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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 불교사
6. 에도[江戶: 1603~1868] 시대 불교
일본 혼슈, 지금의 시즈오카현[静岡県]에는 이마가와[今川] 집안이 지배하는 스루가[駿河]와 도토미[遠江]라는 곳이 있었고, 근접한 오와리[尾張, 현재의 아이치현愛知県 서부] 지역은 오다[織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두 집안은 오랫동안 앙숙으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에이로쿠[永禄] 3년인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1519~1560]가 2만 5천(최대 4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가문의 오와리 지역을 침공한다. 당시 오다 가문의 수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동생인 노부유키와의 분쟁을 겪는 등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된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桶狭間]에 진을 친 이마가와군을 고작 2천기의 병사로 급습, 승리에 취해 정찰 방어를 느슨하게 푼 채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 자멸하고 만다. 파죽지세로 침공해 들어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당황한 와중에 타고 다니던 꽃가마마저 팽개치고 도망가다가 모리 신스케라는 인물에게 목을 베이고 말았다. 이 전투가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 3대 기습奇襲의 하나로 꼽히는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이마가와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생활하고 있던 중 전투에서 최선봉에 섰던 18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2~1616]는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오카자키성[岡崎城]을 근거지로 독립하게 되었다.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는 그로부터 8년 뒤인 1568년, 무로마치 막부의 제15대이자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善昭, 재위 1568~1573]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잡는다. 쇼군 요시아키는 불만을 품은 다이묘들을 포섭하여 자신을 꼭두각시 삼아 전횡을 일삼는 노부나가에게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573년 추방당한다. 이견이 있지만 이로써 100년 넘게 이어지던 난세亂世의 시기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는 막을 내리고, 이후는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로 이어지는 권력 다툼의 시대, 일본 열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암투暗鬪의 시대로 들어간다.
한편, 쇼군 요시아키는 비록 교토에서는 추방되었지만 아직 조정으로부터 쇼군 해임령을 받지 않았으므로 유력 다이묘들과 소통하며 또 다시 쿄토 복귀를 꾀하게 된다. 1576년에는 원래의 거주지인 긴키[近畿, 관서 지방]를 떠나 모리 씨 영향력 하에 있던 빈고국[備後国]의 도모[鞆, 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이른바 ‘도모 막부’를 열기도 하였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여러 지방을 떠돌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인 1587년 10월 쿄토로 돌아오지만, 1588년 정월 쇼군 직을 반납하고 히데요시로부터 야마시로[현재의 교토[京都府] 남부] 근처에 1만 석의 영지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보호아래 다이묘 대우를 받고 지내다가 오사카에서 사망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영원히 막을 내린다.
1)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고마키[小牧]성을, 1567년 미노[美濃]를 얻은 뒤에는 기후[岐阜] 성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나간다. 1576년에는 오오미[近江, 시가현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 거대한 성 아즈치[安土]를 3년 만에 축조하고 천하통일의 길로 나서는데, 1582년에는 수도인 교토 인근 키나이[機内] 지방을 거의 장악하였고, 그해 3월에는 숙적이었던 다케다[武田] 가문마저 멸망시킨다. 대부분의 지방을 평정하였지만, 가장 강력한 적인 주고쿠[中国] 지방의 모리[森利] 가문이 남아있었다.
모리를 공격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원병을 요청하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에게 히데요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5월 29일 본인도 히데요시를 구원하기 위해 10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아즈치성을 출발 교토 혼노지[本能寺]로 향한다. 6월 1일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도착해 있었고, 6월 2일 새벽, 미츠히데가 이끄는 1만 3천여 명의 병력도 혼노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미츠히데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敵は本能寺にあり!].”
아케치 미츠히데가 이끄는 병력이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했고, 노부나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 몰려드는 적들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적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전투에서 조총을 맞고 심한 부상을 입자 싸움을 포기하고 모리 란마루에게 불을 지르게 한 뒤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오다 가문의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도 미츠히데 군의 공격을 받고 묘카쿠지[妙覚寺] 인근 니조 신 어소[二条御所]로 이동 항전하다 패해 결국 자살하였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잘 알려진 이 모반謀反으로 원한 맺힌 노부나가를 제거한 미츠히데는 교토의 치안유지에 나서면서 유력 다이묘들에게 자신에게 가세할 것을 호소하였지만, 명분이 없었던 미츠히데는 불과 13일 만에 교토 남부 야마자키[山崎]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에게 패하고 도주한다. 미츠히데는 슈류지[勝龍寺] 성을 몰래 빠져나와 자신의 거성 사카모토[坂本] 성을 향해 도망치던 중 교토 동부 오구루스[小栗栖]에서 농민에게 잡혀 살해당한다.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상 인물, 무사 인기 No.1인 오다 노부나가와 특히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영상화되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는 「레전드 & 버터플라이 (レジェンド&バタフライ)」가 있다. 모두가 아는 노부나가와 누구도 몰랐던 아내 노히메와의 30년간의 비극적이고도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리고 사랑을 중심으로 혼노지에서의 몰락 등 노부나가의 일생을 팩션(faction), 즉 사실과 픽션이 섞어가며 색다른 시각으로 쫒아가고 있다.
