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
최근 유네스코가 해녀의 민간신앙인 ‘칠머리당굿’ 등을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해녀문화의 특수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의 해녀 강영숙(47)씨가 막 물질을 끝내고 바다에서 나오고 있다.
오른손에 빗창을, 왼손에는 테왁을 들고 있다. 테왁에 걸린 푸른 그물이 좀망사리다.
제주 해녀에겐 일하는 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보리를 갈고, 고구마를 심는 땅의 밭이고, 다른 하나는 땅 바깥쪽에 있다.
우뭇가사리와 소라ㆍ전복 따위를 캐는 ‘바다밭’이 해녀의 제2 작업공간이다.
“이여싸나 이여싸나/ 너른 바당 앞을 재연/ 혼질 두질 들어 가난/ 저승질이 왓닥 갓닥/ 이여싸나 이여도 싸나.”
제주 해녀들이 즐겨 부르는 ‘해녀노래’는 그들의 처절한 삶을 보여준다.
내륙과 떨어진, 척박한 땅 제주지만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여성은 바다로 나간 남편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가까운 바다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나섰다.
잠수(潛嫂)ㆍ잠녀(潛女)라고도 불리는 해녀.
해녀는 세계적으로 제주도와 일본 일부 지방에 있을 뿐이다.
해녀연구가인 고(故) 김영돈 전 제주도 문화재전문위원은 저서 『제주의 해녀』에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조류ㆍ패류를 즐겨 먹는 식생활 습관과 연결지어 미역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쉽게 된다.
특히 분만 후 첫 음식으로 반드시 자연생 미역을 먹어야 한다는 풍습이 있는 경우는 한국ㆍ일본 외엔 없다는 점이다. 제주의 미역과 전복은 산후조리 음식으론 최고로 쳤다.”
1960년대 말 문화인류학자인 미국 뉴욕주립대 허만란 교수도 저서『한국과 일본의 해녀』에서 해녀의 발상지를 제주도로 추정했다. 일본에도 해녀가 있으나 제주에서 건너온 해녀한테서 기량을 이어받은 경우가 많은 점을 들어 ‘제주 해녀의 수출’로 규정했다.
▶날씨 때문에 한 달에 보름가량 일
*해녀의 상징은 까만 잠수복이다.
해녀들 사이에서는 ‘고무옷’으로 통한다. 하얀 무명저고리와 까만 적삼을 입고 물질을 하던 해녀들 사이에서 1970년대 들어 하나 둘 고무옷을 입었다.
고무옷은 해녀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온몸을 가려 추위를 쫓을 수 있는 데다 5~6시간 물질을 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어촌계원들 사이에서 고무옷을 착용한 해녀의 작업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해녀들의 작업 도구는 단출하다.
해녀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물안경,
부력을 이용해 그 위에 가슴을 얹어 헤엄치는 ‘테왁’(또는 두렁박),
테왁 밑에 달아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그물주머니 ‘망사리’가 주축이다.
‘좀망사리’로 불리는 작은 그물망은 허리에 착용해 물속에 들어가고,
10∼20㎏에 육박하는 납덩이는 물속 작업을 자유롭게 하는 장비다.
바닷속 바위에 달라붙은 전복을 떼어낼 때 해녀들은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을 쓰고,
해조류를 캘 때는 ‘정게호미’를 사용한다.
성게ㆍ문어 등을 잡을 때는 ‘골괭이(또는 골각지)’가 동원된다.
배를 타고 나가 깊은 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는 ‘상군’ 해녀의 작업시간은 하루 8~10시간이다.
조류의 흐름과 날씨가 조업을 좌우하기에 한 달 중 작업할 수 있는 날은 보름을 넘지 않는다.
바닷속에서 전복·소라를 많이 캐면 하루 20만원 벌이가 가능하지만 매일 일하기가 쉽지 않다.
해녀는 직업병을 달고 산다. 고무옷을 입고 오랫동안 깊은 곳에서 자맥질을 하는 탓이다.
‘잠수병’으로 불리는 이 직업병은 수압이 높은 깊은 바다에서 일하기 때문에 질소가 몸에 쌓이고,
이 때문에 머리와 온몸에 통증이 지속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해녀가 “온몸이 쑤신다”고 호소한다.
‘해남(海男)’도 있다. 문정석(62·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씨가 대표적이다.
물질 경력 45년에 이르는 ‘상군잠수’로 동갑내기 아내 김순녀씨도 해녀 일을 한다.
제주에는 문씨 외에 임동옥(70·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씨 등 3명의 해남이 더 있다.
