락에 맞춰 외우고 하였으나 조선어 글 읽는 소리도 1938년 일본 당국이 조선어교육을 폐지시킴으로써 영영 들을 수 없게 돼버렸다,
서울 사람들의 유일한 낙은 가까운 극장에 가서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이었다, 오후 한 두시쯤이면 은근한 유행가나 주제곡이 퍼지면서 각기 문을 열기 시작했다, 서울 문안에만 동양극장, 당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등 한인(韓人)과, 일인들이 운영하는 극장이 십여 곳이나 있었다, 젊은 남녀는 이곳에서 테이트를 즐겼고 장노년층은『장화홍련전』『단종애사』등 우리역사물에 심취하기도 했고 현대극『홍도야 울지 마라』『이수일과 심순애』등을 통해 애환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 무렵『눈물 젓은 두망강); 김정구』(1936년) 『나그네 설음; 백년설』(1938년) 등의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1936년 8월 서울장안을 흥분 감격 환희에 물고가 것은 독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제11회 올림픽에서 우리의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한 승전보였다, 종로를 비롯한 큰 거리의 라듸오방 마다, 가게문 밖에 스피커를 달고 중계방송을 시민들에게 들려 주엇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름처럼 모여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조선사람 남녀노소 모두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던 손기정 선수를 생각하면서 기쁨과 함께 망국의 비애(悲哀)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7년 드디어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며『중일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서울도 더욱 혐난한 분위기로 극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동시기에서도 서울 한구석 서실에서는 우리의 학자들이 꾸준히 그 어는 때보다도 우리의 전통문화 발굴,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주옥같은 학문의 열매들을 내놓기도 했다, 1933년에는 조선연극사(朝鮮演劇史) 김재철(金在喆), 1937년에는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조윤제(趙潤濟) 1938년에는 조선 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 김윤경(金允經)등 우리 문화유산을 각기 정리한 고전적인 명저서(名著書)가 발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서울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울은 1940년이 되기 전 그런대로 거리나 골목에는 우리의 오래된 전통적 삶의 틀이 힘겹게나마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른바 전업(專業)가게나 전포가 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떡집, 기름집, 국수집(잔치가 있을 때 몇 사람 분을 주문하면 주문된 분량을 실버드나무 가지로 짠 채반<1m x 30cm>위에 좌우 다발로 앉힌 다) 솜틀집, 세물전(혼인이나 장사 때에 쓰이는 물건을 세를 받고 빌려 주는 가게) 따위가 여전히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개화 후에 생긴 목욕탕, 이발관, 일력거방, 차부 그리고 꽃방(신식결혼식에 필요한 웨딩드레스 대여해주거나 꽃(화환)준비,주례도 서주는 결혼 편이점)등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 외에도 오랜 관습으로 일상생활에 긴요했던 한약국, 유기전 솥전, 목문전(木器類)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쟁이집(무꿀이하는 무당집) 그때에는 보통가정 집에서 자녀가 병이 나면 우선 죽(약간의 쌀에다 된장을 풀고 시금치 따위를 넣어 멀겋게 쑨다, 또는 팥죽)을 쑤어서 거리에다 벼렸다, 즉 액운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 글 하시는 분에게 약방문을 얻어 한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다려먹였다, 아이들은 자라배(복이라고 하며 ;어린 아이가 열이 나고 보챔)라는 것을 잘 않았는데『복합잡는집』(지금의 서대문 네거리에서 독립문 쪽을 가다가 왼쪽골목 안에 있었다)이라는 곳에 찾아 갔다, 보통 노파가 언지손가락 밑의 도도록한 데를 칼끝으로 째고는 하안 비지 같은 것을 꺼내고 하얀 붕대를 “人,,자형으로 감아주곤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에는 어렸을 때는 누구나 거쳐 가야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골목안의 이발소는 복덕방 못지않게 여러 계층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어서 자연히 여러 정보가 오갔고 시국담 등 여론의 집산지(集散地)이며 사랑방(싸롱)의 구실도 했던 셈이다, 주인들도 대개가 자칭 지식인들이었고 멋쟁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국(時局)이 급변(急變)하면서 이발소 분위기부터가 이상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말과 