2)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덴쇼 10년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빗추[備中, 현 오카야마현[岡山県]]의 다카마쓰성[高松城]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빗추 다카마쓰성 전투[備中高松城の戦い]). 모리 가문의 가신인 시미즈 무네하루[清水宗治]가 지키는 성은 주변이 습지라 공격이 용이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는 저지대에 위치한 다카마쓰 성 주위에 제방을 쌓아 성을 수몰시키는 전략을 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일본 전투사에서 3대 수공전(모두 다 히데요시의 작품이다) 중에 첫째로 꼽히는 다카마쓰성 수공[高松城水攻め]이다. (일본 전투사의 3대 수공은 전부 토요토미 히데요시군의 작품이다. 1. 빗츄 타카마츠 성 수공 備中 高松城の水攻め (텐쇼 10년 - 1582년 4월 ~ 6월 4일) 2. 기이 오오타 성 수공 紀伊 太田城の水攻め (텐쇼 13년 - 1585년 3월 24일 ~ 4월 22일) 3. 무사시 오시 성 수공 武蔵 忍城の水攻め (텐쇼 18년 - 1590년 6월 5일 ~ 7월 17일).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투가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자신을 지원하러 오고 있던 노부나가의 죽음을 접한다. 히데요시는 즉시 측근이자 모리 가문의 외교승이기도 한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을 내세워, 성주城主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정전 협정을 맺는다. 비바람을 뚫고 회군, 6일 누마성[沼城]을 거쳐 7일 자신의 거성인 히메지[姫路]성에 들어간다.
히데요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다음 날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기 위하여 긴키[近畿]로 향한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음력 6월 11일에는 고베[神戶]를 지나 아마가사키[尼崎], 오사카[大阪], 12일에는 교토 남부 야마자키[山崎]의 엔묘지 강[円明寺川, 현 고이즈미 강]가에 도착한다. 군사를 이끌고 열흘 동안 달린 대략 230km의 강행군을 주고쿠 대반전, 주고쿠 오가에시[中国の大返し]라고 부른다.
엔묘지 강을 사이에 두고 아케치 미츠히데 군과 대치하던 13일, 북상한 이케다 모토스케[池田元助]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군이 은밀히 강을 건너, 미츠히데 군의 좌익을 기습하는데, 이때부터 미츠히데 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히데요시는 미츠히데가 비운 쇼류지성[勝竜寺城]에 입성, 교통로 차단과 더불어 미츠히데 수색에 나선다. 14일에는 사카모토[坂本]성에서 농성중인 미츠히데의 사위 아케치 히데미츠[明智秀満](통칭 아케치 사마노스케)를 격파하였고, 아즈치[安土]를 평정하고 나가하마[長浜]를 탈환한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하고 기선을 제압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성이었던 오사카 북부 미노[箕面]의 기후[岐阜]성으로 들어간다. 이때는 노부나가의 삼남인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가 성을 회복한 뒤로 노부나가의 손자이자 노부타다의 아들인 세 살 난 산보시[三法師,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가 기후 성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산보시를 보고 1582년 음력 6월 25일 노부나가가 기후 입성 이전의 근거지로 삼았던 기요스[清須, 清洲] 성으로 들어간다. 오다 군을 이끄는 중요한 두 명의 무장 중 하나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는 이미 삼남 노부타카와 함께 와 있었고, 다음날 그중 첫째로 뽑히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성으로 들어왔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하시바[羽柴]는 이들 두 맹장의 성에서 따왔다고 하니 이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짐작이 간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의견으로 27일 오전 열한 시, 드디어 오다 집안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기 위한 대회의, 기요스 회의[清洲会議]가 열린다. 문제는 기요스 성 성주이자 노부나가의 차남인 노부카츠[織田信雄]와 삼남 노부타가[織田信孝]가 나이가 같은 배다른 형제 사이라는 것이다. 먼저 상석에 앉은 카츠이에는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싸운 삼남 노부타카를 상속자로 추천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이미 정해놓은 후계자를 왜 제멋대로 변경하느냐며 하면서, 후계자는 죽은 적장자 노부타다이고 노부타다에게는 이미 세 살 난 산보시라는 적자가 있다는 것이다.
