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상)/소개문 김현욱
* 소개 글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종래의 통사 개념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반역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반란과 반역, 혁명과 항쟁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이 책에서는 귀족이나 호족 계층과 '민'의 뜻이 구체적으로 서로 결합되는 시기인 신라 말기에 일어난 반란부터 다루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여러 반란과 항쟁 사건들을 상호 연관성을 고려하여 한국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에 대해 '반역자'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각 시대를 살다 사라진 반역자, 혁명가는 왜 반란과 민란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극명한 사건을 유발시킨 당대의 모순은 과연 무엇일까.
* 저자 소개 - 저자 김현묵은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 계간 [희곡문학] 제정 희곡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극작가다. - 주요 작품으로는 [광인일기], [어둠의 집], [자살] 등이 있다. - [반역의 한국사]는 역사의 진실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그의 역작이다. - 이밖에도 한국 현대 정치현실의 아이러니를 다룬 저서 [거짓말보고서]가 있다.
* 목차
1.신라 말기의 반란 : 궁예의 반란 등 호족들의 신 국가 건설 투쟁
신라 말의 정치 동향 : 고려 건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김헌창의 반란 : 지방 호족들의 봉기 장보고의 반란 : 해상 무역의 중심지, 청해진 궁예의 반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통치자
2.묘청의 반란 : 총체적 난국을 주도하기 위한 대전
묘청난 이전의 고려 이자겸의 반란 : 개경 왕궁을 초토화시키다 인종의 서경(평양)천도론 북진정책 대 사대정책 서경 천도론은 북진정책의 산물이었다
3.정중부의 반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의 군사 쿠데타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까지 : 타락의 극치를 이룬 문벌귀족 반란의 배경 : 정치의 부재와 사회 모순의 극대화 반기를 든 정중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이 주역이었다
4.무신정권시대의 민란 : 군사정권 타도와 신분 해방을 위하여
반란의 원인과 배경 : 민중의 고양된 사회의식 고려 민란의 시대 : 전체 개요 민란의 발생과 특성 : 주요 민란을 중심으로 - 조위총의 반란(1174년) : 민란 발생의 도화선 - 명학소민의 반란(1176년) : 신분해방에서 정부타도로 - 김사미, 효심의 반란(1193년) :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한 반란 - 만적의 반란(1198년) : 최초로 일어난 순수 천민반란
5.삼별초의 항쟁 : 몽고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최씨 정권의 성립과 몽고의 침입 강경책과 화친책의 갈등 원종의 사대정책과 삼별초의 항쟁 : 김방경과 배중손 삼별초의 최후 : 몽고에 대항하여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6.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천자의 죄를 얻을까 두려워 말머리를 돌린다
명나라 성립과 원나라의 몰락 이성계의 등장, 그의 혁혁한 전공 '위화도 회군' 직전의 국내외 정세 역사의 분기점, 위화도 회군 사불가론, 정당한 주장인가 쿠데타의 구실인가
7.수양대군의 쿠데타 : 조선중기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계유정난(1453년) 이징옥의 반란 사전 모의로 끝난 수양대군 암살 미수사건 : 사육신의 항거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실패 사건
8.이시애의 반란 : 세조의 집권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다
한 가지 의문점 : 토호들과 농민들의 연합 투쟁 이시애의 반란은 왜 일어났는가 반란의 전개 과정 : 북청전투와 만령전투
9.중종반정 : 훈구파의 집권과 사림파의 재등장
남이 장군의 죽음 : 구세력과 신세력의 충돌 김종직의 조의제문 : 무오사화 유흥비 마련 과정에서 일어나다 : 갑자사화 폭군 폐위를 위하여 : 중종반정(1506년) 중종반정의 의미와 {연산군일기} 반정 이후, 조광조의 등장과 몰락 : 기묘사화 전후 상황
10.임꺽정의 반란 : 부패한 봉건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농민 반란
누군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 봉기의 집약체, 임꺽정의 반란 임꺽정의 반란 이후 정세
11.정여립의 불발 혁명 : 군주체제를 부정한 반체제 지식인
동서 분당 : 붕당정치의 시작 사전에 발각된 혁명(기축옥사) 역사적 의의
12.광해군과 인조반정 :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17세기 초 사회 변화와 정치 동향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권에 대한 도전 : 왕권 약화에 따른 붕당의 득세 계축옥사와 인목대비 폐모 사건 : 인조반정의 원인 인조반정 : 서인 일파의 집권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는가 : 대동법 실시와 자주외교 정책 @ff 1.신라 말기의 반란 : 궁예의 반란 등 호족들의 신국가 건설 투쟁
신라 말의 정치 동향 : 고려 건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내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애꾸눈의 폭군. 이 말은 '궁예'라는 역사적 인물을 대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이다. 이합집산의 혼란한 후삼국 시대에 여러 호족들을 평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궁예는 어쩌면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폭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관한 평가를 단순히 이런 말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즉 당대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토대, 그리고 민중들의 의식 수준과 사회 사상(또는 종교 사상)이 어떠한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만일 궁예가 일반적인 선입견대로 단순한 폭군으로만 살았다면 그가 어떻게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궁예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한 가지 잣대만을 사용한다면 온당한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궁예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 말기의 정치 현상부터 진단해보아야 한다.(여기서는 '통일신라'라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뒤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필자는 신라가 3국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 말 호족 세력인 김헌창과 동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등을 먼저 살펴본다면 궁예의 반란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 더 구조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난 고대국가는 원래 여러 호족 세력들의 연합체였다. 그 연합체가 왕을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 사회를 이루면서 대토지 소유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계급 분화 현상은 신라 말기에 와서 극대화되었다.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인 9세기의 신라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뒤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집안 역시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권세가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자연경제의 핵인 토지를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중소 토지소유자와 소농민들의 토지를 싼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자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따라서 호족들이 사병을 키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른바 대농장이 형성되어 대부분의 농민(또한 당시 인구의 거의가 농민이었다.)들이 소작농이나 심할 경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자연히 생계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걸식 생활을 하거나 유랑인들 끼리 모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의 집중으로 정전제가 무너진 가운데 과다한 조세와 공납, 부역 등으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이러한 토지 집중화 현상은 약화된 신라 왕권 내의 정치적 암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8세기를 전후로 신라 왕실에서는 서로 다른 핏줄을 타고난 왕자를 중심으로 호족들간에 권력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즉 최고 권력인 왕위 계승 싸움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8세기 중엽 이후인 혜공왕 때에는 '대공의 난'을 발단으로 하여 96각간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 다툼도 치열해졌으나 선덕왕이 즉위함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흔히 선덕왕 때부터를 신라 하대라고 부른다. 선덕왕은 중앙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신라 하대의 정권은 귀족간의 연립 정부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불씨가 되어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정권 쟁탈전에 휘말리게 된다. 통계적으로만 봐도 하대 150년 동안 스무 번이 넘게 왕이 교체되었고,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암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9세기에 들어 왕위 쟁탈전은 더욱 심화되어 싸움의 규모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김헌창의 반란(822년)이다.
김헌창의 반란 : 지방 호족들의 봉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은 자기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고 하고 건원하여 경운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광주), 완산(전주), 사벌(상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중략) 김헌창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김헌창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 싸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 사이의 왕권 다툼이라는 평가가 내려져 있는 이 반란은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의 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신라 말기에 있었던 여러 반란 사건 가운데 당시의 정치 동향을 해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일개 귀족이 국가를 세울 정도로 신라 말기의 정치 분화 현상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김헌창의 반란 후 견훤의 후백제, 궁에의 후고구려 건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어 측근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려 하였지만 김경신(후에 원성왕이 됨)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는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김헌창은 반대 계파가 왕위에 있을 때에도 중앙 관직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당시의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세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원성왕 계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주변으로 밀려난 김헌창은 자기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김경신의 정변으로 부당하게 왕권을 빼앗겼다고 본 김헌창은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가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지역에 이미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할 점은 이 지역이 옛 백제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신라 정부는 옛 백제 땅에 살고 있는 호족들의 불만을 무마할 만한 정통성이나 견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헌창은 잘 훈련된 중앙 군대를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왕위 쟁탈전에 초점을 두었던 반란이었기에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그를 위해 적극적인 싸움에 나설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했던 것이다. 이것이 뒤에 일어난 견훤이나 궁예의 난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위한 정치적 구호마저 역사 자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 호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더욱 불만을 갖게 되어 신라는 구심점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반란 사건을 볼 때 신라 말의 왕실은 민중들의 삶은 도외시한 채 계열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자체도 큰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니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라 정부의 정통성부터 의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지방 세력 가운데 중앙 왕권을 대신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나올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장보고의 반란 : 해상 무역의 중심지, 청해진
장보고는 사실상 신라 중앙정부를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국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그의 일생과 당시 정치 상황을 연관시켜 검토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사망 연도는 846년(문성왕 8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호족이며 대상인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부패한 왕실의 무능력함에 혐오감을 느낀 민중들은 장보고의 민족적이고 대국적인 활동에 동조하여 스스로 민병이 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서 그 뜻은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적 출신 성분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자료를 검토해볼 때 일반 평민 출신이거나 또는 천민일 수도 있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 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고 왕의 승인을 받아 청해진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봐서는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모두가 추정일 뿐이다. 어쨌든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활동할 때 만난 대성 장씨를 따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어려서부터 무예에 재능을 나타내었고 바닷가에서 태어난 탓에 물에 매우 익숙하였던 것 같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풍운의 뜻을 품고 잠수에 명수라고 알려져 있는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장보고는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며 생활하다가 서주에 있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무술 장교가 되었다. 당과 신라는 교류가 잦아 신라인이 당나라 군사가 되는 일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군 생활에 복무하면서 여러 가지를 눈 여겨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당나라 군대의 특성과 조직 체제 등을 관심 있게 관찰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지에 절도사가 할거 하고 있었기에 지방에 따라 군대의 특성이 조금씩 달랐다.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 군벌의 속성과 군대 양성 방법 등의 이론적인 것이나 갖가지 병법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을 통하여 몸에 익히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 등주에 이르는 지역에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라방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8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신라와 당 사이의 국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보고도 쉽게 당나라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도심에 거주하는 신라인들도 생겨나 자치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구역을 신라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구역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권리나 생활을 밑받침해주는 정치적 구실도 하였다. 신라방의 구성을 보면, 총책임자를 총관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전지관이라는 직책이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어에 능통하여 신라인과 당인간의 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에 시골에 자리잡은 경우에는 촌락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기관인 구당신라소를 세워 일정 지역 내에 있는 신라인들을 다스렸다. 그렇다고 당나라 지방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신라인들의 자치 지역은 보통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꾸려나갔다. 특히 도심에 설치된 신라방의 사람들은 상업, 운송업, 조선업, 무역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특별히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 소주, 명주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을 넓힘은 물론이고 중국과 신라, 일본 등 동아시아를 오가면서 국제 무역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해안 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 역시 번창하고 있는 해상 무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국외 신라인들의 활동은 활발한 반면 당나라는 물론이고 신라도 중앙 집권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거의 매년마다 흉년과 기근 등 자연 재해에 시달려 유랑민들이 많아졌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적이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였다. 바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해적은 신라 해안에 자주 나타나 주민들을 마구 잡아가 중국의 중원지방에 노예로 팔았다. 무역선 역시 언제나 해적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장보고는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극심한 현실에 분노하였다. 장보고는 여러 조사 끝에 중국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국제 무역에 대한 지식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장보고는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고,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정치적 배경은 물론 신라 왕실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장보고는 마침내 828년(흥덕왕 3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와 동지나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장보고의 말을 듣고 실행할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진골귀족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선덕왕 이후 귀족연립 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앙정부로서는 완도까지 적극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뿐이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왕의 승인을 받아낸 장보고는 완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방민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당시 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은 6두품 이상이어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장보고가 어느 정도 왕실과 관련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보고의 민병대는 얼마 안 가 1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장보고는 이에 자신감을 갖고 완도에 '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을 지닌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사실 진을 설치한 것은 장보고가 처음은 아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의 진만 보아도 658년(태종무열왕 5년) 북진,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 등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은 앞서 세운 다른 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주체도 상이하였다. 그래서 청해진은 설치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 형성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신라의 군사력은 매우 미약해서 실제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국가의 군대라기보다는 왕의 사병과 같은 위치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이나 호족들은 저마다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중앙 군대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도 신라 관직체계에서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본격적으로 해적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때로는 회유를 통하여 해적 세력을 와해시켰다. 장보고는 이러한 눈부신 활동으로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장보고의 해적 소탕 이후 신라인들은 해적들의 피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평정하여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신라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 초기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귀족들이 여러 호사품을 찾게 된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신라 등지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이 오가는 중에 사무역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공도 무역의 하나로 편입될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에는 753년 외교 단절 이후 교역 물품이 희귀해져 반대급부 적으로 두 나라 간에 사무역이 더욱 성행하였다. 또한 발해가 북쪽에 안정된 국가를 세워 서해 북쪽 연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동해 북부 연안까지 자유스러운 해상 유통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점차 해상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일본과 거래할 때 신라 무역상들이 수출했던 물품 내용을 보면, 구리거울 등 금속제품과 모직물 등의 신라 産 물품은 물론이고 향료, 염료, 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개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특산품 등이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과 비단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통일기 전에는 주로 특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기 이후에 접어들어서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 등 고가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귀족들이 애용하였던 향료 등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상인의 중개무역으로 수입된 것이었으니 이를 통해 사무역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장보고 역시 해적을 평정한 뒤에는 직접 무역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다룬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 문방구류들을 취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을 통해 재력도 갖추게 되어 당시 신라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던 것은 이러한 물질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으로 자리 잡은 장보고는 840년(문성왕 2년)에 이르러서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이 거부 반응을 보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양국 간의 사무역은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에 대해서는 견당매물사라는 외교관의 책임 아래 교관선을 보내어 청해진이 교역의 중심지임을 홍보하는 한편 물품 내용 등 여러 무역 실무를 체계화시켜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라고 불렀던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를 통하여 장보고는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국제 무역을 관장한다는 것을 주변 국가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방관과 엔닌이라는 승려가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안정 보장을 요청했던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장보고의 해상 교통로가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점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세력을 안정시킨 장보고는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모든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었고, 연간 5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장전도 갖게 되었다.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하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은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청해진에 필요한 사람을 쓸 때에는 당시 관직의 절대 기준인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스스로 자기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또다른 배경에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던 농민 등을 받아들인 데에 있다. 자연 재해 등으로 민중들은 기본적인 터전마저 잃어버리고 사방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가령 예를 들자면,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유민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강 지역까지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할 정도였으며 이 무렵 일본에도 수백 명이 건너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대거 이동은 사회 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극히 약화되어 흉년 등 자연 재해가 닥쳐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황폐한 고향을 떠난 빈민들은 새 터전을 찾아 외국이나 바다로 무작정 떠났다. 따라서 빈민들의 눈에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적절한 피난처로 보였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렇게 찾아온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기 위해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조직화함으로써 그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이제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당시 가장 큰 지방 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 관여하게 되었다. 중앙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성덕왕 때부터이다. 선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앙의 왕위 쟁탈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보고도 이 싸움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때가 흥덕왕 代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도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년, 즉위 후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어느 날, 경주에서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왕족으로서 뒤에 신무왕이 된다.) 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청해진으로 피난해왔다. 왕족이청해진을 피난처로 삼을 정도로 이미 장보고는 중앙정부와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2년 뒤인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김우징은 날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였다. 장보고는 사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18년 동안 지켜온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가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다. 그러나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구국의 차원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다그쳤다. 김우징은 2년간 청해진에서 지내면서 장보고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가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자기의 정치적 야심에 이용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동안 정치에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던 장보고이지만 신라 왕실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청해진에서는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김우징이 제시한 '구국적 결단'이라는 명분에 걸려들고 말았다. 장보고는 김우징에게 자기 군대를 내주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청해진을 나와 경주를 공격하였다. 결국 김우징은 반란에 성공하여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다. 비록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경주를 치진 않았지만 사실상 장보고는 자기 군대를 동원시켜 반란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되었다. 정변 이후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높이 사 그를 감의군사로 임명하였다. 이 관직은 신라의 군사권을 총괄하는 고위직이었다. 청해진은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정년이 맡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중앙정부에서 정식으로 공직을 맡게 됨으로써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권력을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후원자인 신무왕은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문성왕은 장보고의 기세에 눌려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장보고는 직접 중앙정치에 관여하면서 신라 왕실의 정변이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사병들을 갖고 있는 주변 왕족들의 농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군대가 강해야만이 정권이 안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보고는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기 위해 진해장군의 자리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왕족과 귀족들은 장보고를 경계하고 그를 축출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래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일본 등과의 교역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장보고가 군사력을 장악함에 따라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주변 왕족과 귀족들의 정치적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장보고는 군사력만으로는 정변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딸을 문성왕의 두번째 왕비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왕족, 귀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만일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그만큼 약화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대 세력들은 다음과 같이 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부부의 길은 매우 큰 윤리입니다. 예전을 돌아보아도 왕비를 잘못 택하여 나라까지 망한 일이 허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왕비를 택할 수 있겠습니까? 궁복은 원래 섬 사람입니다. 이런 천한 신분의 딸이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장보고와 귀족 사이의 알력은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큰 정변이 일어날 것 같은 삼엄한 분위기가 정치권을 맴돌고 있었다. 반대 세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는 장보고와 정치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장보고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장보고를 직접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대 세력들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투항자로 위장하여 보내 장보고를 안심시킨 뒤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파란만장했던 장보고의 생애가 어처구니 없이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장복고가 죽은 후 청해진 세력은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다. 장보고가 암살된 뒤에도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의 주도하에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이 때에도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는 등 장보고가 이루어놓은 해상 무역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중앙연합군의 토벌 작전에 휘말려 청해진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가 846년 경의 일이었다. 잔존 세력이 다시 봉기할 것이 두려운 중앙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에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에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장보고가 꿈꾸었던 것은 동지나해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대국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연상선에서 그의 정치 개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장보고가 왜 외척이라는 정치적 전술까지 동원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논할 때 바다를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이순신 장군의 여러 대첩을 중요시 여길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국운을 바로세우려 했던 장보고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결국 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신라는 더욱 부패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장보고는 김우징의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무력 쿠데타에 동조한 결과가 되었으며 뒤에 왕권 안정을 위해 군사권을 장악하여 점진적인 정치 변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의 음모에 말려 장보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변혁은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해진으로 몰려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보면서 신라가 얼마나 ㅆ어 있는가를 직접 체험하였다. 그리고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경제적 수탈 행위도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정치 변혁 시도는 이러한 당대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장보고를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정치적 야심가이며 모반자로 묘사한 {삼국사기}의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비록 장보고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재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삼국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기도 하다.
궁예의 반란
이상에서 봤을 때 김헌창의 난이 왕실 찬탈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면 장보고는 당시 민중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부패한 중앙정부에 대항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대의 반란을 배경으로 후삼국 시대가 열린 것이며 궁예 역시 신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 가운데 등장한 호족이었던 것이다. 후고구려의 건국자인 궁예가 태어난 해는 불분명하다. 그의 성은 김씨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였다. 일설에는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헌안왕의 핏줄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그가 왕족 출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서자라는 차등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그의 운명은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말려 왕실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탄생 설화를 살펴보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에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내므로, 장차 국가에 막대한 해를 입힐 인물이라고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격렬한 정권 싸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그뒤 유모의 손에서 남의 눈을 피해 자라게 된 궁예는 후에 세달사라는 절에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까지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세달사라는 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세달사는 고려 중기에는 흥교사라고 개칭되었다. 정확한 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대화산이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쓸 정도로 삼국시대 이래로 불교는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고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세달사 역시 여러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낸 추방된 왕자 궁예는 후에 세력을 확장할 때 이 일대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자연스럽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호족들은 궁예가 한때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알고서는 쉽게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년)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도적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성인이 된 궁예는 891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가 뜻을 키우려 하였으나 기훤이 자신을 냉대하자, 이듬해인 892년에는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궁예의 출신 성분을 알고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의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에 이르렀다. 이때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고 여러 역사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궁예는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이 확정되자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군사적 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로 치자면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궁예는 양길의 도움을 발판으로 삼아 어느새 새로운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저족(인제), 생주(화천), 철원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인근 지역의 무리들 가운데는 스스로 항복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려는 호족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궁예는 기반 세력이 다져지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나갔다. 896년 경 임진강 연안을 공격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 임강(장단)과 지금의 개풍군 풍덕 주변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 등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과 몇년 동안에 파죽지세로 궁예가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지방 호족들의 자발적인 참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본 세달사가 위치한 영월에는 궁예의 외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탄생 설화가 말그대로 설화라면 그는 노비 출신의 유모의 품에서 자라났다기 보다는 몰락한 진골귀족인 그의 외가집에서 성장하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다. 외가는 왕권 계승 싸움이 계속되자 궁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는 열 살이 조금 넘은 궁예를 절에 출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을 중심으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계의 세력 근거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등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볼 때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중앙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여러 호족들이 김헌창의 반란 실패 이후 영월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것도 사료에 나타나 있다. 즉 궁예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동안 정부에 대해 쌓인 불만을 일시에 터뜨려 왕족 출신인 궁예를 지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명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주는 김주원이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좌천된 곳이기도 하다. 김주원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을 자기 세력으로 삼았고 궁예의 등장으로 이들은 반정부 투쟁을 벌일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주에서도 궁예는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갖게 되었다. 청주에서도 역시 명주나 영월 지방처럼 중앙에서 밀려난 호족들이 궁예를 중심으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반정부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부의 호응만으로는 후고구려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헌창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심을 빨리 알아차렸다. 토지의 독점으로 파탄에 빠진 일반 민중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궁예가 내세운 정치 이데올로기는 옛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는 당나라라는 외세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애초부터 신라는 백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당나라는 오래 전부터 넘본 고구려 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차지하고 대신 당나라에게 고구려의 대부분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오갔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전 후 신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당태종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공식적인 언약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단순히 백제와 고구려 일부를 흡수 통합한 것에 불과했다. 통합 당시 신라는 자국만의 힘이 아닌 외세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과오를 범함으로써 두고두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궁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옛고구려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내세웠을 때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통성을 상실한 국운을 다시 세우자고 민중들은 궁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단순히 궁예의 구호에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라 왕실에 대한 전면 부정이 극대화되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차원까지 나아갔던 것에 불과하다. 민중들이 궁예를 지지했던 이유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심화되어 이에 저항하기 위해 궁예를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호족과 농민 사이에 신라 왕실에 대한 불신이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899년(효공왕 3년)에 송악군 일대를 점령한 궁예는 왕건을 보내어 양주, 견주를 복속하고, 그 다음 해에도 광주, 춘주, 당성(화성군 남양 일대), 청주, 괴양(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901년에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는 실제로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쳐 올라가 정복하였으며 공공연하게 북쪽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하였다. 그 해 7월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게 되자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하여 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으로 고쳤다. 이즈음에 평양 성주 금용이 투항하여 옴으로써 평양 일대의 지역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해졌음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였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이때 왕건은 해로를 타고 내려가 금성(후에 나주라 불렀다.)을 정복하였는데, 이후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옛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견훤을 위협하기도 했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쳤다. 이 무렵 궁예는 폭군이 되었고, 그를 반대하고 왕건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현재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918년에 궁예의 폭정에 반대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일어나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가다가 부양(평강)에서 피살당함으써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궁예는 단순히 후고구려를 세운 뒤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폭군으로 변한 뒤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일까. 그러나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또한 정사를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폭군으로 변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나 계기,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궁예에 대한 평가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통치자
후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들의 대거 등장과 더불어 농민들의 항쟁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반란 등이 단순히 왕위 쟁탈전에 불과하여 민중들의 호응을 별로 받지 못했던 반면, 구조적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호족과 농민들은 신라 왕조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궁예는 891년에 양길의 휘하에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기까지 약 28년 동안 통치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통치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고려사> 등 종래의 사료들은 대체로 폭군적인 면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즉, 궁예는 원래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915년에 올바른 정치를 건의하는 부인 강씨와 그 소생의 두 아들을 죽여버린 일도 있다고 한다. 그 뒤 궁예는 자기 자리에 불안감을 가져 의심이 더욱 많아지고 성급해져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독심술을 터득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위협,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왕건 역시 궁예로부터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궁예와 왕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왕건 일파는 궁예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나주) 등지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고대나 중세 때 정변이 일어날 경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왕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도참 설화가 떠도는 것이다. 궁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을 잃은 궁예에 대해 그의 멸망을 예언하는 도참 설화가 각처에 만연하게 되었다. 철원에 사는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한 백발 노인을 통해 거울을 사서 걸어 놓았더니, 거울에 시구가 나타났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니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었다. 또한 궁예는 매우 미신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책을 쓰고 방포를 입고 다녔다. 궁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불러 마치 자기 가족은 모두 해탈한 부처처럼 자처했던 것이다. 밖에 행차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깃발과 향과 꽃 등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은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가히 교주의 모습을 상상케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불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지었다는 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어느 정도 세력 기반을 닦자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으로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그를 따르는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국토는 황폐해졌는데도 자신이 머무는 왕궁만은 매우 웅장하게 지었다. 또 법도나 제도는 지키지 않고 노역은 끊일 사이가 없어 점차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궁예에 대한 평가를 당시의 형편을 그대로 알려주는 자료로써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도적의 무리로 편성된 궁예의 지배 세력은 그 성격을 바꿀 시간도 없이 패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도적이 성행한 이유는 신라 왕실의 부당한 세금 징수와 호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의 무리는 농민군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다른 지방 호족과 같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도적의 무리로서 출발한 궁예의 세력 기반에는 분명한 한계성이 있다는 지적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잘못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초기 활동 당시부터 각 지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세달사나 영월을 중심으로 궁예는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출생 과정부터 이미 신라 정부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궁예는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901년 부석사에 갔을 때 신라왕의 초상화를 보고 이를 칼로 쳐서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반신라적 성향은 반정부적 무리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토지를 빼앗겨 유랑하다가 도적으로 몰락한 무리들이 궁예의 세력 밑으로 모여든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즉, 궁예를 중심으로 민중 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신라 고대사회가 해체되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반민중성에 대항한 궁예의 등장으로 민중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국가 통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 기록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국가를 운영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으므로 토지 겸병 등 토지제도나 수취제도를 개선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즉, 경륜 부족으로 그는 조금씩 포악한 왕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나라를 세운 뒤에도 연호와 국호를 자주 고쳤다고 하는 것은, 한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이러한 지적은 앞서 말한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궁예의 실정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점차 호족 세력을 결집해 내면서 뚜렷한 유교적 정치 이념과 선종 승려 및 6두품 지식인층까지 포섭하였던 왕건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해 주면서도 일면 현실 개혁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예에게는 통치 이념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고려사> 등 사료에 나타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가 포악한 왕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가 내세운 미륵불 사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미륵불 사상은 무엇인가. 대체로 관음보살을 중시하는 불교는 해탈 등 자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것이 극대화되면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륵불 사상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구하기 위해 미래불인 미륵이 이 땅에 온다는, 사회 개혁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따라서 최고권력자가 이러한 개혁 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록 궁예는 왕건처럼 견실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그가 왜 난폭한 짓을 자행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또한 왕건의 고려 건국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궁예가 완전한 폭군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감안할 때 궁예에 대한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궁예는 지나치게 종교를 강조하는 등 이상주의적 이념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지식인층을 확보하지 못했고, 또한 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일부 호족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궁예는 축출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원래부터 성격이 난폭하여 폭군이 되었다는 단순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궁예가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한 정책이나 자기를 지지하는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행정체제를 정비해나갔으며, 이러한 궁예의 뛰어난 통솔력에 끌린 호족들이 사방에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궁예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는 이상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구체적인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였으며,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그의 이념을 반대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과 대립하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대립 과정에서 궁예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폭정을 일삼았다고 이해한다면 그의 난폭한 행동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ff 2.묘청의 반란 : 총체적 난국을 주도하기 위한 대전
묘청난 이전의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여 명실공히 고려라는 국가를 세운 태조에게 제일 먼저 주어진 과제는 지방 호족들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였다. 자신도 역시 호족 출신이기에 그들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조는 각 지방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여러 호족들과 정략 결혼 관계를 맺어 중앙집권 강화를 모색하였다. 이와 더불어 호족들이나 개국 공신들을 중앙 관직에 임명하고 신라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한 정치 제도를 만들어 서서히 안정된 왕권을 세워나갔다. 그동안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을 위해서는 수취의 양을 대폭 삭감하여 모든 세율을 10분의 1에 맞추었으며 복지적인 성격을 지닌 흑창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는 호족들과 농민들의 쌓인 불만을 조금씩 해결해 나감과 동시에 기반이 무너진 왕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태조 이후 다시 왕권은 흔들리기 시작하여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위 찬탈을 위한 정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하고 있던 노비들을 양민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실시하여 인맥을 통한 관리 임용의 부조리를 없애는 한편 왕권에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민생의 안정과 지배 체제의 물적 토대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개간을 장려하는 등 광종은 태조에 이어 왕권 강화를 다져나갔다. 광종은 이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황제라 부르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고 개칭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왕궁 건설이나 잦은 불교 행사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광종 이후의 고려사에서 주목할 점은 과거제도 실시로 개국 공신들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새롭게 등장한 문신 세력들이 중앙 권력을 점차 차지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구 세력은 다음 왕인 경종 때도 갈등을 겪었지만, 성종 때에 이르러 3성6부제와 지방관 파견 등의 행정조직 개혁을 통하여 신진 세력이 고위 관리직을 차지하여 완전한 중앙집권 체제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조직에 임명된 관리들을 중심으로 대문벌 귀족들이 등장하게 되어 지배 세력 내에 파벌과 반목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대토지 소유 등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고 정치적 세력 확장을 위해 왕실과 외척 관계를 맺는 등 고려 중기가 지나면서 고려의 왕권은 약화되고 대신 문신들의 권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묘청의 반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 왕궁을 거의 불살라 버릴 정도로 극심했던 이자겸의 반란 배경과 경위를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이해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이자겸의 반란 : 개경 왕궁을 초토화시키다