행동거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형사들에게 경찰서로 끌려가기 때문에 제각기 자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년대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부담키 어려운 『쇼코』가 아닐 수 없었다, 걸인(거지) 아닌 걸인 가난한 이농민(離農民)이 갑자기 서울 골목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여러 날이나 굶었는지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가운데 눈물마저 주르륵 흘리며 나무껍질이나 붉은 진흙을 먹으며 구원의 손길을 애결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허기가 져서 거동마저 신통치 않아 보였다, 갓난아이는 말라붙은 어머니의 젖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으나 그 기운마저 지쳐서 헛손 놀림뿐이다, 가진 것이란 가마니 몇 장 찌그러지고 낡은 바가지, 숟갈 몇 개가 고작이다, 모두가 중남부지역에서 땅을 빼앗기거나 잃고 무작정 만주(북간도)로 가는 길이라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따뜻한 계레 사랑의 손길이 정성껏 배풀어진곤 했다, 각 집기리 협동하여 우선 옷을 갈아입히고 흰죽(금방 밥을 먹으면 죽는다고들 했다,)을 끓여 먹인 후 여러 기니가 지난 후에야 밥을 주었고 좀 기운을 차린 후 며칠 분 주먹밥과 간단한 반찬을 싸주어서 북쪽으로 보냈다,
1938년 올 것이 오고만 것이다, 일제에 의해 보통학교를 비릇하여 가급학교마다 조선어 수업을 폐지하는 조칙가 취해지고 일본말만 쓰라는 것을 강요됐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바꾸라는 것)까지 강요 당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서도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만 쓰고 만약 조선말을 쓰다가 발각되며 벌점이 붙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한복판 종로대로에서는 가끔 일본 군인들의 시가전(市街戰)훈련이 실시되었다, 한두 시간 통행이 통제된 가운데 총소리가 요란하고 초연(初煙)이 자욱하게 깔리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함으로써 서울 사람들에게 불안과 위기감을 일게끔 하니, 눈에 보이게 차츰 사회가 전시체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38년 2월에는 조선청년을 전쟁터로 유도키 위한 소위『조선육군특별지원제도』와『조선일보가』1940년 8월에 폐간 되었다, 이어 10월부터는 소위『국민총력연맹』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어 조선 사람들을『황국신민화』시키는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서울 곳곳 직장, 학교를 비롯하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우리의 가락, 노래는 숨을 죽이게 되고 일본군가가 기세를 부리기 시작했다,『공무원』학생들의 복장도 군복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지는 등 가시적으로 전쟁시국임을 느낄 수 있게 되어 갔다, 그러나 이처럼 일제의 조선적인 것의 말살정책이 더욱 가해질수록 그 반발에서 오는 우리 문화, 우리말, 우리문학의 예착과 수호의 열은 대단해져서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출판물이 번창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문학(단)사상 가장 수준이 높은 순문예지『문장(文章)』(1936년창간)의 발간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생동을 결연히 보여줌으로써 이를 통해 현대문학의 절정(絶頂)을 이룩할 수 있게 했다, 한편 종로구 익선동 골목 안에서는 그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전통적『소리』(판소리)의 맥을 끊기 지 않게 하기위한『조선성악연구회』(1933~1940)회원들의 소리판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눈물겨운 나날도 있었다,
④ 서울의 밤
연년세세(年年歲歲) 서울의 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서울의 밤도 이 땅의 역사와 더불어 어김없이 오고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낮과는 달리 밤은 다행(多幸)이 일제의 입김이 당지 않는 조선 사람들끼리의 삶 조선조의 그림자가 그런대로 이어져가고 있는 시간대였다, 각 가정은 일시나마 외부와는 단절된 가운데 가족끼리 우리식의 오븟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사랑방에서는 할아버지의 한서(漢書)를 읽으시는 나지막한 소리가 도란거리고 가끔 놎 재떨이에 장죽(長竹)을 탕,탕 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안채에서는 늦설거질이며 다듬질하고 문간방에서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간헐(間歇)적으로 이어졌다, 부엌에서는 내일 먹을 찬을 준비하는 아낙내들의 손길이 바쁘고 거기에서 나오는 조선가장 된장, 고추장 등 우리들이 특유한『조선냄새』가 집안에 흔건하게 퍼졌다, 라듸오의 소위『제2방송』에서 우리의 민요, 창(唱)이 들려오기도 했다.