기요스 회의에 참가한 4인 중에 하나인 이케다 쇼뉴[이케다 노부테루[池田信輝]]가 히데요시에게 동조, 두 형제 중 한 명을 주군으로 세운다면 혼란할 것이라고 하니 니와 나가히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바타 가츠이에는 세 살 난 어린 군주가 장식품으로 전락하지 않을 까 걱정하는데, 이에 니와 나가히데는 수호역으로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를 추천하면서 산보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네 중신이 교토에 제각기 대표자를 내보내 협의 하자는 의견을 낸다.
의견이 분분할 때 히데요시가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안고 등장한다. 모든 중신들은 산보시와 히데요시에게 엎드려 절할 수밖에 없었고, 히데요시는 산보시를 대신하여 새 영지를 분배하겠다고 하면서 품안에서 초안을 꺼내 영지 분배를 공표하고 기요스 회의는 그대로 끝이 났다.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타카가 형 노부타다가 남긴 영지 미노 국을 배정 받았고, 기후 성의 성주 및 노부타다의 적자였던 산보시의 후견이 된다. 이후 히데요시에게 대항해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할복자살하였고, 산보시 즉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역시 기후 성의 성주로 남는다. 히데노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거병에 호응해 서군에 가담했다가 기후 성 전투[岐阜城の戦い]에서 항복하는 신세가 되었고, 게이초 10년(1605년)에 사망하였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반란세력 척결에 앞장섰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권을 잡았고, 1583년 오사카[大阪] 성을 축성, 그곳을 거점으로 천하통일에 나선다. 1584년에는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화친하고, 일본 내의 군사력을 외부로 돌려 분쟁의 여지를 최대한 억제하려는 의도로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다. 두 차례에 걸친 조선침략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5살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 1593~1616]가 뒤를 잇는다. 3살 난 산보시를 세우고 정권을 잡았던 히데요시,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이다.
히데요리가 불가 5세였기 때문에, 5명의 다이로[大老]가 일본을 다스리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아슬아슬하던 섭정들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 마침내 1600년 기후켄[(岐阜県] 세키가하라[関が原]에서 도쿠가와[徳川] 세력과 반反 도쿠가와 세력이 동서로 나뉘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실제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전장이기도 하였다.
명분상 서군과 동군이 모두 히데요리를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음을 천명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정작 팔짱을 끼고 관망 자세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 편에 섰던 히데요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갈등 끝에 오사카 성을 공격당하고 히데요리는 2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戰鬪]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1603년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받아 에도[江戸]에 새로운 막부를 개설한다. 한때 자신의 손녀와 히대요리를 결혼시켜 두 가문을 통합하려 하기도 했지만, 1614년 이에야스는 범종에 새겨진 글자를 빌미로 오사카 성을 공격한다. 처음 오사카 성 함락에는 실패하고 휴전을 제의한다. 그리고는 성을 둘러싼 해자垓字를 메우게 하고는 무방비상태가 된 오사카 성을 다시 공격한다. 절망에 빠진 히데요리는 가족과 함께 자결한다.
3) 울지 않으면 울때 까지 기다려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2~1616]
암투暗鬪의 시대를 지나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 계급에 의한 새로운 일본의 지배 체제를 구상한다. 그것이 막부幕府와 다이묘의 영지인 번藩 간의 정치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막번체제幕藩體制의 도입이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요지要地는 막부의 직할로 두고, 나머지 250여개의 번을 다이묘들에게 배분해 지배하는 구조다. 막부는 직할령만 통치하고, 번에 대해서는 다이묘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쇼군과 다이묘 간의 봉건적 주종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들 다이묘들은 독자적으로 법률을 만들고, 조세를 걷고, 재판을 하는 등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다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킨코타이[參勤交代]를 실시하였다. 참근参勤이란 밖으로 나와 주군을 만난다는 뜻으로, 참근교대參勤交代란 다이묘들이 에도[江戸]와 자신의 영지를 1년 단위로 번갈아 오가며 주군을 만난다는 뜻이다. 다이묘의 처와 자녀들은 에도의 저택에서 볼모생활을 하여야 했다. 다이묘 혼자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가신 및 휘하 병력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므로 해서 그 과정에서 이동 및 체류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초고속! 참근교대 超高速!参勤交代>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비용 부담으로 다이묘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는 효과를 노렸으나, 한편으로는 각지의 다이묘와 가신 수천 명이 에도와 번을 1년마다 왕복해야 했으므로 도로와 역참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지방의 문물이 에도로 들어오고, 반대로 에도의 발달한 문물이 각 지방으로 퍼지는 문화의 순환 효과도 있었다.