태조가 왕권 강화의 방편으로 지방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이 오히려 외척들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척들이 가장 극성을 부린 때가 고려 중기였다. 왕실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권 장악을 해나가는 것이 중세 족벌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봤을 때 이자겸의 등장은 가장 전형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12세기에 들어서서 고려는 안팎으로 위기를 겪게 되었다. 밖으로는 금나라의 위협으로 북쪽 변방은 늘 전운이 감돌았고 안으로는 외척 등 문벌 귀족들의 극성으로 왕권은 극히 미약해져 구심점을 잃게 되어 구조적 모순이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문벌들은 외척을 중심으로 대토지 소유 등 경제적 기반을 강화해 나가는 등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여 국가의 기강 자체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인종 때 외척 권세가이던 이자겸은 왕권 약화를 기회로 삼아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가 1126년 2월이었다.(이자겸의 반란이 척준경을 비롯한 군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척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광종 이후 개국 공신들이 몰락해감에 따라 등장한 문벌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고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과거제도, 전시과, 녹봉제 등을 정비하였다. 그들은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선대가 다져놓은 문벌을 토대로 음서제도와 같은 특권을 통하여 가문의 지위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이들은 사전, 공음전 등의 특권적 경제 기반을 유지하면서 그밖에도 토지 개간이나 겸병 등의 방법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일반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이들이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국가 정책을 수립하고, 관료로서 행정을 운용하여 국왕을 보필하는 대신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문벌귀족간에 알력이 생기고 여기서 승리한 귀족은 왕에게 딸을 주어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의 권세와 부귀는 더욱 강대해지고 번성해갔던 것이다. 고려 중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외척 세력으로는 안산 김씨와 인주(인천) 이씨 등이 있다. 이들 문벌 귀족들은 고려 초기 태조가 남긴 선례대로 한 왕이 남매나 친족끼리 겹쳐서 혼인하던 관습을 이용하여 일족의 세력 확대를 해나갔다. 안산 김씨의 경우, 김은전의 세 딸이 전부 현종(1009-1031)의 비가 되어 4대에 걸친 4, 50년 동안 정권을 좌지우지하였다. 그 뒤에 등장한 귀족이 인주 이씨였다. 문종 때 이자연의 딸 셋이 모두 왕비가 되어 인주 이씨는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초기 이래 외척 중에서도 인주 이씨의 세력만큼 강대한 것은 없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큼 인주 이씨의 외척 세력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들은 문종에서 시작하여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 관계를 맺어 후비, 귀빈을 거의 독점적으로 들여보내다시피 하였다. 이에 따라 왕자, 왕녀도 대부분 인주 이씨의 외손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주 이씨 일족은 이자겸 때에 와서 절정기를 이루었다. 인주 이씨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허겸 때부터이다. 그의 딸은 안산 김씨 은부의 아내가 되었으며, 낳은 두 딸이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인주 이씨 집안은 귀족의 가문이 되었다. 후대로 내려와 이자연의 고모 안효국대부인의 손자들이 덕종, 정종, 문종이 되자 문벌귀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잇달아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왕비로 들어가게 된 배경도 이러한 선대의 외척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뒤 인종 때까지의 왕은 모두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의 혈통이었으며 숙종을 제외한 왕들의 비 또한 인주 이씨로 그 일문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1094년에 선종이 죽자 그의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어린 데다가 몸도 매우 약하여 모후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이자연의 손자 자의는 중추원사의 위치에 있었는데, 그의 누이 원신궁주와 선종 사이에서 태어난 한산후 균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계략을 꾸몄다. 당시 왕실에는 계림공 희(뒤의 숙종) 등 이른바 헌종의 오숙이 왕위를 넘겨다보고 있다는 것을 이자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의 추진을 위해 이자의는 많은 재화를 비축하고 사병을 양성하는 등 한산후를 추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중에는 공공연히 이를 알리고 다녔다. 이에 계림공은 먼저 선수를 쳐서 이자의 세력을 축출하여 미약해진 왕권을 다시 세워 헌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렇게 봤을 때 숙종은 인주 이씨의 세력을 제거할 뜻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숙종은 인주 이씨가 아닌 유씨 왕후를 맞이하는 등 인주 이씨의 외척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의 노력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105년 숙종의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자기 딸을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다시 인주 이씨와 왕실은 혼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자의와 종형제 사이인 이자겸의 딸과 숙종의 아들 예종이 혼인을 했다는 것은 왕실과 인주 이씨의 관계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정리하자면, 예종의 비 문경황후는 이자겸의 딸이며 인종의 모후인 셈이다. 이자겸은 그의 딸을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갑자기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자겸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고려사>에 나오는 [이자겸전]에 따르면, 그의 여동생이 순종의 비로 들어갔는데 순종이 죽은 후에 궁에 있는 관노와 간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자겸도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종이 즉위하여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삼자, 그의 지위는 갑자기 부상하였다. 그의 모친이나 아내 등에게 하루 세 차례나 칙봉이 내려져 집안 모두가 외척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1122년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자 그의 여러 아내들이 낳은 자손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알력이 생겼는데 이자겸은 여러 세력을 물리치고 자기 큰딸이 낳은 어린 외손자 해를 옹립하는 데 성공,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외손자가 바로 고려 17대 왕인 인종(1122-1146)이다. 이후 이자겸은 중서령 소성후 등 주요 관직을 겸직하여 점차 정권을 함부로 휘둘러 마침내 왕권을 좌우할 만큼 그 세력이 비대해갔다. 그의 친인척들이 중앙의 요직을 거의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그의 아들들은 앞을 다투어 개경 내에 화려한 저택을 지었고, 이자겸의 집에는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나 될 정도'로 뇌물이 끊이지 않는 등 외척에 의한 기강 문란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자겸은 무신 척준경과 손을 잡는 한편 후대에까지 자기 가문의 부귀를 보장하기 위하여 세째 딸과 네째 딸을 강제로 인종의 비로 출가시켜 왕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왕위를 넘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자겸은 주로 서울 인근 지방과 개성 주위의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일대의 사원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사찰 보수나 준공을 위해 일반 백성들을 강제로 징발하는가 하면 농민들을 착취하여 많은 원성을 샀다. 심지어 노복들을 풀어 다른 사람의 수레와 말을 빼앗기도 하였다. 나중에 이자겸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농민 등 일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정도로 그의 폭정은 타락의 끝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어린 왕을 세워놓고 실권을 쥔 이자겸은 자기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 이는 백방으로 중상하고 제거하는 한편, 그의 족속을 요직에 배치하고 벼슬을 팔아 세력을 확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폭정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뒤에 군사력을 쥐고 있던 척준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그가 추종하던 이자겸과 결별하기 직전까지도 판병부사의 위치에 있으면서 이자겸의 아들 판추밀원사 지미와 함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사돈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유대는 매우 긴밀하였다.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지원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자겸은 척준경을 믿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반대파를 대거 숙청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반대파의 저항도 더욱 거세어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고려에 와 있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증언을 들어보자. 인종이 즉위한 해인 1122년 12월 경에 왕의 작은 아버지인 대방공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안인, 문공인, 이영, 정극영, 임존 등 10여 명과 함께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려고 역모를 꾸몄다. 그런데 이것이 이자겸 등에게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살해되거나 유배당하게 되었다. 이에 여루된 자가 수백 명이 넘었다고 서긍은 말하고 있다. 대방공의 역모 사건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이자겸 등은 그들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서긍이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 일파의 주장을 듣고 그대로 적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봤을 때 대방공 등은 이자겸의 계략에 걸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자겸에게 당한 한안인, 이영, 문공인, 정극영 등은 대부분 향리들의 자제로서 중앙으로 진출한 신진 관료들이었다. 따라서 외척 세도가로 등장한 이자겸 일파와는 대립과 반목의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이자겸은 반대파의 근본 뿌리까지 제거할 작정으로 계속된 숙청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자겸은 나중에는 중국에까지 자기의 위치를 알리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송나라에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보내면서 왕의 위치와 동등하다는 뜻을 지닌 지군국사라고 자칭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명칭 문제는 인종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인종은 이자겸을 매우 혐오하게 되었다. 이자겸에 대한 분노는 궁중에 널리 퍼지게 되어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은 이자겸을 제거할 뜻을 세웠다. 1126년 2월 25일 이들은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겠다는 뜻을 인종에게 은밀히 보고하였다. 마침 이자겸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달해 있던 인종은 거사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찬을 평장사 이수, 전평장사 김인존과 만나게 하여 세부 계획을 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찬의 말을 들은 이수(그는 이자겸의 재종형이기도 하다.)와 김인존은 이자겸을 제거한다는 원칙에는 동조하지만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찬은 다시 왕을 찾아가 경과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즉시 실천에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인종은 김찬 등의 설득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인종의 허락을 받아낸 후 이자겸 제거를 위한 사전 모의를 최종 점검하고 마침내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지녹연 등은 최탁, 오탁 등 장군들을 포섭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쳐들어가 병부상서를 맡고 있던 척준신(척준경의 아우)과 그의 아들인 내시 척순 등을 죽인 다음 시체를 궁성 밖에 내던져버렸다. 척준경의 아우와 조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접한 이자겸 등은 격분하여 반대파 제거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 그는 내친 김에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정권을 둘러싸고 왕실과 외척, 귀족관료 사이에 대립과 항쟁이 격화되어 고려 귀족사회의 지배체제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자겸 축출에 동조한 인물들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하급 관료들이거나 무장들로서 평소 반문벌귀족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후에 일어나는 무신들의 반란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에도 무신들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있었던 것이다.(정중부의 반란 때 동조한 무신들은 대체로 하위직에 종사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하급 무신들은 왕권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이자겸은 자기 세력에 속한 관료, 무신들을 집으로 불러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때 척준경은 사태가 시급한 마당에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면서 혼자 수십 만의 군사를 이끌고 그날 밤으로 신봉문 밖으로 쳐들어가 왕의 친위 세력과 대치하였다. 척준경의 사기등등한 군대에 기가 질린 지녹연, 최탁 등은 함부로 궁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적의 동태만을 살펴보았다. 이튿날 새벽에 동생 척준신의 시체를 목격한 척준경은 사태의 심각성을 재삼 확인하고는 이자겸의 아들 지보 등과 함께 군기고에 들어가 갑옷과 병기로 재무장하고 승평문을 포위하였다. 평소 군사력을 쥐고 있던 척준경의 공격에 궁궐 안에 있던 친위 세력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만 활을 쏘며 대응할 뿐이었다. 사태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인종은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직접 신봉문에 나가 신하 이중과 호종단을 성 밖으로 내보내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미 흥분해 있던 척준경은 이중 등 왕의 신하들을 쫓아보내고 인종을 겨냥하여 화살을 퍼부어댔다. 이것은 왕위 찬탈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뜻은 이자겸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최학란과 소억을 보내 궁안에 있는 '반란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이자겸은 오히려 왕의 친위 세력을 반역자로 몰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간에 척준경은 동화문 행랑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에 인종은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 근신 임경청 등 10여 명과 함께 산호정으로 피신하였다. 왕이 몸을 숨기면서 친위 세력도 패색이 짙어갔다. 더이상 저항할 여지가 없다고 느낀 인종은 왕위를 내놓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막상 인종이 물러나겠다고 하자 이자겸은 다른 대신들의 반발이 더 거세질 것이 두려워 머뭇거렸다. 이때 이수 등이 인종을 설득하여 일단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한편 기선을 잡은 척준경은 부하들을 시켜 왕을 따르던 오탁을 잡아 죽이게 하고, 최탁, 권수, 고석, 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등도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로써 친위 쿠데타는 비참한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세력을 다시 잡은 이자겸 일파는 지녹연, 김찬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이자겸은 대표적인 친위 세력인 지녹연을 유배보내는 도중 살해하고 말았다. 이밖에 잡혀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이자겸 일파가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친위 세력을 제거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결국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하여 왕권을 지키려던 친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전쟁과 맞먹는 두 세력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궁궐은 거의 불에 타 소실되어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 등 세 정과 내제석원의 일부만이 겨우 잔존할 정도였다. 개경은 말그대로 초토화되어 인심이 흉흉해져갔다. 내전에서 승리한 이자겸은 이 해 3월에 자기 소유인 중흥택 서원에 인종을 연금해놓고 그 주위에는 자신의 일파를 옮겨 살게 하여 왕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인종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었고 식사까지도 간섭을 받는 등 완전히 무력한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이자겸과 척준경은 왕과 다름없는 세력을 거머쥐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들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실제로 왕위에 올라도 될 법하지만 당대의 시대적 제한과 중세사회의 특수한 사회 구조 때문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왕위를 차지할 경우에 파생될 여파를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식적 한계도 내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정권을 잡은 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인종은 내의군기소감 최사전과 비밀리 대책을 논의하였다. 두 사람은 사태 해결 방안에 대해 골몰하다가 이자겸과 척준경을 갈라놓은 뒤 척준경을 왕실 편으로 끌어들여 군사력을 되찾는다면 이자겸은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사실 이자겸이 세도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척준경의 강력한 군사력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사전은 두 사람 사이의 이간 공작에 나섰다. 그는 척준경의 성격이 단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척준경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이자겸은 언젠가 당신을 버릴 것이다, 그는 전혀 믿을 사람이 못된다고 설득하여 지금이라도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 부귀 권세를 누릴 수 있다고 회유하였다. 이와 동시에 인종은 척준경에게 몰래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최사전의 설득과 인종의 교서에 척준경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자겸과 척준경이 갈라서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이자겸의 아들인 지언이 거느리고 있던 한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척준경이 왕궁에 활을 쏘고 궁을 태운 죄를 비난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척준경에게 알려졌다. 이에 척준경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어쩌면 이 일은 최사전 등이 꾸며낸 일인지도 모른다.) 척준경이 격분하자 불안감을 느낀 이자겸은 아들을 척준경에게 보내어 사죄하고 화해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미 최사전과 인종의 말을 들은 뒤라 분노를 감추지 않고, 이럴 바에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는 등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추밀원사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어 이자겸이 나서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라고 하면서 거사를 재촉하도록 하였다. 곧이어 최사전은 다시 척준경을 찾아가 이자겸의 공격에 대비하여 먼저 거사를 모도하라고 회유하여 척준경은 마침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5월 1일 인종은 이자겸의 손에서 벗어나 연경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초조해진 이자겸은 마침내 왕위 찬탈을 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이자겸은 12세기 초부터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이라는 유언비어를 믿고 왕위마저 찬탈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묘청의 반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참사상이 당대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이렇게 이자겸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도참사상에 의존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준비 작업으로 연경궁 남쪽으로 가서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한 다음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훔쳐 집안에 감추어 두었다. 또한 이자겸은 실제로 떡에 독약을 넣어 인종을 독살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왕비가 이를 알려 수포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사전 준비를 마친 이자겸은 드디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의 동태는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다. 같은 달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숭덕부군(숭덕부는 이자겸이 세운 것이다.)이 무장을 하고 연경궁 북쪽에 와서 침문을 침범한다는 보고를 듣고 손수 밀지를 써서 척준경에게 거사를 재촉하였다. 이미 이자겸에게 등을 돌린 척준경은 김향 등 장교 7명과 심복 20여 명을 거느리고 급히 연경궁으로 향하였고, 순검도령 정유황은 100명을 이끌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장을 갖추고 궁으로 들어갔다. 사태가 급박하여 군대를 동원할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왕을 보호해야겠다고 판단한 척준경은 궁궐로 가 천복전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왕을 호위하고, 활을 쏘아대는 이자겸의 무리를 피해 군기감으로 왕을 피신시켰다. 왕은 군기감에서 방비를 철통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척준경은 승선 강후현을 시켜 기습 작전을 펼쳐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납치하여 팔관보에 가두어 놓은 다음 이자겸의 측근인 장군 강호와 고진수 등을 베고 그밖의 무리들도 체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자겸의 폭정 시대를 종결지었다. 사태 수습 후 인종은 광화문에 나아가 대역부도의 화가 궁궐 안에서 일어났으나 충신.의사의 의거로 그 해를 제거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다음날 이자겸은 처와 아들 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아버지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다른 아들들도 각기 유배되었다. 이밖에 이자겸의 측근들도 모두 유배 조치를 당하였다. 또한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도 폐위되고 대신 임원애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이와 반면 척준경과 이수, 김향, 최사전은 각기 공신 칭호와 높은 관작을 받았다. 이자겸은 그 해 12월 영광의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자겸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척준경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그 이듬해인 1127년 3월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다시 고향인 곡주로 이배되었다. 인종은 1144년 척준경의 공로를 참작하여 검교호부상서로 재임명하려 하였으나 오랜 유배지 생활에서 얻은 병인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자겸을 중심으로 기세 등등하게 권력을 휘두르던 인주 이씨의 외척 세력은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인종의 서경(평양)천도론
'이자겸의 반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건국한 지 200여 년 만에 왕실은 외척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에게 실질적인 왕권을 빼앗겨 나중에는 역성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왕권이 극도로 미약해졌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당대의 인종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이다. 이자겸의 반란이 평정된 후 다음 해에 인종은 서경을 돌아보면서 15조항의 유신정교를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회복하려는 인종의 의지가 내포된 조치였다. 또한 인종의 서경 방문은 개경의 궁궐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잿더미로 변해버린 지경에서 새로운 곳에 천도할 결심을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태조나 광종 등 오랜 시간 동안 국가의 수도로 거론되어 왔던 서경을 인종이 염두해 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인종은 천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당시 유행했던 풍수설은 인종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묘청의 반란은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인종이 천도를 꿈꾸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자겸의 반란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들은 변란이 진행되는 동안 하급 관료나 군장 세력과는 달리 왕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줄 만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토지와 많은 노비 등 풍부한 경제적 기반을 누리고 있던 이들은 타성에 젖어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유교 정치이념을 표방하여 평소 충의 윤리를 강조하던 귀족세력이 막상 사태가 급박해지자 소극적인 태도로 나왔을 때 인종은 심한 배신감에 시달렸다. 인종이 서경을 방문하여 서경 세력의 대표격인 묘청와 정지상 등과 가까워져 그들의 도움으로 척준경을 제거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정치적 변동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경천도론의 대두는 단순히 인종의 심리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기득권과 계급적 입장만을 지키려는 개경 세력의 부패와 부조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다가 서경 천도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풍수설에서 그 이론적인 근거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각되어, 당시로서는 이자겸의 몰락과 함께 서경은 새로운 매력을 지닌 수도 후보지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서경천도론은 왕실과 개경귀족 간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북진정책 대 사대정책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인종 때의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져서 수도 내의 분위기는 흉흉해졌으며 밖으로는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고려에 대하여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자겸의 반란이 있기 전 해인 1125년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요(거란족)를 멸망시킨 다음 고려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 해 5월에 고려 사신이 금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금은 고려의 국서 내용이 불경하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는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사전책이었다. 금나라는 점점 고려를 협박하여 속국의 위치를 지키라고 다그쳐왔고, 고려 정부에서는 이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때는 이자겸이 세력을 잡고 있었기에 일부 관료들이 금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자겸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금나라에 사대하자고 주장하였다. 물론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서는 금나라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지만 이보다 이자겸은 자기의 세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러한 굴욕적인 정책으로 결정지었다. 이러한 사대적인 정책은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도 개경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고 나선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묘청이었다. '묘청의 난'은 그 주동 인물의 신분이 승려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한국 역사상 승려의 신분으로 난을 일으킨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일개 승려가 어떻게 난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묘청 개인의 신상 파악부터 해볼 필요가 있다. 묘청은 언제 태어났는지 역사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망 연도가 1135년, 인종 13년이라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그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서경(평양) 사람이라고 하는데 속성이나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이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경위도 알 수 없다.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그는 도교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 방면에 박식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의 여러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풍수지리와 도참 사상도 익혀 이를 바탕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1128년(인종 6년)에 같은 서경 사람인 정지상과 백수한, 김안, 문공인 등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 정지상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가장 좋은 명당인 임원역(평남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을 짓게까지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도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군데에 벼락이 떨어지고, 인종의 서경 방문 도중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죽는 등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방문을 단념,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 계획도 그만두게 되었다. 당초에 묘청 일파의 정치적 목표는 이자겸의 난 직후에 불안해진 국내외 정세를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귀족 대신 서경 천도를 성공시켜 서경인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국정벌론 등 자주적 기백과 내정 혁신의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얕은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점점 중앙에서 묘청의 천도 계획을 배척하는 여론이 고조되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1135년 정월에 서경의 조광, 유참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은 물론 그밖에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이와 함께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고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라고 하였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임명, 그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고, 좌.우.중 3군을 거느리고 평산역, 관산역 등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반역자를 처단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내어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를 거쳐 안북대도호부(안주安州)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 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서경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는 묘청, 유담, 유호(유담의 아들)의 목을 베어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실제로 이들의 목을 베어 윤첨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 정부에서는 오히려 윤첨 등을 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하여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서경 반란군은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나 교섭 제의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조광은 인종이 보낸 김부, 내시 황문상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였다. 이로써 반란군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반란군은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강을 따라 성을 쌓았다. 이 성은 1,730칸이었으며 그 사이에 여섯 문을 만들어 놓았다.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에까지 진격,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조광이 저항을 다짐한 이래 1년 넘도록 완강하게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 안의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마침내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패배를 자인한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묘청이 시작한 반란은 조광 때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서경천도론은 북진정책의 산물이었다
이상이 정사를 참조하여 간단히 추린 묘청의 반란 내역이다. 일반적으로 묘청난이 갖고 있는 특징을 논할 때 1)왕권에 도전하지 않은 점 2)국호, 연호를 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3)그들 스스로 왕에게 거사 소식을 전달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일찍이 묘청난에 대해 정밀한 분석을 해놓은 사학자는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낭불 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하였다. 여기서는 신채호의 견해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 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그 반란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 구조의 균형도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었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로 개경 귀족세력이 독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따라서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일어난 무신정변위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묘청의 난이 황당무계한 풍수지리설에 근거로 한 광신에서 비롯된 듯한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그 이면을 파헤쳐 보면 이 반란이 엄청난 정치적, 사상적 대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묘청의 난은 우선 옛고구려 강역 수복운동(이하 수복운동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한다.)의 전통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그리고 신라 말기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어온 수복운동은 고려가 개국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려가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에만 활동 영역을 국한시킨 것 같지만 고려초 여러 왕들은 기회만 닿으면 옛강역을 되찾기에 부심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를 흔히 신라를 이은 후계자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것에 비유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단일 왕조를 이루었기에 그런 역사적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사이에는 건국 이념 차원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애초부터 한반도의 중북부 이남에 민족 활동 영역을 국한시킨 것은 둘째치고 민족적인 경륜이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 고구려 두 강국의 침공을 당해낼 수 없어서 자주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무왕대까지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두 강국을 패망시켰다. 이에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이 끊임없이 당나라에 대항하자 신라는 뒤늦게나마 이러한 항쟁을 이용하여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신라와 당이 애초부터 맺은 공약이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백제 땅과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 이상의 국토 확대라든가 평양 이북의 고구려 옛땅을 수복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도의 위치도 한반도의 중심지가 아닌 경주에 그대로 두어 강제 통합에 의한 민족적 갈등을 해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일 신라가 진정 민족적 화합을 원했다면 과감하게 옛백제의 땅에 천도한다든가 하는 가시적 조치를 취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경주에 연연했다는 것은 결국 신라는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백제나 고구려를 단지 점령지로만 이해하였다는 점과, 별다른 개혁 의지도 없이 통치 기반을 지키기에 급급했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니 자연히 신라 왕조의 정치적 이념은 대동강을 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실제로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역사 기록에서도 신라가 그러한 이념을 세우려고 노력했던 흔적을 별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런 점에서 신라와 상당히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통일 전부터 고구려를 위해 신라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은 궁예의 영향이 컸다는 점도 뜻하는 것이지만 그가 송악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으로 있을 때부터 중앙 정부인 신라 왕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아울러 나타내는 말이다. 그가 궁예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동질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당대의 민심이었다는 것을 왕건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궁예를 몰아내고 세력을 거머쥐었지만 궁예의 사상만은 인정하여 그의 측근 사람들을 과감히 기용한 것도 왕건이 단순히 임시방편으로 그러한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왕건은 새 나라의 국호를 궁예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 명명했던 '고려'로 정했다는 것은 위의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국가의 태조가 된 왕건은 막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고려말의 문신인 익제 이제현의 말에 따르면, 왕건은 후삼국 통일 전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서경)을 비롯해서 북쪽 국경지대를 자주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건이 삼국 통합 과정에서 상실한 고구려의 고강을 되찾으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한반도 통일에만 연연하지 않았다고 익제는 평가하고 있다. 익제의 평가가 왕건 개인에게만 국한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의 문무 대신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런 여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일 민중들의 여망이 없었다면 왕건도 그러한 뜻을 표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민중들은 신라의 삼국 통합이 얼마나 민족적으로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심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그래서 왕건은 신라의 영토를 넘어서서 대동강 이북, 즉 압록강 지역을 일단 수복의 일차 목표로 삼았던 것도 당대 백성들의 염원을 반영한 증거인 것이다. 고려 태조는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의 고도 평양은 이미 황폐한 지 오래고 여진족들이 거기에 드나들어 변경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으니 그 방비를 철저히 해야겠다'고 명하였다. 또한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백성들을 평양에 이주시켜 부흥을 꾀하는 한편 평양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충신들을 보내 군사력을 키우는 등 북방 정책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아직 후삼국이 통일되기도 훨씬 전이었다. 아직 후백제와 신라와의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과감한 정책을 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왕건은 백성들의 여망대로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왕건은 평양성을 쌓고 평양도호부를 다시 서경으로 승격시킨 뒤, 몇 년 뒤에는 중앙정부와 대등하게 서경의 관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수복운동은 고려 태조 이후의 역대 왕들에게 이어졌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신하들에게 통일이 이루어지면 평양에 도읍하겠다는 계획까지도 밝혔다. 이러한 계획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고려 3대 왕인 정종은 태조의 뜻을 이어 947년에 서경 왕성을 쌓은 뒤에 서경 천도계획을 세워 궁궐 조성 등 사전 작업을 착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종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광종은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여 평양을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볼 때 서경을 중시한 역대 왕들의 노력은 민중들의 뜻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 사기를 진작시키고 나아가 북방 개척의 중심지를 서경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수복운동이 있었기에 성종 때에 있었던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서희는 거란족과의 담판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며 또한 역대 이래로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기 때문에 이곳은 고려의 땅이라고 강변하였다. 서희의 말은 단순히 논리적 비약이 아니라 계속된 수복운동의 결과인 셈이다. 서희의 담판으로 차지하게 된 압록강 지역은 그후 윤관이 9성을 개척함에 따라 고려의 땅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으로 9성은 반납되었고 강경해진 여진족은 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고려를 위협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만주 일대에서 융성했던 발해가 거란에 의해 패망했을 때 고려 정부는 이들 유민을 동족으로 여겨 받아들이면서 거란과는 일절의 국교도 끊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가 발해를 동일 민족국가로 여겼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발해의 패망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발해가 망한 뒤 친척의 나라인 발해가 거란에게 패망되었으니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후진의 왕에게 함께 거란을 공격하자는 뜻을 전해달라고 중국 서성에서 온 한 승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볼 때 고려는 계속해서 수복운동의 차원에서 평양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묘청의 서경천도론이 단순히 그가 표방한 풍수지리설에만 의거하여 일어났다고 본다면 편견을 낳을 우려가 많다. <고려사>에서 묘청을 요역이라고 부른 것도 계산된 정치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묘청의 난은 내부적으로 볼 때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간의 왕을 둘러싼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개경 세력의 부패와 부조리는 결국 왕권 자체마저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극대화되어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태조 이래로 천도의 대상이 되었던 서경 세력은 부패한 개경 세력을 척결하고 개혁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들이 정권을 재장악함으로써 고려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묘청난에 참여한 농민들의 투쟁을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된다. 김부식의 군대가 서경을 포위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항한 이들은 바로 농민들이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묘청의 난이 농민 항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개경의 문벌귀족들에 의해 자행된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반증하는 셈이다. 묘청난이 갖고 있는 한계점은 너무 지나치게 도참사상과 풍수설에 이념의 근거를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당대에는 큰 장점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반대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지지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민중적 지지를 확대해 나가지 못한 점도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일반 농민들이 아직 계급적 인식을 갖지 못한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묘청의 난이 실패한 후 고려는 다시 왕권이 미약해져 문벌귀족들이 득세하게 되어 새로운 개혁을 바라는 민중들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한 채 내리막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ff 3.정중부의 반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의 군사 쿠데타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까지 : 타락의 극치를 이룬 문벌귀족
이자겸과 묘청의 반란을 겪으면서 고려의 왕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특히 묘청난 이후 세력을 거머쥔 개경 중심의 문벌귀족들은 왕실을 좌우하면서 지배 계급으로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럴수록 사회의 모순은 심화되어 갔다. 당시 정치적 성향은 마치 19세기 세도정치 때 노론의 일당독재가 횡행했던 것처럼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개경 세력이 일당독재적인 방식으로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치는 대부분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원래 태조 때부터 고려의 국왕들은 개경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경 세력을 양성하였다. 태조의 북진정책이나 광종이 서경을 서도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이다. 또한 인종 이전까지도 서경천도론을 계속 거론하여 개경 세력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립적인 세력이 존재함으로써 고려 건국 때부터 온갖 특혜를 누려온 귀족들은 문치주의에 입각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청난 이후 그 균형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동기에 대해 1)왕과 문신들의 타락 2)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만 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18대 왕 의종(1146-1170)이 방탕을 일삼아 문벌귀족들의 타락 역시 극에 달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종이 처음부터 방탕한 왕이었는가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146년 인종이 죽고 나자 대관전에서 왕위에 오른 의종의 나이는 불과 19세의 청년이었다.(의종은 1127년생이다.) 선왕을 통해 정치적 경륜을 배울 틈도 없이 바로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개경 문벌귀족들의 견제를 견뎌낼 수 없었다. 오히려 왕권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으니 의종으로서는 항상 신변의 위험마저 느껴야 했다. 물론 의종이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회복했다면 그러한 위치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묘청난 이후 유일한 왕실의 세력 기반이었던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개경 세력의 정치적 독점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의종의 개인적 성품이 나약하고 섬세해서 왕권 회복이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역으로 말해서 왕이 스스로 위협을 느낄 정도로 이미 왕권은 극히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인종 때보다 더 강성해진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는 열세에 놓여 있어 안팎으로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의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의종은 궁궐 내에 있기가 싫어 자주 궁 밖으로 나갔다. 일종의 도피 행각이었다. 그러나 의종이 처음부터 이러한 도피 행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의종은 몰락한 서경 세력의 회복을 바라는 여망에서 1454년(의종 8년) 서경에 중흥사라는 절을 창건하였고 4년 후인 1158년에는 백주에 별궁을 지어놓았다. 그런데 이때 별궁의 이름 역시 '중흥'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이 절을 짓게 된 동기가 태사감후의 자리에 있던 유원도의 상소에 따른 것이라고 나와 있다. 유원도는 상소에서 백주 토산이 중흥의 땅이니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의종은 그곳 풍수를 알아보게 하였고 궁궐을 지을 만하다는 결과 보고가 나오자 즉시 별궁을 지었던 것이다. 또한 1470년에도 서경을 방문하여 거기서 왕권 강화와 개혁을 바라는 뜻에서 신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개경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밖에 의종은 항상 "민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역설하면서 문벌 귀족들의 착취 행각을 은근히 비판, 선정을 베풀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그런데 여기서 의종이 펼친 왕권 복원사업을 자세히 보면 불교나 풍수지리 등 유교와 상반되는 이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의종은 유교적 문치주의를 정권 장악에 이용한 개경의 문벌귀족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의종이 절의 이름이나 별궁의 이름을 '중흥'이라고 지었다는 데에서 그의 왕권 회복을 위한 힘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왕권 회복 노력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니 의종으로서 할 일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부처에게 빌거나 향락을 일삼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의 성품이나 시대적 한계상 의종은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의종이 말년에 가까울수록 방탕과 사치 향락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종을 무조건 폭군이나 악군으로 몰아부친다면 올바른 이해가 아닐 것이다. 의종의 방종은 정치적 실의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책임은 당시 문벌귀족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의종의 모든 정책에 제동을 걸어 왕권을 완전히 실추시켰으며 이에 따른 왕의 타락을 방조하면서 정권 유지에 이용했던 것이다. 의종의 주변에 측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은 매욱 허약해서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봤을 때 정중부의 반란 대상이었던 왕과 문벌귀족을 같은 범주에 묶어 버린다면 의종은 완전히 타락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 될 것이다. 이렇듯 왕권이 실추된 상태에서는 그 위치를 대신하려는 세력들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정권의 공동화 현상이 두드러지자 문벌귀족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어 정치는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군사력을 지닌 무신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종은 축출 대상이 아니었다. 무신들은 왕이 문벌귀족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심지어는 암살의 위협까지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의 방탕은 무기력에서 비롯된 자위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의종 역시 무신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문벌들의 타락이 극에 달한 지경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집단은 무신들 뿐이었다. 주관적인 판단일지는 모르지만 의종은 내심 정중부 등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면 하는 뜻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의종은 막다른 길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반란의 배경 : 정치의 부재와 사회 모순의 극대화
이제는 무신난의 두번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만'에 대해 검토해볼 차례이다. 사실 고대로부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집단은 '문'을 중시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은 국가를 운영할 이념과 정책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대체로 무신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려에 접어들어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직접적인 공을 세운 것은 무신들이지만 그 공을 가로챈 것은 문신들이었다. 또한 전쟁이 벌어지면 최고 책임자는 언제나 문신이었다. 거란족과 담판을 지은 서희나 구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여진을 정벌한 윤관, 묘청난 때 출정한 김부식 등은 모두 문신이었다. 물론 이들이 각 전투의 최고 책임자였지만 그 이면에는 무신들의 활약이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공은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의 난과 묘청난 등으로 전에 비하여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문벌귀족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져 의종 때에도 문존무비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아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일상적인 일로 되어 있었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물론이고 군사 작전시에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그 아래에서 지휘를 받는 일이 관례가 되어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등 문신들은 무신들의 존재를 무시하다시피 하였다. 이러다보니 하급 장교들이나 군사들은 더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정중부의 반란 때 활동한 중심 인물들이 하급 장교라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여기까지 보면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신들에 대한 차별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무신은 언제나 문신들의 손발 역할을 해야 했고 지휘 체제에서 도 하위 개념에 속해 있었다. 또한 다른 시대에도 의종 때보다도 더 무신들의 차별 대우가 극심한 적이 많았다. 따라서 무신들의 반란 원인을 단순히 신분적인 불만에서만 찾는다면 반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큰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왕권의 실추에 따른 올바른 정치 부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종 이래로 왕권이 극히 쇠약해짐에 따라 권력 장악을 놓고 문무간의 또는 왕과 문신, 그리고 귀족들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반란이 쉽게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무신들의 반란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개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모순이 낳은 정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신들이나 군사들이 고역과 빈궁에 시달렸던 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실의에 빠진 의종은 그 대가로 궁궐이나 사찰 창건에 주력하여 농민이나 군사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다. 의종은 이같은 일을 통해 그나마 왕권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로 인해 일반 군사들은 굶주림과 노역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들의 정변이 일어날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사정도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태조가 건국하여 농민 등 민중들의 복지 문제를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귀족들의 토지 겸병이 심화되어 사회 모순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은 높아지고 개간 등을 통해 수확물이 증대되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착취에 의해 민중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점점 감소되었다. 12세기에 들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자 귀족들은 자연히 토지 확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농민들이 이루어놓은 생산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토지를 빼앗아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반대로 농민들은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문벌귀족들이나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로 인해 농촌경제는 큰 위기에 빠져 심지어는 토지를 잃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속출하였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저항도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의종 때에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문신 귀족정치의 모순이 극에 달하였다. 12세기의 생산력 발전에 따른 토지 수탈은 심지어는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에 의해 양반 계층에게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배체제는 대립의 양상으로 치달아 갈등을 낳게 되어 사회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자겸, 묘청 등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 모순은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반기를 든 정중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이 주역이었다
우선 정중부의 반란이 우발적인 것도, 그렇다고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설명하려 한다. 문벌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의종은 일부러 별궁을 짓거나 사찰을 창건하여 자기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문신들과 모여 자주 연회를 가졌고 장소도 여기저기로 옮겨다녔다. 그만큼 무신들이나 군졸들은 과도한 근무에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왕의 행차 때 신변 보호를 위해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시 법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연회 장소에서 무신들은 대부분 소외되어 왕과 문신들이 즐기는 동안에 무신들이나 군졸들은 계속 보초를 서고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뜩이나 평소 차별에 시달려왔던 무신들은 왕과 문신들의 방탕을 증오하면서 마음 속 깊이 불만을 품었다. 그 가운데는 반역의 뜻을 품은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던중 1170년, 의종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신들과 함께 화평재에서 술잔을 나누고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놀이에 빠져 돌아갈 줄을 몰랐다. <고려사> [정중부전]에 따르면 이때 무신들은 심히 굶주려 있었다고 한다.(대체로 이 부분에 대해 별로 의심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문신들을 호위하고 다녔지만 전시도 아닌데 난을 일으킬 정도로 굶주렸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곳에서도 지적을 하겠지만, 고려 역사의 주요 사료가 조선 때 편찬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라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길이 막연하다. 다만 여기서 행간의 의미를 읽자면, 굶주림에 시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호위 근무에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정중부가 소변을 보러 나가자 이의방과 이고가 뒤쫓아가 그에게 귓속말로 말하였다. "문관들은 의기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관들은 굶주려 피로해졌으니 어찌 참을 수가 있습니까?" 전에 김부식의 아들인 내시 김돈중이 인종 앞에서 무예를 선보이고 있던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린 적이 있었다. 무신들이 얼마나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정중부는 화가 나 그 자리에서 김돈중의 멱살을 잡고 혼을 내주었다. 이 사실이 김부식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인종에게 정중부를 매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인종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김부식의 뜻이 너무 완강해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이 사실을 미리 정중부에게 알려 화를 면하게 하였다. 젊었을 때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있던 정중부는 계속된 문신들의 차별에 깊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의방 등이 역모를 권해오자 그도 역시 동의하고 나섰다. "지금이 거사할 때다. 그러나 왕이 만약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만 두기로 하고 만일 또 보현원으로 옮겨 가거든 그때 거사를 하자." 그런데 다음날 의종은 마침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호종하는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 보현원으로 향하던중 오문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왕과 문신들의 술잔치는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술잔이 돌고 여흥이 감돌자 의종은 좌우 풍경을 살펴보더니, "장하도다! 여기가 바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로구나" 하면서 갑자기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일종의 무술 시범. 또는 그와 유사한 공연)를 시켰다. 무신들은 왕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기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의종은 계속되는 연회 속에서 고생하는 무신들을 위로하고 공연을 빌미로 상을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문신들 때문에 연회장에 얼씬거리지도 못하는 무신들을 의종은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의도를 눈치챈 문신이 있었다. 바로 한뢰였다. 마침내 박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장군 이소응은 얼굴이 수척하고 힘이 없어 한 사람과 박희를 하다가 그만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자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뢰가 나서서 이소응의 뺨을 후려쳤다. 이에 다른 문신들인 이복기, 임종식이 이소응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왕 앞에서 당돌하게 시범을 중단하느냐는 질책이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연회장은 문신들의 욕설과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박희를 하던 다른 무신들은 참혹한 심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정중부, 김광미, 양숙, 진준 등 무신들의 낯빛이 변하더니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중부는 한뢰를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이소응은 무관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째서 이처럼 심한 모욕을 하는가!"의종이 보니 무신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의종은 사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 정중부의 손을 잡으며 제지하였다. 이때 이고가 칼을 뽑으려 정중부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이고를 말렸다. 이렇게 해서 일단 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유혈 사태는 얼마 가지 않아 벌어지고 말았다. 해가 저물어 왕과 일행은 보현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의방과 이고는 왕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순검 군사(왕의 호위군대)를 조용히 한 곳에 불러모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까 낮에 이소응을 힐난하던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무신들의 반란은 시작된 것이다. 한뢰는 사태가 급하자 왕의 침실로 숨어들어가 왕의 옷자락에 매달렸지만 결국 이고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러한 살육으로 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대부분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수도 성내에도 정예군을 급히 보내어 왕실이나 문신들이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분쇄하였다. 그러나 무신들의 살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처음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중부 등이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자.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여라" 하여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반란군은 그날 밤으로 왕을 데리고 개경으로 들어와서 중요 문신 50여 명을 또 학살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반 군졸들이 반란에 가세하여 개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가 된 상태였다. 이들은 외쳐대기를,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씨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지는 못하였다. 고려 문종 때 중앙 문관의 정원이 532인이고 그 이속의 정원은 1,165인이었다. 그런데 반란 세력에 의하여 학살된 문신의 수는 모두 합쳐야 100여 명 정도로 보인다. 씨도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개경 거리를 활보했다는 것은 평소 문신들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이때 의종은 정중부를 불러 정변을 중지하라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예"라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미 사태는 정중부의 손에서도 떠나 그동안 쌓인 무관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중부는 의종에게 해롭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정중부는 의종의 곽정동택, 관북택, 천동택 등 사저와 거기에 축적한 많은 재물을 이의민, 이고 등과 나누어 차지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의종을 제거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환관 왕광취 등이 반격을 하자 정중부는 왕을 수행하던 내시 등 20여 명을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을 통하여 왕이 궁궐 내에 있으면 계속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의방 등은 의종을 처음부터 죽이려 하였으나 정중부가 말린 적이 있었다. 또한 문신들을 진짜 모두 죽이자고 했을 때로 정중부는 제지하였다. 비록 무신이지만 고위직에 있던 정중부는 문신 몇 사람에 대해서만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군졸들이 봉기했다'고 할 정도로 수습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의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반란군 중심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임명하였지만 결국 3일이 지난 날 군기감에서 영은관으로, 그리고 다시 거제도로 쫓겨나야 했고, 태자는 진도로 가게 되어 무신들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다. 무신들은 의종의 아우인 익양후 호를 허수아비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명종(1170-1197)이다. 왕위에 오른 명종은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을 벽상공신에 봉하고 대사령을 내리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그는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할 뿐, 정치적인 실권은 반란 세력이 장악하여 마침내 무신정권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정중부의 반란'이라고 부르는 이 무신들의 반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반란 주도 세력간의 입장 차이이다. 사실 정중부는 주요 문신들을 모두 제거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장군이라는 무관 고위직에 있었던 그는 나름대로 계급적인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문신들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김돈중 사건처럼 개인적인 원한이나 문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있는 자신의 위치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중부는 당시 60이 넘은 노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중부처럼 온건적인 입장에 선 인물들이 분명 있었다. 이러한 점은 반란에 동참한 대장군 진준이 "우리들이 미워하는 것은 문신 4, 5명인데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면서 더이상의 학살을 적극 만류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 오히려 군졸들은 문신들의 집을 부서버릴 정도로 사태는 악화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감정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란이 전개될수록 사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 일반 군졸들까지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 집단 살육이 벌어져 정중부로서도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주도해나갔다. 그렇다면 사태를 이토록 확대한 인물들은 누구인가. 바로 정중부에게 반란을 꾀하자고 말한 이의방과 이고 등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정중부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먼저 대장군 우학유를 찾아갔다. 우학유는 전통적인 무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신들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유학유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하여 이의방 등의 요청을 거절했다. 우학유에 대한 포섭이 실패로 끝나자 정중부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무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할 만큼 아직 높은 지위에 올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역으로 추리할 수 있다. 실제로 이의방과 이고는 정8품에 해당되는 산원의 위치에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중급 또는 하급 장교에 불과했다. 그밖에 반란에 참여한 조원정, 석린, 이영진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수공업자였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모두 기생 출신이었다는 조원정은 무신란 이후 그 공로로 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 지위 역시 하급에 속한다. 이영진은 나졸 출신으로 창고 곁에서 쌀을 주워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살았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가세하여 출세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원래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영진 역시 반란 후 낭장에 임명되었다. 낭장이라는 관직은 중앙군 조직에서 중량장 바로 아래에 해당되며 다섯번째 계급에 해당된다. 품관으로는 정6품이다. 각 영에 5인씩 배치하였는데 통솔 군졸 수는 약 200명에 해당된다. 공을 인정받아 낭장이 되었다면 그들은 모두 하급 장교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로 하급 이하 장교들이나 일반 군졸들이 문신들의 횡포에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란이 있기 전부터 이의방 등은 왕마저 교체시키고 정권을 장악할 심산이었다. 지배체제의 동요와 정치적 구심점이 상실된 시점에서 하급 장교들이 하극상을 할 정도로 당시 고려사회는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변이 수습된 후 세력을 잡은 사람은 이의방이었다. 그는 천성이 악한 탓인지 자기의 동지였던 이고와 세력 다툼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이미 나이가 든 정중부는 젊은 장교들의 행태에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중부는 이의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집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의방 형제는 손에 술을 들고 정중부를 찾아가 부자의 인연을 맺자고 제의, 정중부는 이를 수락하였다. 이의방은 정중부가 혹시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하여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의방은 혼자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다른 무신들이 반발하며 나섰고, '조위총의 반란' 진압 작전에서 크게 패한 이의방은 결국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의 형인 이준의마저 이의방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겨 죽일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매우 포악하고 독단적인 인물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 때에도 시국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일대 개혁을 바라는 일반 군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정중부 정권은 하급 무관들과 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일부 의견을 수렴하여 정치에 반영하긴 했지만 원천적인 갈등 요소는 없앨 수 없었다. 또한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 정국은 다시 유혈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갔다. 세력을 잡은 정중부 역시 정권 유지에 급급해 정적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았다. 1171년, 김보당 등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난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이를 평정하고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 유인준을 따라 경주까지 왔던 의종을 잡기 위해 이의민을 급파하였다. 이에 이의민은 손으로 의종의 등뼈를 추려 죽이고 연못 속에 던져버렸다. 김보당이 신문을 당하면서 모든 문신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진술하자, 정중부는 그동안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던 문신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준의, 진준 등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이토록 정중부도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권에 맛을 들인 정중부는 조위총의 반란이 있던 1174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주위에는 아부하는 자들만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니 정중부 정권은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중부는 결국 1179년(명종 9년) 아들과 사위 등과 함께 경대승에게 살해당하였다.