특별히 예절에 잘 맞추어 사용되어 오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서울말은 그때 까지는 지방 말, 시투리가 거의 유입되지 않던 때이어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전래의 대가족제도가 이어져오고 있던 1930년 때는 비록 신문명(新文明)으로 개화(開化)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각 가정은 조선조의 유교적 가정질서 곧 관습, 예절, 언어, 의식주의 형태가 거의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었다, 특히 밤에 치려지는 조상들에 대한 여러 차례의 각 제사의례는 조선조의 연장을 방불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밤은 온전히 우리차지였던 셈이다,
서울가정에서는 철에 따라 길일(吉日)을 택해서 고사(告祀)를 자주 지냈다, 시루팥떡을 집안에서 만들고 막걸리, 북어 따위를 사서 여러 접시에다 정성껏 얹어서 마루, 부엌, 광, 장독대, 뒤곁, 중문안 등 곳곳에다 놓고 지냈다, 그 집안의 안어른인 할머니들이 정결한 옷차림을 갖추고 가정의 평화, 자녀들 온가족의 건강, 집주인의 사업융성 등을 위해 두 손으로 빌면서 기원했다,
고사를 지낸 후 떡은 동네집에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때만해도 지금과는 전혀 달리 시골 못지않게 각 집안끼리 사람이 자주 오가고 경조사(慶弔事)도 함께 하는 등 인척(姻戚)처럼 지내는 정(情)겨운 사이었다, 그러하니 길에서 동네어른을 뵈면 집안어른 모시듯 깍듯이 예를 갖추어 공대(恭待)하는 것이상례(常禮)였다,
낮과 밤의 환경이 다른 시대적 상황에서 특히 자라나는 어린세대들은 예민하게 촉각을 세워 가면 살아가야만 했다, 낮에는 일인들에 의한 일본말로 일제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밤에는 누천년 내려오는 우리 몸에 벤 조선 사람의 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일인들의 동화전책이 강하여도 집안 어른들의 우리말, 우리 것, 우리전통을 지키려는 고집을 너무나도 대단하여 어린 심정들도 알고 모르게 어떤 한 확신을 갖는 게 부족함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좀 여우가 생기면 낮에는 거의 얼굴조차 밖에 안 내밀던 서울 여염집 여인들이 외출을 하고 하였다 고부간, 모녀간, 혹은 이웃집 연인들과 함께 나갔다 자연히 몇몇씩 어린이들이 손에 매달려 따르게 마련이다, 가는 곳은 가까운 극장이나 서울의 명물이었던 야시장(夜市場)이였다,
서울의 야시장은 1925년경 생겨난 것으로 요즈음말로 밤에만 세우는 야간임시 편의점 같은 것이라 하겠다, 종로에서 종로3가 사이 차도 쪽에 세워졌다, 가게는 한 칸씩 자리 잡는데 더러는 두 칸, 네 나무기둥을 세워게 했다, 파는 것은 생활필수품 생선(生鮮), 채소(菜蔬)따위를 제외한 물건이었는데. 옷감, 그릇, 약품 그 외 화장품등 주로 여성용이 많았고 이른바『빨간딱지』라고 부르던 고대소설도 인기가 되었다, 가게마다 자기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호객소리와 몸짓도 재미있어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근처 악기점이나 전파상에서는 악기나, 유성기(측음기)판 (도난츠판)을 선전하기 위해 틀어 놓은 유행가 소리가 곁들여 거리 손님들의 흥을 돋구기도 했다,