거기다 에도[江戸],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그리고 각지의 조카마치[城下町, 다이묘[大名]의 거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상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음으로 해서 상업 또한 덩달아 발전하게 되었다. 상공업의 발달로 조닌[町人, 에도 시대에 도시에 거주하던 장인, 상인을 총칭한 말로 정町은 도시를 의미]의 수가 급격히 늘어 일종의 근세 부르주아 문화라고 할 수 있 조닌문화[町人文化]가 형성되었다.
에도 막부는 수많은 번藩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도 엄격히 규정하였으며, 크리스트교를 금지하고, 외국, 특히 서구 제국과의 접촉 또한 철저히 규제하였다. 이런 기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봉건체제를 유지하면서 1867년 근대 일본이 탄생하기까지 약 250여 년 간 유지되었으며 일본의 에도시대江戸時代를 이끌었다.
4)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의 확립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통일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세력의 효율적 관리는 정권유지의 매우 중대한 요건으로 부각되었다. 정토진종의 잇코잇키[一向一揆]나 법화종 승려와 신도들이 주축이 된 홋케잇키[法華一揆] 등 막강한 불교세력의 힘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유력사원들이 거느린 승병들의 위세와 사찰세력이 농민들과 결속해 일으킨 농민봉기 등을 막아낼 근본적인 제도가 필요하였다.
막부초기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밑에서 외교 문서를 총괄했던 승려 스덴[以心崇傳, 1569~1633]과 이에야스의 자문역이었던 천태종 승려 덴카이[天海, 1536~1643] 등을 내세워 불교의 자유로운 포교, 사원건립, 출가득도 등을 통제하는 한편, 이들 불교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원법도寺院法度의 제정과 본말사本末寺제도의 행정체계를 추진하였다.
사찰이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승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가마쿠라 시대 이래 국가 통제를 벗어나 대중화大衆化, 서민화庶民化 된 불교를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환원시킨 것이다. 그 결과 그때까지 봉건 영주화되어 강력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던 사원들은 무력을 잃고 순응하게 되었고 차츰 국가체제에 예속隸屬되어 갔다.
본말사제도는 본사와 말사간의 관계를 상하로 고정화시킨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 그 시작은 무로마치시대 임제종이 오산(五山)·십찰(十刹)·제산(諸山) 제도를 도입하면서 부터였다. 1386년 무로마치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는 임제종 승려 기도우슈신(義堂周信)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산십찰제도를 시행한다. 사찰의 종교·사회적 지위에 따라 교토와 가마쿠라에 각각 5개 사찰을 오산(五山), 그리고 그보다 낮은 지위의 사찰은 십찰(十刹), 또 그 아래는 제산(諸山), 임하(林下) 등으로 서열화하고, 사격에 따른 지원 및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교토의 난젠지(南禪寺)를 별격 사찰로서 오산의 위에 두고, 교토에 제1위 턴류지(天龍寺), 제2위 쇼코쿠지(相國寺), 제3위 켄닌지(建仁寺), 제4위 토후쿠지(東福寺), 제5위 만주지(万寿寺)를, 가마쿠라에는 제1위 건쵸지(建長寺), 제2위 엔카쿠지(圓覺寺), 제3위 주후쿠지(壽福寺), 제4위 조치지(浄智寺), 제5위 조묘지(浄妙寺)를 오산으로 정한다.
또한 교토와 칸토(關東)에 십찰(十刹)로서 10개의 사찰을, 전국 각지에 제산(諸山) 사찰을 지정한다. 그러나 1633년 만들어진 『오산십찰제산사령목록(五山十刹諸山寺領目錄)』에 따르면, 오산은 그대로이지만 십찰이 43개 사찰로, 제산이 189개 사찰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지방 확산을 계기로 사격이 높아진 지역의 사원들이 십찰과 제산으로 다시 지정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㉖통일시대의 도래와 불교계의 새로운 질서체제, 본말사제도.)
종파를 단위로 본사와 말사를 제정制定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고, 그 외에 공인된 종파 본산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들을 모두 폐쇄하였다. 더불어 학문을 권장하고 계율과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임을 강조하여, 승려들의 자율적 포교나 신행활동들을 통제하고 승병으로서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종학宗學을 발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사찰 주지住持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등 승려들은 국가에 종속從屬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초기와 같이 종교적 역동성은 줄어들었고, 사찰들은 국가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어 점차 관사화官寺化 되었다.