정중부의 반란은 무신들의 신분적 차별은 물론이고 당대 지배계급의 동요와 사회 모순의 심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 모순이 심화된 상태에서 이에 대한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반란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통치 능력이 없는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는 구심점을 잃고 혼미를 거듭하였던 것이며 정통성이 없는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의 등장으로 고려의 역사는 암울한 터널을 거쳐 나가야만 했다. 사실 정중부의 반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로써 무신들간의 정권 다툼이 반복되면서 백년 동안의 무신정권 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층부의 동요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으니 '고려 민란의 시대'는 무신정권의 모순 자체 속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ff 4.무신정권시대의 민란 : 군사정권 타도와 신분 해방을 위하여
반란의 원인과 배경 : 민중의 고양된 사회의식
무신란 후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이같은 민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 우선 농촌사회의 파탄에 따른 농민 생활의 궁핍화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사회는 무신정권 이전 시기부터 국가 권력이 쇠약해짐에 따라 관리들의 횡포와 권문세가의 토지겸병 등으로 농민의 생활은 점차 어려워졌으며 더욱이 지배층에 의한 사원의 난립은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특히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여 이를 견디지 못한 많은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예종(1105-1122)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 적이 있다.
지금 각도 주군을 다스리는 사목 가운데 청렴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자는 열에 한 두명도 없어 오직 이익을 얻고자 할 뿐이며, 명성을 얻고자 대체를 상하게 하고 있으며 뇌물을 좋아하고 사욕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심히 억압하므로 유망민이 서로 잇달아 생겨 열집 중에 아홉이 빈 집이라고 하니 짐은 매우 가슴이 아프다.
이러한 유민들은 신라 말기처럼 결국 도적이나 걸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씨는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이 피폐된 민중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단호한 개혁정치를 펼쳤다면 민란의 발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뀔 당시에는 일반 민중들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호족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왕실의 허약함을 알고 있던 민중들은 중앙집권적인 정부에 의한 과감한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말그대로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민중들은 오히려 각성할 수 있었고 더이상 상층부에게 개혁을 맡긴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며 결국 자신들의 현실은 스스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각종 민란이 발생하였다. 더군다나 무신정권의 전개 과정이 반복된 무신들간의 세력 싸움과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하극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역설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게다가 천민들의 경우, 무신정권 이전부터 정치적 사회적 신분 상승을 하여 심지어는 중앙관리로 나서는 자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의종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의민이다. 조선 후기처럼 신분 계층간의 변동과 구조적 와해의 조짐이 보편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천민들 스스로는 신분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조작 세습되거나, 그리고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객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여러 사료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농민들이나 천민들 사이에서는 혼란한 사회가 재정립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질서와 신분 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를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이러한 보편적인 요구를 무신정권이 묵살하자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 당시의 각종 민란은 유사한 점도 있지만 특이한 배경과 원인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민란 발생 배경에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지금부터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민란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 민란의 시대 : 전체 개요
19세기가 '조선 민란의 시대'였다면 무신정권이 들어선 1170년부터 이후 40-50년 동안을 고려 민란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김보당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당시 민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참여 계층 또한 농민이나 천민만이 아니라 중앙에서 소외된 일부 지방 호족들도 동조의 움직임을 보였다. 주요 민란만을 보아도, 김보당의 반란 이후 창성, 성천, 철산의 민란(서북지방 : 1172), 조위총의 반란(1174), 명학소민의 반란(1176), 예산(1176), 익산(1177), 여주(1177), 가야산(1177), 옥천(1182), 서산(1182), 남원(1200), 진주(1186), 안동(1186), 경주(1190) 등지의 지역적인 민란, 김사미.효심의 반란(1193), 강릉, 경주(1199), 합천, 김해(1200), 제주(1202) 등에서 일어난 민란, 만적의 반란(1198) 진주 공사노비의 반란(1200), 밀양 관노들의 반란(1202)이 일어났다.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의 봉기에서 신라 부흥을 내세웠으며(1202) 고종 때 서경에서 최광수 등이 고구려 부흥을(1217), 담양에서 이연년 등이 백제 부흥을(1237) 각각 표방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중의 항쟁이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단계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것은 대표적인 민란에 불과하다. 이밖의 것을 포함시킨다면 명종, 신종대만도 전국에 걸쳐 수십 차례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선 문벌귀족이 무너진 다음 정권을 잡은 무신정권은 반복되는 유혈 경쟁으로 인해 안정된 집권 유지를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방 통제가 극히 약화되어 지방관들의 탐학이 날로 심화되었고 중앙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이나 농민 수탈도 극에 달했다. 결국 무신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사실상 고려는 무정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 틈을 이용하여 민중들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기 위하여 봉기했던 것이다. 이 당시 민란을 여기서 모두 거론할 수는 없다. 그대신 성격이 뚜렷한 민란을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민란의 발생과 특성 : 주요 민란을 중심으로
조위총의 반란(1174년) : 민란 발생의 도화선 이전에도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김보당의 난이 있긴 하였지만 명종과 신종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민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반란은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봉기이다. 조위총의 신상에 대한 사료는 그리 많지 않으나 의종 말년에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유수라는 말은 임금이 주재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곳을 지킨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문신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신들을 대량 학살할 때에도 살아남은 것을 봐서 어느 정도 무신들과 교류를 하였거나 최소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타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서경유수로 임명된 것으로 봐서 무신들의 신임도 상당히 두터웠던 것 같다. 또한 무신들간에 문신 학살 범위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틈을 타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묘청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 세력은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무신들 역시 이를 무마할 수 있는 자를 서경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위총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하여 무신정권을 속여 충성을 하는 척하다가 서경유수가 되자 난을 일으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문신 특유의 자존심을 숨기고 있다가 정권 장악을 목적으로 봉기하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봉기 계획을 마친 조위총은 1174년 9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 지역에 격문을 돌려 정중부를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듣건대, 개경의 중방에서 의논하기를 우리 북경의 여러 성이 사납고 난폭해져서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 하고 이미 대군을 보냈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조위총이 꾸민 내용이지만 그의 봉기에 재령(서흥-봉산 일대) 이북의 40여 성의 대부분이 동조한 것으로 봐서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이 일대에서도 심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위총의 격문은 단지 이를 집약시키는 구실을 했을 뿐이다. 이때 농민들이 조위총의 봉기에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무신정권 이후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가 매우 미약해져 지방 관리들의 농민 수탈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반무신정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참여했던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묘청난 이후 개경 집권자들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역 감정적인 면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위총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무신정권은 곧바로 평장사 윤인첨(이 사람도 역시 문신이다.)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내시예부낭중 최균을 여러 성에 보내 반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토벌군과 반란군은 재령 근처에서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되었다. 토벌군이 재령에 이르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고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토벌군은 지리나 날씨에 익숙치 못한 탓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런 틈을 타서 반란군은 고개 위에서 쳐내려가 삽시간에 토벌군을 물리쳤다. 윤인첨은 포위당하여 끝까지 싸우려 하였으나 도지병마사인 정균이 훗날을 도모하자고 말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첫 전투는 반란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한편 동계 방면에서는 조위총의 부하 장수인 김박승, 조관 등이 화주영을 점령하고 있었다. 윤인첨의 군대를 물리친 반란군은 사기가 올라 개경을 향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이의방은 화가 난 나머지 개경 안에 있는 서경 출신 양반들인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거리에 효수한 뒤 군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이의방은 우선 기습 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그는 최숙 등에게 정예 기병 수십 명을 보내 반란군의 허를 찔렀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말린 반란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의방은 전진 명령을 내려 대동강 유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반란군은 서경 성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토벌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 날씨에 익숙치 못한 토벌군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반란군의 공세에 패해 밀려나고 말았다. 서경으로 돌아온 이의방 등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같은 해 11월에 5군을 편성한 뒤 윤인첨을 원수로 임명하고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서경을 집중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3차 토벌군에게 갑자기 출정 보류 명령이 떨어졌다.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손에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같은 해 12월이었다. 이의방이 살해당한 뒤 무신정권 내부에는 잠시 혼란이 일어났다. 정중부 일파는 이를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조위총에게, 이의방을 처단하였으니 이제는 화해하자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조위총은 '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상표를 사신을 통하여 개경에 보냈다. 그런데 정중부 일파는 사신을 옥에 가두고 말았다. 정중부 일파의 제의는 순전히 기만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결국 양 세력 사이의 화해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3차 토벌군이 출발한 것은 대략 해가 바뀐 1175년 1월이나 그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토벌군은 서경을 목적으로 진격하였지만 연주(개천)에 있는 조위총 지지 세력이 있어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두경승은 먼저 이곳을 쳐야만이 서경 점령이 수월하다고 판단, 함남의 남쪽을 거쳐 서북 지방에 이르러 개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성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개천을 소홀히 하면 토벌군은 앞뒤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개천을 차지하게 되면 서북 지역의 다른 성 점령도 한층 쉬워진다. 두경승은 이러한 점을 묘청난 때 김부식이 써먹은 전술에서 배웠던 것이다. 연주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이곳의 전투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아마 늦겨울에 시작하여 봄까지 진행된 듯하다. 조위총이 이곳을 집중 지원했던 점으로 봐서 그의 충실한 부하가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연주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주는 두경승의 집요한 공격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전투로 수천 명의 반란군이 죽고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런 숫자만 봐도 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전투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반란군에 참여한 농민들의 저항이 매우 완강했음을 뜻한다. 즉 이곳 지역의 농민들이나 무신들은 개경의 무신정권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성이 함락되자 그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은 토벌군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남은 것은 서경 뿐이었다. 윤인첨은 다시 전열을 다듬어 서경으로 향했다. 윤인첨의 군대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동북쪽에 토산을 쌓아 성안을 공격하였다. 조위총은 주위 성과 통신이 거의 두절되어 고립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조위총은 마지막 수단으로 금나라에 호소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김존심과 조규를 금나라에 보내 이의방 등이 왕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모반이라고 하면서 군대를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김존심이 조규를 죽이고 토벌군에 투항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금나라에 보냈다. 조위총은 서언을 통해 말하기를, 재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게 넘겨줄테니 원병을 보내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서언을 잡아 고려정부에 넘겨버렸다. 결국 조위총의 사대적인 계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위총은 서경 내의 군대만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양군 사이의 전투는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1176년 6월, 윤인첨이 서경의 통양문을 공격하고 두경승이 대동문을 공격하는 등 총공세를 펼쳐 반란군은 패하고 말았다. 조위총은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였다. 이로써 1174년 9월부터 1176년 6월까지 거의 22개월 이상 벌였던 반무신 항쟁은 끝을 보게 되었다. 묘청난 이후 다시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 무산된 셈이다. 그러나 반란이 평정된 후에도 잔류 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계속 투쟁을 벌였다. 즉 이에 참여한 농민들이 끝까지 무신정권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조위총의 반란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난이 진행되는 동안에 전국에 걸쳐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조위총 개인의 정권 탈취욕에서 시작된 반란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란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힘이 서경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위총의 반란이 농민항쟁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전국적인 민중 봉기의 서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명학소민의 반란(1176년) : 신분해방에서 정부타도로서북지방에서 시작된 민란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조위총의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에 자극을 받은 중부지방의 여러 곳에서 민중 봉기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 마침내 공주를 중심으로 농민들과 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망이.망소이가 일으킨 반란이다.(이 반란은 조위총의 반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176년 1월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반란이 당시 특수행정구역이었던 소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따라서 공주 명학소민의 반란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고려 지방제도의 하나인 소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소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설과 다음은 고려시대에 와서 만들어진 지방제도라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도 될 듯하다. 중요한 것은 소의 기능이 지배 수단의 일환이었으며 이것이 무신정권의 폭압적 상황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소는 다른 지방제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심하게 수탈 대상이 되었던 것이며 그만큼 소에 속한 백성들의 반발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소가 갖고 있었던 가장 큰 기능은 특수 공물 담당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공물은 생산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상층부에 유입되었고 그 공물의 양 역시 중앙정부나 관리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정되었다. 고려 지방제도의 핵심은 현에 있다. 이는 주로 지방의 동족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풍습에 따라 신분과 계층을 고려하여 편성한 것이다. 결국 이에 편성되지 못한 지역은 지배 수단의 일환으로서 소로 따로 분리되어 관할받게 되었다. 고려사회의 지방제도는 신분 질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소는 향이나 부곡과는 달리 관리자의 면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조세를 거둘 때 향이나 부곡이 지방 관청의 관리를 받았다면 소는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는 특수 공물을 담당하였는데, 특수 공물은 말그대로 일정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것이었다. 자연경제의 토대에서 소가 갖고 있는 기능은 이처럼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중앙의 통치 기반이 허약했던 고려 정치구조를 그대로 나타내는 실례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소가 수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반 농민들과는 달리 이곳 천민들은 특수 공물의 생산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사회가 농경을 주산업을 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농민들은 특산물을 포로 대신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고려사>에 포와 특산물을 어떻게 비교하여 그 양을 상응시키느냐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대체로 특산물은 소의 몫으로 돌아갔다. 또한 공물은 여진족 등 외국에 바치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대외 관계 유지를 위해서 정부는 소를 더욱 수탈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는 대내외적인 구조 속에서 발전의 계기를 갖지 못하고 오직 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었다. 명학소민의 반란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명학소민의 봉기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176년 정월에, 2차 봉기는 다음 해인 1177년 2월에 각각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반란은 어째서 두 번에 걸쳐 나누어 일어났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봉기 전개 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첫번째 봉기는 1176년(명종 6)에 일어났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망이, 망소이 두 형제는 무리를 불러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고 일컫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정부는 채원부 등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반란은 규모가 매우 커져 나중에는 주위 일대를 거의 점령하였는데 한때 덕산, 여주, 진천, 청주, 아산 등지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봉기가 다른 민란들처럼 지방 관리의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는 국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 공주가 함락되자 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한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우발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짜놓은 치밀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어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봉기가 사전 계획에 따라 확장되었는지 살펴보자. 명학소민들이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공주였다. 그 당시 공주를 지키는 관군의 수는 천오백 명 정도였다. 그런데 명학소민들 가운데 봉기에 가담할 수 있는 남자의 수는 기껏해 천 명을 웃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주둔군을 함락시켰다. 명학소민들은 군사 훈련이나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규군을 물리쳤다. 이에 추리해보면 1)기습전을 펼친 것은 물론이고 2)사전에 조직을 이루놓았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후에 삼천 명이 넘은 중앙군을 물리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그 숫자에도 문제가 있다. 남자 천 명 가운데 실제적으로 봉기에 가담할 수 있는 숫자는 더 적어 수백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사전에 세워놓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주위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성공하였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망이 등이 자칭한 '산행병마사'에서 '산행'이 갖고 있는 뜻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12세기를 전후하여 권세가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한층 강화되자 떠도는 농민들이 많아져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다. 망이 등이 난을 일으킨 공주 지역 역시 비옥한 땅이므로 이에 대한 지방관들이나 권세가들의 수탈이 매우 심했을 것이다. 즉, 생산력이 높은 만큼 수탈도 강화되어 유랑민들이 급증했다는 말이다. 이들이 산행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어찌 보면 이런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중앙정부는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망이.망소이의 난이 터지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채원부와 박상수를 보내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란군이 이들의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그러자 정부는 정황재와 장박인에게 장사(고려 무신시대 때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여러 의미가 있지만 지금으로 치자면 용병과 같은 성격이 강하다.) 3,000명을 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반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반란군은 자신감을 갖고 공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중앙정부는 남북으로 반란에 시달리게 되자 명학소민들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하여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책에 크게 위배되는 조치였다. 일반적으로 향.부곡.소가 현으로 승격되는 지역은 유공자의 출신지이거나 권세가들의 고향일 경우였다. 이러한 관례를 깨고 천민들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 소를 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가 위기 의식을 느낀 탓이었다. 이와 더불어 반란군들은 무력으로 부당한 제도 개선을 요구하면 국가도 양보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 고양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민란의 원동력이 되었다. 천민들조차 사회 제도를 자신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개혁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자 오히려 공주 지역 일대의 농민들이 명학소민들의 반란에 대거 동조하였다. 망이 등은 정부의 조처가 기만책인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개혁 조치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반란군에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지방관들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봉기를 중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반란군은 예산현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감무를 잡아 살해하였다. 승기를 잡은 반란군은 충주까지 밀고들어가 점령하였다. 충주는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반란군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유책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판단한 중앙정부는 즉시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당시에 개경 아래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남적, 북부 지역의 반란군을 북적이라고 불렀다.)에 임명하여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대규모의 토벌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망이 등은 더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 1177년 1월에 정부에 대해 화해를 요청하였다. 망이 등은 귀향과 식량 보장 등을 내세워 정부측과 강화를 맺었다.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곡식을 주어 반란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이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곡식이 매우 귀해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명학소민의 1차 봉기는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이 반란에 대거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앞서 반란이 일어난 다음에 '감무'를 잡아죽였다고 했다. 즉 봉기의 원인이 이 감무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부는 오랫동안 여진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막대한 인력과 군비를 손실당하게 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후방 지역에 감무라는 직책을 가진 자를 파견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 공급에 쓸 조세 수납과 민호 징발을 직접 관장하였다. 이곳을 군수 물자 보급지로 삼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가야산의 앞 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가야산 일대는 예로부터 물자가 풍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감무는 특별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감무는 특별 임무를 빙자하여 가렴주구를 일삼았고 심지어는 지방 호족들과도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렇게 중첩된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은 망이 등의 반란에 대거 참여하였고 호족들 가운데 반무신정권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도 이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손청이었다. 명학소민의 반란이 일어나자 주위 농민들이 합세한 것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민란이 일어났다. <고려사>에서 중부 이남 지역, 즉 삼남 지방에서 봉기한 반란군을 대체로 '남적'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가운데 명학소민의 반란군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반란군이 있었다. 그것은 손청이 이끄는 군대였다. 손청은 망이 등이 정부와 화약을 맺기 한 달 전인 1176년 12월에 스스로 병마사라고 하면서 반란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손청이 망이의 반란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산현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고 했는데 정부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연합 작전을 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서산과 공주는 모두 충청도의 요충지이고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정부는 반란군이 두 패로 나누어 난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정세유와 이부를 각각 병마사에 임명하여 2군으로 나눈 것도 이러한 점을 고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명학소민의 반란이 일자 일부 하급 문신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사칭하여 망이 등에게 서신을 보내 반란군을 자신들의 정권욕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망이 등은 서신을 갖고 온 사자를 잡아 정부에 넘겨버렸다. 이것은 망이 등이 더이상 정부군과 소모전을 갖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오였다. 정부는 망이가 귀향하는 시간 동안에 명학소에 있는 처와 모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이뿐 아니라 명학소에 토벌군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명학소민의 2차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망이 등이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이들이 귀향하는 시간을 벌어 다시 토벌군을 보내어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 등 공격해 왔던 것이다. 이에 망이 등은 격분하여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가 1177년 2월이었다. 망이 등은 우선 인근에 있는 가야사라는 절을 공격하였다. 사찰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은 당시 불교가 권세가들과 밀착하여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노비를 거느리고 토지 겸병을 일삼는 등 타락의 극치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망이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손청 등도 비슷한 시기에 다시 봉기했을 것이다. 손청은 이때 주로 충청남도 북부 지역을 공략해 나갔다. 반란군은 정부에 속았다는 데 분노한 나머지 1차 때보다 더 격렬하게 정부군과 싸움을 벌였다. 그 탓인지 1차 때는 충주까지 점령하는 데 몇 달이 걸리던 것이 2차 때에는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충청북도 진천까지 점령하였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계속 북상하여 개경에 이르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사실이었다. 같은 해 3월에 홍경원이라는 사찰을 점령, 불을 지르고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살려주는 대신 협박하여 서울 정부에 편지를 전하라고 다그쳤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고서는 곧 그 길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고 우리의 모친과 처를 잡아가두니 그 뜻이 어디 있느뇨.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요, 반드시 서울에 가서 분풀이를 하고야 말것이다.
실로 비장한 각오가 담긴 편지 내용이다. 망이 등은 사실상 중앙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반란군들은 더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반란군의 봉기는 이제 신분해방에서 정부타도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2차 봉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승승장구를 달리던 반란군은 급기야 북부 일부를 뺀 충청남북도 전지역과 경기도 일부까지도 점령하게 되었다. <고려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적이 아주(아산)를 함락시켰다. 이때에 청주목 내의 군현들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고 오직 청주만이 점령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선전포고를 한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 서울을 점령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1018년에 정부는 전국을 네 개의 도호와 8개의 목으로 나누었다. 청주는 이 8개 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대가 모두 반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면 그 차지한 고을 수는 무려 60개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제 정부와 반란군은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여야만 했다. 반란군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강경책만이 반란군을 평정할 수 있다고 판단, 이해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원위치시켰다. 이것은 반란군에 대한 최후 통첩이었다. 토벌군은 먼저 손청, 이광(미륵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이 등과 함께 북진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파견했다는 것은 이들과 망이의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본다.) 등이 이끄는 반란군을 먼저 공격하여 이들을 잡아 죽였다. 갑자기 지원부대를 상실한 망이 등의 반란군은 삼면에서 쳐들어오는 토벌군을 당하지 못해 2개월도 견디지 못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망이와 망소이는 생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혔다. 이로써 1년 육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명학소민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명학소민의 반란은 농민과 천민이 연합하여 일어났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만큼 당시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되어 신분해방과 더불어 정부의 정통성 결여를 비판하면서 정부타도를 외쳤던 것이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뒤에 일어나는 전국적인 민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후대에 와 천민 집단인 소가 소멸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김사미.효심의 반란(1193년) :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한 반란 명종과 신종대의 30년간 지속된 민란은 다양한 성격을 갖고 진행되었다. 천민이나 농민들이 사회 모순과 중앙정부 타도를 외치며 봉기를 하는가 하면 다분히 이념적인 구호를 내세우며 봉기를 한 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김사미.효심의 반란이다. 이 반란 역시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민중들이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다른 민란과는 달리 복잡미묘한 내막을 갖고 있다. 당시 경주를 동경이라고 불렀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성행한 민란 봉기는 이제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도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김사미.효심의 반란은 처음부터 이곳의 민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반란을 꾀한 1193년에서 밑으로 거슬러 내려가 3년 전인 1190년 전후에 경주 시내에서 이미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의 민란은 그 저항이 매우 완강해서 걷잡을 수 없이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조직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사미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부재로 알 길이 없다. 그가 농민이거나 아니면 몰락한 가문의 자손이라는 지적도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다. 김사미는 지금의 경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군소 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반란 세력을 규합, 봉기하였다. 효심은 초전(울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운문산과 초전은 지리상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연합할 수 있었다. 이들이 봉기하자 중앙정부는 대장군 전존걸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장군으로는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을 보내어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중 이지순은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8월에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전존걸이 이끄는 토벌군의 대패였다. 이뿐 아니라 모든 전투나 전황이 대체로 토벌군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의민은 일찌기 꿈을 꾸었는데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붉은 무지개가 뻗어나왔다. 그는 이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또 옛날 참언에 '용손(왕손을 말한다.)이 12대로 끝나면 다시 십팔자가 있겠다'라는 말을 듣고 '십팔자'가 바로 '이'자이므로 이를 근거로 인군이 되어보려는 생각을 품었다. 욕심도 덜부리고 비루한 것도 덜하면서 명사들을 등용하여 헛된 명예를 노리었다. 스스로 경주 출신이라고 하면서 은밀히 신라를 부흥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적 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고 적들도 또한 많은 재물을 그에게 보내었다. 지순도 또한 욕심이 한없는 자였으므로 적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이를 얻어내어보려고 몰래 적과 교통하였다.(중략) 이로 말미암아 군중의 동정은 번번이 누설되어 여러번 패하기까지 하였다. 존걸은 일찍이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이에 이르러 분노하여 '만일 법으로 지순을 다스린다면 그 아비(이의민)가 나를 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적은 더욱 기세가 오를 터이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고 하였다. 기양현에 이르러 그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의민 부자는 김사미.효심과 내통하였다는 뜻이다. 내통은 주로 장군으로 내려간 이지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경주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과 쉽게 줄이 닿을 수 있었다고 본다. 내통에 따라 군사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가 토벌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의민은 자기 연고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라 부흥'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 왕위에 오르려 했다는 것이 <고려사>의 시각이다. 이의민은 아버지가 소금장수이고 어머니가 절의 노비였던 천민 출신이었다. 그러한 그가 경주 이씨라는 본관에 연연하여 '신라 부흥'을 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나 일생을 살펴보면 충분히 왕권을 넘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라 부흥' 운운은 지역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실제로 옛 신라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하여 김사미 등과 손을 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김사미나 효심도 이의민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와 또는 그의 아들과 내통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김사미는 일단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하여 최대한 두 사람을 이용하려 했다는 뜻이다. 집권 세력이 내통을 원할 만큼 당시 반란군의 형세가 막강했다는 뜻도 되지만 이보다는 당시 민중들의 의식이 집권층을 역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토벌군은 패배를 거듭하였고 게다가 전존걸이 자살하자 일단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는 이의민과 이지순 등이 적과 내통했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또한 전존걸의 자살로 이지순 등과 반란군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약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해 11월 중앙정부는 2차 토벌군을 구성하였다. 이 군대는 1차 때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최고 책임자에 대하여 대장군보다 지위가 높은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았고 장군 고용지를 도지병마사에 임명하는 등 흐트러진 전열을 수습하였다. 정부는 본격적인 대토벌 작전에 나선 것이다. 정부의 작전은 유효하여 연말을 고비로 승세를 잡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194년 2월에 김사미는 자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사미는 즉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대장은 효심뿐이었다. 효심은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을 수습하여 토벌군에 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밀양 '저전촌전투'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죽은 반란군의 수만 7,0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반란군의 수가 원래 수만 명이 넘었다고 하였으니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상당한 군사력을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가 1194년 4월이었다. 이 전투를 고비로 여름에는 거의 전투가 없다가 8월을 고비로 다시 반란군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가족들이 혹독한 처분을 받는 등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반란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순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려 회유책을 쓰는 한편, 9월에 이르러 경주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결국 같은 해 12월에 효심마저 고용지에게 체포당하여 토벌군이 서울로 회군함으로써 경주를 중심으로 시작한 민란은 4년, 김사미.효심의 반란은 2년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김사미.효심의 반란군이 지녔던 특징은 그 규모가 정규군과 맘먹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숫자만도 수만 명이었고 이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거의 관군과 버금가는 대등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반란군의 군사력이 상승했다는 뜻이며 전략과 전술면에서도 정규군에 뒤지지 않았다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만적의 반란(1198년) : 최초로 일어난 순수 천민반란 최충헌의 집권 시기를 전후하여 천민들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는 허다했다. 명학소민의 반란 역시 망이.망소이라는 천민이 주도하여 일어난 예이지만 이때는 농민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농민-천민의 연합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어떻게 보면 농민들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적의 반란은 순전히 노비들이 중심이 되어 터졌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천민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난에 대해서는 <고려사> [최충헌전]에 그 진행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우선 그 내막을 알아보자. 신종 원년(1198년)에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을 비롯하여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이 개경 북산(송악산으로 추정됨)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공사 노예들을 모아 놓고 모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 이래 고관 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일어났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빠지게 천역만 하겠느냐!" 이런 울분을 토해놓은 사람은 아마 만적이었을 것이다. 모여 있던 노비들은 만적의 선동에 찬성하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것인가 논의한 끝에 일단 개경 내에 있는 모든 노비들을 결집시키자고 결정하였다. <고려사>에 '누런 종이 수천 매를 오려 정자를 새겨서 표식'으로 삼았다고 나와 있는데, 이 앞에는 세력 결집을 위해 동분서주한 주동 인물들의 활동 상황이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고려사>를 쓴 주체가 지배층인 관계로 자세한 내막에 대해 적기를 꺼려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찬동 세력을 규합한 주동 인물들은 드디어 거사일을 정하고 세밀한 봉기 계획을 설정하였다. "우리들은 흥국사 보랑에서 구정에 이르는 사이에서 일시에 집결하여 북치며 고함치면 궁내의 환관들이 반드시 이에 응할 것이다. 궁노들은 안에서 숙청할 자들을 숙청할 것인즉 우리들은 성중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 각자는 자기 주인 놈을 때려 죽일 것이고 이어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자! 이렇게 되면 어떤 공경, 장상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적 등이 봉기하게 되면 궁내의 환관들이나 궁노들이 내응하여 지배계급을 일시에 물리친다는 것이 주요 일정임을 알 수 있다. 즉 만적 등은 궁밖의 사노비들만이 아니라 궁내의 소외 집단들과도 연계하여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만적의 반란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드디어 거사일이 되어서 노비들은 약속된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불과 수백 명만이 모이게 되었다. 주동 인물들은 예정대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가 우선 더 많은 노비들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거사일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결집 장소를 보재사라는 사찰로 정하고는 '일의 비밀을 보장 못하면 성사하지 못하니 누설치 않도록 조심하라'고 서로 당부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을 연기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 중에 순정이라는 자가 있었다. 아마 순정도 처음부터 만적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거사 장소에 나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귀가하면서 갈등을 한 모양이었다. 처음 거사가 연기되자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부터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모임에 참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한충유에게 모든 사실을 밀고하였다. 놀란 한충유는 즉시 만적 등의 역모 내용을 최충헌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만적을 비롯하여 백여 명의 주동 인물들이 대거 체포당하게 되었다. 노비들의 반란이라는 점에 격분한 최충헌은 주동 인물 백여 명을 모두 강물에 생매장시켜 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봉기 계획을 누설한 순정에게는 백금(은) 80냥을 상으로 주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백여 명의 목숨과 자신의 출세를 맞바꾼 셈이었다. 미수에 그친 만적의 난은 이것으로 평정되었고, 최충헌은 봉기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노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주동 인물 백여 명만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만적의 반란은 분명 손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완전히 계획 단계에서 끝나버린 미수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미수에 그친 이 봉기를 왜 주요한 사건으로 치는 것일까. 봉건적 성격이 강한 고려 사회는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귀족들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민들을 무상으로 이용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해서 지배계급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탈 대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무신정권 전까지는 계급간의 분명한 구분하에 사회 질서는 유지될 수 있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문벌귀족들이 득세하면서 사노비들은 권문세가들의 사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자겸은 사노비들을 시켜 농민들을 착취하거나 반대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는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들이 무신들에게 동조, 출세의 길을 닦기도 하였다. 만적의 반란 초기 단계에서 '경인년 이래 고관 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일어났다'는 말이 나온 것은 천민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분 상승의식과 사회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노비들은 권세가들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그들 스스로 자각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 심지어는 관리로 임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은 신분 질서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힘으로 억압의 신분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여망이 표출된 여러 반란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를 만적의 반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반란의 경우 최충헌 정권을 타도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이들 노비들이 수권 능력이 있어서 정권을 노렸다고는 보기 힘들다. 단지 신분 해방을 위해서는 지배층을 와해시켜야만 한다는 고양된 정치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비록 만적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천민들의 봉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200년에는 진주에서 공사노예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켜 고을 아전들의 집 50여 채를 불태우고 관리들을 죽인 일이 벌어졌으며, 1203년에는 개경의 노비들이 나무하러 산으로 올라가 전투 연습을 하다가 발각되어 50여 명이 처형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밖에도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무신정권 이후 붕괴된 신분 질서에 상응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려 했던 만적의 반란은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다시 말해서 이후 일어난 천민들의 반란과 더불어 만적의 반란은 고려사회의 신분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천민들의 반란이었다.