▶작년 기준 해녀 5244명
2008년 말 기준 제주도가 파악한 해녀는 5244명. 50대 이상이 95.1%를 차지한다.
현직 최고령 해녀는 서귀포시 대포동의 김절(88) 할머니다.
얕은 바다에서 하는 조업이지만 15세 때부터 해온 물질 경력이 73년이나 된다.
가장 젊은 사람은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의 박미야(35)씨다. 경력 5년이다.
30세 이하의 해녀는 한 명도 없다. 해녀라는 직업을 신세대가 받아들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고된 조업, 직업병, 어촌을 버리고 도시로 내닫는 도시화의 물결이 ‘바닷물질’과 거리를 두게 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해녀문화를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5월 제주시 한림읍 주민자치위원회는 ‘한수풀 해녀학교’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매주 말 마을 주민자치센터에서 이론강의를 하고, 이후엔 포구에서 교복인 ‘고무옷’을 입고 해녀로부터 물질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해녀 실습 과정이다.
지난해 8월 첫 졸업생 30여 명을 배출했고, 올 8월에도 30여 명을 졸업시켰다.
교장인 임명호 한림읍 귀덕2리 어촌계장은 “제주에 살게 된 외국 이주여성도 물질을 배우러 온다”며 “해녀문화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10월 제주도의회는 ‘제주도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다.
해녀 교육과정을 이수한 교육생을 ‘해녀 전수생’으로 선발해 어촌계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하고,
노래·굿·작업도구 등을 민속유산으로 지키자는 원칙을 정한 것이다.
조례를 대표발의한 오옥만 의원은 “고령화로 맥이 끊길 위험에 놓인 해녀의 전통을 제주도가 계승하는 것은 물론 해녀와 연계된 유형·무형의 민속을 잇따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주의 무당 ‘심방’은 남성
제주도 해안마을마다 여는 영등굿을 비롯한 굿ㆍ제례는 해녀의 민간신앙과 연결돼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최근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칠머리당굿이 대표적이다.
제주엔 1만8000여 신(神)이 삼라만상을 관장한다는 신화가 있다.
이 많은 神 중에서도 영등신은 바람과 비를 관장해 어부나 해녀들에게 해상 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다.
칠머리당굿은 제주시 건입동의 속칭 칠머리당에서 열린다.
안전과 소라나 미역·전복 등을 잘 잡게 해달라는 해녀들의 소원·소망을 담아 음력 2월 초와 14일에 치르는 대규모 굿판이다.
굿은 ‘심방’으로 불리는 무당이 집전한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71호인 칠머리당굿은 김윤수(63) 심방이 기능보유자다.
특이한 점은 굿판의 집전자가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이다.
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심방’이란 말이 ‘신의 형방’이란 유래를 갖고 있고,
그 권능은 남성에게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때문에 제주에선 뭍과 달리 큰 굿의 집전자가 남성 ‘심방’이 주류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항일투쟁 이끈 해녀
제주 해녀는 결속력이 강하다.
일제하 첫 여성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해녀 항일투쟁’을 해녀들이 주도했다.
일본 관헌이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에 대해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매기자 시위 ·습격투쟁을 한 것이다. 1931년 말부터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7000여 명의 해녀·제주도민이 참가하는 등 최대 규모 시위로 발전한 이 사건으로 많은 해녀가 투옥됐다.
이 해녀 항일운동에는 김옥련 해녀 소녀회장과 부춘화 해녀회장이 앞장섰다.
부씨는 95년 87세의 나이로, 김씨는 2005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2003년 8월 두 사람에게 건국훈장 포장을 수여했다.
해녀 항일투쟁을 막후에서 지도했고 ‘해녀노래’를 만든 고 강관수(1909~42)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강길녀(67)씨도 제주 동쪽 끝 섬인 우도에서 해녀일을 하고 있다. 그는 젖먹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해녀인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며 물질을 배웠다.
☞‘상군’ ‘대상군(大上軍)’
얼마나 바닷속 깊이 들어가 소라·전복 등 해산물을 잘 캐느냐에 따라 해녀들이 얻는 칭호다.
나이와 무관하다. 기량이 빼어난 해녀가 대상군이다. 깊은 바다가 아닌 야트막한 해안에서 물질하는 해녀는 ‘갓잠수’, 한철만 물질하는 해녀는 ‘고망잠수’라고 한다. 나이든 해녀들 가운데는 어릴 적 물질 기량이 워낙 좋아 얻은 ‘애기상군’이란 호칭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