5) 단가제도檀家制度
16세기 후반 혼란한 전국시대가 끝이 나고 통일정권이 들어서자 막부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1587년 규슈 후쿠오카시[福岡市] 북쪽 하코자키[箱崎]의 그리스도교 신부를 추방하였고, 1612년과 1613년에는 그리스도교 금교禁敎 조치가 내려진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계속되고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지자 이를 견디지 못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난다.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島原]와 가톨릭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였던 아마쿠사[天草, 현 구마모토[熊本]현 카미아마쿠사시[上天草市]]에서 일어난 시마바라·아마쿠사 잇키[島原·天草の一揆]가 대표적이다.
1637년 10월 25일, 큐슈 북서부의 시마하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에서 일본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이 일어난다. 시마하라의 번주(藩主)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 1597-1638)와 아마쿠사의 성주 테라자와 타다타카(寺沢堅高: 1609-1647)의 무자비한 세금징수와 그리스도교 박해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원래 이 지역은 전국(戰國)시대부터 대명(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뿌리 깊게 정착해 있었던 곳이었다.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정책은 신자들이 많았던 시마하라나 아마쿠사와 같은 지역민들에게는 당연히 불만일 수밖에 없었고, 에도(江戸)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이들 지역에 부임한 번주들의 폭정에, 흉작으로 인한 기근 등이 더해지면서 민중봉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㉗ 기독교 전래에 나온 사찰과 신도관계, 단가(檀家)제도.)
시마바라의 난을 평정한 에도 막부는 기독교의 전파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 사찰을 이용하는 정책을 도입한다. 사찰을 통해 개인의 종교 여부를 확인하고, 개인의 신상을 사찰에 등록하게 하는 종문개宗門改 제도가 그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불교로 개종하여야 했고, 사원에 신자로 등록하였다는 증거로 사찰에서 발행하는 증명서 테라우케[寺請, 사찰소속신도증명]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는 이후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점차 일반국민에게도 확대되어, 혼인, 여행, 이사 등에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하는 증명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전국에 걸쳐 매년 각 호, 각 사람별로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에 기재하여 불교 종파의 귀의자인 것을 증명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서 국민은 누구나 어느 사찰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찰은 그것을 관리하여야 하는 말단 관리의 역할을 하게 되어, 특정사찰이 신도집안의 장례나 제사 등을 독점하게 되었고 신자들은 그 대가로 일정액을 보시하여야 했다. 이것이 불교 신자는 보시를 통해 사찰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사찰은 그 집안의 장례나 종교의례를 담당하게 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이다. 신도집안은 대대로 사찰의 단가檀家가 되었고,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승려에게나 절에 물건 따위를 공양하는 절이라 하여 단나사檀那寺라 하였다.
단가제도는 크리스천 근절 후에도 국민 통제 수단으로 존속하게 되었고, 이 제도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조상 제사와 장례 등 장례불교가 체제화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는 죽음과 사후의 문제를 불교가 전담하게 되었고, 기독교적 내세관에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영생永生이나 천국天國과 같은 기독교적 사고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부연하자면 본말사제도가 사찰과 사찰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제도라면, 단가제도는 사찰과 신도와의 관계를 규정짓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에도 정부는 한편에서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기도 했지만 당시 주자학의 종교성은 불교만 못했기에, 민중은 대체로 불교와 신도에게서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켰고, 불교는 정부 정책에 적절히 이용되었다. 당시의 불교 중심 정책으로 인해 사찰이 신자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은 장례나 제사로 사찰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일본 불교는 급기야 ‘장례불교’(일본어로는 葬式佛敎)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장례불교는 일본 불교의 특징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중략)
일본인의 사생관 내지 장례문화와 관련해 불교를 빼놓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려는 장례식 덕에 먹고 사는 존재라는 볼멘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은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결국 사찰에 맡기고 산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불교는 가장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찬수, 일본 교성학림 객원강사, 종교문화연구원장,「일본의 장례문화와 불교」금강신문 2008.06.05.)
불교는 단가제도로 인하여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으나, 한편 체제 순응적으로 바뀌게 되어 승려의 관료화와 이에 따른 안일과 타락에 빠지게 되어 종교적 창의성과 역동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추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국교로서 보호했기 때문에 각 종파의 교단조직이 재정비되고 교학도 다듬어지는 계기도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