현대말로『아이쇼핑』이라하며, 그저 구경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저녁에 바람도 쐴겸 나왔던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상품은 거의가 상표도 제대로 안 붙은 싸구려가 대부분인 그야말로 서민 상대용이었다, 또한 손님들을 유혹하는 것은 경품(景品) 타기였다, 일정액수의 물건을 사면 상품권을 주는데 한곳에서 추첨하여 상품을 주는 것이다, 거의 등외(等外)인데 『오꼬시』(일본말, ;쌀로 만든 네모진 큰 강정 같은 관자)를 탈수 있었고 등수에 들어가면 냄비 등 좀 쓸 만한 고급(?) 살림살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야시가 인기가 있었고 조선 사람들이 매일 밤 구름처럼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내놓은 상품들이 오랜 우리전통과 생활관습에서 오는 체취(體臭)를 느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옷, 버선, 인두 반짓꼬리, 꽃실, 고무신, 각종 목물(木物) 그리고 깨엿, 호박엿 다식, 약과등... 서울 인구가 100만도 (1930년때에는 355,426명이였으나 1940년때에는 서울을 확장으로 인하여 930,547명) 안되었던 당시에 이 야시장에서 친인척, 친구들을 상면하는 기뿜, 청춘남녀의 사랑어린 데인트장이 되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야시장의 낭만(浪漫)이었다,
다음으로 서울의 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각 가정에서의 밤참<야찬(夜餐)>이다, 긴긴 겨울철은 말할 것도 없고 의래 자기 전에 밤참을 즐겼다, 그래서 밤에는 장사하는 사람이 참쌀덕 매밀묵사려 하면 골목골목을 외치면 다니었다, 여름철에는 수박 참외(지금은 노랑참외만 남았다, 옛날에는 청참외 개구리참외 백참외등도 있었으나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도 더러 먹었지만 특미(特味)있는 간식이 준비돼 있었다, 꿀에 재어 놋그릇에 넣어놓은 인절미, 범벅이(늙은 큰호박, 감자, 팥, 설탕을 범벅하여 찐것)등이 맛이 좋았다,
예나이제나 밤은 무릇 사람들의 휴식뿐 아니라 환락과 은밀함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 더 일해야만 하는 고역(苦役)과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해야만 하는 야간학교의 어린학생들의 힘겨운 시간대이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의 실의(失意)에 찬 삶 속에서 밤에 술로나마 마음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내일로의 희망(希望)을 잃은 젊은 지식인들이 격분(激忿)을 술로 푸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달 푼 생활을 지탱(支撑)해 가는 민초(民草)들도 밤에는 술이 약이었던 시절이었다, 각계각층이 여기저기 산재(散在)해 있는 술집에서 술과 노래를 통한(痛恨)을 배설(排泄)해야 하는 풍류(風流)보다는 시름을 잊으려 했던 것이다,
유명한 요정『명월관(明月館』『국일관(國一館』서부터 다옥동(중구 다동)에 몰려있던 기생집 여기저기 뒤 골목의 술집, 한강나루마다에는 객주, 색주가들이 무성했다, 이름 있는 기생들은 자기 집을 갖고 있었지만 거의 기생들은 호젓한 골목안집 문간방이나 행낭 등을 빌어 세 들어 살면서 밤에 출되근(出退勤)(?)하였다, 권번(券番)이란 간판(看板)을 건 제법 큰 술집에서는 기생들을 기거케 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뀐면서 양가집규수나 여학교를 나온『인테리』기생도 흔히 있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여튼 그녀들의 실련(失戀)의 도피처(逃避處)가 되었거나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한 생활방편(生活方便)이기도 했다, 많은 일화(逸話)와 사건이 야기되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집에서는 생활에 보탬을 주기 위해 밤늦도록 일거리를 얻어다가 일을 했다, 그 중 삯바느질은 좀 나은 편이며 헌신문지나 잡지(雜誌)로 봉투를 만들거나 양복단추 구멍을 내기가 고작이었다, 어린것들은 밤이 되며 (여름철엔)거리에 나가『아이스케키』를 팔았고 극장에 나가 과자, 땅콩, 오징어, 음료수(사이다)따위를 목에 밀 빵을 맨 나무상자에 넣어 팔고 다녔다,