@ff 5.삼별초의 항쟁 : 몽고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최씨정권의 성립과 몽고의 침입
여기서 100년간(1170-1270) 지속된 무신정권의 흐름을 잠시 정리해 보자. 왜냐하면 무신정권의 등장과 몰락이 대몽 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1170년 무신들의 반란 후 바로 정권을 장악한 사람은 이의방이었지만 그는 정중부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중부는 젊은 장교 경대승에게 제거당하였고 경대승이 4년 만에 죽자 고향으로 쫓겨가 있던 천민 출신 이의민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의민 역시 살해당하고 마는데 그 주체가 바로 최충헌이었다. 이로써 최씨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1196년) 최충헌 정권의 등장은 고려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다. 그는 반복된 유혈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정권을 자손에게 세습토록 조치하였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후에 최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최우가 죽은 후 다시 최항, 최의 등으로 이어져 60여 년간 최씨 정권이 유지되었다. 최씨 정권 초기에는 어느 정도 국내 상황도 진전 국면으로 접어 들어섰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민란이 발생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 속에서 발생한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는 다시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몽고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인 때가 최씨정권의 2대인 최우가 집권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206년 징기스칸이 몽고제국을 건설하면서 대륙은 대변동에 휩쓸리게 되었다. 몽고는 서로는 동유럽, 동으로는 금나라 등을 정복하면서 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려와 몽고는 처음부터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접촉이 시작된 것은 거란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거란족은 당시 금나라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금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잠시 독립을 하였으나 이내 몽고에게 쫓겨 남하하게 되었다. 몽고군에게 몰린 나머지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고려는 대항군을 보내어 평양 동쪽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물리쳤다. 이때 북에서는 몽고군이 거란족을 협공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여.몽의 연합적인 작전이 벌어졌던 것이다.(1219년) 이 작전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는 형제맹약을 맺었다. 그런데 몽고는 이를 빌미삼아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몽고의 입장에서는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서 남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던 고려를 견제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따라 몽고는 사신 저고여를 보내 금품 등 공물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고려를 억압하려 하였다.(1221년) 곧 몽고의 무력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최우 정권은 몽고에 대한 방비를 논하고 1222년 의주, 화주, 철관 등 북방 지역에 성을 쌓았다. 이때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탈하여 고려는 남과 북 양쪽을 모두 방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최우는 나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고려는 가급적이면 몽고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연안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1225년) 몽고는 당연히 고려를 의심하고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몽고는 바로 고려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아직 몽고는 대륙에서 금나라와 남송 등과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고 또한 중앙아시아(서역) 정벌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1227년 징기스칸이 죽고 오고타이가 왕위에 오른 상황이어서 고려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은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벌인 전쟁이 다소 몽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남송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여야할 상황이 임박하자 몽고는 마침내 살리타이를 원수로 내세워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때가 1231년, 고종 18년이었다. 몽고의 침입에 고려군도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지금의 구성과 자산, 광주, 충주 등에서는 적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충주성 전투는 매우 유명하다.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지배층인 양반들이나 귀족들은 거의 도망을 쳤지만 하층민들인 농민, 노비들은 성을 지키면서 몽고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 후 충주성의 농민 등은 1253년 때에도 몽고군을 물리쳤다. 또한 관악산과 파주 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초적들이 대거 항몽전에 참가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로 개경이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의 입장에서도 고려의 저항이 완강하자 침입 4개월 만에 고려와 강화를 맺고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고는 계속해서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려는 사태가 점점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1232년 6월) 또한 백성들은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가게 하였다. 이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기전에 돌입하겠다는 뜻이며, 따라서 항몽을 선언하고 나선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낸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최씨정권은 전쟁으로 인해 실각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집권 연장을 위해 항몽을 선언했던 것이다.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간 백성들은 식량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 오히려 민심을 자극한 계기가 되었다. 최씨정권은 쿠데타로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몽고군에 대항하여 싸운 민중들을 조직적으로 이끌 이념도 뜻도 갖지 못했다. 강화도 천도는 오직 정권 유지 차원에서 나온 조치이며 소극적인 항몽 자세의 결과일 따름이다. 이러한 고려의 조치는 몽고를 더 자극하게 되었다. 1232년 12월, 몽고군은 2차 침입을 하여 온 나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적극적인 항전을 벌이지 못한 반면 백성들은 스스로 봉기하여 몽고군과 맞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천민들인 처인(용인) 부곡민들의 승리는 커다란 성과였다. 김윤후가 이끄는 부곡민들은 살리타이의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살리타이를 죽이고 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것은 당시 백성들의 항몽 자세가 어떠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였다. 이와 더불어 몽고군의 침탈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이 속출하였으며 귀한 문화재가 불에 소각되는 등 고려측이 입은 손실도 대단하였다. 몽고군은 유목 민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번 침입을 하면 전국 구석구석을 도륙하며 살상과 약탈을 일삼았다. 금나라의 경우 멸망(1234년)되기 전 화북지역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전 택주라는 곳에 5만 9천 416호의 가구가 있었는데 전쟁이 종식된 후 남은 것은 973호에 불과하였다고 하니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민가가 한 채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 들어온 몽고군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1254년에 시작되어 6년에 걸쳐 지속된 6차 침입 때 피해는 극에 달하였다. <고려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에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자는 남녀 합하여 20만 6천 8백여 명이며, 살육을 당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이 지나간 주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고군의 난이 있은 이래 이때처럼 혹심한 피해는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눌려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무신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도에 머문 채 강경책을 주장하는 등 대의명분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물론 최씨정권이 대몽 항전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자존에 어느 정도 기여한 바도 있다. 그러나 최씨 정권 자체가 독단적이고 위압적이어서 정책 차원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씨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즈음에 몽고군의 무력 침입도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가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1231년에서 1259년에 이르는 28년 동안 몽고군과 싸운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의병들이었다. 의병은 주로 농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도둑의 무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초적들도 대몽 항전에 참가하였다. 그렇다면 군대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정권을 장악한 최씨정권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사병 양성에 몰두하였다. 군인전이 사실상 붕괴되고 사병 양성에 따라 중앙군의 조직은 붕괴되어 당시 주요 군대는 최씨정권의 사병이 주력이었다. 몽고의 침입이 있자 중앙군의 후원을 받지 못한 지방군은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곧 군사 통제력마저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강화도 천도 이후 신변 보호를 위해 사병들을 모두 강화도를 지키게 하여 정권 유지의 첨병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때 국가 경찰로 운영된 집단이 삼별초였다. 따라서 몽고군과 주로 싸운 것은 일반 백성들이며 구체적으로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만큼 중앙정부는 정권 유지하기에도 힘에 겨워했던 것이니 이로 인해 유혈 투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최씨정권이 약화된 것은 최충헌, 최우 이후에 집권한 최항 때였다. 최우가 30여 년간 독재 정권을 유지하다가 1249년 사망하자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원래 최항은 서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물림의 대상은 아니었다. 최우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딸만이 있어서 사위인 김약선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서자인 만종과 만전을 입산시켜 승려 생활을 하게 하였다. 그런데 최우는 사위 세력을 제거한 뒤 만전을 환속시켜 후계자로 결정하였다. 이 만전이 바로 최항이다. 아마 사위와 알력이 생겨 이러한 번복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권을 잡은 최항은 새 집정으로서 상당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김약선과 이어지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혀 최씨정권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자 최항은 반대파를 대거 숙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 기반이 더욱 흔들렸다. 승려 생활을 하는 동안에 현실에 대한 감각을 배우지 못한 탓에 최항은 당시 대몽 정책에 대해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였으며 8년간 기존 세력에 의지하여 집정하다가 병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최의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주위 사람들의 인망을 얻지 못해 정권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1258년 별장 김준과 유사성 유경 등이 최의를 암살하고 최씨정권을 타도하였다. 이로써 4대에 걸쳐 60년간 지속되었던 최씨 무신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육지에서 백성들은 항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처럼 강화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정권 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당시 고려의 현실이었다.
강경책과 화친책의 갈등
최씨정권이 무너졌다고 무신정권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김준 등은 1268년에 임연에게 살해당하였고 임연이 병사한 후 아들인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집권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원종의 밀명을 받은 홍문계의 손에 죽고 말았다(1270년). 이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몽고와의 관계는 청산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섯 번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받는 동안 정부 내에서는 몽고와 계속 항전을 벌이자는 강경파와 속국으로서의 예를 갖추자는 화친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강경책은 주로 무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화친책은 문신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신들의 주장이 자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권 유지 차원에서 몽고와 항전을 벌이자는 뜻이었다. 문신들은 대국인 몽고와 항전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하면서 개경으로 환도하여 몽고와 화친을 맺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왕권 복위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수차례에 걸쳐 외교 교섭을 가졌다. 몽고는 즉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촉구하였고 고려는 군사적 침략을 중단한다면 환도를 고려하겠다고 대응하였다. 이러한 줄다리기 가운데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고군이 철수하기도 했던 것이며 이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집권 세력인 무신정권은 개경 환도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6차까지 가는 몽고군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며 점차 화친책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화친책이 사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중앙정부에서 몽고군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해 육지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가끔 삼별초가 육지로 나와 몽고군과 항전을 벌였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무신정권 유지를 위해 만든 군대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지휘하에 있던 삼별초는 지속적인 대몽 항전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화친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백성 가운데 생존자는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이고 농토는 황폐화되어가니 강화도 하나만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면서 무신정권의 무모한 강경책을 비판하였다. 강경책의 헛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만일 진정 무신정권이 몽고와 대적하여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군대를 양성하고 의병을 조직화하여 몽고와 싸워야 했다. 따라서 강화도에 머물면서 강경책을 주장한다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화친책이 대몽 관계의 정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물론 최씨정권 말기에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는 등 다소 온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몽고는 더욱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공작에 몰두하였고 결국 고려는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게 봤을 때 강경책이나 화친책 모두 문제가 있었다. 국가의 존립을 염두해두고 본다면 강경책을 쓰되 실질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군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화친책을 쓰되 그것을 전술적인 차원에서 역이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 구심점이 상실된 고려 말기의 정부는 뚜렷한 대몽 정책 방향이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해 결국 몽고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원종의 사대정책과 삼별초의 항쟁 : 김방경과 배중손
이제 삼별초의 항쟁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살펴볼 차례이다.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임금이었던 원종이 몽고 정부에 입조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보통 강대국이 국왕을 직접 입조하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태자들이 볼모 형식으로 입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종이 직접 입조하였다는 것은 고려가 완전히 몽고의 예속국이 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것을 뜻한다. 위에서 김준 등을 제거한 임연은 원래 원종과 제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자 몽고에 대해 항전을 계속 주장하였다. 임연이 이렇게 강경책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 등의 군대와 무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연은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 안경공을 즉위시켰다. 원종이 스스로 물러나 상왕의 자리에 앉는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이에 몽고는 내정 간섭의 기회라고 여기고 즉시 원종과 임연 모두 입조하라고 명령하였다. 몽고의 입장에서는 원종이 친몽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몽고에서 돌아오던 태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몽고의 세조에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하였다. 몽고군이 다시 침략할 기미를 보이자 임연은 이에 굴복하고 원종을 복위시킨 뒤 입조토록 하였다. 물론 임연은 가지 않았다. 원종 11년, 즉 1270년에 원종은 몽고의 세조를 만나 사대할 것을 약속하고 만다. 원종은 귀국하기에 앞서 먼저 전령을 강화도로 보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즈음에 강경책을 주장하던 임연이 등창으로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들 임유무가 자객 홍문계의 손에 죽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원종은 신변 안전을 위해 몽고군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원종이 입조의 길을 떠날 때 이미 강경파들은 고려가 몽고에 예속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임연은 죽기 전에 삼별초를 중심으로 입보 (비상 사태시 일단 안전 지역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하라고 명령해 놓았다. 임유무 역시 개경 환도의 명령이 떨어지자 당황하면서 삼별초에게 입보하라고 다그쳤다. 그런데 원종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역시 삼별초였다. 원종은 삼별초의 명부를 몽고에게 바치려고 압수하는 한편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만일 명부가 몽고의 손에 들어가면 삼별초는 그 기반부터 무너져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상황은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겉으로 봤을 때 삼별초의 반란은 해체 명령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또한 그동안 무신정권의 사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난은 다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제2의 무신 반란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쟁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삼별초의 창설 동기와 연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한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가 처음부터 3군으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다. 최씨정권의 2대 집정자인 최우는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는다'고 하면서 지금의 경찰 조직과 유사한 별초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주로 밤에 활동한다고 해서 이를 야별초라고 불렀는데 이후 그 수가 불어나자 2군으로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는 명칭을 붙였다. 야별초의 경우 경찰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몽고의 침입 이후 몽고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편성, 삼별초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삼별초가 구성된 것은 최씨 정권이 몰락하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별초는 국가 차원의 정예 군대라는 면보다는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적인 군대의 성격이 더 강했다. 삼별초는 대몽 항전에도 나서기도 했는데 지속적인 전투는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몽고와 접전을 벌이면서 삼별초의 군인들은 몽고에 대해 깊은 적의를 품게 되어 무신정권의 하수인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적인 차원에서 몽고의 침입을 대항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결국 삼별초 군인들은 본부를 제주도로 옮기면서까지 4년 동안 항쟁했던 것이다. 그 조직을 보면,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수도경비대 등 임무에 따라 군을 편성하였다. 이들은 왕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으며 수배된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삼별초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된 경위는 대몽 항전을 펼치면서이다. 삼별초는 정예 군대가 와해되자 이를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1253년 전후로 몽고군의 침략이 강경해지면서 정규군의 활동이 둔화되고 대신 삼별초가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는 정규전보다는 주로 기습전과 게릴라전에 능하여 몽고군을 수시로 괴롭혔으며 때로는 정면에서 몽고군을 함정에 빠뜨려 대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어디까지나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군대만으로 몽고군을 물리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실전을 쌓은 삼별초는 강화도 내의 정치 변동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삼별초가 주체가 되어 정치를 변화시킨 경우는 없었다. 대체로 세력을 잡은 무신들에 의해 삼별초는 움직여 나갔다. 삼별초가 나라의 재정으로 운영되고 녹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분명 사병은 아니었지만 최씨정권을 거치고 이후 등장한 무신들의 집권에 따라 삼별초는 사병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별초의 반란은 사병으로서의 역할이 끝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삼별초의 반란이 갖고 있는 복잡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때 편찬된 <고려사>에 보면 삼별초의 초기 지도자 배중손은 [반역열전]에 포함되어 있다. 즉 조선시대 지배층은 삼별초의 저항은 반역이었다고 규정한 것이다.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주장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삼별초를 이렇게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만은 없다. 삼별초는 분명히 군사조직이다. 그것도 정규군이 아닌 특수부대였다. 또한 무신정권이나 권신들의 세력이 이 삼별초에 의존하여 유지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원종의 몽고에 대한 태도와 정책에 내재되어 있었다. 원종의 입조는 왕권 회복을 뜻함과 동시에 화친책이 정세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270년 5월, 몽고에서 돌아온 원종은 고려군이 아닌 몽고군의 호위 아래 강화에 있던 군민들에게 위압적인 자세를 보이며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마치 원종은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원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몽고의 요구대로 개경으로 환도하되 매우 사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와 더불어 삼별초의 명부 압수와 해산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국왕은 몽고에 의존하여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원종이 개경 환도를 서두르자 그동안 대몽 항전을 벌여온 일반 백성들은 원종의 투항주의적인 자세에 반발을 하였다. 백성들은 30년 가까이 대몽 항전을 벌이면서 몽고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국왕이 항복과 다름없는 조치를 취하니 정부에 대해 등을 돌리고 만 것이다. 삼별초는 이러한 민심을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오랜 전쟁 기간 동안에 갖게 된 몽고에 대한 적의가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삼별초의 해체라는 것은 정규군이 와해된 처지에서는 사실상 국가 군대의 위치를 박탈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곧 적에 대해 무조건 항복하라는 명령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삼별초의 항쟁은 민중들의 반발을 토대로 하여 일어났다. 실제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육지에서는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의 항쟁이 병행되었다. 마침내 배중손과 야별초의 노영희 등은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손인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행정기구를 개편한 뒤 관리도 새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원종 왕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이 있어 항쟁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지 3일 뒤에 강화도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에 싣고 진도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이때 이동한 선박이 1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선박이 필요했던 것은 삼별초의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고 개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별초에 가담한 상당수의 노비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도에 새 정부를 세운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에 대비하여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궁성을 짓는 등 군사 시설을 완비해 나갔다. 그리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남부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나중에는 거제도, 제주도 등 주요 섬들이 모두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자진하여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찾아와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남하할 즈음에 전라도 토적참지정사로 파견나와 있던 신사전이나 전주부사 이빈 등은 삼별초의 세력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쳤다. 심지어 내륙의 전주, 나주 같은 도시들도 삼별초에 포위당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삼별초가 남부 지역을 석권해가자 몽고와 개경 정부는 커다란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개경 정부는 몽고군과 협의하여 진도의 삼별초를 정벌할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이미 삼별초가 남하할 무렵에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임명하여 몽고군과 함께 해상으로 추격하도록 조치해 놓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군사력이 워낙 강해서 함부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270년 9월, 개경 정부는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재임명하고 몽고 원수 아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11월,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는 진도 근처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였다. 처음에는 연합군이 이길 것 같았지만 전세는 삼별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김방경이 적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쓰고 개경으로 소환되었고 아해는 겁이 많아 싸우기도 전에 후퇴만 하다가 이듬해 1월에 다른 장수로 교체되는 등 첫 접전은 삼별초의 승리로 끝났다. 삼별초는 기세를 몰아 11월에 제주도를 점령하였고 멀리는 동래와 김해까지도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왔다. 이로써 삼별초는 남부 지역을 항쟁의 교두보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원종이 1271년에 몽고에 보낸 국서 내용을 보면, "경상.전라의 공부는 모두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수로로 운송하는데, 지금 역적이 수로의 목구멍인 진도에 진을 치고 있어 선박들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삼별초는 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 재정의 원천인 남부 지역의 조운이 차단되자 개경 정부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몽고 정부 역시 삼별초의 항쟁으로 일본 정벌을 늦출 수밖에 없었고 어렵게 이룬 고려와의 화평도 깨지게 되었다. 이에 몽고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진도로 보냈다. 그러나 삼별초는 오히려 몽고의 사신을 억류하는 등 회유책에 응하지 않았다. 몽고로서도 이제는 강경 대응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몽 연합군은 다시 진도를 공격하였고 이때마다 삼별초는 완강히 저항하였다. 드디어 여몽 연합군은 1271년 5월 15일에 김방경을 중심으로 삼별초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이때 몽고군의 사령관은 홍다구와 흔도였다. 그런데 이 총공세에 삼별초는 휘말리고 말았다. 이 무렵 삼별초는 여러 번에 걸쳐 전투에서 승리하자 방비를 소홀히 하였고 몽고가 회유책을 쓰자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를 찔린 것이었다. 그러나 방비가 허술해진 탓보다는 100여 척의 대군이 기습하였기 때문에 삼별초는 순식간에 연합군에게 패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배중손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말았으며 반개경 정부의 상징이었던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삼별초의 김통정은 잔류 군대를 이끌고 마지막 보루인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 다시 전열을 수습하고 재차 항쟁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삼별초가 진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하여 대몽고전을 펼칠 즈음 내륙에서는 민중들의 항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삼별초는 진도에 임시정부를 설치하면서 각 지방에 격문을 보내 항몽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적이 있다.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육지의 민중들이 호응한 면도 있지만 이보다는 30년 가까이 몽고의 침탈을 견뎌오며 다져진 전의를 바탕으로 마지막 일전을 벌일 결의를 했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내륙에서 일어난 항전의 대표적인 경우가 1271년 1월 밀성군(경남 밀양)에서 있었던 봉기였다. {고려사}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밀성군 사람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은 군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차 진도에 호응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부사 이이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일설에는 '호국'이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병마사라고 칭하면서 군현에 공문을 보내어 그 패거리를 파견하여 청도 감무 임종을 죽였다.
병마사라는 명칭은 여러 반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병마사라고 자칭할 수 있다는 것은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항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관노들의 폭동을 들 수 있다.
관노인 숭겸과 공덕 등은 그 도당을 모아 다로하치와 궁중의 벼슬하는 자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투항하려고 하였다. (중략) 탈타아는 홍다구 등과 더불어 재상들과 중신들을 모아 숭겸 등 십여 명을 체포하였다. 취조를 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그러나 내륙에서 벌인 항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유존혁이 이끄는 항쟁군은 진도가 점령당하는 시점까지도 남해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삼별초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남부 지역을 통괄함으로써 각 지방의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에 나섰다. 따라서 항몽전은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여 내륙의 민중들이 항전을 벌임으로써 확대되어 나갔다. 이러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만 삼별초는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마지막 항쟁에 돌입한 것이다.
삼별초의 최후 : 몽고에 대항하여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항전에 대비하여 내성과 외성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해변에 장성도 갖추었다. 따라서 제주도로 이동한 후 몇 달 동안은 성 쌓기에 바빠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다시 전투를 시작한 것은 11월에 이르러서였다. 삼별초는 다시 배를 타고 나가 남해안 지방과 내륙 지방을 공격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충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이 다시 본격화된 것은 해가 바뀐 127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별초는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 등 주요 섬들을 공략하여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3월에는 장흥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5월에는 전라남도 대포, 탐진 등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삼별초는 조운선을 탈취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고 전함을 노획하여 불살라 적의 기동력을 마비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몽고는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게 전함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러한 전함 건조 공장도 삼별초의 공격 대상이 되어 몽고의 전략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뿐 아니라 몽고군이나 고려 관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였다. 이것은 반몽고적이고 반정부적인 민심을 더욱 고무시키기 위한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몽고의 세조는 1272년 8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탐라(제주도) 공격에 주력하라고 촉구하였다. 세조는 일본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이 해 11월, 심지어 삼별초는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를 공격하여 부사와 그의 처를 납치해간 적도 있었다. 개경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몽고는 삼별초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세조의 명을 받은 홍다구 등이 김통정에게 공작을 벌이거나 제주초유사를 두 번이나 파견하는 등 다시 회유책을 쓰지만 삼별초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진도에서 이미 몽고의 회유책이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삼별초의 항쟁 의식은 고취되었다. 몽고는 결국 제주도를 무력으로 정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도 때와 똑같은 수순이었다. 1273년 4월,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은 160여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제주도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기습하였다. 이때 구성을 보면, 고려에서는 김방경이, 몽고에서는 흔도, 홍다구가 군사를 이끌고 상륙하였다. 이들은 모두 진도 공격에 경험이 있는 사령관들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삼별초와의 전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제주도는 유혈의 현장이 되었다. 삼별초는 연합군에 대적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보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통정은 70여 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후퇴하였으나 형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일설에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삼별초 가운데 1천 3백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연합군은 몽고군 5백 명, 고려군 1천 명을 제주도에 주둔시킴으로써 토벌 작전을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하여 삼별초는 1270년 6월 항쟁을 선언한 이후 만 4년 동안 치열한 항몽 대전을 벌이다가 1273년 4월에 장열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정부는 삼국 통일 당시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이후 처음으로 외세까지 끌여들여 토벌을 하였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항쟁은 분명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보다는 이 반란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삼별초는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삼별초의 저항에 부딪혀 일본 정벌과 남송 침략에 큰 차질을 입은 몽고 정부는 고려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 의식에 밀려 고려의 주권을 넘보지 못하였다. 물론 고려가 이후 몽고의 내정 간섭을 받는 등 속국으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주권 자체가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 몽고의 침입을 받은 아시아, 유럽을 통틀어서 고려만이 주권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려의 민중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항몽전을 펼쳤던가를 반증하는 셈이다. 즉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몽고는 고려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에 대항하여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난 최초의 군인 반란이었으며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반역 행위가 아닌 국가의 자존을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의 항쟁이 끝남으로써 무신정권 전후로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어 이후 고려는 원의 내정 간섭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ff 6.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천자의 죄를 얻을까 두려워 말머리를 돌린다'
천자에게 죄를 범해서는 안된다. 지금 말머리를 돌리지 않는다면 국가와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기 힘들다.'이것은 1388년(우왕 14) 명나라에 대항하여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할 때 내건 명분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쿠데타나 혁명은 모두 나름대로 일정한 명분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위화도 회군 역시 이러한 명분 아래 자행된 것이며 이후 이씨 조선이 성립되어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권을 유지하게 된다. 한번의 혁명에 의해 왕권이 이렇게 계속 유지된 탓에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는 간단하지 않다. 우선 가장 힘든 것은 사료 선택에 문제가 있다. 대체로 학계에서 회군의 전후 사정에 대해 말할 때 인용하는 사료는 <고려사>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태조인 이성계가 죽고난 뒤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또한 후대왕의 지휘 아래 편찬되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 여부를 가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뿐 아니라 태조 이래로 조선이 기울어질 때까지 모든 왕들이 그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관련된 기타 사료들 역시 건국에 대한 정통성 확립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큰 난점이다. 또한 조선의 역사는 근대와 현대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했다가는 역사적 왜곡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회군 자체에 대한 사건 나열식 접근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반을 살펴보고 대내외의 정세를 판단하여 사료 가운데 진실에 가까운 것을 선별한다면 어느 정도는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의문점이 가는 것은 당시 최영 등 막강한 군부 집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회군에 성공했는지 여부이다. 물론 회군 자체가 이성계가 강력한 추진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셈이지만 그가 뛰어난 군 지휘자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매우 혼란했던 당시의 동북아 정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주둔한 이유가 원래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요동 정벌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성립과 원나라의 몰락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던 1388년 전후의 정세, 넓게 잡자면 14세기 중엽의 동북아 정세에 일대 개편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멀리 동유럽까지 차지하고 있던 원나라의 몰락은 동북아의 국제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런 관계로 명과 원 교체기에 고려 내부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간의 정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나라는 전성기였던 13세기 중엽 이후 1세기 동안에도 끊임없이 일어난 폭동과 반란에 시달렸다. 원나라는 워낙 방대한 지역을 점령한 대제국으로 자리잡은 탓에 모든 곳을 중앙에서 일일이 통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중국 본토와 몽골 일대를 총괄하는 지역을 본국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변방으로 구분하여 '한'이라는 봉건영주에게 일임하여 분할 통치하였다. 바로 이러한 분할 통치가 원이 무너지는 화근이 되었다. 원나라는 노예사회에서 신분을 등급으로 표시하듯이 통치 지역에 속한 여러 종족들에 대해 심한 인종차별 정책을 썼다. 모든 종족들을 4등급으로 나누어 몽골족은 1등급에 두고 나머지를 셋으로 나누어 지배, 착취하였던 것이다. 특히 원나라는 양자강 이남에 속하는 남중국의 중국족을 4등급으로 규정하여 가장 심한 차별과 착취를 하였다. 이렇게 인종차별 정책을 쓰자 착취당하는 종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계속된 항거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원나라는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여 정권을 유지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원나라 정부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 이동과 공물 수납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해 사방 팔방으로 대도로망을 구축해 놓았지만 통치 지역이 워낙 방대하여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저항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원나라의 통치 기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엽 순종 때부터였다. 그는 라마교의 광신도여서 자기 만족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찰을 짓고 공양을 드리는 등 국고를 탕진하였다. 또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이를 위해 온갖 명목을 내세워 각 지역에 대해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방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중국에서 일어난 주원장의 세력이다. 종족 가운데 4등급으로 분류되어 가장 심한 억압과 착취를 당한 남중국의 농민들은 주원장의 휘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반란 초기 주원장은 농민군의 대장이었지만 차츰 세력권이 커지자 1368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명'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명나라가 성립된 것이다. 주원장은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내친 김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다는 전략에 따라 북으로 진격하여 승승장구 끝에 마침내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 정부를 북쪽 몽골 지역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축출된 원나라를 당시 고려에서는 북원이라고 불렀다. 주원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을 넘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곳과 인접한 곳에 고려가 있었으니 명나라와 고려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물론 고려가 명나라에게 단순히 사대정책을 써서 압록강 이북 지역에 대해 포기를 했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원나라가 몰락해가자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수복운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성계의 등장, 그의 혁혁한 전공
원나라의 몰락은 고려 정계 개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별초의 항쟁이 실패한 이후로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 시달리던 고려는 다시 국권을 회복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원명 교체기에 고려를 통치한 왕은 공민왕(1351-1374)이었다. 그는 순종 즉위 후 원나라의 통치 기반이 문란해지고 주원장의 등장으로 중국 전역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이를 국권 회복의 호기로 여기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친원파의 거두인 기씨 일족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기씨 일족의 대표는 기철이었는데, 그의 누이가 원나라 왕실의 제2 황후가 되었고 그 소생이 책봉되어 소종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평장정사가 되는 등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또한 자기의 딸을 원의 왕실에 바쳐 고려 왕권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몰락으로 기씨 일족의 친원 행각은 공민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 몰려 처형당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공민왕은 원나라가 초기 고려를 속국으로 삼을 때 일본 정벌을 구실로 내세워 개경에 설치한 내정 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을 철폐시켰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는 원나라식 변발을 금하는 등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국권 회복운동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북진정책이다.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개국 이래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옛 영토 수복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국제 관계의 다변성과 내부 혼란으로 그 운동의 맥이 끊어진 상태였다. 공민왕의 북진정책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의 잔류 세력을 처단하지 않으면 언제 남침을 감행할지 모르기 때문에 원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이를 방비하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공민왕의 북진정책은 국권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삼국 통일 이래로 끊어진 국운 회복이라는 민족적 사명 의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356년, 공민왕은 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압록강 너머에 있는 원나라의 주요 거점지를 공격하였다. 또한 화령부(영흥)에 설치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쳐서 그 일대를 수복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이 바로 이성계의 출생지였다. 이미 그 당시 함경도 일대에서 자체 세력을 키우고 있던 그의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는 군대를 일으켜 고려 원정군과 합세하였다. 두 사람은 원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인 이안사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여진족의 터전인 남경(간도 지방)에 정착하여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안사는 차츰 이 지역에서 기반을 잡게 되어 그의 아들 행리와 손자 춘 등은 대를 이어 두만강 일대와 덕원 지방의 천호로서 원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이자춘 역시 원나라의 총관부가 설치된 쌍성의 천호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성계의 가문은 오랜 시간을 두고 쌍성 일대에서 세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정군이 총관부를 칠 때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이성계 부자의 공을 인정하여 나중에 벼슬을 내리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역사의 무대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1361년 이성계는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관직을 얻어 함경도 일대에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정식으로 고려 정부에 등용되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한편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북원 정부는 요양성으로 도망하여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나하추(납합출)에게 고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나하추는 원래 원나라의 유신이었는데 고려 말에 심양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장악하여 주로 여진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나하추는 주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려 침범을 다소 늦추었다. 중국 유랑민으로 이루어진 홍건적이 강성해져 고려 북방 지역을 침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추는 남침을 감행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하추는 홍건적과 고려의 싸움을 주시하여 고려의 힘이 약화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하추 군대와 고려의 전투가 벌어진 때는 1362년에 와서였다. 이해 2월 나하추의 군대는 지금의 함경남도에 속한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북면도지휘사 정휘가 나가 여러번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 군대를 격퇴하라고 명령하였다. 같은 해 7월, 나하추 주력 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 나하추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휘하 지휘관에게 선봉부대 천여 명을 주어 이성계의 군대와 맞서게 하였다. 두 군대는 덕산동 원평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이성계의 군대가 첫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는 도망가는 나하추의 선봉 부대를 뒤쫓아가 거의 섬멸시켰다.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덕산동으로 옮겨 전열을 수습하고 전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집요하게 이를 추적하여 달단동에서 나하추를 격퇴하고 다시 함흥 벌방 지대에서 잔병들을 섬멸하니 나하추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자기 본거지로 도망갔다. 이후에도 동북 지방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인들의 반란이 있었으나 이때마다 이성계는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나하추 격퇴와 여진족 반란을 수습한 이성계는 고려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점차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고려 정부가 이성계를 나하추 정벌에 나서게 했던 것은 그전에 이미 다른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하추의 침범이 있기 전 해인 1361년에 홍건적의 2차 대규모 침략이 있었다. 이 해 11월, 고려 정부는 서울인 개경을 내주고 지금의 안동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군은 이듬해인 1362년 1월에 총동원령을 내려 개경을 포위하여 수복 작전을 펼쳤는데, 이성계는 이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건적을 쳐서 고려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1361년에 있었던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는 상태였다. 이런 연유로 고려 정부는 이성계가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추 격퇴에 그를 기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하추의 몰락은 뒷날 명나라가 요동 일대에 대한 공략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하추는 고려 군대와 싸워 진 뒤에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였고, 명나라 입장에서는 동북 지방 진출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걸림돌을 제거하게 되어 적극적으로 요동 공략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고려 정부는 어느 정도 압록강 일대 수복에 성공하였으나 외침은 여기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성계의 활동도 더욱 분주해졌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철의 누이동생은 원나라 순종의 황후가 되어 있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자기 일족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민왕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원나라에는 고려 출신으로 관직을 얻어 살고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최유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고려 내부에서 친원파가 몰락해가고 있다는 말에 초조해 하다가 기황후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묘한 술책을 썼다. 그는 기황후를 찾아가, 아직 고려에는 내응 세력(대표로는 김용이라는 자가 있었다.)이 있고 게다가 원나라에 충선왕의 아들인 덕흥군(그는 일찌기 중이 되어 원나라에 도망와 있었다.)이 살아있으니 순종의 명에 따라 그를 고려의 새 왕으로 삼아 공민왕을 처단하자고 설득하였다. 기황후는 이를 흔쾌히 승락하여 순종의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 순종은 공민왕을 폐한다고 공포하면서 덕흥군을 새 왕으로 지명하였다. 또한 최유를 정승, 김용을 판삼사사에 임명하는 등 기황후의 청원대로 고려 정부에 대한 내정 간섭을 자행하였다. 순종은 덕흥군 일파에게 요양에 있는 군사를 내주어 고려로 향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이에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일단 사신을 보내 순종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중간에서 최유가 서신과 예물을 가로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설사 그 서신이 순종에게 도착하였다고 하여도 기황후의 모략으로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자 무력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덕흥군의 부대가 남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안우경, 이구수, 이수, 이인임, 정찬 등을 시켜 방비에 나섰다. 양군은 점차적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의주였다. 이 성을 지키고 있던 자는 안우경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최유의 부대 일만여 명은 처음엔 열세에 놓여 패색이 짙었지만 지원군이 없다는 것을 안 최유는 다시 공략하여 안우경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에 안우경은 안주로 도망갔다. 의주가 함락됐다는 보고에 접한 고려 정부는 최영을 급파하여 도망가는 군사들의 목을 베어 죽이는 등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또한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천여 명을 주어 합동작전을 펴게 하였다. 최영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정주에 주둔하여 덕흥군의 부대 동정을 살폈다. 이미 적군은 달천까지 남하한 상태였다. 다음날 덕흥군의 부대는 셋으로 나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에 고려군도 셋으로 나뉘어 중앙은 이성계가 맡도록 했다. 이성계는 적장 몇 명을 활로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는 등 중앙 돌파에 성공하여 덕흥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덕흥군의 부대는 고려군의 전술에 말려 거의 섬멸당하고 덕흥군은 간신히 원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공민왕은 다시 왕권을 잡게 되었고 이성계는 또 한번 큰 공을 세운 결과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까지 이성계의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이성계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어냈다. 명나라의 성립으로 북으로 쫓겨간 기회를 이용하여 만주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운 공민왕의 명에 따라 이성계는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또한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우왕 때에는 이성계는 활동 영역을 남부 지방까지 넓혀 나갔다. 그는 왜구와의 싸움에도 나섰던 것이다. 일본은 원나라의 침범을 받던 14세기 전후로 하여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호죠 정권이 무너지자 정권을 잡기 위한 내란이 벌어졌는데 아시까가라는 사무라이가 등장하여 막부를 세워 호죠 정권의 빈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내분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부의 수단으로 일본 봉건영주들은 인접 국가에 대한 침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사까, 사까이 등을 중심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들이 군대를 세워 가세하였다. 당시 고려는 이러한 일본 영주들이나 상인집단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1376년에는 충청도 공주가 함락될 정도로 왜구의 침범은 약탈질에서 벗어나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였다. 고려는 지방군을 새로 개편하여 왜구와 대처하게 하였다. 이때 이성계도 남하하여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이성계는 1377년(우왕 3)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고 1380년에는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이때의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 등장한 것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화통이었다. 바다에서 기선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고려는 수군을 창설한 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화통을 응용하여 포를 쏘아 왜구의 선박을 물리칠 수 있었다.) 1382년에 여진인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를 격퇴하였고 1385년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때부터 '위화도 회군'이 있던 1388년에 이르기까지 삼십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이성계는 드디어 수문하시중이라는 고위 관직에 올라 최영과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그의 전기에 관련된 기록이 대체로 {고려사}와 {동국병감}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세 관료 지식인들이 이씨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고려말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북진정책이나 왜구 섬멸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가 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고 말았을까.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의 전적으로 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이제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회군 직전의 '명과 고려의 관계'와 '고려말 정치경제적 상황'을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할 것 같다.