그뿐 아니라 저녁거리는 온통 밤 장사꾼(노상)으로 뒤덮였다, 채소, 과일, 군밤 군고구마, 엿장수 말고도 수레점포(포장마차)는 우동, 오뎅 등 뜨끈뜨근 한 간식(間食)을 제공(提供)했고 간이주점 구실도 했다, 밤이 되면 활기를 띠우는 일은 인력거(人力車)꾼의 몫이었다, 인력거방(돈화문 근처와 동대문 서대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요정, 권번, 기생집들과 손님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달려가서 태워 날랐다 요즈음의『콜택시』인 샘이다, 대개가 홀아비들이었는데 그들이 공동생활상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자정(子正)이 넘어 야경꾼은 나무 두 쪽을 딱딱 처가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순찰했다, 모든 것이 어려웠던 그 시절 각 가정이 할머니들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희미한 백열등(白熱燈) 아래서 아들, 손자들의 터진 양말 속에 못 쓰는 정구를 넣어 꿰매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밤일의 하나였다,
한편 지금의 명동, 충무로, 용산(일본군 사렁부 소재)일대에서는 지배자로서의 일인들의 흥겨운 술판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 중심상가인 종로에서 그런 데로 네온사인의 현란(絢爛)한 불빛 아래 야시와 함께 밤이 번성을 보이는 것은 양가도(兩街道)의 주단포모점(綢緞布木店)이었다 그때로서는 단연 우위(優位)를 차지했던『쇼핑원도우』격이었다, 요새 말로『패션』의 중심으로서 점잖은 여염집여인네들이 유일하게 저녁에 찾는 곳이 되었다,
대개가 고부간, 모녀간이 나들이 옷차림으로 성장(盛裝)을 하여 곧잘 단골집을 찾았다, 당시 상세(商勢)를 자랑하던 점포들이 종로네거리에서 6가까지 길 양쪽에 줄서 있는데 대충 들어보면 관화문에서 종로네거리 거의 다 와서 오른쪽 양옥집이 김희준(金熙俊)상점으로 큰 도매상이다, 바로 옆에 구정(九鼎)상회 비각 뒤에 보신포목점(普信布木店), 그리고 3가 까지 양편에 백(白)상회 최두호상회 4가에 와서 박승직(朴承稷)상점 (우리나라 화장품의 효시(嚆矢)인) 박가분(朴家粉도 팔아 유명했다 보성(普晟)상회 원창(元昌)상회 인창(仁昌)상회 등이 있었다 각기 특색 있는 장식(디자인)으로 꾸며 고객을 유치했다
이들 포목점은 낮보다 밤에 손님이 많았고 거래가 주로 이루어졌다, 그때그때의 유행옷감 말고도 혼수감, 회갑, 돌, 생신 등 잔치옷감, 산모(産母), 갓 난 아이 옷 그리고 수의(壽衣)등 모든 수요에 따른 것들이 구색 갖추어 있었다, 공단, 율똥, 뻴배또, 조에서또, 지리멘 아사, 황나, 배, 모시, 인조견, 옥양목, 광목...등이다, 그 중에서도 윤(閏)달 드는 해에는 수의(주로 안동포 세사)옷을 준비하여 함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는 노부모가 기거(寄居)하시는 방의 의거리장 같은 가구(家具)에다, 정중(鄭重)히 모셔 놓았다,