'위화도 회군' 직전의 국내외 정세
사실 이성계가 활동하던 14세기 중엽의 국내 정치, 경제 상황은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한반도에 위치한 관계로 정책 수립에 반드시 인접 국가나 종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관계로 국제 관계의 변화에 따라 관료 정치인들의 행각도 여러 편차를 보였다. 지금 흔히 사용하는 '동북아 정세'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미 고조선 이래로 복잡성을 띤 주변 정세를 집약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역사상 각 시대의 정치 변동은 늘 주변 정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고려 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되기 전에도 화친책과 강경책으로 나누어졌듯이 원명 교체기였던 14세기 중엽 이후에는 친원파와 친명파로 파벌이 형성되었다. 또한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온건과 강경으로 다시 세분화되는 것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때의 국내 정치 관료들 사이의 내분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근대화 이후의 정치가 자본과 맞물려 있다면 근대 이전의 정치는, 특히 중세 시대에는 토지 문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고려 시대의 민란이나, 조선 시대에 있었던 대부분의 민란은 바로 이 토지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대토지 확대로 빚어진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역대 왕들은 여러 형태의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족과 귀족(또는 양반)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단행된 것이기 때문에 생산의 주체인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소유나 권한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자영농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다른 부문에서 수탈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려 말기는 이러한 경제적, 계급적 모순이 극대화된 때였다. 918년 건국된 고려는 11세기를 기점으로 전성기를 이루다가 12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무신정권을 거치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중앙 통제 기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토지의 겸병이었다. 토지 겸병은 주로 귀족들과 기성관료, 그리고 사원과 지방 토호들에 의해 횡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 계층은 급격히 분해되어 대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피해를 보는 것은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전의 확대로 상대적으로 공전이 점차 감소되어 나중에는 신진관료들에게 줄 토지와 녹봉마저 모자랄 형편이었다. 이러한 대토지 확대 현상(당시 권세가들은 농장식으로 경영하였다.)는 특히 무신정권과 원나라 내정 간섭기에 보편화되어 전면적인 개혁이 없이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비교하자면,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매년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국가와 농촌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려 말에는 대농장의 횡포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계층은 역시 신진관료들이다. 고려 말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둔 신진 세력들은 기존 관료 계층처럼 특권이나 음서제도를 통해 등용하지 않고 정식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경제적 기반이 미약한 지방 소외 계층들이었다. 이들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침탈에 피해를 입었다. 물론 공민왕은 이러한 경제적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승려 신돈을 기용하여 일대 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공민왕은 1366년, 신돈의 제의에 따라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세신대족 등 대지주가 차지한 토지와 노비들을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해주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또한 대지주들에 의해 양민 신분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에게도 본래의 신분을 찾도록 해주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당연히 대지주 등 기득권 세력들이었다. 이때 친원파의 핵심인 기씨 일족이 소탕된 뒤였으나 그것으로 매국적 행각을 벌인 모든 계층들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 뿌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신돈이 반역 음모를 꾸민다고 중상하여 1371년에 그를 처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민변정 정책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정도전 등 일부 신흥사대부들이 개혁에 참여하였지만 힘이 미미하여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보수 세력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인임, 염홍방, 임견미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친원파에 속해 있었다.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토지 겸병에 박차를 가하고 세력 확장에만 힘쓰는 등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이인임 등이 친원적인 주장을 펼친 것은 명나라를 반대하여 국운을 바로세우고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의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북원이 몰락해가고 명나라의 세력이 한반도 북방 지역까지 미칠 조짐이 보이자 이인임 등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처음으로 외교 문제로 부닺힌 것은 역시 영토 문제였다. 명나라는 제주도가 원나라의 점령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점령지였던 곳을 다시 차지하여 중국을 통일한다는 내용의 구호를 앞세워 영토 확장의 명목으로 삼고 있었다. 위화도 회군의 불씨가 된 요동 침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어쨌든 명나라는 1374년에 고려에게 제주도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다. 삼별초의 항쟁으로 유명한 이 섬은 당시 원나라의 침공 이후 그들의 말 목장이 되어 몽골 목부들이 아직 잔재하여 있었다. 이들은 본국이 몰락해가자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최영이 이끄는 수만 명의 토벌군이 나서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러자 명나라는 고려에게 말 오만 필을 바치라고 협박하였다. 고려는 강대해진 명나라와 아직은 섣불리 접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 제주도에서 얻은 말 가운데 일부를 명나라에게 주기로 하였다. 명나라의 사신은 이미 개경에 와 있었다. 사신은 거만한 태도로 일의 진척이 늦어진다고 다그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고려의 호송관이 압록강을 건너서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을 빌미로 명나라는 더욱 고려에 대해 강경 태도를 견지하였고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한편 고려 정계에서는 이인임 등의 친원파에 대한 일대 숙청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조반이라는 지주의 땅을 염홍방의 가신인 이광이 강제로 빼앗았는데, 이에 격분한 조반은 이광을 죽이고 그의 집에 불을 지른 데서 시작되었다. 염홍방은 조반을 반역자로 몰아 옥에 가두었다. 이즈음에 명나라가 고려에 말을 공물로 바치라는 협박을 할 때였다. 처음에는 친원파의 세력에 밀려 미약한 왕권만을 유지하고 있던 우왕(1374-1388)은 최영에게 국내외 문제를 논의하였고 최영은 왕명에 따라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때가 1388년이었다. 이후 수탈체제를 반대해온 최영,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세력을 잡게 되었고 최영은 수상격인 문하시중이 되었고 이성계는 그 밑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이념을 갖고 친원 세력을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이나 정몽주 등은 고려를 부흥시키고 국토 수복을 하여 기존 체제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나 정도전은 혁명을 통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은 이인임 등 대농장 소유자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입장을 취했으나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최영은 다소 온건적이었고 이성계는 급진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연령의 차이에서 비롯된 면도 있지만 최영은 고려 자체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단행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화도 회군 이전을 볼 때 역사 기록에는 두 파벌간에 정치적 분쟁이 될 만한 사건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봐서 이미 두 계열은 동상이몽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은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일어난 쿠데타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해둘 수 있다. 조선 건국의 공신인 정도전은 9년간의 유랑 생활 끝에 1383년에 동북면 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직접 찾아간 일이 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해서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성계가 회군 당시 내세운 주장을 분석해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 위화도 회군
명나라는 영토 확장을 위해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중원을 어느 정도 정비한 다음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에게 위협하였다. 제주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길 때와 같은 명분을 내세워, 이 땅이 원나라 당시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원이 몰락한 후에는 당연히 명나라가 소유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미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으로 매우 긴장된 상태였는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한 뒤 같은 해 3월에 관리들을 강계에 들여보내자 고려 정부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명나라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최영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곧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바로 고려를 예속시키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중세사회에서,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군대를 일괄적으로 통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후방의 소홀함을 견지하기 위해 최영을 팔도의 도통사로 임명하여 그에게 모든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가 같은 해 4월이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명나라라는 강국인 만큼 상당한 군사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각도에서 군사를 징집, 육만 명에 이르는 원정군을 모으게 되었다. 또한 후방 대비를 위해 세자와 여러 비들을 한양산성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를 시켜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로 가 요동 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한 우왕은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등을 그 휘하에 배속시키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좌, 우군을 편성하였다. 최영을 중심으로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한 셈이다. 그중의 한 부대를 이성계가 총지휘했으니 이성계의 정치적, 군사적 지위가 얼마나 상승되어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고, 이성계와 최영은 군사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1388년 5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하여 위화도에 주둔하게 되었다.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부대는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을 알고 도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서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우왕에게 상소하여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 요점은 이러하다.({고려사}에는 출정 전부터 이성계가 이에 대해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계속하여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불가능성을 상소하였다.)
1)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2)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다. 3)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범할 것이다. 4)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져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그러나 평양에 머무르면서 독전하고 있던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요동 정벌을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이성계에게 강을 건너라는 어명이 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강을 건너든지 아니면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 등은 최영의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사로잡은 뒤 그를 고봉현으로 유배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창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상이 위화도 회군의 과정을 간단히 추린 내용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가 내세운 사불가론이 정당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은 이성계의 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대목마다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사불가론 : 정당한 주장인가, 쿠데타의 구실인가
먼저 이성계가 첫번째로 내세운 이소역대, 다시 말해서 조선은 명나라를 칠 수 없다는 다분히 사대적인 명분을 살펴보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성계는 북방 지역은 물론 남부 지역에서도 놀라운 전과를 세웠다. 그의 전공만을 살펴본다면 이성계는 당연히 압록강을 건너 요동 정벌에 호응했어야 했다. 그런데 돌연히 명나라를 대국이라 칭하면서 천자의 죄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머리를 남으로 돌렸다. 게다가 이성계가 회군 전에 명나라 정부와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욱 납득이 안가는 이유는, 오랜 수대에 걸친 왕조를 거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 시달려오던 고려가 그 고리를 끊고 간신히 자주권을 회복하고 구강을 수복할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성계의 회군이 이미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성계가 여러 전과를 올리면서 중앙 관직에 진출하면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신진관료들이다. 뒷날 조선 건국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도전을 비롯하여 조준, 윤소종 등의 인물들과 이성계 사이에 급진 개혁이나 혁명에 대한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 신진관료들은 엘리트 계층이지만 세신대족에 비하면 지방 소지주에 불과하여 기득권 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닦아온 신진 세력들은 고려 말기의 사회를 보는 시각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이들은 유학적 이상국가 실현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상국가는 안으로는 민본사상과 왕도정치 구현에 있지만 밖으로는 중국을 유교의 종주국으로 여겨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사대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질서의 개념이 구체화된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신분에 의한 질서,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질서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성계도 역시 성리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어 갔을 것이며 따라서 요동 정벌은 그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국운 회복운동보다 유교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목적이었다. 나중에 조선을 건국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운 것을 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이성계가 첫번째 내세운 이소역대의 명분은 단순히 쿠데타의 구실이라기보다는 사상적 결실이며,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주장이었다. 그에게는 내부 혁명이 더 중요했다. 조선 왕조의 사대주의는 이렇게 해서 국책으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내세운 불가론은,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출병 당시 시점이 5월이므로 분명히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임은 틀림없다. 군사를 일반 농민 가운데 징집하여 채웠던 실정으로 봤을 때 일면 그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미 전에 농번기에도 군대는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국가의 존립이 촌각에 달렸을 때 중세사회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만일 이런 병폐를 없애려면 지금처럼 일정한 규정하에 전문적인 군대를 키웠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점은 전혀 시정되지 않아 일반 농민들은 여전히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은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는 전근대적인 국가가 갖는 시대적인 한계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성계의 군사들은 그의 오랜 전적으로 비추어 볼 때 사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전공이 가능했던 원인은 이성계가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점은 물론이고 군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위화도에 머무는 동안 도망가는 군사들이나 병들어 쓰러지는 군사들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체 전력 면에서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성계는 가을에는 군량미 공급이 수월하니 좀더 기다리자고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요동 정벌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정벌 시기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성계의 진짜 의중을 알기가 쉽지 않다. 결국 위화도 회군 전후의 정세를 판단해볼 때 이성계는 전부터 급진적인 변혁을 꿈꾸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외세와 싸우는 일보다는 우선 국내 개혁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요동 정벌론이 대두되었을 때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일단 출정 명령에 복종하여 위화도에 머문 것은 변혁의 주도권을 잡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번째로 이성계가 내세운 왜구 침입에 대한 우려는 당시 이미 고려 수군이 창설된 뒤이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지방군 전체가 이 원정군에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왜구에 대처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오랜 전쟁 경험을 갖고 있는 최영 등이 이러한 상황을 소홀히 여겼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요동 정벌을 빠른 시일 안에 마친다면 다시 원정군을 개편하여 왜구 토벌에 나서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이 점은 당시 다른 부대의 진격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에 니성에서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이성계와 좌도 도통사 조민수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에 접한 요동 주둔군은 이미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섰으니 만일 원정군이 도착하여 도강을 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환성 원수 홍인규, 강계 원수 이의 등이 먼저 요동에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요동민들은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요동 정벌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막강한 홍건적 등을 물리친 이성계가 만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쳤다면 그의 전적으로 보아 명나라는 퇴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봤을 때 세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변명에 지나지 않다. 네번쩨 불가론인 습기에 활을 사용할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많다는 주장 역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용병술을 지닌 이성계에게 이런 문제는 사실 큰 장애 요소가 아니었다. 오랜 전투 경험을 가진 그로서 우기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가 내습하는 한겨울에도 그는 군사를 지휘한 사람이다. 물론 원정 도중에 도망치는 군사가 생기고 실제로 병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탈영을 방지하고 위생에 주의를 주어 환자 발생률을 줄여 나가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원정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볼 때, 이 네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구실인 셈이다. 더욱이 이성계는 이런 내용을 상소함으로써 자기 군사들로부터 더욱 굳은 신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로 나가기 꺼려하는 것이 모든 군인들의 생리라고 봤을 때 그는 이것을 일종의 회군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한 세력 규합으로 이용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결국 네 가지 불가론 가운데 이성계가 실질적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첫번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것 역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이성계는 나름대로 계산이 서있었다. 그는 우선 세력 장악이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세를 견지할 만한 이념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사실 조선 왕조가 성립된 뒤에 이성계는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국가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성계의 사대주의는 분명 하나의 정책 차원에서 나온 이념이다. 그러나 이 사대주의는 16세기를 지나면서 껍질만 남은 대의명분으로만 남아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위화도 회군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과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사실 고려 말기는 개인 소유의 대농장 확대로 농촌 경제는 파탄 지경에 있었다. 봉건적 국가에서 토지 자체가 국가적 운영이 불가능해지면 그러한 모순은 모든 계층에 확산되어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될수록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도 한층 깊어져 사회 전반에 동요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고려 말기에는 민중들의 적극적인 저항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의지가 신흥사대부들이나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장들에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안고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것이지, 우발적으로 발생한 행위는 아니었다. 이후 과전법을 실시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지만 지금의 복지정책과 같은 농민 위주의 정책을 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봉건적 사회가 갖는 시대적 한계점이지만, 또한 이것이 붕괴되면서 근대화의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즉 한국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볼 때 조선 건국은 나름대로 봉건질서가 한층 발전되는 전환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결국 위화도 회군은 외세와의 전쟁이나 영토 확장보다는 국가 혁명을 더욱 중시한 신진 세력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일어났던 사건이었으며 이로써 한국 역사는 큰 전환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ff 7.수양대군의 쿠데타 : 조선중기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계유정난(1453년)
그는 조카는 물론이고 동생 둘을 죽였다- 언뜻 들으면 일간지 사회면에서 볼 수 있는 머릿기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수백 년 전 조선 왕조 역사 가운데 벌어진 왕위 찬탈의 결과였다. 수양대군(세조)은 조선 5대 왕인 문종의 동생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학문은 물론이고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래 진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는 세종의 명에 따라 김수온 등과 함께 불서 번역을 감독하였고 향악 악보 정리도 관장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 불교 중흥에 힘쓴 것을 봐도 그가 불교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세조의 불교 정책은 유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2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치,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부흥시대를 이룩한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1452년에 이르러서는 관습도감도제조라는 직책에 임명되어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해에 원래 몸이 약했던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2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왕위를 이을 세자는 12살밖에 안 되었다. 그가 바로 단종(1452-1455)이다. 이런 점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이 세종은 말년에 김종서, 황보 인 등 충신들에게 문종을 잘 보필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런데 문종은 죽었다. 당시 일반적인 관례에 따르면 나이 어린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가장 서열이 높은 왕비가 수렴청정(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발을 친 뒤에서 국사를 지시한다는 뜻으로,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국가를 이끌어가는 대리정치를 뜻한다.)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정상 대왕대비도 없었을 뿐더러 단종의 친모는 해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욕열로 죽은 뒤였다. 세종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가 있었으나 별다른 권한을 지니고 있지 못한 형편이었다. 왕의 나이는 어리고 그렇다고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되지 못한 탓에 단종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서와 황보 인이며 그 밑으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세대들인 성삼문 등이 단종의 주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세종에게는 친아들만 해도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가장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수양대군이 형이긴 하지만 겨우 한 살 차이여서 그런지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서로 경쟁 의식을 갖고 살아왔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할 즈음에 두 사람의 경쟁심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알려질 만큼 학문은 물론이고 그림과 시문, 서예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즉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실제로 문인들이나 학자들과 모여 시회를 갖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안평대군은 김종서나 황보 인,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또한 무예에도 뛰어나 1438년에 육진이 신설되자 여진족 토벌에 앞장선 일도 있었다. 따라서 수양대군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지만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수양대군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을 경계하면서 고명 대신들인 김종서와 황보인 등과 전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일반적으로 수양대군이 역모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단종 즉위 원년 초기부터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온 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안평대군이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의 주변에 권람, 한명회 등 모사꾼들이 모여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카의 왕위 보존을 위해 주위에서 보필할 생각을 갖고 인사 행정기관의 하나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양대군은 심복 세력을 키워가면서 거사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는 단종 즉위 원년인 1452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자 우선 안평대군의 세력권인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그는 안평대군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명나라로 떠나기 전에 권람 등에게 자신의 야망을 털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신진 세대의 한 사람인 신숙주를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 등의 무사들도 몰래 양성하였다. 어느 정도 역모 세력이 형성되자 수양대군은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 일파는 반대 세력의 핵심인 김종서를 제일 먼저 해치우자고 결정짓고, 심야에 급한 서류가 있어 왔다고 속이면서 김종서의 집을 급습, 그를 단숨에 철퇴로 내리쳐 살해하였다. 그리고 황보인, 이양 등 주요 대신들을 급한 왕명이 있다고 속여 궁문으로 오게 하여 역시 살해하였다. 주요 반대 세력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자기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후에 교동으로 옮겼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 과정에서 삼정승은 물론이고 평소 자기의 세력과 반대된 입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은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반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렇게 해도 안심이 안 되는지 멀리 변방에 있는 김종서의 심복이었던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박호문이라는 자를 대신 임명하였다. 그는 당시 함길도절도사로 복무하고 있었다.(이것이 '이징옥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유혈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내외병마절도사 등 여러 중직을 독점하는 한편, 쿠데타에 공을 세운 정인지, 권람, 한명회 등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여 난을 수습하여 나갔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살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세조는 이 당시 성삼문 등 신진 세력을 같이 제거하지 않았을까. 물론 수양대군이 세력을 잡는 과정이나 그 후에도 신진 관료들 중에는 그를 추종하게 된 자들도 있어서 수양대군으서는 그들을 회유의 대상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성삼문 등이 김종서 등 고위 관리들의 대리정치에도 비판적이었다는 데 있다. 그런 점을 수양대군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단종 복위운동을 펼칠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장차 수양대군이 정식으로 왕이 되었을 때 귀히 쓸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김종서 등은 단종을 보필하기 위해 주로 의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합의 형식으로 정사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정부의 기능이 너무 확대되어 상대적으로 왕의 권한은 미약해져 왕의 존재조차 느끼기 힘들 때가 많았다고 한다. 신진 관료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며 그 가운데는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한 인물들도 나왔던 것이다. 성삼문 등도 역시 의정부의 월권 행위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종서 등이 왕위를 전복할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종서 등은 세종의 유언에 따라 여타의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단종을 보호할 생각을 하다 보니 과도한 행동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던 신진 관료들이었지만 단종을 따르는 이들로서는 김종서 등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던중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키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일부 신진 관료들은 수양대군의 난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데에 합의하고 단종을 복위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사육신이 생겨나게 된다. 다시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충신 대부분을 잃은 단종은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 빼고는 모든 관직과 권한을 차지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역모하려던 세력을 제거했다고 알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보필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대신 실권을 차지하고 내각을 정리하면서 반란의 정당성을 알리는 홍보정책에 주력하였다. 이것은 적법적인 절차를 거쳐 왕에 오르기 위한 사전책이었다. 그는 조카를 내몰고 강제로 왕위에 오르기를 매우 꺼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양대군에 대해 무력적인 반기를 든 이가 바로 이징옥이었다.
이징옥의 반란
수양대군이 이징옥을 파면 조치한 점만 봐도 이징옥이 당시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이 김종서와는 절친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그를 첫번째 제거 대상으로 꼽았다. 이징옥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담력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를 위해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오는가 하면 호랑이를 호령할 정도였다고 하니 비록 이것을 일화라고 친다 해도 그가 타고난 장사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416년 8월에 무과 별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세종 5년인 1423년에는 황상의 추천으로 경원첨절제사에 임명되어 아산에 침범한 여진족을 격퇴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430년까지 여진족 토벌에 앞장서게 되었다. 경원첨절제사에 임명될 당시의 이징옥에 대해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처음 징옥이 사복시라는 벼슬 자리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의 재주를 모르더니, 황상이 그를 천거하여 북방의 장이 되자, 이에 그의 출중한 재주를 알게 되었다.
1436년에 회령절제사가 되었다가 같은 해에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당시 함길도 절세사였던 김종서를 만나 4군 6진 개척 사업에 동참하여 2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징옥은 여진족에게는 가장 두려운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의 공적에 대해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근래 10여년간 여진족이 우리 국경을 넘보지 못한 것은 전시귀, 이징옥, 하경복 등이 잘 싸워 이긴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함부로 여진족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았으며 해당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어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무장으로서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선정을 베푸니 여진족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진족들이 이징옥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여자나 재물을 갖고 찾아와도 그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그들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렇게 봤을 때 이징옥은 청렴결백한 무장이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따라서 김종서를 스승 이상의 존재로 받든 것은 그의 인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이러한 이징옥에 대한 김종서의 평가를 들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징석(그의 형)과 징옥은 다 명장이다. 그러나 징석은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기에 부지런하고 징옥은 청렴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일찍이 징옥에게 일러 말하기를 '청백은 무복인의 별호니라' 하였다.
1435년을 전후하여 동북 개척이 안정을 이루어 나가자 중앙정부에서는 여진족에 대해 회유와 동화정책을 폈다. 이에 한시름을 놓은 이징옥은 모친상을 당해 1438년에 함길도를 떠났다가 세 달 후에 경상도와 평안도의 절제사를 두루 거치게 되었다. 세종이 죽기 한 해 전인 1449년에 그는 20여 년 동안 세운 북방 개척의 공을 인정받아 지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 다시 그에게 북방 책임이 주어져 전에 김종서가 맡은 적이 있었던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종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이징옥은 몸을 아끼지 않고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이징옥은 생애의 대부분을 북방 개척에 바쳐 조선이 안정적인 국방 쳬계를 갖추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문종실록}은 이러한 이징옥의 헌신적인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도 절제사 이징옥은 가산을 돌보지 않고 오래 변방에 임사하여 생계가 본래 어려웠다. 또 그의 처가 죽은 지 이미 오래니 누가 그의 옷을 줄 것인가. 왕이 이 말을 듣고 명하여 옷 세 벌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청렴결백의 무장 이징옥은 김종서의 총애와 후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이 북방 개척에 공을 세운 사이이며, 둘 다 무장이었던 점 등 공통점이 많아 스승과 제자같이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수양대군은 쿠데타 뒤처리를 위해 변방의 이징옥에게도 손을 뻗쳤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대신 박호문을 은밀히 보내 쿠데타를 틈타 일어날 수 있는 외침에 대비하는 한편 이징옥이 군대를 일으켜 남하하는 것을 방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앙의 정변 소식에 접한 이징옥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우선 수양대군이 임명한 박호문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수양대군의 난'을 규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종성에 주둔하면서 단종을 복위시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단종실록}에는 이때 그가 '대금황제'라고 자칭하고 도읍까지 설정했다고 하는데 이를 사실대로 믿기는 석연치 않다. 우선 {단종실록}은 단종이 죽은 후 어용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 만일 이징옥이 위와 같이 자칭 황제라 칭하였다면 그도 역시 수양대군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쿠데타 주모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북방 개척에서 나타난 무장으로서의 태도나 김종서와의 관계를 고려해볼 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태가 불리해지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과 함께 장기전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는 점에서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스승과 다를 바 없는 김종서가 죽은 직후에 이런 자기 만족적인 구호를 외쳤다고 보기는 역시 힘들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단지 수양대군이 세력을 잡자 이에 반대급부적으로 그의 반란이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황제라 하고 도읍지까지 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있어도 수양대군의 반란을 계기로 자기도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단종실록} 기록 당시의 해석은 무리가 많다. 어쨌든 이징옥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적은 내부에 있었다. 그는 아들들과 함께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의 기습에 말려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징옥의 반란이 있고 난 후부터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하여 뒷날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의 뿌리가 되었다.
사전 모의로 끝난 수양대군 암살 미수사건 : 사육신의 항거
이징옥의 난이 실패로 끝난 후 수양대군은 더욱 자기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여 마침내 계유정난이 있은 지 약 2년 뒤인 1455년 6월에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수양대군은 측근들의 모의에 따라 단종이 스스로 왕권을 내놓도록 그를 설득, 또는 협박하였다. 단종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이미 2년 전에 충신들이 죽고나자 자신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이상 버틴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어린 단종은 깨닫고서 삼촌인 수양대군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2일의 일이었다. 단종은 안팎으로 반란의 기미가 끊이지 않으니 어린 왕으로서 더이상 통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옥새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일부 대신들은 반대하였지만 이미 각본은 짜여진 대로 진행되었다. 단종이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자 대신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단종은 동부승지 성삼문을 시켜 상서원에서 옥새를 내와 환관 전균에게 주어 경회루 아래로 나오게 하라고 다시 명하였다. 성삼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명인지라 할수없이 옥새를 가져와 전균에게 건네주었다. 전균은 그것을 가지고 경회루로 가 왕위 계승식을 치룰 준비를 하였다. 잠시 후 단종은 경회루로 가 예정대로 수양대군을 불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단종 앞으로 나아갔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받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엎디어 울면서 몇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는 이미 단종에게 측근들을 통해 왕위를 내놓으라고 협박해 놓고서는 마치 자기는 왕이 되기 싫은데 여건상 부득이하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세상에 선전하기 위하여 거짓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옥새를 받고서도 단종의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겉으로 보면 정말 비탄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단종은 수양대군을 부축하여 나가라고 명하였다. 밖에는 이미 문무백관들이 즉위식에 대비하여 줄서 있었다. 수양대군은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즉위식에 임하였다. 수양대군은 사정전에 들어가 단종을 알현한 뒤에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마쳤다.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단종을 상왕으로 삼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의 완벽한 쇼는 일단락을 내렸다. 이날 성삼문은 옥새를 가져오다가 이를 부둥켜 안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세손인 단종을 안고 후사를 부탁한다고 했던 세종의 당부가 새삼 머리에 떠오른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다른 대신들은 아연실색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즉위식이 끝나고 성삼문이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경회루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데 누군가 연못에 빠져 죽으려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바로 박팽년이었다. 성삼문은 황급히 달려가 팔을 잡으며 말렸다. "비록 지금은 임금이 바뀌었으나 주상이 여전히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가 살아있는 한 아직 가능하오. 일을 도모하다가 그때 죽는다 해도 늦지 않소이다." 성삼문의 설득에 박팽년은 마음을 고쳐먹고 수양대군을 제거하는 일에 합세하기로 굳은 결의를 다졌다. 그날 밤 단종의 처소 근처에는 그의 하야를 슬퍼하는 신하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반면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다음과 같은 취임 소감을 밝혔다.
우리의 태조께서 하늘의 명을 받들어 동방을 차지하시고 여러 성왕이 대를 이어 밝음과 화합을 거듭하였다. 주상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에 불행히도 나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내가 선왕(문종)의 형제이고 또한 작은 공이 있어서 장성한 임금이 아니고서는 근심과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마침내 대위를 나에게 맡기시니 끝까지 사양해도 안되고, 종친, 대신들도 모두 종사의 대계를 사양하지 않는 것이 의무라 하기에 부득불 여러 사람에 따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매월 2일, 12일, 22일에는 단종의 거처에 나아가 문안 인사를 올릴 것이고 만일 유고시에는 다음날 행할 것이라고 전교하였다. 참으로 수양대군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조치라 하겠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이 자신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시대적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대신들은 그의 쿠데타를 반역으로 여기고 수양대군을 살해할 모의를 시작하였다. 수양대군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성삼문을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인 성승을 비롯하여 성삼문과 평소 가깝게 지내온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하여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이 있다. 이들은 단종 복위를 위한 사전 모의를 비밀리 진행시켰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복위를 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수양대군이 즉위한 직후에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왔다. 이에 수양대군은 사신을 위해 태평관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 단종을 참석시켜 자신의 왕위 찬탈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사신에게 보여줄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에 접한 성삼문 등은 치밀한 계획을 준비하였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연회에 성승, 유응부 등이 운검(대검의 하나로 행사에 나갈 때 무인들이 차던 칼을 말한다.) 차림으로 들어가 있다가 연회가 한창 진행되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수양대군을 죽이고 그의 아들도 제거한 뒤에 성문을 닫아 그의 측근들을 모두 없앤 후 단종 복위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양대군과 그의 아들은 유응부가 맡기로 결정하는 등 역할 분담까지 마쳤다. 성삼문은 신숙주에 대해서는, 비록 자기의 절친했던 벗이지만 죽이지 않을 수 없다는 비장한 말을 하였다. 그 일은 형조정랑인 윤영손이 맡기로 하였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철저한 모의가 끝나 있는 상태였는데, 당일 아침 한명회가 갑자기 수양대군을 찾아가, 창덕궁의 광연전은 좁고 또 더위가 심하니 세자는 입시하지 말게 하자고 하면서 운검도 들여오지 못하게 하자고 수양대군에게 말했다. 한명회의 말은 마치 성삼문 등의 모의를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평소 성삼문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사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뛰어난 모사꾼이었던 한명회는 연회중에 일어날 가능한 모든 일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수양대군에게 일렀던 것이다. 이런 뜻을 수양대군이 모를리 없었다. 그는 한명회의 말대로 시행하자고 동의하였다.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는 운검을 차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한명회가 나서며 운검을 차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고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승은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나 한명회를 먼저 죽이자고 아들인 성삼문에게 말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세자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비록 한명회를 죽인다고 해도 무익하다고 말하면서 성승을 말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응부가 칼자루를 굳게 손으로 잡으면서, 지금이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이니 치고 들어가자고 다그쳤다. 그러자 박팽년과 성삼문이 유응부의 손을 잡으면서 말렸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여가지 못하니 만일 지금 거사하였다가 경복궁에 있는 세자가 군사를 몰고 온다면 일의 승산을 예측할 수 없다. 다른 날 주상이 세자와 같이 있을 때 거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유응부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은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만일 다른 날로 늦춘다면 거사가 들통날 염려가 있다.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다고 하나 측근들이 지금 연회장에 모두 모여 있으니 오늘 한꺼번에 제거하여 상왕이 복위한 뒤 군사들을 풀어 먼저 경복궁을 친다면 세자가 감히 어디로 도망을 갈 것인가. 세자가 아무리 영특하다고 치더라도 지금같은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니 난 놓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유응부는 혼자서라도 거사를 행할 기세를 보였다. 박팽년은 다시 그를 저지하면서 지금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유응부는 성삼문 등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단종 복위의 결정적인 실수였음이 뒤에 드러났다. 성삼문의 모의에 가담한 자들 가운데 김질이라는 자가 있었다. 성삼문은 모의 도중 그에게, 만일 거사가 성공한다면 김질의 장인인 정창손은 정승이 될 것이라고 언질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계획과는 달리 거사가 연기되자 김질은 불안한 마음을 갖출 길이 없었다. 그는 궁을 빠져나와 정창손에게 달려갔다. "오늘 특별히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 또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먼저 선수를 쳐서 고발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단종 복위보다는 그 후에 얻어질 관직 등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사위의 말을 심각히 듣고 있던 정창손은 그의 말을 수긍하면서 사전 모의를 고하자고 결정하였다. 둘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수양대군을 만났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이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즉시 성삼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마침내 성삼문은 수양대군 앞으로 끌려 나왔다. 수양대군이 역모의 뜻이 있었느냐고 다그치자 성삼문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 김질과 대질을 원한다고 요구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질을 불러 자기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하라고 하였다. 김질은 성삼문의 눈초리를 살피며 성삼문이 역모의 뜻을 품고 있다고 다시 증언하였다. 그러자 성삼문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사실이오. 상왕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물러나셨으니 다시 복위의 뜻을 갖는 것은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인데 더이상 무엇을 물으시오?" 그러면서 김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고한 것이 오히려 말을 돌린 감이 있구나. 우리들의 뜻은 바로 상왕을 다시 복위하는 데 있다."성삼문의 여유있는 대답에 격분한 수양대군은 그를 고문하여 동조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성삼문은 같이 일을 꾸민 자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대었다. 결국 박팽년, 이개 등 모의 가담자들이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가담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신하는가?" 성삼문은 고개를 들어 수양대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원래의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가 있는가. 그런데 어찌 이것을 모반이라고 하는가. 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것이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으니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임금이 폐위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리 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중국 주나라 사람으로서 무왕의 아우이다. 그는 어린 조카 성왕을 보필하여 주나라의 기초를 다졌다.)을 내세웠는데 주공이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은 하나뿐이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수양대군은 성삼문이 자기를 '나으리'라고 부르는데도 흥분을 억제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왕위에 오를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에게 붙어 있다가 어찌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한단 말이냐?" 성삼문은 다시 대답하였다. "단지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때 죽을 각오를 하고 저지할 생각도 있었지만 헛된 죽음을 당하기 싫어 참고 기다리면서 후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나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는데, 넌 내가 주는 녹을 먹지 않았더냐. 녹을 먹고도 이렇게 했으니 너는 배반한 것이다. 겉으로는 상왕 복위가 목적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네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냐." 수양대군은 성삼문이 분명히 녹봉을 받아 썼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정적인 신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성삼문의 대답은 의외였다. "상왕이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나으리의 신하란 말이오. 난 나으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소. 만일 의심스럽거든 후에 우리 집을 적몰 (죄인의 재산을 기록하여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하여 계산해 보시오. 나으리의 말은 하나도 맞는 것이 없을 것이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뒤에 성삼문이 죽은 뒤 그의 집을 적몰해보니 녹봉은 따로 모아놓고 어느 달에 받은 녹봉이라고 써놓은 채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집에는 남은 것이 없이 안방에는 오직 짚자리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더이상 성삼문의 말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성삼문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쇠를 달구어 성삼문의 다리를 뚫어버렸다. 그리고 팔은 아예 달군 쇠로 지져 짤라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성삼문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쇠를 더 달구어 오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질리게 하였다. 그 자리에 신숙주도 나와 있었다. 성삼문과는 매우 절친했던 친구였다. 성삼문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숙주를 향해 일갈을 내뿜었다. "옛날 나와 함께 집현전에서 숙직할 때 영릉(세종의 능호. 세종을 뜻한다.)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거느시다가 말씀하시기를, '나의 천추 만세 뒤에 너희들은 이 아이를 잘 보필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 말씀이 귀에 생생한데 네가 그것을 잊었단 말이냐. 네가 이토록 악한 자인 것을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신숙주는 성삼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에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였다. 수양대군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도망가듯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양대군은 평소에 박팽년을 마음 속으로 매우 아끼고 있었다. 그는 모의가 진행될 즈음에 박팽년을 충청감사로 임명하여 외직에 보낸 적이 있다. 그는 박팽년도 가담했다는 말에 놀라 그가 잡혀오자 몰래 사람을 시켜 항복을 하고 가담한 것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다. 이에 박팽년 역시 수양대군을 나으리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어 녹을 받아 먹었으니 아무리 부인하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박팽년은 수양대군의 말을 매우 재미있는 예를 들어 반박하였다. "나는 상왕의 신라로서 충청감사가 된 것이다. 나으리에게 올린 계목에는 한번도 신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으며 또한 녹은 손을 대지도 않았소." 수양대군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신 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즉시 박팽년이 올린 계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정말 신이라는 한자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거' 자가 있을 뿐이었다. 두 글자가 너무 흡사하여 얼핏 보면 '거' 자가 '신' 자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뒤에 박팽년의 집을 뒤지니 성삼문과 똑같이 녹을 창고에 두고 봉해놓았다. 수양대군은 박팽년의 치밀한 성격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다음은 유응부를 국문하였다. "너는 대체 어찌하려 했느냐?" 무술로 단련된 체격을 가진 유응부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연회 날을 맞이하여 한 자루 칼을 가지고 족하(세조를 말함)를 폐위하고 옛 임금을 복위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간신이 고발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족하는 어서 나를 죽이시오." 이에 수양대군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 역시 상왕을 복위한다는 핑계로 사직을 넘보았구나." 그리고는 살을 도려내는 고문을 가하였다. 유응부는 말그대로 살이 잘려나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옆에 있던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탄식했다. "사람들이 서생들과는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구나. 지난 연회 때 내가 칼을 쓰고자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리며 만전의 계획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화를 자초하게 되었구나. 너희들은 사람이면서도 생각할 줄 모르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더란 말이냐." 유응부는 연회 때 거사를 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그는 다시 수양대군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저 더벅머리 선비들에게나 물으시오."말이 끝난 유응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수양대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유응부가 너무 건방져 보였다. 그는 벌겋게 쇠를 달구어 유응부의 다리 사이에 집어 넣게 하였다. 기름불이 지글지글 타오르고 살가죽과 속살이 불에 타들어갔다. 그런데도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오히려 쇠를 더 달구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이개에게는 단근질의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자 이개는 이게 무슨 고문이냐고 말하자 수양대군은 질린 나머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위지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지만 결코 수양대군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고문이 끝나고 가담자들은 모두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레를 타고 가던 성삼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서쪽 해는 점점 저물고 있네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을텐데 오늘 밤엔 누구 집에서 자고 갈꼬.
성삼문이 수양대군에게 잡혀갔을 즈음 유성원은 성균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의가 발각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사당에 올라간다고 하더니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내는 급히 사당으로 올라가 보았다. 안을 둘러보던 아내는 유성원의 싸늘한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관대를 입은 채 반드시 누워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기 목에 대고 나무 조각으로 칼자루 밑둥을 쳐서 자살한 모습이었다. 아내는 영문을 모른 채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잠시 후 관청 포졸들이 들이닥쳐 시체를 강제로 빼앗아갔다.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역사에서 말하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은 이 일로 집현전을 폐지하고 거기에 있던 모든 서적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수양대군은 사육신의 일을 처리한 후 단종이 궁궐에 머물고 있으면 역모가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하루 아침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이 즈음에 유배지를 옮기게 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동생중 한 사람인 금성대군이었다. 그는 이미 1455년에 수양대군에게 당해 삭녕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 사건을 당한 후 그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순흥으로 다시 유배보낸 것이었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실패 사건
금성대군은 세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한 후에 그는 수양대군 등과 함께 단종 앞에 나아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금성대군 역시 안평대군과 마찬가지로 수양대군과는 평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홉 살이나 위인 수양대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금성대군은 형식적인 말로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1453년 염려한 대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자 더욱 단종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러한 금성대군의 심정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삭녕으로 유배보내고 말았다. 이때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독촉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1455년이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는 여기서 본격적인 모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금성대군은 부사 이보흠을 중심으로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를 결집시키고 경상도 안에 있는 지방 양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있기 직전 관노의 고발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금성대군 등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거사 목적은 오직 단종 복위에 있었다. 맏형인 문종이 살아있을 때 금성대군은 조카의 신병 안전에 대해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맏형의 유언을 받들어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다. 아무런 뜻을 품지 않고 있었다면 왕이 된 수양대군의 혜택을 받아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반역이라고 판단,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아 거사를 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금성대군은 정조 때에 와서야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정식으로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단종 복위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결국 단종은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반란의 불씨를 제거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수양대군이나 그 측근들은 왕의 나이가 어려 정국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변명을 내세웠지만 조선의 문물제도를 정비한 9대 왕인 성종도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성종이 20살이 되는 7년 동안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어도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나온 견해가 아니라 세조의 왕위 찬탈이 뒤에 이어질 여러 역사적 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수양대군이 뿌린 씨는 이후에도 조선 역사의 흐름에 악영향을 끼쳐 그만큼 역사 발전을 더디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여러 반란이나 사화를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세조 이전에도 정도전과 이방원(후에 태종) 사이의 권력 다툼 등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이 있었다. 이러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왕위 찬탈의 가능성을 쉽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자의 난은 조선이 건국된 후 아직 왕권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시대적 상황에서 개국 공신과 왕실 사이의 암투로 벌어진 것인 만큼 정치적 경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와 반면 세조의 쿠데타는 당시 내외 정세로 봤을 때 그렇게 뚜렷한 명분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수양대군에 대한 정통성 시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조가 된 뒤에도 그에게는 반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이시애의 반란'이다.
@ff 8.이시애의 반란 : 세조의 집권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다
한 가지 의문점 : 토호들과 농민들의 연합 투쟁
이시애는 세조 13년인 146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때는 어느 정도 세조가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펼쳐 안정된 기반 위에서 통치를 할 때였다. 대체로 세조의 통치가 안정세로 접어든 때를 1466년 전후로 잡는다. 그리고 세조가 죽은 때는 반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468년 가을이었다. 일반적으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세조의 중앙집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함길도 수령을 중앙에서 임명, 기존 토호들의 반발을 샀다. 둘째, 중앙에서 임명된 수령들은 대체로 무인 출신이라 행정적 차원의 통치보다는 무력을 동원한 독재적인 방법으로 그 지방을 다스렸다. 따라서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가 극성을 이루어 깊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세조 13년은, 세조가 이미 중앙집권적 정책을 성공리에 펼친 상태였으며 게다가 군사력을 증강시켜 막강한 군대를 조직해 놓은 뒤였다. 다른 반란들이 대체로 정치적 혼돈이나 중앙정부의 군사적 힘이 미약할 때, 또는 외침이 자주 일어날 때 등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시애는 국가 기강도 안정되어 있고 중앙정부의 군사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의문점이다. 그는 왜 그런 위험한 모험을 자초했을까.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함길도가 갖고 있는 지방적, 역사적 특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원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함길도는 본래 숙신국의 땅이었다. 이곳을 관북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다른 명칭으로는 읍루, 말갈, 물길, 여진 등이 있다. 고구려가 이곳에 있던 동옥저를 멸해 통합하였고 신라의 영토는 한때 영흥평야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다. 7세기에 들어서서 발해는 영흥을 중심으로 신라와 경계를 이루었고, 신라 말기 중앙정부의 권력이 미약해짐을 틈타 이 지역을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이곳이 복구된 것은 잘 알려진 바대로 고려 예종 때 9성을 개척하면서이다. 그러나 2년 후에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화친을 맺기 위해 다시 9성을 내어줌으로써 함길도는 여진족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원나라가 강대해져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 이곳은 원나라의 통치권에 들게 되었다.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나는 틈을 타서 공민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쌍성총관부를 공략하는 등 원나라의 지배권에 들어있던 8개주를 수복하여 함경산맥 동쪽 해안의 칠보산 남쪽이 고려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다시 여진족이 이 지방을 넘보게 되었고, 태조인 이성계는 계속된 정벌에 나서 국경을 두만강 하류까지 넓히게 되었다. 태종 때에는 여진족을 회유하기 위해 무역소를 설치했으나 침공이 빈번해지자 다시 강경책으로 돌아 여진족과 일대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함길도가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에 와서이다. 세종은 북방을 정비하고 안정된 정권 유지를 위해 김종서, 이징옥을 중심으로 4군 6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특히 6진은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두만강 중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설치한 여섯 개의 전진기지를 뜻하는데, 6진 개척으로 함길도는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 터전으로 자리잡혀 나갔다. 또한 4군 6진의 개척으로 말미암아 한반도 전체가 조선의 영토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함길도는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범이 잦고 이주가 많은 곳이어서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기 꺼려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영토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주민이 생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고려 때에도 남부 지역의 백성들을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이때 이성계의 선조도 전주에서 이주하여 토호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남부인들의 이주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어 함길도는 여러 지방에서 모인 백성들로 구성된 특수한 지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이주정책으로 말미암아 부작용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통상적인 관념상 고향을 따로 두고 타지에 와서 자리잡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배경에는 이렇게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 특히 농민들은 함길도를 개척하여 생활 터전으로 만들어갔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하여 가뜩이나 이주 자체에 대해 누적된 불만이 있는 상태에서 깊은 원한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령들의 가렴주구는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함길도가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그 정도가 다른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심한 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세조 정권의 특성을 살펴본 뒤 원인 분석을 할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대체로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통치자들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언제 다시 반대 세력이 형성되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부담감이 늘 상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쿠데타, 또는 혁명에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한 통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책은 중앙집권 강화이다. 특히 세조의 경우에는 조카와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잡은 왕권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중앙통치를 행한 임금이 있다면 단연 세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사를 통사적으로 볼 때 왕권이 안정되고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반이 잡히게 된 시기도 세조대였다. 선왕인 태종이 왕위 계승 싸움에서 승리한 후 왕권의 기초를 어느 정도 닦아놓았기 때문에 4대 왕인 세종은 문화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따라서 병약한 문종과 단명한 단종을 지나 세조에 이르러서는 선대가 세워놓은 정치, 사회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왕권 강화의 차원에서 강력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로 생긴 부작용이었다. 세조는 부국강병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고 국방강화 정책을 폈으며 이를 위해 군역을 재정비하는 한편 단종을 살해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지 2년 뒤인 1458년부터 호적을 개정하고, 1459년 2월부터 호패법을 실시하여 누락되는 부역 대상이 없게 하였다. 세조는 군제를 개편하여 오위체제를 세웠고 연해 지방에만 설치하였던 영과 진을 전국에 걸쳐 내륙 지방으로 확대하여 거진 중심의 방위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방위체제의 특징은 어느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적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이 형성된 상태에서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시애의 반란은 왜 일어났는가
첫째, 함길도만이 갖고 있는 지리적, 역사적 특성이 반란의 배경이 되었다. 함길도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여진족의 침범을 막는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족의 침범은 세조 때에 와서도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1460년, 여진족은 두만강 중류에 위치한 회령을 침범하였으나 곧 격퇴되었다. 전투에 진 여진족은 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족은 종성, 부령, 경성 등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즈음에 신숙주 등이 나서서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래로 취한 대여진 강경책은 정책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또한 여진족과의 전투가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전이 될 가능성도 높아져 회유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원 등지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농기구나 양식 등을 공급하거나 귀화나 조공을 종용하여 이에 응하는 자들에게는 관직과 살 집을 마련해주어 다른 여진인들에게 자극이 되도록 하였다. 원래 반농, 반수렵을 하는 여진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선의 회유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고 무력 침공을 할 때에는 가차없이 정벌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공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침범에 대비하여 성을 축조하는 등의 부역에 시달리고 게다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함길도에는 늘 이런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귀화해오는 여진인이 입경하기 위해 함길도에 머무는 동안에 드는 경비도 부담해야만 했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세종 때에 귀화인의 수를 제한하던 것을 철폐하고 무제한으로 귀화인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점에 함길도민들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들의 가렴주구가 매우 극심하였다. 세조 전에는 원래 국방 강화를 위해 함길도 출신에서 뽑아 수령을 삼았었다. 그런데 세조는 '이징옥의 반란'을 겪은 후 함길도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 함길도를 관리하였다. 그런데 이들 관리들은 지방 토호들의 의견이나 함길도가 갖고 있는 특성을 무시한 채 치부를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세조가 중앙 사람을 임명했다는 것은 결국 이 지방 출신의 등용을 억제한다는 뜻이다. 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세조로서는 이곳이 여진족과 접경하고 있어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곳의 인재들을 중앙에 진출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지방 차별은 있어왔다. 가령 묘청의 반란이 있고 난 후부터 평안도와 함길도 출신의 등용을 꺼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세조의 경우에는 특히 이에 대해 민감했다. 지역적 특성 때문에 고려 시대에 이미 막을 내린 지방 호족이 함길도에는 잔존하고 있었다. 이시애의 선조들은 길주에 자리잡아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니 그는 지방 호족 출신인 셈이다. 그러므로 수령을 직접 중앙에서 파견하는 등의 차별 대우에 대해 이시애를 비롯하여 그 지역 실력자들이 반발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일반 백성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가렴주구에 대해 극도의 원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며 지방 실력자들은 세조의 지역 차별정책에 심한 불만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 호족들의 불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전법을 시행한 것은 1466년도였다. 직전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원래 과전법하에서는 퇴직자들이나 유공자 가족 등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다. 그러나 과전법으로 말미암아 지급해야 할 토지가 증대하여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세조는 이런 병폐를 없애기 위해 재직 기간에 한에서만 토지를 지급하였던 것이다. 그런 한편 계유정난 때를 비롯하여 세조가 세력을 잡는 데 공을 세운 훈신들에게는 공신전 등을 지급하여 경제적 특권을 줌으로써 정책에 형평성이 없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호패법의 실시로 지방 실력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이 군대로 편입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세조의 통치에 지방 토호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함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위에서 가진 의문점은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결국 왕권이 안정되어 있는 시점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은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인 손실을 입은 지방 토호의 불만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중앙 출신 수령에 대한 일반 농민들의 원성이 공통분모를 찾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사력이 극대화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은 다른 반란과는 그 발생 배경이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소외된 상층부의 계층과 농민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를 '홍경래의 반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란의 전개 과정 : 북청전투와 만령전투
반란이 진압된 후 체포된 이시애의 공초(문초 내용)를 보면 이미 3년 전부터 봉기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을 짠 것은 1467년 초에 모친상을 당해 기거하는 동안 아우인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와 긴밀한 모의를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1467년에서 3년 전이면 세조의 정권이 전성기를 이룬 때이며 상대적으로 지방 토호들이나 농민들의 반발이 심화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시애는 함길도 전반에 걸쳐 토호들이나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으므로 봉기의 뜻을 품게 되었다. 이성계와 함께 동녕부 정벌에 나섰던 이원경의 손자인 이시애 자신도 막강한 토호라는 점에서 이권 상실과 중앙 출신 관료들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시애가 반란을 꿈꿀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함길도의 지리적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해도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함길도는 산세가 매우 험해 외부로부터 침입하기가 곤란한 데다가 6진을 중심으로 한 주둔군은 수차례에 걸친 전투 경험을 토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시애는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한다는 전제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나름대로 봉기의 성공 가능성을 점친 이시애는 그 목적을 '북도를 점령한 후에 수년 뒤에 군사를 배양하여 서울을 친다'로 세웠다. 따라서 이시애는 정권 탈취를 봉기의 궁극적인 도달점으로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시애가 이렇게 뜻을 품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세조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시애는 세조 정권의 취약성을 정면으로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만일 이시애의 반란이 성공하여 함길도와 평안도 지방을 장악했다고 가정해 볼 때 그는 분명히 세조의 찬탈 행위를 비난하는 격문을 써서 전국에 배포했을지도 모른다. 반란의 성공을 위해 이시애가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역시 농민들의 호응을 얻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수령들의 가렴주구와 신세포라는 명목하에 징수를 당해온 터라 이미 그들의 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신세포는 원래 미신 타파를 위해 무당들에게 부과하던 것인데 함길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는 일반인들에게도 이것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불법이 만행되었기에 민심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사방에 퍼뜨렸다.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사들이 수륙 양면에 걸쳐 함길도로 진격해 오고 있다. 충청도 군병은 배를 타고 경상, 후라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 설한령을 통해 북도로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이시애는 당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지역 감정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만일 위와 같이 남부인들의 침입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소외감에 시달려온 함길도민들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민들 가운데는 이시애가 퍼뜨린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늘어갔다. 이시애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런 가운데 드디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1467년 5월 10일,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은 각 진을 순찰하기 위해 이시애의 고향인 길주에 와 있었다. 그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중앙 출신의 대표격으로서 이미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시애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이시애 등은 한밤중에 강효문의 숙소를 기습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길주목사 설정신, 부령부사 김익수, 판관 박순달, 군관 성이건, 김수동 등 중앙 출신의 관리들을 차례로 칼로 베어 죽였다. 5월 10일에 있었던 암살 사건은 이시애의 철저한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앙 출신의 관리들은 토호들이나 농민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적이었다. 토호들은 중앙 진출을 막고 있는 관리들을 적대시하고 있었고 농민들 역시 수탈과 억압을 일삼는 관리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시애는 양 계층 모두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직접적인 불만 대상인 중앙 출신의 관리들을 처단했던 것이다. 이것은 반란 직후 함길도 대부분의 토호들이나 농민들이 반란에 동조, 또는 직접 참여했다는 점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시애는 이 암살 사건을 묘한 술책에 이용하였다. 이시애는 담대하게도 이극기라는 측근 한 사람을 서울로 보내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모반을 결행하려 했기 때문에 강효문 등을 죽였으니 이는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러면서 도민들에게는 세조의 뜻을 받들어 역모를 계획하고 있던 강효문 등을 죽였다고 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시애는 이후에도 두 번 더 거짓 보고문을 올려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지도록 유도하였다. 이시애의 이러한 술책은 중앙의 권력을 분산시켜 약화되는 것을 노린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실제로 세조는 자기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신숙주 등을 의심하여 궁궐 내에 구금시켰다. 또한 도민들로서는 이유는 상관없이 중앙 출신 관리들이 처단됐다는 말에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강효문 등을 살해하는 일에 성공한 이시애는 스스로 함길도절도사라고 자처하고 지방 세력가들의 근거지인 각 유향소에 전달하기를, 중앙에서 온 관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런 전달이 가능했던 것은 이시애는 이미 다른 지역의 토호들과 연계 조직을 정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친상을 당하기 전에 봉기에 대비하여 다른 토호들과 접촉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시애의 명령이 떨어지자 함길도는 순식간에 살육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강효문의 죽음에 사기가 오른 토호들이나 도민들은 중앙 출신의 관리들은 무조건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 어느 곳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여 서울 출신이라고 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곧 함길도가 그동안 얼마나 지역적 차별과 수탈을 당해왔는가를 반증해주는 실례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살행당한 자 중에 세조에게 반란군의 동향을 알리며 먼저 마운령 등을 점령할 것을 건의한 신면이 있었다. 이시애는 신면을 죽이고나서 태연하게 중앙에 보고서를 보냈다.
신면은 난신 신숙주의 아들로서 역모하여 남도의 군사를 이끌고 도내의 백성들을 살육한 후 다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반역하려고 해서 그를 죽이고 또 그에게 동조한 체찰사 윤자운도 잡아 가두었다.
그러면서 이시애는 본도 출신의 인재들을 뽑아 관리로 임명한다면 민생이 안정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반복된 보고가 올라오자 세조는 신숙주 등을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실제로 누가 반역자인지 객관적으로 판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함길도 전체는 반란의 피바람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제 문제는 이런 격렬한 분위기를 어떻게 조직해 내는가에 그 관건이 달려 있었다. 반란에 가담한 농민들은 부역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군사 훈련 같은 기초 작업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랜 전투 경험을 지니고 있는 함길도 농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시일 안에 일정한 조직력을 지니는 것 뿐이었다. 세조는 신숙주 등을 옥에 가두면서도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조작해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세조는 얼마 가지 않아 이들을 다시 풀어주었다.) 세조는 조카인 구성군 이준을 함길, 평안, 황해, 강원도 등 4도의 병마도총사로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또한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 군사 3만 명을 절도사의 근거지인 함흥으로 급파하였다. 이때가 5월 18일경이었다. 이미 이시애는 길주에서 단천, 북청, 흥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그곳 관장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고 칭하며 중앙 출신 관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있었다. 이와같이 반란군의 기세가 너무 세어지자, 구성군 이준이 이끄는 관군은 철원까지 나아갔으나 더 진격을 하지 못하였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예상보다 반란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세조는 각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다년간 함길도에서 근무한 경험을 갖고 있는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임명한 뒤 평안도병 3,000명을 주어 평안도 경계에 위치한 영흥 쪽으로 진격하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장군으로 삼아 황해도병 500명을 주어 문천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군 1,000명을 주어 구성군 이준을 돕게 하였다. 또한 중앙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세조는 각종 효유문을 내려보내는 동시에 반란군 일당을 체포할 경우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한편 북방 지역의 유향소와 육진 등에 밀사를 보내 이시애의 반란에 동요하지 말고 반역자를 체포하라는 말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밀사 파견은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한편, 이준이 이끌고 서울을 떠난 관군은 함길도 경계 지역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신면을 죽이는 등 함길도 일대는 반란군의 기세가 올라 있어 함부로 진격을 하지 못했다. 이준은 전면 공격을 보류하고 허종을 선봉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서울을 떠난 지 이틀 뒤인 5월 20일, 허종은 선봉부대를 이끌고 안변에 도착하였다. 원래 허종은 덕원까지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이시애가 자칭 절도사라고 사칭하면서 이미 민심을 동요시킨 뒤이기 때문에 신변 안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안변에 머물게 된 것이다. 허종은 안변에 머물면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허종은 포섭 작전에 나섰다. 허종은 주로 함길도 출신 사람 몇 명을 보내 고을 장로들을 설득, 이시애의 반란에 동조하지 말라고 회유하는 한편 조정의 뜻을 이시애에게 전달케 하였다. 또한 육진에도 사람을 보내 이시애가 반역을 일으켰으니 조정의 뜻에 따르라는 공작을 폈다. 이러한 선무 공작이 효과를 보아 반란군 내부에서 억지로 참여한 차운혁 등을 골라 집중적으로 설득한 끝에 이시애의 동생 이시합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반란군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이시합은 홍원의 파탄동으로 나아갈 때 기습에 말려 한때 갑사 출신인 차운혁에게 사로잡히기도 했으나 속임수를 써서 빠져나온 뒤 역습으로 차운혁을 처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관군과 반란군은 전투를 앞두고 민심을 자기 편으로 돌리기 위해 치열한 심리전을 벌였던 것이다. 앞에서 이시애가 중앙에 보낸 보고서에 보면 윤자운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런데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그는 당시 상당히 신망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연유로 반란군에게 잡혔는지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서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생포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반란군 중에 조여규라는 자가 그를 죽이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여 윤자운은 이시애의 손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가 6월 1일이었다. 체찰사 윤자운이 이시애 진영에서 탈출해 나온 후인 6월 4일, 구성군은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들어가는 한편 허종은 영흥으로 밀고 들어가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해 나갔다. 이미 이준이 이끄는 진영 내에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고 군량미나 무기 등 전투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영흥을 거친 허종은 마침내 함흥으로 들어가 민심을 수습하고 치안을 회복하였다. 당시 반란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반란을 평정하려 했던 온건책을 취소하고 옥에 갇혀 있던 신숙주 등의 중신을 풀어주면서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시애는 이같은 세조의 강경책에 당황하여 후퇴하여 북청을 거쳐 이성에 근거를 두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나와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시 말해서 작전상 후퇴였다. 어쨌든 이시애가 후퇴하자 구성군 이준이 이끄는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한 뒤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 아래 신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 산개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강순은 이에 따라 어유소, 허종, 박중선 등을 대장으로 삼은 뒤 북청 앞의 평포에 진을 쳤다. 그리고 이시애의 본거지인 길주를 향하여 진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 북청에서 양군간의 첫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관군은 이시애의 군대가 이미 북청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관군이 함흥을 점령한 날인 6월 19일에 이시애는 벌써 북청에서 벗어나 후퇴한 상태였다. 그는 육진의 군대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킨 뒤 길주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 등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합세하여 북청으로 향하였다. 반란군도 2만여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이시합은 군졸을 이끌고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에 주둔하는 한편, 이시애는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에서 북청 어소로 나아갔다. 양군 사이의 전투가 임박한 것이다. 6월 24일, 이시애가 이끄는 반란군은 야음을 틈타 관군을 공격하였다. 관군은 반란군이 북청을 떠난 사실을 모른 채 북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도리어 포위당한 상태였다. 반란군은 진중을 향하여 화전을 쏘아댔다. 반란군의 북소리와 함성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이에 반해 관군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고는 반란군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았다. 일체 소리를 내지 않으니 마치 진중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관군을 이끄는 강순은 포위당한 것을 알고 북청을 사수할 결심으로 김교라는 자의 건의에 따라 목책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사슴뿔 모양으로 대나무로 짜서 만든 적을 막는 물건)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감을 파서 적의 공격에 대비해 놓는 등 반란군의 공격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진중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이상히 여긴 반란군은 일단 후퇴하였다가 새벽이 되자 재차 공격해 들어갔다. 관군도 이때는 즉시 응전을 하였다. 양군 사이에 싸움은 10여 회나 벌어졌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관군들은 쳐들어오는 반란군과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특히 남이 장군은 빗발치는 화살 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 독전하면서 반란군들의 목을 다수 베었다. 그는 몸에 활이 꽂히는 것도 잊고 전투에 응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반란군은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북청에서 물러난 반란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의 매부인 이명효는 홍원, 북청, 갑산, 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탐구령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에 주둔하여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를 차단하고,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을 넘어 2진을 형성하였다. 이시애는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준비하는 등 반란군은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일 준비를 완료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관군도 다시 전투에 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강순은 북청에 있던 군사 일부를 홍원으로 이끌고 갔으며 이준의 총도사 본진은 함흥으로 내려와 주둔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반란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 군사력을 더 보강하여 북진을 감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관군은 1.2.3진으로 나누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1진은 강순과 남이, 박중선 등이 이끌고, 2진은 함길도 절도사 허종과 어유소 등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3진은 병마총도사 구성군 이준을 비롯하여 대장 오장경 등이 맡았다. 그런데 이때 현장에 있던 관군 지휘부는 반란군이 어떠한 작전을 펼칠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란군의 작전을 알게 된 것은 정찰 나온 반란군 첩자를 통해서였다. 북청과 함흥 경계 지역에 석장현이라는 매우 험준한 곳이 있었다. 북청 전투 이후 여기서 관군과 반란군이 다시 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7월 22일 반란군 소속인 김말손이 군졸 200여 명을 이끌고 먼저 이곳을 점령한 상태였다. 관군은 단지 김말손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총도사영 소속 최유림이 석장현으로 나아가 고개 밑에 목책을 쌓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렇게 반란군이 서둘러 석장현을 점령하고 있던 것은 나름대로 작전을 세워놨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은 석장현을 넘어 함흥에 도착한 뒤에 밤을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면 성안에 있는 하급 관리들이나 노비들이 내응할 것이라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만일 이것이 성공한다면 관군은 남과 북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어 그때에는 승산이 없게 된다.(이러한 작전을 세운 것으로 봐서 반란군측은 함흥 내에 내응 세력을 갖추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전을 모르고 있던 관군은 정찰 나온 반란군 첩자를 생포하게 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관군은 첩자를 다그쳐 작전 일체에 대해 자백을 받아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반란군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세워놓은 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때 총도사 본군이 석장현에 이르자 김말손이 이끄는 반란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김말손이 전방을 지키는 사이에 다른 반란군은 북청을 점령하고 있었다. 석장현을 넘은 관군은 7월 25일, 야밤을 이용하여 반란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을 개시하여 진북장군 강순이 인솔하는 1진은 홍원을 떠나 산개령을 넘고, 2진에 속해 있는 대장 어유소는 군사를 이끌고 종개령을 넘어 북청으로 진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남이가 이끄는 부대는 중간 요충지인 종개령의 적을 격파하고 같은 요충지인 산개령은 선봉장 이숙기의 부대가 점령하였다. 이렇게 중간 장애물을 없앤 관군은 북청으로 밀고 들어가 반란군을 격퇴시키니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이었다. 당시 북청에 있던 반란군은 이명효 등이 이끄는 부대였다. 이들은 관군의 움직임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연회를 열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날 전투는 관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청에서 동쪽으로 68리쯤 떨어져 있는 만령에 15리에 걸친 진을 쳤다. 이 만령은 남으로는 바다에 인접하여 있고, 북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서 요충지로서는 적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리한 위치가 오히려 관군에게 역이용당하고 만다. 때는 벌써 8월을 넘기고 있었다. 관군은 다시 만령 공격에 나섰다. 강순의 1진이 먼저 만령 밑에 도착하고 어유소의 2진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관군은 1,800여 명으로 구성된 총포 부대를 앞세워 공격했기 때문에 지형이 낮아도 매우 유리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성군 이준과 강순, 박중선 등이 이끄는 군사들은 큰길로 진격하고, 허종 등은 큰길 남쪽 중봉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관군의 작전중 유효했던 것은 바다를 이용한 후면 공격이었다. 어유소는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만령 뒤로 돌아가 후위에서 일대 공격을 펼쳤다. 즉 관군은 앞뒤 좌우 등 사면에서 포위, 진격하였으니 반란군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시애가 이끄는 반란군은 관군의 빈틈없는 공격에 대하여 중봉을 거점으로 2,000여 기의 팽배대를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버텼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반란군이 완강히 버티자 만령 동봉에 있던 어유소는 중봉으로 나아가 이시애 군대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 일부를 허물어뜨렸다. 이에 양군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반란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날은 완전히 저물어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이 날은 8월 4일이었다. 이튿날인 8월 5일 관군은 이시애 군대를 추격하여 이성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패잔병들은 객사,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관군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마운령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넘어 영제원에서 일단 주둔하였다가 다시 반란군을 뒤쫓았다. 북으로 도망간 잔류 반란군과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치고는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저항해 보았으나 이미 반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중과부적이었다. 반란군은 길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길주에서 시작한 반란군의 행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길주에 도착한 이시애는 자기 집 창고에 있던 곡식을 인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의복 등은 이명효를 시켜 경성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관들을 죽이고 획득한 의복 등 노획물을 여진족에 주어 환심을 사서 그들의 도움을 청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시애는 육진의 군사들을 모으고 여진족을 규합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키려고 경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부하로 위장하고 들어와 있던 허유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시애는 허종 휘하에 있던 허유례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된 것이다. 이미 관군은 8월 12일 이시애 군대를 계속 추격하여 단천을 탈환하고 마천령을 넘어 영동역에 이른 상태였다. 허유례는 본래 길주 출신이다. 그는 서울에서 낮은 관직 생활을 하고 있다가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공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 있음을 알고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경성 운위원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부하들인 이주, 이운로, 황생 등을 설득하여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자고 설득하였다. 이들은 허유례의 말에 동의하고 체포조를 구성하였다. 이운로는 군사들을 "만일 이시애를 체포하면 조정에서 큰 상을 내릴 것이다"라느 말로 독려한 뒤, 8월 12일 이시애 등이 천막에서 술을 먹고 있는 틈을 타서 천막줄을 끊고 덮어씌워 생포하였다. 허유례 등은 이시애와 이시합을 영동역에 주둔하고 있던 도총사인 구성군 이준 앞으로 끌고 갔다. 그는 두 형제를 문초한 뒤 목을 베어죽이고 머리는 서울로 보냈다. 세조는 이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 4개월간 지속된 이시애의 반란은 완전히 평정되고 막을 내렸다.