본인들은 조금도 서운스럽거나 언잖게 여기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자식의 효심과 정성을 대견하게 생각하였다, 깊은 밤 혼자서 자기가 죽어서 입을 옷을 만지작거리며 흐믓하게 여기거나 낮에 친인척이 오면 내놓아 자랑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때 노인들은 지금과는 달리 죽음을 대천명(待天命)의 겸혀히 순종(順從)하는 자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뭐니뭔니 해도 서울의 밤은 술집보다도 극장가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버쩍 거렸다, 유일한 위락(慰樂)행각이었다, 극장 앞에는 음식점, 국화빵(우미간 앞이 제일 유명)가게 구멍가게가 즐비했다, 의례 극장 주변에는 힘께 나 쓰는 젊은이들이 질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운집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서민들을 괴롭히기는커녕 양민(조선 사람)을 보호하는데 주력을 했던 것 같다, 이웃 일인 낭인(浪人)들은 조선인 극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 어린이들에게 보인 그들은 오히려 형(兄)철럼 보여 든든하기까지 했다,
소님은 주로 저녁을 마치고 집안을 대충 치고 나온 가정주부, 아낙네 어린이들이 많았다, 그때 있엇던 극장(劇場)을 몇몇 들어보면 서대문을 지나서 동양극장(東洋劇場)(4 19도서관 건너편 연극을 주로 공연)을 필두로 단성사(團成社)(종로3가) 조선(朝鮮)극장,(천도교 옆), 제일(第一)극장(졸로5가) 광무(光武)극장(왕십리) 신부좌(新富座)(신당동)... 일인들이 경영(經營)하던 우미관(優美館), 약초(若草)극장(현 스카라), 명치좌(明治座)(명동입구) 황금좌(黃金座)(현 국도극장) 희락관(喜樂館)(충무로 입구)...등 그밖에 많이 있었다,
이런 중에도 서울의 깊은 밤 곳곳 으슥한 한옥 뒷방 등에서는 은밀하게 검은 그림자가 오가고 그 안에서는 이 땅, 이 겨레 그리고 국권을 다시 찾으려는 결사적 광복운동이 도모되고, 연락되고 자금이 모여 중국 등으로 보내지는 등 이 땅 역사를 이어가는 결연한 활동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늘 밤마다 뜨는 달도 조선 사람에게는 쳐다볼 여유와 낭만보다는 차라리 설음이었으리라, 밤이 가면 어김없이 밝은 새아침이 오듯이 언제 가는 오고야말 서울의 진정한 새 역사의 아침을 수많은 날 오고가던 밤이 준비하고 있으리라,
⑤ 일제(日製)의 종말(終末)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眞珠灣)을 기습(奇襲)하고 선전포고(宣戰布告) 하므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2월 일본은 신가포르를 점령, 3월에는 자바를 상륙하여 승전기념(勝戰記念)으로 각 초등학생에게 남학생에게는 테니스공 여학생에게는 좀 큰 공 을 주고 기뻐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전세(戰勢)는 점점 악화(惡化)되고 물자가 모자라 배급제가 실시(實施)하였다,
각 가정에 쌀 배급표가 있어 식구(食口)대로 하루에 2홉을 배금하였으며 그 것도 모자라 콩 깨묵을 주면 물에 몇일을 담구었다가 먹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채소표(菜蔬票)까지도 있어 파 한 뿔이라도 배급이며, 담배도 규정량이외에는 팔지를 않아 담배 한 갑을 살려고 새벽 4시부터 이부자리를 갖고나가 가개 앞에서 줄을 서면 아침 8시경 한갑자리 표를 규정된 수량만을 나누워 주니 아침 일찍부터 나가도 밭지를 못한 사람이 있었다,
전세가 점점 불리하게 되자 제대한 일인들은 다시 현역군인으로 조선 청년은 군인으로 징집(徵集)되고 초등학생까지도 특공대(가미가재)을 지원모집을 하였으며 또는 징용(徵用)으로 끄려가고 처녀들은 군수고장 정신대(위안부)로 대리고 가무러 딸 가진 집에서는 16세만 되어도 결혼을 하려고 하니 신랑이 없어 불구자(不具者)에게로 많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직장과 공장에서는 사람이 부족하여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을 모집(募集)하는데도 많았다,