이시애의 반란은 사회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난이 진정됨에 따라 세조는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썼다. 세조는 자기에게 호응했던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 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강화하고 이시애의 근거지였던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시켰다. 그런 한편, 반란의 원인이 지방관의 수탈에 있다고 판단한 세조는 부당한 대납은 엄단한다는 조치를 내렸고 둔전제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경작자에게 유리하게 법을 개정하였다. 무엇보다도 세조는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북방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시애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이후 함길도 등 북부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이 한층 심화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것은 결국 '홍경래의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가할 때 세조 정권의 특성을 염두해두지 않을 수 없다. 세조 정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단정치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조는 중앙집권적 통치에 집착한 나머지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1)정국 국면이 경색되어 권위주의가 더욱 팽배하여 계급적 착취가 심화되었고 2)상명하달식의 통치를 함으로써 민의가 제대로 수렴되지 못했다. 또한 승정원을 중심으로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세 명만을 중심으로 주요 정책을 결정하여 많은 관료들이 소외당함으로써 독재적인 성격을 지닌 통치를 하였다. 세조는 피를 뿌리며 정권을 잡은 탓에 죽는 순간에도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하자 모든 신하들을 물리고 직접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이날 세상을 떠났다. 만일 누군가 자기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잡을까봐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조의 전반적인 생애를 검토해 볼 때 '이시애의 반란'은 바로 그의 지나친 권위주의와 무단정치적인 통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시애나 당시 반란군에 참여한 농민들은 이러한 세조의 독단적인 정치에 반기를 든 것이다. 따라서 이시애의 반란을 농민들의 항쟁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당시 역사 기록은 대체로 사건에 참여한 양반 계층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농민들의 투쟁과 죽음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들 스스로 조직력을 갖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 반란은 토호들과 농민들이 공동의 적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시애의 반란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ff 9.중종반정 : 훈구파의 집권과 사림파의 재등장
얼핏 보면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뿌리는 세조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산군 때 일어난 대표적인 2대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가운데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은 유자광인데, 그는 세조의 친애를 받던 인물이다. 그는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현장으로 달려가 당시 반란군의 동태와 현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세조에게 보고하여 그의 눈에 들기 시작하였다. 그후 세조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느 정도 중앙에 자기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때에는 남이, 강순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여 공신이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 중기 정치사의 뿌리는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배태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참사인데, 이 사초의 내용이 의제를 죽인 중국의 황우를 단종과 세조에 빗대어 쓴 것이므로 세조의 유혈 쿠데타가 조선 중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중종반정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이의 죽음이 있었던 8대 임금 예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종대에 형성된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갈등 경과도 중종반정의 정치사적 배경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남이 장군의 죽음 : 구세력과 신세력의 충돌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던 장군들의 이름중에 남이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남이는 세조의 신뢰를 받던 무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포천과 영평 등에서 들끓던 도적떼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이시애 군대를 치기 위해 조직된 원정군에 대장으로 임명받아 구성군 이준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무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용맹과 지략을 겸비하여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몫을 한 명장이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올랐고 의산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뒤에도 남이는 여진족 토벌에도 앞장섰으며 이러한 여러 공로로 호조판서에 이르기도 하였다. 1468년에는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직후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 세력들이 예종을 부추켜 그가 병조판서를 맡을 자질이 안된다고 주장, 결국 남이는 해직되고 겸사복장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겸사복은 궁중 친위대의 하나로서 왕을 호위하고 궁내의 경비를 담당하였는데 잡일이 많고 고된 훈련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친위대를 담당하는 대장은 한 명이 아니라 3인이었다고 하니 남이의 지위가 얼마나 격하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남이의 해직은 단순한 모함이 아니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등장한 신세력인 구성군이나 강순 등을 구세력이 축출하면서 남이 역시 제거 대상이 되었던 것이므로 정치적 알력의 희생물이 된 셈이다. 세조의 쿠데타를 도와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거머쥐고 있던 훈구 세력은 새롭게 등장한 신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고위 관직에서 추방시켰던 것이다. 세조도 그러했지만 그를 도와 유혈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훈구 세력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무신들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훈구 세력은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남이가 점점 고위 관직에 오르자 이를 경계하기에 이르렀고 세조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중앙에서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가 살아있는 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무력으로 잡은 권력을 언제 다시 무력으로 빼앗길지 모른다는 경계심에 사로잡혀 남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러던중 남이 등 신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되었다. 병조판서직에서 해임된 후 남이는 숙직을 서면서 허탈한 심정을 달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고대로부터 혜성이 나타나면 나라에 큰 이변이 일어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남이도 마찬가지였다. 남이는 무심코 혜성을 본 소감을 말하였다. "혜성이 나타난 걸 보니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로구나."그런데 이 말을 엿듣고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유자광이었다. 그는 곧바로 예종에게 달려가 남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모함하였다. 예종은 평소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유자광의 말을 곧이 들은 예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역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예종 앞으로 잡혀온 남이를 두고 여러 증인들의 진술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유자광이 나섰다. 그는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열릴 징조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거사하여 역모하려 했다고 증언하였다. 남이에 대한 불리한 증언은 계속되었다. 그의 측근인 순장 민서는 남이가 여진족에 대한 방비 대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혜성의 출현은 간신들이 득세하여 변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면서 자신이 당할 일이 두렵다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 간신의 대표로 한명회를 지목하였다고 부언하였다. 결정적인 증언을 한 사람은 남이와 같은 겸사복 소속인 문효량이었다. 그는 여진족 출신이었다. 문효량은 남이와 강순이 임금과 한명회 등을 제거하고 구성군 등도 몰아내어 왕권을 잡으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더이상 남이로서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남이와 강순을 비롯하여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강등 조치되었다. 흔히 '남이의 옥사'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로 남이가 역모를 계획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유자광의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는 주로 {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야사를 통해 전해오고 있다. 전자에 따르면, 그는 병조판서에서 강등된 후 이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남이의 역모 실제성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는 이 사건의 발단이 신구 세력간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유자광의 고발이 모함이건 아니건간에 이 사건 이면에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 세력과 세조 때부터 성장한 무신 중심의 신세력 사이에 계속되어온 보이지 않는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이 위와 같은 상황으로 구체화된 것일 뿐이다. 뒤에 유자광이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그는 구세력에 붙기 위해 남이를 희생물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어쨌든 '남이의 옥사'는 한명회 등 세조의 친위 세력들의 위기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왕권을 좌지우지할 만큼 성장한 훈구 세력들은 점차 보수적 성향이 짙어져 성종대에 가서는 신세력인 사림파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 무오사화
조선의 문물제도를 확립한 왕은 성종이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숭상하여 세종 이래로 두번째로 문화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수차례에 걸쳐 개정하여 완성하였고 {재전속록}을 완성하여 법제를 마련하는 등 개국 이래로 산재해 있는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신진 세력을 대거 중앙에 진출시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흔히 훈구파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인물들로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서거정, 이극돈, 강희맹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주역으로 떠오른 공신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기반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주요 권력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이 탓도 있겠지만 이들은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한명회의 경우만 봐도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대 중기(그는 성종 18년인 1487년에 사망하였다.)에까지 생존하면서 자기의 딸을 성종과 결혼시키는 등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왕의 외척으로서 성종의 개혁 정치에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에 성종은 새로운 인물들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정치 현실에 따라 역사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신진 세력을 사림파라고 부르는 것이다. 훈구파가 주로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면 사림파는 영남 지방을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하였다. 사림파의 거두는 김종직이었다. 그는 고려 말의 문신 길재의 사상을 이어받아 의리와 수신 치인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등 도학의 발전에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조위 등이 있으며 김굉필의 제자 가운데는 중종 때 활동한 조광조가 있다. 성종은 김종직을 포함해서 그의 제자들을 등용하여 당시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훈구파들을 견제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사림파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 왕위를 찬탈한 세조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들의 부정과 비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세조가 저지른 불의에 가담하여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하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파를 제거할 뜻을 품었으나 성종의 중도적인 정치노선으로 별다른 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양파간의 정쟁이 본격화된 것은 연산군 때에 와서였다. 성종이 죽고 난 뒤 다음 해인 1495년부터 영의정 노사신의 건의에 따라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편찬 도중인 1498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여러 사초를 점검하던중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 세조의 찬탈을 반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김일손은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중국의 의제를 죽인 황우에 빗대어 제문을 쓴 김종직의 글을 실록에 편입시키기 위해 실록청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김일손의 행동은 세조의 즉위와 이로 인해 배출된 공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훈구파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김일손은 훈구파인 이극돈이 성종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향을 바치며 근신하기는커녕 기생과 놀아났다는 사초도 제출하였다. 이것은 훈구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당시 이극돈은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손의 자료를 검토하던중 위의 두 가지 사초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극돈은 즉시 총재관 어세겸에게 사실을 고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자 유자광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모두 사림파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터라 금방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중 한 사람인 유자광은 김종직이 살아 있을 적에 그의 문하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 등을 모함하여 그 공으로 출세했다고 믿고 매우 못마땅해 했다. 의리를 중요시 여기던 김종직의 눈에 유자광은 협잡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판단을 갖고 있던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유자광의 시가 현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떼어내어 소각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김종직이 죽자 글을 지어 이를 슬퍼하기도 하였다. 유자광의 원한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로 인해 사림파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 이극돈의 정보는 불에 석유를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다른 훈구파인 노사신, 윤필상 등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는 바로 연산군을 찾아갔다. 그들은 연산군에게 김종직의 글을 설명하면서 세조를 비난하는 것은 바로 임금을 부정하는 대역무도의 죄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엄히 다스릴 것을 요청하였다. 관련자는 결국 사림파의 인물들을 말하는 것이다. 성종의 정실 소생인 중종이 태어나기 전에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죽자 바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정치는 뒤로 하고 방탕한 생활로 소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사림파들이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사림파들은 연산군에게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연일 촉구하였고 이로 인해 연산군은 '내가 자유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학사배들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였다. 이러던 차에 유자광의 보고를 듣고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연산군은 내심 좋아하였다. 드디어 피비린내 나는 일대 숙청이 벌어졌다. 우선 연산군은 사림파의 죄를 조종한 것은 김종직이라고 하여 그의 무덤을 파서 목을 베게 하였다.(일명 부관참시라고 한다.) 그리고 사림파의 핵심 인물들인 김일손, 권오복, 이목 등을 잡아들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었다. 이밖에 사림파 소속 관료들을 대거 체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앙 관직에 있지도 않은 수백 명의 사림파 인물들까지도 화를 입게 되었다. 한편 연산군은 이극돈, 노사신 등 훈구파 사람들에 대해서도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하였다. 연산군의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가를 여실히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사화로 말미암아 중앙에 진출한 주요 사림파 인물들이 거의 제거당하게 되었고 반면 훈구파는 더 기승을 부렸다. 유자광은 이 일로 지위가 더욱 확고해져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유흥비 마련 과정에서 일어나다 : 갑자사화
연산군의 방탕은 끝이 없어 국고를 거의 자기의 연락에 쓸 정도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즐거움을 더욱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의 양을 늘리는 한편 훈구파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을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연산군의 개인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갑자사화이다. 이때가 1504년, 연산군 집권 10년째 되는 해였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가 된 다음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내용이 담긴 임사홍의 밀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연산군이 토지 등을 몰수하려 하자 이에 대한 대응 방식에 따라 궁중파와 부중파로 나뉘어진 훈구파 신하들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부중파 신하들은 연산군에게 절약할 것을 건의하는 등 자신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런 반면 궁중파 사람들은 오히려 연산군의 방탕을 조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훈구파 내의 조신들은 둘로 나뉘어 반목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때 궁중파에 속하는 임사홍은 계책을 세우는 데 고심하다가 폐비 윤씨 사건을 머리에 떠올렸다. 포악한 성격을 가진 연산군에게 친모의 죽음을 알리면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대숙청을 벌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임사홍은 연산군비인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옥사를 결행하였다. 임사홍의 말을 들은 연산군은 격분하여 당시 관련된 자들이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처형하였다. 이때 해당자 가족이나 동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좌하여 처형하였다. 이미 사망한 한명회, 어세겸 등에 대해서는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다. 연산군의 망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임사홍의 말을 따라 잔류하고 있던 사림파들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이로써 김종직 이후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는 거의 몰살하기에 이르렀고 연산군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전사를 배경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사화에 대한 시각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사화가 직접적으로는 개인적 원한이나 임금의 욕망에서 비롯된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간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당쟁이나 파벌 싸움을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로 못박는다면 이것은 곧 식민주의사관과 별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한론을 세우면서 조선이 자주성이 없는 민족이므로 조선을 병합하여 올바른 국가를 성립시켜 주겠다는 논리를 펼쳤다. 정한론의 기본 논리는 이러한 역사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관학자들은 조선의 정치사를 단지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 때문에 무정부 상태에 이르른 것이라는 시각을 정립해 놓았었다.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조선 역사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화에 대한 판단은 더욱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폭군 폐위를 위하여 : 중종 반정(1506년)
한마디로 말해서 중종 반정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중종반정의 가장 큰 원인은 연산군의 학정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렇다면 우선 앞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반정의 직접적인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산군은 1498년 훈구파의 부추김을 받아 평소 걸림돌이 되었던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제거함으로써 외척과 훈구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 사화로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굳힌 훈구파는 연산군을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닦아나가는 등 권귀화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외척 중심의 궁중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이번에는 훈구파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기 위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사림파도 피해를 보게 되었다. 연산군이 훈구파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던 것은 왕권에 대한 불안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갑자사화가 크게 확대된 것은, 연산군이 자기 생모가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았다는 데에 감정적으로 격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을 위협해오는 훈구파와 새롭게 부상하는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동시에 제거하자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에 연산군의 학정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연산군일기} 등에 나오는 그의 폭정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우선 자신의 실정에 대해 간언하는 것을 싫어하여 비위가 상하면 죽여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중종반정을 일으킨 대부분의 핵심 인물들이 연산군에게 건의를 하다가 미움을 받아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또한 그는 경연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을 원각사에 두어 거기를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뿐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미녀를 선발(이를 운평이라 하였다.),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시키면서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연산군은 매우 사냥을 즐겨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사냥을 즐기기 위하여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하는 폭정을 휘둘러 점차 민심을 잃어갔다. 이러한 연산군의 병적인 행동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 등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언문 때문에 왕을 욕하게 된 것이라고 격분하면서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 등을 불태우면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연산군의 사치와 방탕은 극에 달하여 심지어는 내연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이러한 지경이라면 올바른 정치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정치는 거의 왕의 손을 떠나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진 상태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혼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왕이 아무리 폭정이나 학정을 일삼아도 그 배후에는 이를 방관하거나 조종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바로 신수근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었다. 여기서 당시 왕실을 둘러싸고 궁중파, 훈구파, 사림파 등 세 파로 갈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림파의 경우 중앙에서 거의 밀려나 있는 상태라 그 힘은 미약하였지만 언제든지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사림파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미약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세력은 훈구파 뿐이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핵심 인물들과 상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부사용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의 호응을 얻고,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 박문영, 장정 등의 지지를 받아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반정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행차를 취소하는 바람에 거사도 중지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일으킨다는 격문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둘러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고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수영 형제와 임사홍 등을 죽임으로써 반정을 시도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들이 순전히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순수한 의미에서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인물 대부분이 연산군에게 피해를 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이 다시 중앙 진출을 노린 쿠데타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정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반정을 맨앞에서 이끈 성희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성희안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많은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종사관이나 형조참판의 자리를 거쳐 1504년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런데 연산군이 망원정이라는 곳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연산군의 방탕적인 생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성희안은 분을 못이겨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 이에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부사용은 종9품에 해당되는 무직이었다. 사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산군의 폭정과 타락은 날로 더해가 민심이 흉흉해지는 등 정치적인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박원종과 모의하고 당시 명망가로 알려져 있던 유순종을 끌어들이는 한편,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을 옹립, 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성희안이 제일 먼저 모의를 나눈 대상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원래 연산군이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거치면서 주로 재정 문제에 대해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옳은 말을 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사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성희안과 쉽게 뜻을 같이할 수 있다. 거사를 앞두고 박원종 등은 신수근을 찾아간 적이 있다. 신수근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로서, 임사홍과 결탁하여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외척이라는 특혜를 입어 좌의정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박원종 등이 그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옹립하려는 진성대군은 바로 신수근의 사위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히 여기느냐고 눈치채지 못하게 돌려서 물었다. 그러자 신수근은 화를 벌떡 내며 비록 지금 임금이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박원종 등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만일을 위해 반정을 일으킨 후 제일 먼저 신윤무 등을 시켜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살해하였다. 또한 그의 아우인 신수겸, 수영도 제거되었으며, 임사홍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당시 인망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유순정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이었다. 그는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를 따를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탓에 그는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구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으며 이시애의 반란 때 공을 세운 허종의 막료가 되어 평안도평사를 지낸 적도 있다. 연산군이 즉위한 해에 사헌부헌납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임사홍의 잔악한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 정벌에 참가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산군이 평안도 지역에 밤사냥을 간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정은 밤사냥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사홍이 이를 빌미삼아 그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앞서 그가 임사홍을 비난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일로 유순정은 연산군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성희안과 박원종의 뜻을 받아들여 급기야는 중종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언제 자신도 궁중 세력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들 가운데 선두에 서서 활동한 인물은 신윤무였다. 그는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군자시부정에 오를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정에 점차 불만을 갖게 되어 궁중 사정 등 내외 동향을 성희안, 박원종 등에게 자세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반정이 있던 날 신윤무는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 등을 죽이는 등 거사에 앞장섰다. 장정 역시 무신이었다. 그는 대마도치위관, 하동군수 등 여러 내외직을 거친 후 1504년 창성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은 사실을 알고 다시 농토를 원래의 주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장정은 연산군의 학정이 극에 달하자 반정에 가담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거사중에는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하였다. 전라도의 유배지에서 거사격문을 보낸 인물은 이과와 유빈이었다. 우선 이과는 15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전라도로 귀양갔다. 1506년 유배지에서 유빈, 김준손 등과 같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서울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유빈은 함경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참판까지 올랐으나 갑자사화 때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반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거사를 계획한 인물들은 연산군과 그를 비호하는 궁중파로 인해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물론 내건 명분은 연산군의 학정을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를 개혁하거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조광조가 등장한 이후 다시 재개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정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변에 성공한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대비를 경복궁에서 찾아가 만나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교동에 안치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날인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11대 왕인 중종이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반정은 일단락되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거사 주동 인물들이 연산군 때 일정한 관직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훈구 세력들이기 때문에 다시 정권은 훈구파에게 넘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림파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종반정의 의미와 {연산군일기}
중종반정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연산군이 폐위되고 정상적인 왕권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 뿐이다. 훈구파의 재집권으로 말미암아 이전부터 문제되어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며, 이에 따라 사림파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중종반정은 기득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훈구파들이 정권을 재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봐서 중종반정 자체는 커다란 역사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은 아니었다. 중종반정의 역사적 자리매김은 반정 이후의 상황을 검토해본 후에야 가능하다. 여기서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정의 구실이었다. 흔히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거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앞선 왕을 격하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산군도 어느 정도로 폭군이었는지 그 실체는 사실상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행적을 추격해 볼 때 연산군이 문제가 많은 왕이었음은 사실이라고 보지만 <연산군일기>에 나타나 있는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산군의 학정과 폭정을 말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로 거론되는 것은 역시 <연산군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 상황을 보면 중종반정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게 된다. <연산군일기> 편찬은 중종이 즉위한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하여 1509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편찬관 임명을 둘러싸고 처음에 임명된 자들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라고 해서 곧 교체되어 편찬 책임자에는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성희안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편찬자들도 대폭 개편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 편찬의 어려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 사관이 왕과 대신들의 회의나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했다. 따라서 사관의 기록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또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라는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문에 사관들이 해를 입을까봐 사초를 제출하기를 두려워했으며, 편찬자들도 후환이 무서워 그 직을 회피하는 사례가 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 <연산군일기>였다. 따라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조할 자료들이 매우 희귀했다는 뜻이다. 사론 역시 다른 실록에 비해 매우 적어 25개 정도만이 실려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일기가 얼마나 부실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면, 연산군 4년 이전에는 주로 대간들의 상소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고 갑자사화 이후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각각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까지는 주로 무오, 갑자사화에 관련된 내용과 연산군의 학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연산군의 시문과 이에 화답하는 신하들의 시도 실려 있기는 하지만 명나라나 여진족 등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연산군일기>의 편찬 과정과 그 내용을 살피는 것이 그가 후세에 의해 조작된 폭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중종반정 자체에 대한 판단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즉 중종반정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중요한 것은, 연산군이 폭군이기 때문에 이를 폐위시키기 위해 반정이 일어났다고 평면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어떠한 정치적 흐름이 있었는가를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연산군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부실한 상황에서 연산군 당시의 정치 동향을 정확히 읽는 것이 힘들다면 그 초점을 중종반정 이후로 돌려야한다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종반정이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냈다는 점만 가지고 그 역사적 의미를 함부로 상승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정 이후, 조광조의 등장과 몰락 : 기묘사화 전후 상황
왕위에 오른 중종(1506-1544)이 추구한 정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왕도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서 그 주위에 외척과 훈구파를 중심으로 한 문벌세가들이 왕실을 좌지우지하여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훈구파를 이용하여 왕위에 오른 것은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개혁파라 할 수 있는 사림파는 중앙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탁하여 반정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중종은 일단 훈구파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종은 일단 왕위에 오르자 유교적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당시 사림파의 거두인 조광조를 과감하게 중앙 관직에 등용시켰다. 중종은 성종이 보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당시 사림들을 대거 기용한 것을 본받아 반정을 주도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훈구파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림파 인물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당시 조광조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벌써 20대 초반에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때문에 조광조는 갑자사화 때 유배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는 정권이 바뀐 뒤 1510년 29세의 나이로 진사 회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한 뒤 뛰어난 학문과 인격으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515년,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중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된 조광조는 마침내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막강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언로의 활성화, 향촌의 상호부조 장려로 서민들의 복리 증진, 미신 타파 등을 건의하면서 특히 현량과를 설치하여 세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물'은 당연히 사림파의 청년들이었다. 이에 따라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려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여기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현량과라는 제도를 신설함으로써 사림파 인물들이 대거 중앙에 등용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현량과는 한마디로 말해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특채 형식으로 판단하여 뽑는 제도이다. 즉, 기존의 사장 중심으로 뽑아 부조리가 많던 과거제도를 과감히 개혁하여 인재를 임금이 필요한 인물 중심으로 뽑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현량과로 등용된 인물들은 대체로 30대 소장들이거나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현량과를 통하여 중앙 관직에 계속 오르자 훈구파는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현량과 폐지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간의 대립과 반목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사림파의 혁신정치에 반감을 가진 훈구파들이 이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양대 세력의 싸움은 단순한 정파 다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려 이래로 장려된 사장을 중시하는 것이 훈구파(그래서 사장파라고도 부른다.)이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을 추구하는 것이 사림파라는 점에서 사상적인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이때 벌어진 양 세력의 알력은 이념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권 장악을 놓고 일대 격돌이 벌어진 면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광조 일파는 세력이 커짐에 따라 반정에 참여했던 중신들조차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훈구파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된 것은 이른바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 때문이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등은 반정공신에 올라 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자도 포함되어 있으니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중종은 한번 정한 것이니 다시 수정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조광조가 강청하는 바람에 중종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전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이나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공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과분한 토지나 노비를 몰수하여 사대부의 기풍을 바로잡는다는 취지 아래 내려진 조치였다. 그 이면에는 구세력에 대한 신진 세력의 정면 도전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이 훈구파를 크게 자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광조 일파를 모략할 준비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일에는 사림파에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등이 중심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한때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와 뜻을 같이 하여 수시로 중종을 찾아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말해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 또한 이들은 중종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였다. 아무도 몰래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주:초는 趙의 파자)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중종에게 갖다 바쳤다. 도참사상을 역이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본 중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조광조에 대해 진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홍경주는 상소하기를,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차지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이를 엄히 다스려 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속된 조작에 따라 조광조 등은 옥에 갖히게 되었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였지만 결국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사림파의 기세는 다시 꺾였다. 이후 사림들은 중앙 진출보다는 지방에서 학문 탐구와 후진 양성에 더 힘쓰게 되었으며, 이로써 서원 전성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한편, 기묘사화에 성공한 훈구파는 다시 서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유혈 투쟁을 벌였으며 이러한 것이 뿌리가 되어 명종 때까지도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종반정 이후의 상황을 살펴볼 때 중종반정은 새로운 개혁을 모색하기 위해 훈구파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친위 쿠데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종을 추대한 훈구파는 학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이것을 역이용한 중종은 사림들을 대거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주의 정책이 두터운 문벌세가들의 벽을 뚫기에는 시기상조였는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후일 조선 정치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사상에는 실학적인 개념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어 위민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ff 10.임꺽정의 반란 : 부패한 봉건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농민 반란
누군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역사적, 사회적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구조적 모순으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여 빈농이나 빈민, 유랑민, 또는 도적으로 몰락해갔는가이다. 가장 큰 원인 제공은 역시 당시 정치를 맡고 있던 관료들과 외척들에게 있다는 시각에 일단 분석의 초점을 맞춰놓고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기묘사화가 사림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너무 커 보수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는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조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향리에 뿌리를 내려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꾸준히 후진을 양성하여 지방에서는 사림들이 계속 증가하였다. 반면에 중앙에서는 기묘사화 이후 권신들 사이에 격렬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 기묘사화로 정권을 장악한 남곤, 심정 등이 몰락한 후 김안로가 득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를 폐출시키려다 오히려 실각당하였다. 이때가 1537년(중종 32년)이었다. 김안로 실각 이후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통해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씨의 몸에서는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가 원자를를 낳고 바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왕비를 들인 것이다. 장경왕후의 동생은 윤임이고, 문정왕후의 동생은 윤원형.윤원로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숙청되자 그에게 당해 정계에서 쫓겨났던 윤원형 등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에 따라 두 윤씨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두고 엄청난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불렀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순리대로 왕위는 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런데 인종은 성격이 조용하고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며 효심도 매우 깊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중종이 병상에 있을 때 지나치게 간호에 신경을 쓰다가 자신도 병을 얻어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인종은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 등의 신원을 회복해 주었다. 이러한 인종의 조치는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여 건강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다시 왕도정치를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림들을 대거 기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중종 말년에도 주리론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비롯하여 이황 등이 등용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포부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1545년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숨을 거두었다. 이가 바로 명종(1545-1567)이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에 있었다. 명종이 즉위할 때 나이가 불과 12살이었다. 따라서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윤원형.윤원로 등 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아직도 대윤인 윤임 일파가 건재했기 때문에 소윤 일파는 이들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안정적인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 이들을 반역죄로 몰아 윤임 등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그리고 윤임 등을 따랐던 사림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이로써 윤원형 등은 반대파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이다.(1545년) 그리고 윤원형은 자기의 형인 윤원로마저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하여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 일파의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553년(명종 8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명종은 이를 기회로 외척을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이량 등을 기용하였으나 이량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파벌을 조성하고 사림들을 외직으로 추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량은 사화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심의겸 등의 밀고로 좌절되어 숙청당하였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윤원형과 결탁하여 왕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승하함으로써 윤원형의 횡행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왕후의 죽음으로 크게 위축된 윤원형은 박순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숙청당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림들은 다시 중앙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사림파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상 간략하게나마 왕권을 둘러싼 당시 왕실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중앙 동향을 살펴본 이유는,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지방에 대한 통치가 소홀해져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부렸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당시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은 극심한 왕권 약화 사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중앙의 정치가 구심점을 잃으면 지방 관리들은 불법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또한 정치의 부재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통제 기능이 크게 축소되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배경은 이외에도 제도적인 취약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조 때 실시한 직전법이 명종 때에 폐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관리들은 녹봉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이에 관료들은 사리사욕의 충족을 위해 토지의 개간, 매입, 약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를 넓혀나갔다. 16세기에는 토지에 대한 사유권이 확립되어가는 시기였는데, 이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일반 농민들의 사유지를 부당한 방법으로 겸병하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무전 농민이 되어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으로 떠돌기도 했다. 게다가 놀고 있는 토지에도 세를 부과하는 진전세에 시달려 일방적으로 수탈당해야만 했다. 토지겸병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16세기 중엽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 대부분이 권력자들의 소유지가 되어 나무값이 터무니없이 오르게 되었는데 나무 한 바리에 쌀 한 말을 주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윤원형의 폭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토지겸병과 더불어 16세기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공납(또는 대납)이었다. 왕실과 관료들의 사치가 날로 더해가 부과되는 공물의 양은 끝도 없이 늘어만 갔다. 그런데 수납 과정에서 폐단이 생겨 그전에는 현물로 바치던 것을 상인들이나 지방 관리들을 통해 대납하게 하였는데 그 대가로 착취를 일삼아 중간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각종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는 사족들의 개간에 강제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하기 일쑤였고 군역에 시달리던 장정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의창제도 그 기능을 잃어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제구실을 하지 못해 빌려간 식량의 1할을 내던 이자가 점점 고리대로 변하여 빈농들은 쌓인 이자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제도의 부패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있기 전부터 이미 도적떼들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위와 같은 사회적 모순이 낳은 결과였다. 임꺽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부패해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1559년은 윤원형의 외척 세력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농민 봉기의 집약체, 임꺽정의 반란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명종 14년)에서 시작되어 1562년 1월(명종 17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다른 민란에 비해 볼 때 한 인물이 이끈 난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임꺽정의 활동 상황에 대해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이 반란의 역사적 의미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위에서 본 사회적 모순이 빚어낸 농민들의 몰락으로 임꺽정이 전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도적들은 들끓고 있었다. 연산군의 집권 시기인 15세기 말을 전후하여 산발적인 저항이 지속되었는데, 농민들은 손에 쟁기를 드는 대신 죽창과 칼을 들고 봉건체제에 도전하였다. 명종대에 이르러서는 민란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도적으로 몰락한 농민들의 봉기가 끊임없이 사방에서 진행되었다. 유민들의 봉기는 경기, 전라, 강원, 황해도 등 중남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지역적 봉기가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이 임꺽정의 반란이다. 농촌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자 임꺽정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유랑민들과 도적들을 규합하여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임꺽정의 반란은 특이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무장 게릴라 활동을 통해 평소 농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온 권문세가나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이것을 양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행위를 펼쳤다. 이러한 점이 임꺽정의 봉기가 오래 지속된 원인일 수도 있다. 그는 구월산을 본거지로 삼고 주변 고을의 관리나 양반집을 강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는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옥에 갖혀 있는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임꺽정 등이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을 지지하여 내응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관에서 잡으려 하면 이들을 통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중앙정부에서는 임꺽정의 반란군이 극성을 부리자 개성 등 황해도 일대의 관리를 거의 무관으로 교체하는 등 수습책을 마련하였지만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뿐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신출귀몰하는 임꺽정의 무리를 정탐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미투리를 눈 위에서 거꾸로 신고 다니는 바람에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구월산에 소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은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오히려 반란군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임꺽정은 관리를 사칭하여 군현에 자유롭게 출입하는 등 대낮에도 당당하게 활동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 관료는 이와 관련하여 명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도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 심지어는 관호를 사칭하고 여러 마을에 출입하기를 꺼림김 없이 하여, 수령 중에는 알지 못한 채 대접한 자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임꺽정 등은 개성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서울과 평양 내부에도 자유로이 왕래하고 다녔다고 하니 이들의 활동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임꺽정 등은 대낮에도 공물 등을 싣고가는 수레를 털어대니, 관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1559년(명종 14년) 개성 근방에서 임꺽정이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군인 20여 명을 데리고 임꺽정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여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반드시 잡으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명종은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면 엄벌을 내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작은 도둑 무리만 잡았을 뿐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서울에까지 임꺽정 등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560년 8월 무렵이었다. 서울에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통방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며 달아나 부장을 맞혔다. 그런데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이 잡히고 말았다. 정부는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중앙정부는 금교역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소굴을 두고 활동 영역을 넓혀 더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정부를 괴롭혔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아 활동 자금을 확보하여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자주 출입을 하였다. 이들은 이때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수법으로 관리나 문벌세가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낼 정도였으니 임꺽정의 반란군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활동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예이다. 정부는 오가작통법(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그 책임자가 감시하는 제도를 말한다.)을 통하여 이들을 검색하려 했으나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해 12월에 엄가이라는 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다. 이 사람이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다. 또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해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은 뒤 무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때 반란군은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에 대항하여 부장 연천령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명종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또한 평산 북면 어수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임꺽정의 한 부대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결과는 관군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백주에 임꺽정 휘하의 무장단이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 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신문을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 강려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 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1561년 9월에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 한온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하였다. 이렇듯 관군의 눈을 피해 신출귀몰하던 임꺽정은 정부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결국 사로잡혔다. 체포된 지 약 15일 후에 처형당함으로써 임꺽정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 사관은 임꺽정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이 절박해도 아침 저녁 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의 반란은 현실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반영하여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민중들이 임꺽정의 무장단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것은 중세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임꺽정의 반란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이 축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종은 왕권 회복의 기미를 잡을 수 있었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이유가 바로 외척들의 불법적인 횡행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사림파가 대거 중앙에 진출하였다고 하지만 사회적 모순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형태로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 다음에 볼 '정여립의 반란'이다. 바꿔 말해서 정여립의 반란은 임꺽정의 반란을 토대로 일어났던 지식인의 저항이었다.
임꺽정의 반란 이후 정세
16세기 조선 사회의 특징은 사림파의 득세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의 무오, 갑자사화, 그 뒤의 을사, 기묘사화 등을 거치면서도 사림파는 꾸준히 중앙에 진출하였다. 특히 사림들은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을 설립하여 세력 기반을 확장해 나갔다. 원래 향약과 서원은 중앙 중심의 교육과 통치 형태를 지양하고 주자학의 이념에 따라 교육, 제사, 풍습 등을 시행한 지방자치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도 이를 권장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되고 훈구파와 거의 대등한 권력을 잡게 될수록 나중에는 이 향약과 서원이 양반 중심의 통치 기구로 전락하여 새로운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명종 통치 기간인 16세기 중엽에는 사족들이 토지 겸병을 하여 대지주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농민들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향촌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만 갔다. 무엇보다도 사림파가 중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이들 사이에 이념적 대립이 생겨 파벌이 형성되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래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소인과 대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성리학자들은 서로를 소인이라고 하면서 분당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서 분당이다. 이로 인해 19세기 초 세도정치가 들어설 때까지 조선 특유의 붕당정치가 약 250년간 지속된다.
@ff 11.정여립의 불발 혁명 : 군주체제를 부정한 반체제 지식인
임꺽정의 반란이 진압된 지 3년 후인 1565년에 윤원형의 외척 세력이 숙청당함에 따라 중앙은 사림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임꺽정의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윤원형의 외척 세력과 훈구파가 몰락할 정도로 정치권 변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해서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이용하여 토지와 노비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결국 지배계급의 핵심 세력만이 교체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 개혁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정여립의 미완성 혁명은 이러한 당대 정치 동향과 함수 관계를 갖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여립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동인에 속한 인물을 중심으로 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즉, 흔히 '기축옥사'라고 부르는 정여립 사건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숙청 대상이 된 것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당시 정치 현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여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동서 분당이 일어났는지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동서 분당 : 붕당정치의 시작
동서 분당에 대해서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조금 길더라도 우선 이중환의 말을 들어보자.
선조 때에 김효원이 훌륭한 명망이 있어서 전랑에 추천되었다. 그때에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조참의 심의겸이 거부하여 효원의 전랑 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효원은 명망있는 집 자제로서 학행과 문장이 있고, 또 어진 사람을 추대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기를 즐겨하여 소년 선비들의 환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이에 선비들이 시끄럽게 일어나 의겸을 가르켜, 어진 사람을 거부하여 권세를 농간한다고 공박하였다. 의겸은 비록 왕실의 외척이나, 일찌기 권력을 잡은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선비를 보호한 공이 있었다. 이리하여 나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이 의겸을 옹호하였다. 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논의가 갈라졌는데, 처음은 하찮은 일에서 점차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미, 갑신년 사이에 동과 서라는 명호가 비로소 나누어졌다. 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인이라 하고, 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김효원, 유성룡, 김우옹, 이산해, 정지연, 정유길, 허봉, 이발 등을 추대하였고, 서인은 심의겸, 박순, 정철, 윤두수, 윤근수, 구사맹 등을 추대하였는데 이것이 붕당의 시초였다.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한 일로 인해 파가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숭상했던 당시 사림들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이중환의 말에 따르면, 동서 분당은 결국 원로 대신과 소장 관료 사이의 분쟁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명분을 내세웠으며 무엇을 중시한 의리였는지 알아보자. 위에서 본 것처럼 동서 분당은 전랑직 임명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당시 김효원은 장원급제로 정계에 진출, 명망이 높아져 주로 젊은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심의겸이 시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김효원이 아니라 그를 추천한 김계휘였다. 심의겸은 김계휘가 윤원형에게 아부하는 등 식객 노릇을 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그의 추천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효원이 전랑직을 사퇴하자 그 자리에 심의겸의 아우인 충겸이 임명된 데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의 외척(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다.)에게 전랑의 직책을 맡길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중환의 말에 따르면, 전랑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총칭인데, 그 권한이 매우 커서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 이를 추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전랑을 외척에게 맡길 수 없다는 김효원의 논리는 타당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전랑은 판서보다는 낮은 직위였지만 상당한 실세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료들은 전랑직에 누가 앉는가에 대해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으며, 전랑이 관원을 추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자신들의 세력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주요 요직을 둘러싸고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에 심한 알력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관료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도성 동쪽 낙산 건천동에 집이 있던 김효원 일파를 동인이라고 부르고, 도성 서쪽 정동에 살고 있던 심의겸 일파를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 파로 갈라진 다른 관료들이나 사림들은 어떤 명분으로 뜻을 달리했을까. 여기에는 주로 학연이 크게 작용하였다. 동인의 경우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이황, 조식의 문하 출신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주리철학적 도학을 존중한 영남학파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와 반면 서인들은 주로 이이, 성혼을 중심으로한 주기철학적 학풍을 중시하는 기호학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이이는 후에 당파 싸움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왜란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도 역시 초기에는 김효원 일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동서 분당은 정치적, 사상적 대립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로 그 이면에는 세력 판도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당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일 뿐이다. 동서 분당은 후에 북인과 남인,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는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 특유의 붕당정치를 개막하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조선 건국 이래 정치는 훈신, 척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와 혁신 세력인 사림파 사이의 대립에서 같은 사림들 사이의 사상적, 이념적 대립으로 그 양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서 분당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정여립 사건이었다.