1944년경에는 군수물자가 모자라 쇠붙치는 모두 공출(供出)로 가정(家庭)에 놋그릇 놋수저까지 공출하고 각 학교에 쇠로된 동상(銅像)은 모두 철거하여 군수물자(軍需物資)로 사용하고, 초등학생들에게까지도 지시하여 피마주씨, 송(松)진까지도 공출을 밭고 초등학생들도 동원하여 돌산에 가서 비행장에 사용할 돌을 깨면 간난아이 주먹만 한 찐빵 2개씩을 주었으며 초등학생에게 하루 2작씩 계산(計算)하여 한 달에 6홉 자리표를 주면 배급소에 가서 사기도하였다, 신발이면 양복을 학교에서 배급을 주는데 하늘에 별 따기였다,
전세는 점점 악화되어 국민들은 모두 전투테세(戰鬪態勢)로 방공훈련(防空訓練)을 실시하는데 남자는 군복(軍服)같은 옷을 입고 갑반(게이도루)을 치고 모자는 전투모(센토보시)를 쓰고 여자는 몸배 바지를 입고 조바위 같은 모자(스킨 모자)를 쓰고, 여자는 줄을 서서 물통을 연결하고 남자는 불 털개로 불을 끄는 혼련을 하였으며 각 동네 각 직장에서는 방공호(防空壕)를 파고 가정집에서도 마루 밑이나 동네 뒤 산에다 방공호를 파고 야간에는 등화관제(燈火管制)를 실시하였는데 이상한 것은 B-29 비행기 2대가 매주 수요일 12시경이면 남쪽 하늘에서부터 서울 하늘에 나타나면 공습경보(空襲警報)가 울리면 모두 방공호로 피신(避身)하였다,
비행기는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뿌무면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고사포(高射砲)를 쏘는데 중간에 올라가 터지고 비행기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어는 날 그 것도 정확하게 수요일 낮 12시경 을지로 4가와 종로4가(그 당시 종로경찰서 옆 전매청 담배창고)에 하얀색의 트럼통 같은 것이 두개가 떨어져 전매청 큰 창고 위가 크게 파손(破損)되었고 그 근처에는 일본헌병이 통행을 금지하고 탄약조사반(彈藥調査班)이 나와 조사하는 동한 한때 긴장하였는데 얼마 후 헌병이 와서 소 마차 뒤 바뀌를 뒤로 물리면서 실고 가는 것 보았다 트럼통은 비행기에서 사용하는 빈 트럼통으로 밝혀졌다,
1945년경에는 공무원 봉급이 100원 정도인데 야미(夜米)쌀 (몰래 거래하는 쌀)은 1말에 30원이나 되니 살수가 없어 세탁비누 고무신을 배급을 타면 시골로 가지고가 식량과 바꾸어 쓰며 감시원(監視員)에게 적발되면 압수(押收)되고 심지어는 서울 뚬섬 참외밭에 가서 사먹기는 하여도 서울로 반출이 금지(禁止)되어 왕십리역에서는 형사들이 기동차 안에 와서 검색을 하고 참외나 야채가 적발되면 모두 압수 하니 서울에서는 살기조차 힘들었다, 그 때에 소개령(紹介令)이 내려지고 만주(滿洲)로 이민(移民)가면 2등 국민 대우에다가 1인당 쌀 5홉씩을 준다고 하여 일부는 만주로 또는 시골로 내려 가는이가 많아 서울인구가 한때는 50만정도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일부 서울시민들은 일본이 항복(降伏)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여기저기서 쑤근쑤근 거리다가 12시 정호 라디오방송에 일본천황이 항복을 하였으니 해외(海外)에 나가있는 동포들은 돌아오라는 일본천황의 방송이 나가자 서울시민들은 조선이 행방이 되었다고 태극기(太極旗)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고 종로거리를 지나는 전차(電車)에는 손님이 만원인대도 사람들이 문에 매달리면서 만세를 부르고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만세하며 인사를 하였다, 이로서 일제통치 36년의 막을 내렸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에서 홍순원씀 서울토박이 회보에서 일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