사전에 발각된 혁명(기축옥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정여립 개인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의 신상부터 알아보면서 사건 전모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인백으로서 전주 출신이다. 그의 선조들은 대를 이어 전주 남문 근처에 살았다. 그는 15세 때 익산군수였던 아버지를 따라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때 아전들은 군수보다도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미 십대에 온갖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2년) 식년문과 을과에 두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년배 청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성혼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있었다. 또한 대신인 박순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늘 이해하고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583년 예조좌랑이 되었고 낙향하였다가 2년 뒤엔 다시 수찬의 자리에 올랐다. 정여립은 언관 낭관에 있을 때에는 임금인 선조에게 곧은 말을 자주하였고 공정한 인사를 펴 주위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선조에게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선조를 무시하였는지 건의할 때는 눈을 똑바로 뜨고 왕을 바라보았다. 당시로서는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선조가 건의를 거절하면 문을 나서며 눈을 부라리듯이 뜨고 뒤돌아보기 일쑤였다고 하니, 선조가 이러한 정여립의 불손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본래 서인 사람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들과 가까워지면서, 이이에게 "자기 편만 지나치게 옹호한다"는 등 불만을 토로하여 결국 이이와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이의 제자들이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그는 박순, 스승이었던 성혼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나중에는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제지하고 나서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정여립의 독불장군같은 행위는 서인들의 미움을 사 역모 사건이 터졌을 때 서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탄핵했던 것이다. 정여립이 서인들과 멀어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추측하건대 이이와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했다는 데 있다. 당시 붕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선조 역시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동인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관직 생활을 할 수 없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낙향한 정여립은 만나는 사람마다 선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선조를 바보로 취급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누구를 임금으로 섬기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말은 '임금 한 분만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는 당시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서 군주체제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전주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와 인사하였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그는 점점 유명 인사로 부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낙향하여 한 일중에 주목해야 할 것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를 여는 등 자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는 점이다. 그는 전주, 태인, 금구(훗날 전봉준 등 갑오농민정쟁의 주역들이 활동 했던 곳이기도 하다.) 등의 무사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천민, 승려, 반정부적인 선비들과 사귀면서 모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대동계이다. 그들은 매달 15일에 모여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베풀어 동지적인 연대감을 다졌다. 특히 노비를 훈련시켜 군졸로 양성하는 등 군사적 결합체를 만들어나갔다. 1587년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하였을 때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왜구 토벌을 부탁하자 대동계 군사들을 동원, 토벌할 정도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뒤 대동계의 조직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천민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과 연계해 나가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만난 주요 인물들을 보면, 화적 두목인 길삼봉, 절친한 친구가 된 정개청 등이 있다. 길삼봉은 원래 천안에서 종살이를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화적의 두목이 되었는데 신출귀몰하여 관가에서 잡지 못할 정도였다. 정개청은 박순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지만 이전에는 주역과 풍수지리를 공부하면서 처사로 지내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여립의 집터를 골라주는 등 정여립과 매우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이밖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승려인 의연이다. 그는 스스로 요동에서 온 중이라고 하면서 "요동에서 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와보니 전라도 땅 전주 남문 밖에서 뻗어나왔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렇게 봤을 때 정여립은 황해도의 반체체적인 인물들과 연계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황해도와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여립은 1559년에 시작하여 1562년까지 지속된 임꺽정의 반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임꺽정의 본산지였던 황해도, 특히 구월산을 중심으로(승려 의연은 구월산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연계 조직을 만들어나갔다는 것은 임꺽정의 반란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는 지함두와 만났을 때 "해서의 풍속이 좋지 않아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있었다......몰래 서로 결합하자"고 말했다. 여기서 지함두의 신분이 천민이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자. 즉, 정여립이 천민에게 '결합'하자고 한 것은 민중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비록 자신은 토지도 갖고 있는 양반 신분이지만 민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정여립의 반체제적 성향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정여립은 임꺽정의 반란을 조선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변혁시키려 했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혁명을 준비하였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 거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여립의 수하 인물 가운데 조구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정여립이 엄청난 모반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겁을 먹고는 1589년 10월, 황해도 감사 한준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밀고하였다. 조구의 말을 듣고 놀란 한준은 즉시 비밀 장계(이것은 임금만이 볼 수 있게 꾸며 올리는 보고서이다.)를 작성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내용인즉, 정여립 등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뒤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장계에는 한준을 비롯하여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이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의 연명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 역시 크게 놀라 한밤중에 주요 대신들에게 입궐을 명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평소 그를 미워하고 있던 선조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즉시 의금부에게 명령하여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금부 군졸들이 정여립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정여립은 도망간 뒤였다. 조구의 행동에 의심을 갖고 있던 정여립의 심복 변숭복이 고변 사실을 먼저 그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는 머물고 있던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과 동조자인 박연령의 아들 춘룡, 그리고 변숭복과 함께 진안 죽도로 피신하였다. 갑작스러운 피신이라 아무런 준비도 못한 상태여서 정여립 등은 식량 문제조차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산 속에 은거지를 마련해놓고 마을로 내려가 동냥으로 밥을 빌어먹었다. 그러자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들이 관가에 신고하여 진안현감 민인백이 군졸을 이끌고 출동, 산을 포위하였다. 민인백은 왕명에 따라 그를 사로잡으려 했지만 정여립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고선 자기 아들 등 일행을 칼로 쳐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정여립은 모반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사건은 정여립의 자살로 끝나지 않았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인 소속의 정철이 고향에 있다가 급히 상경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사태의 위급함을 상기시키고 모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당시 정계는 대체로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었던 정철은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동인들을 대거 숙청할 뜻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정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위관으로 임명, 사후 처리를 맡겼다. 이때부터 정여립과 관련된 자들이 속속 잡혀들어갔다. 당시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이 그런 일을 꾸밀 리 없다고 선조에게 말했다가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문초를 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수가 무려 천여 명을 넘었다고 하니 한국 역사상 모반과 관련되어 처벌된 양반들의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었다. 우선 선조는 관련자를 알리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으며, 사태가 파악되면서 동인들이 연루되어 있다고 심증을 굳힌 정철 등 서인들이 이 기회에 동인들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청(죄인을 심문하는 기관)에는 연일 잡혀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한마디로 피비린내 나는 엄청난 숙청이 벌어졌던 것이다.
역사적 의의
정여립 사건이 조작되어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1)정여립이 낙향하여 활동한 내용을 보거나 2)조작이었을 경우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을 볼 때 조작설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피해자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모함에 걸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쨌든 정여립 사건 이후 정계는 다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 사건이 민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파악한 이이 같은 올바른 지식인들은 현실 개혁만이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란을 예방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위로부터의 변혁을 꾀했지만 무위로 끝나, 사건이 있은 지 3년 뒤인 1592년에 이르러 민족 대환란인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임꺽정의 반란, 정여립의 불발 혁명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일반 백성들은 현 정부나 체제가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봉건적 질서의 병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난 이후 17세기에 봉건적 질서 해체의 조짐이 보이게 된 것은 이러한 내재적 발전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임꺽정과 정여립의 반란은 조선 지배체제의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위기 의식을 가진 지배계층은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후 호남 인사들의 등용이 매우 어려워져 지역 감정을 야기시켰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의 탐학이 다른 지방에 비해 심해져 뒷날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 사건은 군주체제를 부정한 혁명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로 끝났지만 지배계급의 위기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현실 개혁의 필연성을 상기시켜준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ff 12.광해군과 인조반정 :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17세기초 사회 변화와 정치 동향
16세기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대변동을 겪게 되었다. 현재 양난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어 아직은 전체적인 조망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확인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조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얻어낸 것이었다. 전쟁에서 아무리 승리한다 해도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쟁이 끝난 후 흉년과 질병으로 농촌경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고 귀중한 문화재는 물론이고 서울의 궁궐은 거의 소각되어 국왕은 개인의 사저를 집무실로 써야할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은 지배계급의 허구성을 여실히 체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미 전쟁 전에 이이 등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역설하였지만 지배계급의 역량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이에 대응할 만한 정규군대는 매우 허술했다. 왜적을 막은 것은 농민들이나 천민이 주축이 된 의병들이었고, 도망가기 바쁜 계층은 양반들이었다. 물론 중앙 관직을 갖고 있던 관료들 중에는 자진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지방 사족들 중에서 왜적과 맞써 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속출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겪은 전쟁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신할 정도로 왜병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각종 공신을 내리고 전후 복구 사업에 착수하려 했으나 전화로 인한 피해가 깊은 데다가 흉년까지 들어 별로 진척이 없었다. 선조는 말년에 몸이 쇠약해져 국정을 쇄신할 역량이 점차 감소하였다. 결국 선조는 전후 복구사업을 별로 이루지도 못한 채 1608년에 급사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할 즈음 붕당간의 파쟁 조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불씨는 선조가 죽기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원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정비 소생의 적자를 얻지 못하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의 몸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얻었다.(적자는 '대군'이라고 불렀지만 서자는 그냥 '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둘다 품계는 없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병이 빠른 속도로 북상한다는 보고를 듣고 정부는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국가의 위급이 초를 다투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둘째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였다. 첫째인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고 학문적인 소양도 없으므로 왕이 될 재목이 안된다는 여론에 따른 조치였다. 사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 늘 선조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었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어깨가 무거워졌음을 인식하고 일단 눈앞에 닥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우선 광해군은 평양을 떠나 다시 의주로 피난을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분조 (세자의 자격으로 임시로 임금의 일을 대행케 한 제도)를 위한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때부터 광해군의 발길은 바빠졌다. 전쟁에 휘말린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그는 약 7개월 동안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돌며 의병 모집을 하는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선조가 있는 행재소에 다시 복귀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광해군은 세자로서 신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후 광해군은 방위체계를 위해 만들어진 군무사를 관장하였고, 1597년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자(정유재란) 전라도로 내려가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당시 왜적에 대비하여 부산에 수군함대를 집결시켜 놓았는데, 선조는 이를 보고 만일 호남으로 적이 들어오면 막을 길이 없으니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아마 광해군은 이러한 선조의 명을 받아 전라도 방어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광해군은 전쟁의 와중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현군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을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전쟁 중에 세운 공로로 말미암아 광해군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안정된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594년 명나라에게 세자 책봉을 보고하였을 때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지만 왕위 계승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반대하는 무리들에게는 이러한 관례적인 문제도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권에 대한 도전 : 왕권 약화에 따른 붕당의 득세 그런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최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선조의 적자, 즉 영창대군이 탄생한 것이다. 선조는 1602년 18세의 어린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죽기 2년 전인 1606년에 영창대군을 품에 안았던 것이다. 인생 말년에 얻은 아들이다 보니 극진한 정을 갖게 된 면도 있지만 우선 서얼이 아닌 적자라는 점에서도 더 정이 갔다. 선조는 광해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들 시대에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척끼리 유혈 싸움을 벌인 일이 허다했다는 것을 선조가 모를 리 없었다. 추측하건대 선조가 만일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아들의 재롱을 다 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선조는 죽기 전 자신의 병이 위독해짐을 알고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린다는 전교를 내렸다. 또한 유영경 등 충신 7인(유교칠신이라고 부른다.)을 따로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여운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한마디의 유언이 광해군 즉위 초기부터 국정이 당쟁에 휘말리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에 붕당은 다시 세포 분열을 일으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있었다. 흔히 역사에서 표현하기를, '전쟁의 와중에서도 당파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치루고 명나라 군대와 사신들을 대하느라 중앙의 관료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당시 정황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당쟁이 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경위를 {택리지}에서 들어보자.
그 무렵에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경전이 유생 때부터 남의 나무람이 많았으니 전조에 끌어들임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산해와, 산해에게 아부하던 자들이 크게 노하였다. 그때에 이덕형이 정승이었는데 사람을 시켜 이준을 청하여서, "자네가 경임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조에 추천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조정을 편케 하는 도리가 아니다. 내가 사정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준은 경세와 같은 고을 사람이고, 경전은 덕형의 아내의 아우인 까닭에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에 남이공이 대간이 되어 수상 유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하였다. 대개 경세는 본디 유정승의 제자였으므로, 산해는 경세가 유정승의 지시를 받았는가 의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공을 시켜 말한 것이나, 성룡의 허물은 아니었다. 이에 성룡을 편드는 사람으로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한준겸은 모두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상룡이 영남 사람인 관계이며, 산해를 편드는 사람으로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노, 이이첨은 모두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산해의 집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인이 비록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으나 남인은 아주 적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대립 양상에 불과하다. 당시 분당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정철의 탄핵을 둘러싸고 서인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일파와 온건 대응을 주장하는 일파가 생겨 갈라졌던 것이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며 공을 세운 정철은 사태 수습 후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591년에 정철은 적자, 즉 왕위를 계승할 원자가 없음을 지적하고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등과 같이 상의한 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에게도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여 '건저 주청'(쉽게 말해서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와 허락을 말함)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자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산해 등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그런데 동인이었던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곤량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 선조가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아끼고 있음을 알고 있던 이산해는,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김씨는 선조에게 달려가 울면서 호소하자 선조는 격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철은 경연에 나가 건저 문제를 거론하니 선조는 크게 화를 내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정철은 이산해, 유성룡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은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또한 같은 서인인 이성중, 이해수 등은 외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봤을 때 이산해의 계략은 2년 전인 1589년에 있었던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 때 동인들이 정철의 손에 엄청나게 숙청당하자 이를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건저 문제를 빌미로 그를 중앙에서 밀어냈던 것이다. 이때 세자 문제로 거론된 왕자는 신성군과 광해군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신성군을 더 총애하였다고 한다. 단지 광해군이 둘째이고 신성군이 네째라는 서열상의 문제 때문에 왕조차도 자신의 뜻을 쉽게 거론할 수 없었다. 신성군은 임진왜란이 터진 이듬해인 1592년 전쟁에 참여했다가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서 다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심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북인은 다시 분열되어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졌다. 1599년의 일이었다.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의 위치에 있었던 남이공이 이를 반대하였다. 이때 홍여순, 기자헌, 이이첨, 정인홍, 허균 등은 대북이 되었고, 남이공을 중심으로 유영경, 이효원, 이유효 등은 소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붕당의 분화 현상은 집권층 내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대북은 소북을 몰아내고 광해군 즉위 후 세력을 잡게 되었지만 다시 세 파로 나누어지는데,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과 홍여순, 이이첨의 육북, 그리고 영창대군, 인복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이 생겨났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대북은 여러 사건 때마다 강경과 온건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며 이것 역시 사건 처리를 놓고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뚜렷한 이념에서 야기된 분열은 아니었다. 어쨌든 거시적으로 봤을 때 선조 말년부터 국정은 주로 북인들이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서인이나 남인들은 중앙에서 점차 멀어졌다. (이것은 당쟁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지 나머지 세력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파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서얼 출신도 과감하게 기용하였다.) 다시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로 돌아가 보자.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죽기 전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영경은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막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선조의 죽음이 임박하자 광해군 즉위 문제를 둘러싸고 당파간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필해온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유영경의 음모는 탄로나고 말았다. 이때의 인물들을 역사에서 분류하기를, 유영경은 소북, 정인홍은 대북이라고 부른다. 소북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정인홍 등은 유영경을 엄히 다스릴 것을 선조에게 요청하였지만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조는 죽었다. 이런 음모를 극복하고 광해군은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 광해군은 자기의 뜻에 따라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는 유영경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그를 교동도에 유배보냈다. 그런데 계속 유영경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영창대군을 추종하는 세력이 다시 커지자 부득불 그에게 사약을 내려야 했다. 또한 더큰 문제는 임해군과의 관계였다. 우선 여기서 그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세자로 책봉되지 않았는지 잠시 알아보자. 성격이 난폭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임해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왕명에 따라 김귀영, 윤탁연 등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가 1592년 9월에 반적 국경인에게 체포되어 왜장 가토에게 넘겨진 후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아무리 세자 책봉이 안됐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장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양국간에 여러 차례 교섭을 하여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포로 생활을 하면서 상당히 피해 의식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군은 자기의 분을 못이겨 거리를 나돌아 다니기 일쑤였고 성격이 더 포악해져 아무 민가나 들어가서 약탈을 하거나 폭력을 휘둘러 더욱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임해군은 포로 당시 가토의 회유에 넘어가 그에게 조선의 내정을 알리는 서신을 몇 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마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임해군임에도 불구하고 장자라는 위치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계속 문제 삼았다. 1608년 선조가 죽은 후 명나라는 마침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역시 임해군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의 조작이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던 임해군은 더 기세가 등등해졌고 그를 이용하여 왕위 찬탈을 꾸미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의 집에 무기가 반입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상소도 보이지만 결국 이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해군이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시비를 건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를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났던 것도 당시 상황이었다. 특히 임해군 자신은 광해군을 헐뜯고 다니면서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임해군 문제를 놓고 당파간에 혈전이 오갔다. 그런데 정인홍은 왕권이 안정되어야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다고 하면서 형제라도 반역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광해군에게 단호하게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친형을 처벌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임해군을 유배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609년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은 반대하였다. 임해군은 진도에 있다가 교동도로 이배되어 있었는데 당시 현감이 이현영이었다. 그는 이이첨과 인척 관계였는데, 이이첨이 임해군을 죽이라는 암시를 주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이첨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어 "현영은 죄인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였다"고 탄핵한 뒤 그 후임으로 이직을 앉혔다. 결국 임해군은 이직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임해군의 죽음은 광해군 때문이라기 보다는 광해군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북인 과격파들이 꾸민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같은 북인이라고 하더라도 정인홍의 경우에는 광해군의 왕권 강화와 국가 기강에 초점을 맞추어 관직을 내려도 중앙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스승이 산림에 처해 있었던 것을 본받아 일이 생길 때마다 광해군의 자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정권이나 자기의 영욕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선비였다. 그래서 그를 산림정승이라고 불렀다. 유영경 사건이 터졌을 때도 처사로 있으면서 과감하게 유영경을 처벌할 것을 선조에게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모함을 당하여 노구를 이끌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도중에 선조가 죽는 바람에 풀려났다. 반면에 이이첨 등은 광해군을 부추켜 여러 실정을 저지르게 하였다. 이렇게 같은 파벌에서도 처세술이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당시 정치가 상당한 분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내용만 살펴봐도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부터 시작하여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험난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축옥사와 인목대비 폐모 사건 : 인조반정의 원인
선조 즉위 전후로 시작된 대북과 소북 사이의 알력은 결국 1613년(광해군 5년)에 일대 숙청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른바 계축옥사가 그것이다. <연려실기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 옥사에 대해 무려 세 가지 시각이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실제로 강변칠우들이 강도짓을 일삼다가 체포되어 이이첨의 협박과 회유로 거짓으로 반역을 꾀했다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강변칠우들이 서얼 출신들이므로 중앙 진출을 할 수 없자 오랜 시간을 두고 스스로 모반을 꾀하다가 이들을 정탐하러 뒤쫓아온 상인을 죽였다고 하는 것이다. 또는 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도 한다. 세째는, 강도짓을 한 박응서가 체포되었을 때 다른 동지들이 중앙에 뇌물을 주어 풀려고 하였지만 박응서가 미리 겁을 먹고 모반을 꾀했다고 자백했다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갑도 체포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까지 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하자 정부의 타락을 욕하면서 "제(광해군)가 나의 어머니를 죽이니 나도 제 어머니(인목대비)를 죽여야 되겠다" 하면서 자기들의 모반을 인목대비와 그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주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1)박응서의 행위가 단순 강도였는데 이이첨의 계략으로 거짓 자백한 것인가, 아니면 2)강변칠우들이 실제로 모반을 계획하던중 자금 조달을 위해 상인을 해치다가 걸려들어 이들의 모반을 알게 된 이이첨이 고문하여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김제남을 괴수로 끌어들였느냐 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즉 이이첨 등 북인 과격파가 단순 강도를 모반으로 조작한 것이냐, 아니면 실제로 강변칠우들이 반란을 계획했는가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일단 양쪽 의견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사건 전모를 밝혀보기로 한다.(일반적으로 이이첨이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므로 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강변칠우란 박응서(그는 박순의 서자였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김평손 등 서얼 출신의 7인을 뜻한다. 이들은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함을 불만을 느낀 나머지 서로 의기투합하여 모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강변칠우는 중국의 죽림 칠현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니 이들의 도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생과 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를 하고 여주 북한강변에 무륜이라는 정자를 짓고는 여기에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서양갑, 심우영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서자도 등용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강도 행각을 일삼는 한편 모반을 꿈꾸었던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던중 박응서 등이 문경 새재에서 서울 상인(또는 동래 상인이라고도 한다.)을 죽이고 수백냥을 약탈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관련자들이 포도청에 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이첨은 포도대장을 찾아가 그와 협작하여 이들을 이용하여 반대파 축출은 물론 영창대군과 그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이첨은 직접 박응서 등을 국문하면서, "네가 이러이러하기만 한다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이룰 수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다시 진술하라"고 종용하였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박응서 등은 이이첨의 계략에 넘어가, 자신들은 모반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목적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사주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상인을 죽인 것은 모반을 위한 자금 마련 때문이라고 자백하였다. 영락없이 어린 영창대군은 모반의 괴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밟은 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폐하였으며 선조의 유교칠신 가운데 현직에 몸을 담고 있던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 등을 중심으로 서인과 남인 수십 명을 삭탈 관직하거나 유배보내었다. 또한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대북파 사이에서 거세게 일자, 이이첨은 강화부사 정항에게 지시하여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암살하고 말았다. 당쟁의 회오리 바람에 어린 왕자는 뜻도 모르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때에도 정인홍은 "아무리 왕법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린 대군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중앙은 이미 대북 과격파가 장악한 뒤라서 그의 의견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과격파들은 아예 반대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정원군(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을 교동도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살해하였다. 물론 영창대군을 따르는 서인들이나 남인들이 인목대비와 김제남을 중심으로 대북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북 과격파는 이러한 정세 불안 요인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하여 위와 같은 옥사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집권층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리일 수도 있다. 결국 계축옥사 사건의 진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강변칠우들이 정말 어떠한 뜻을 갖고 강도짓을 했는지(이 내용조차 조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이첨이 조작한 것인지에 상관없이 이 사건을 빌미로 대북 과격파는 정권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며 광해군은 폭군으로 몰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임금은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까. 바로 여기서 왕권과 신권 사이의 대립, 갈등을 읽을 수 있으며 세조 이후 약화된 왕권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군주체제가 갖는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일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축옥사 이후, 정확히 5년 후 드디어 인조반정을 야기시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다. 계축옥사가 있고 난 뒤에도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 김씨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다가 1617년에 이르러 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사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대해 신하들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다. 같은 대북인이었던 정인홍은 역시 이때에도 전은론을 펼치면서 국모에게 벌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폐륜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던 이원익도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극렬한 어투로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려 대비폐위론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오히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는데도 자꾸 민심을 흐뜨려 놓는다고 하면서 그를 홍천으로 유배보내었다가 여주로 이배시켰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때도 맹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쟁의 병폐에 반대하면서 정도를 주장한 강직한 선비였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과격파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을 끝내 설득시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던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김덕함 등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기회로 삼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뒤, 공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인목대비가 굿을 벌인다는 것을 핑계삼아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말려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광해군은 돌이킬 수 없는 폭군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 민심은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고 반대파에서는 본격적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자는 모의가 진행되었다.
인조반정 : 서인 일파의 집권
인목대비 폐위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들이 극렬한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이 되었다. 마침내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력 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함흥판관에 재직중이던 이귀는 북우후 신경진과 모의를 논의하고, 유생 심기원, 김자점과 뜻을 같이한 뒤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능양군을 옹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단시일에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반정이 있던 전해부터 무력 정변의 조짐은 있었다.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 신경진은 효성령별장으로 있었는데 평산 지방에 호환이 심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귀는 범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보장을 얻어내어 이것을 기회로 서울까지 밀고 내려와 거사하려 했으나 이 모의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러자 다음해에 들어서서 그가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이귀 등은 서둘러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것이다. 거사일을 1623년 3월 13일로 잡고 전날 밤인 3월 12일에 홍제원에 모여서 대오를 가다듬고 일제히 군사 행동을 벌일 것을 최종 약속하였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홍제원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모두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장유라는 자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달려왔다. 이미 정부에서 모반 계획을 알고 일제 검거령을 내린 동시에 훈련도감 이확이 이끄는 정부군들이 창의문에 군사를 결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태는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직 반란군의 반도 차지 않은 데다가 주력부대인 장단부사 이서의 부대가 도착할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반람군 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모인 반란군 수는 불과 600-700명. 그것도 정부군과 접전을 벌일 만한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붙잡힌다면 모두 처형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진퇴양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모인 군사들조차 우왕좌왕하여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으며, 김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대신 대장을 맡으라고 권고하였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면 군사들이 모두 도망갈지도 모르는 지경이었다. 이괄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괄은 군사들에게 '의'자를 쓴 표지 수백 개를 나누어주어 각자 군복 뒤에 붙여 어둠 속에서도 정부군과 구별할 수 있게 조치하였다. 그리고 이괄은 군관들 밑으로 군사를 나누어 전열을 수습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궁궐을 향하여 진격하는 것 뿐이었다. 그때 김류가 보낸 전령이 이괄의 부대를 찾아왔다. 김류가 군대를 일으켜 합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괄은 처음엔 그를 배신자라고 욕하면서 뜻을 합치지 않으려 하였지만 이귀 등이 말리자 결국 김류의 부대와 연합하게 되었다. 김류는 반정의 모의가 정부에 알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담치 않으려고 집에 있다가 그의 측근들이 설득하자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출정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괄은 김류에게 총지휘권을 양보하였다. 이럴 즈음, 이서의 주력부대 등이 도착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반란군은 일시에 창의문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이미 창의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 소속 선봉부대는 문을 부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 주력부대가 북을 치며 들어가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이때 창의문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이확의 부대는 반란군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확은 이미 사태 파악을 하고 광해군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이흥립은 이미 반란군과 내응하기로 결정을 봤기 때문에 아예 반란군이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정도였다. 궁궐의 주력부대가 모두 반란군 세력에 포섭된 상태였다. 반란군은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까지 이르렀다. 이때에도 사전 약속이 되어 있던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반란군의 횃불에 창덕궁의 여러 전이 불에 타올랐다. 반란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반란군 군사들은 돈화문에 이르러 쌓아둔 나무에 불을 질렀다. 한밤중의 궁궐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궁궐 내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시 몇명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의 거사는 별다른 전투도 벌이지 않고 성공리에 끝났다. 남은 일은 왕을 교체시키는 것 뿐이었다. 이튿날 반란군 지휘부는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바로 인조이다. 능양군이 보새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에게 바치자, 인목대비는 기뻐하며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1)선왕(선조)을 독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켰으며 2)토목공사를 크게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3)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하였다는 죄목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인조반정은 모두 일단락되었다. 전날 북문으로 빠져나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던 광해군은 곧 잡히고 말았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인조의 간청으로 사형을 면하게 하여 서인으로 격하시켜 강화도로 귀양보내었다. 사실 광해군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원익의 간곡한 청원 때문이었다. 당시 이원익은 여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반정 이후 인조가 그의 인품을 익히 알고 제일 먼저 조정에 불러 영의정에 임명하려 하였다. 이원익은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인조에게, 자신은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기도 조정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감복한 인조는 광해군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조치를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다시 조정에는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서인들은 그동안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하여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수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낙도 등으로 귀양보내버렸다. 반면, 인조는 반정에 큰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 김류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리고 각기 등위에 따라 관직을 명하였다. 또한 남인에 속한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이 됨으로써 남인이 제2 세력을 형성, 서인과 남인의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는가 : 대동법 실시와 자주외교 정책
여기까지 보면 광해군은 연산군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폭군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는 폭군이었을까. 우선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는 근거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그는 친형인 임해군과 8살의 영창대군을 죽였다. 또한 국모의 아버지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서인들을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조선 국왕 가운데 가까운 친인척을 죽인 임금이 어찌 광해군 하나뿐인가. 물론 결과론적인 지적이지만,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친인척을 모두 살해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선조의 아들이, 즉 언제든지 세력만 있으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왕자들이 영창대군 외에도 13명이나 더 있었다. 만일 광해군이 왕위에 불안을 느꼈다면 이들 모두를 살해했어야 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만을 상대했다. 태종은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왕자의 1, 2차 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세조는 조카와 두 아우를 죽였다. 그리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 역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숙부까지도 죽음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폐위되어 폭군이 된 이는 광해군 뿐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권력 투쟁에서 진 임금은 당시 세력을 잡은 권력자에 의해 폭군이 되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이시애의 반란이 성공하여 세조를 축출했다면 그 역시 역사에 수양대군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실정을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마저 죽이고 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당시 성리학적 이념에서 볼 때 폐륜에 속한다. 이것은 광해군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것을 자의로 행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사화를 일으킬 때, 주위 대신들이 이를 조작한 면도 있지만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는 그도 역시 광분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분명 광해군은 연산군과 다르다. 따라서 연산군에 대한 평가조차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광해군이 처한 당시 정치적, 나아가 외세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의 공적을 드러낸다면 그가 자의적으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대동법 시행이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까지도 대납에 따른 부조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김육 등이 건의하여 모든 공물을 쌀로 대치하자고 하였다. 광해군은 전쟁 직후 피폐화된 국토를 재건설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위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즉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당시는 경기도에만 한정했지만 이후 후대 왕들이 광해군의 취지를 살려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대동법은 1894년까지도 존속하였다. 광해군의 전후 복구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에서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근거로 제시한 것 가운데 하나가 토목공사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세 봉건질서의 안정은 왕권의 강화에 있다. 이것이 독단에 빠져 폭정으로 이어진다면 문제이겠지만, 왕권이 약화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면 그것은 더 큰 문제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문벌귀족들이 득세하여 그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중세에는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대신들이나 관료들이 이를 보필하면서 국정을 이끌고 민생을 돌볼 때 가장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이룰 수 있었다. 결국 광해군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소각된 궁궐을 재창건한 것은 이러한 취지에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서울의 궁궐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 천도를 계획하였다. 전쟁 이후 민심이 흉흉해져 다시 '정씨 왕조설' 등 각종 도참설이 나돌자,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주로 천도할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 궁궐을 지을 기초 공사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또한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막대하고 이때 명나라가 후금과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청병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자기의 독재적인 정권을 유지하는 폭군이었다면 백성들의 원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천도했을 것이다. 광해군의 정국 운영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은 자주외교 정책이다. 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명나라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명나라는 이미 임진왜란에 참가하는 시기 전후로 말기에 처해 있었다. 또한 이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그만큼 국력 소모가 극심했다. 내부적으로 볼 때 농민들은 토지를 수탈당하여 문벌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심화되었으며 이밖에도 농민들은 각종 부세에 시달려 농촌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사회적 모순은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17세기초 전후에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 민란은 하나의 도당을 만들 정도로 강대해져 명나라 정부는 이에 대처하는 데에도 힘겨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거기다가 당쟁이 격화되어 조정 내부는 일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편, 만주를 중심으로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여진족은 누르하치에 의해 강성한 국가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원래 여진족은 11세기 때 금나라를 세워 전성기를 맞은 적이 있지만 이후 원나라에게 패배하여 다시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야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해서, 건주, 야인(고려나 조선 때 여진족을 야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등 3부이다. 이 여진 3부는 각기 사회적 발달 속도가 틀려서 야인부의 경우 '물을 따라 살며' 활 사냥을 해야 할 정도로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이 주로 한반도 북방을 침략한 부족이었다. 반면에 해서부와 건주부는 비록 수렵 생활을 하긴 했지만 목축과 농경이 발달하여 야인부보다는 먼저 계급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나 조선은 이들을 모두 싸잡아 야만인, 또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러한 '오랑캐'가 다시 국가를 세운 것은 1616년의 일이다.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 정권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관제와 법제를 세워 국가 조직을 갖추면서 여러 부족을 통합해 나갔다.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이 그의 수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북방을 수비하던 명나라 장군 이성량 밑에서 성장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섭렵하였다. 그는 이때 병법과 각종 전술도 익혔으며 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안목을 키웠다. 이전에 명나라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동 이북 지역에 180여 개의 위소 (정복지 관리 기관)를 설치해 놓았었다. 그러나 중앙 정권이 약화되자 여진족에 대한 통치도 소홀해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누르하치를 건주위좌도독에 임명하는 등 관직을 준 것이 명나라로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일찍이 배운 학식과 병법을 토대로 강성한 국가를 세워 나갔다. 그리고 명나라의 내정이 날로 갈수록 부패해져 농민 반란 등으로 인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명나라를 치기로 결정하였다. 1618년(바로 광해군이 군사 요청을 받아들인 해이다.), 누르하치는 '칠대한'(한마디로 말해서 중국 민족에게 착취당한 것에 대한 원한이다.)을 내세우며 명을 침입하여 무순성을 불태우고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과 재물을 약탈해갔다. 이로써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도발된 것이다. 명나라 정부는 조선에 군사 요청을 하는 한편,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정시켰다. 그러나 명나라는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 출정한 강홍립의 부대는 누르하치에게 투항한 상태였다. 요동 전투에서 진 명나라는 사실상 요동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된 셈이며 반면 누르하치의 후금은 더욱 강성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나라는 기울고 후금이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광해군은 정확히 읽고 있었다. 이미 그는 임진왜란 때 전투에 직접 참가하면서 명나라 군사들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한 명나라 군사들이 구원병이라고 자처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도 잊지 못할 사실이었다. 유성룡도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었다"고 토로할 정도로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는 왜군 못지 않게 극심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 직후 정인홍이 자주국방론을 주장하면서 명나라 군대는 믿을 것이 못되며 왜적이 쳐들어온 것은 벼슬아치들의 썩은 통치 때문이라고 하면서 민생고를 해결하여 민심을 바로 세워야 국가 기강이 서고 외침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광해군은 이러한 정인홍의 상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국제 정세가 혼돈에 빠지자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에게 명하여 정확한 정세 보고를 하도록 하고 의주지방의 관리를 시켜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시켰다. 불과 몇 년전에 전쟁을 겪어 국력이 약화된 사이에 여진족이 남하한다면 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겪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속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광해군은 판단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다는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군사 요청을 한 것은 1617년도부터이다.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협공으로 후금을 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 정부는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으니 군사를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에 대해 더 짙은 사대의식을 갖게 된 사대파들이 들고 일어나 즉시 군사를 보낼 것을 연일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때 광해군은 묘안을 떠올렸다. 당시 강홍립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광해군이 즉위하기 3년 전인 1605년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도 이덕형을 따라 명나라에 한 차례 더 갔다왔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남병사 (함경도 북청에서 근무하는 무관직. 국경지대의 방비 책임을 맡았다.)에 임명되었다. 그 이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에 강홍립은 세자시강원에서 일하는 보덕을 맡은 적이 있어 광해군과는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즉, 광해군은 그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며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으며 국제 정세에도 밝다는 것을 알고는 중용할 뜻을 가졌다. 마침내 광해군은 그를 한성부 부윤에 임명, 서울에 있게 하면서 자주 국제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 광해군은 무신으로서 신임할 사람이 강홍립밖에는 없다고 최종 결정한 뒤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절대 후금과 싸우지 말며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출정은 명나라 청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누르하치에게 알려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1618년 8월에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7개월이 지나서야 압록강을 건넜다. 광해군의 명령에 따라 명나라와 후금의 동태를 살피며 일부러 행군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강홍립은 명나라 군대에 흡수된 뒤에도 무기가 모자란다, 양식이 떨어졌다는 등 여러 구실을 만들어 후금 군대와 충돌하지 않았다. 4군으로 편성하여 진군하던 명나라 군대는 후금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홍립은 어쩔 수 없이 후금과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군대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때가 1619년 3월초였다. 그는 후금의 누르하치를 만나 광해군의 뜻에 따라 조선은 후금과 조금도 싸울 생각이 없다고 전달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서 8년 동안이나 억류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편, 이러한 내막을 알리 없는 조정 내의 사대파 대신들은 강홍립을 역적으로 몰며 연일 상소를 올려 그의 가족을 처벌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의 가족을 서울에 데리고 와 거처를 마련해주고 신변 보호를 해주었다. 강홍립이 자기의 뜻대로 했으니 이에 당연히 보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광해군의 조치에 대신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홍립에 대한 탄핵 상소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광해군은 국내 정세의 불안을 감안하고, 또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갖고 있는 허구성을 정확히 파악, 후금이 남하하여 이 땅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을 막기 위해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하면서 한편으로는 후금의 침략 가능성을 무마시켜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보기 힘든 절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광해군은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제한적이지만 심지어는 당시 금기시되어 있던 서얼 등용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가 인재 등용에 당파를 가리지 않았다는 증거로는 조정 내에서 계속하여 광해군을 음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된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당파성을 강조하여 소북이나 서인, 남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옥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대북인들에 의한 독재정치가 이어졌을 것이다. 또한 선조 때부터 집필에 들어간 허준의 <동의보감>이 완성된 것도 광해군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례적으로 왕이 죽으면 그 주치의가 탄핵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준을 아끼어 처벌을 내리지 않고 저술 활동을 할 수 있게 조치해 주었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완성된 것도 물론 광해군 때이다. 이제 광해군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 그의 업적과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볼 때 광해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강력한 정부를 갖추어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당쟁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형을 죽이거나 동생을 죽이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과격파의 주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왕권을 이용하여 자파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당파 싸움에 광해군은 휘말려 희생물이 된 것이다.(조선 군주체제에서 왕권과 신권 사이의 관계는 따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었다. 그것은 후대에 세력을 잡은 이들이 조작해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후금과의 전쟁을 피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임금이다. 처음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강홍립도 같이 남하하여 그의 중재로 형제동맹을 맺었지만 그후에도 사대파들은 명분만을 내세워 후금을 계속 자극한 결과,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과 군신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 합방을 빼고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결국 사대파들이 대의명분만을 내세워 정확한 국제 정세를 정책에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인조반정은 자주파와 사대파, 진보파와 보수파의 투쟁에서 자주파가 몰락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사족을 달자면, '묘청의 난'을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 파악했던 신채호가 자주국방론을 주장했던 정인홍의 평전을 쓰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죽었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인조반정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은 언제나 내부에 모순점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터진 것이 바로 1년 뒤에 일어난 '이괄의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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