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3장 1절~26절>
서론: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유서, 그리고 욥의 탄식
1802년 독일의 작은 마을 헤일리겐슈타트에서 서른두 살의 한 청년이 피눈물을 흘리며 유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었습니다. 음악가에게 목숨보다 귀한 청력을 잃어버린 그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가?" 그의 유서는 단순한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의미가 뿌리째 흔들린 한 인간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본문 역시 욥이 자신의 입을 열어 극단적인 고통을 언어화하는 '실존의 탄식'입니다. 욥은 주저앉아 묵념하는 대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쏟아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절망의 자리에 선 성도와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신약적 부활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태어난 날의 저주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날'로
"내가 난 날(욤)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욥 3:3) '욤(יום)'은 욥이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태어난 날(빛)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낮(욤)"이라 부르신 데서 유래한 단어로, 시간의 시작과 빛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욤'은 단순한 24시간의 단위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게 된 시작점(출생일)'을 뜻합니다. 욥이 자신의 '욤'을 저주하며 멸망하길 바라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근원적 출발점 자체를 지워버리고 존재 이전의 상태(빛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극단적 절망의 표현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피투된 존재(Geworfenheit)’라 말합니다. 욥은 내던져진 삶의 고통이 너무나 가혹했기에, 피투된 출발점인 ‘욤’을 부정하며 차라리 비존재(無)로 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베토벤이 유서를 쓰며 자신의 태어남을 원망했던 순간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피투성의 고통,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존재의 그늘진 '욤'에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새로운 '욤', 곧 '새로운 피조물의 날'(고후 5:17)을 선물하셨습니다.
교회는 태어난 날을 원망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는 버려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축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소망을 전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2.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서 '십자가의 신비'로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아말)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욥 3:10), "어찌하여 고난(아말)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욥 3:20) '아말(עָמָל)'은 단순히 신체적 고통을 넘어 해답을 찾을 수 없어 존재를 짓누르는 '근원적 고통과 수고'입니다. 욥이 경험하는 '아말'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받는 인과응보의 벌이 아닌, '원인도 모르고 해답도 얻을 수 없는 근원적 고통'입니다.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어찌하여(Why)?"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 고통으로, 인간의 이성과 신학적 틀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한 삶의 무거운 짐을 뜻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세상의 이성과 인간의 고통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불일치를 ‘부조리(Absurde)’라 불렀습니다. 왜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번성하는가? 욥이 직면한 ‘아말’은 인과율이나 신학적 공식으로 풀어낼 수 없는 부조리한 고통이었습니다. 베토벤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청력을 잃어가는 부조리 앞에 절규했습니다.
신약의 십자가는 세상의 시선으로 볼 때 가장 완벽한 '부조리(아말)'의 사건입니다. 가장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처참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부조리한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신비로운 지혜'를 완성하셨습니다(고전 1:23~24).
성도 여러분,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아말'을 만날 때 섣부른 조언으로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부조리한 고통을 섣불리 합리화하려 하지 말고, 고통받는 이웃 곁에 잠잠히 함께 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고통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부조리 한복판에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3. 죽음의 안식에서 '부활의 영원한 평강'으로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누아흐) 것이니" (욥3:13), "나에게는 평온(누아흐)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3:26) 본문에서 '누아흐(נוּחַ)'는 욥이 고통의 한복판에서 그토록 열망하는 '모든 소요와 고통이 정지된 궁극의 평안'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아말(고통) 때문에 단 한 순간도 누아흐(안식)를 누리지 못하는 욥은, 역설적이게도 태어나지 않았거나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여 도달하는 무(無)의 상태를 유일한 참된 안식처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고통, 투쟁, 죽음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넘어서거나 피할 수 없는 국면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en)’이라 칭했습니다. 한계상황에 다다른 욥은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안식(누아흐)이라고 여겼습니다.
욥이 갈망했던 '누아흐'는 단지 운동이 정지된 '사멸의 안식'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누아흐'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말씀하시며, 한계상황에 갇힌 인간에게 부활이 주는 영원한 실존적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도는 한계상황 앞에서 절망하여 사멸을 꿈꾸는 자가 아니라, 오직 초월자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부활의 '누아흐'를 오늘 이 땅에서 미리 누리는 사람입니다.
결론: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성도의 찬송
유서를 쓰며 본문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갔던 베토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어둠 속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한계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결국 그의 생애 마지막에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환희의 찬가인 교향곡 9번 《합창》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탄식으로 시작했던 그의 삶이 승리와 환희의 찬송으로 끝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인간의 정직한 눈물과 탄식을 배척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던져져(피투되어) 태어난 날(욤, יום)을 원망하고 계십니까?
해석되지 않는 삶의 부조리(아말, עָמָל) 때문에 잠 못 이루고 계십니까?
한계상황 속에서 참된 안식(누아흐, נוּחַ)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탄식을 거두시고 부활의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욥의 탄식이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찬송으로 변했듯,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입은 우리와 교회 역시 이 세상의 부조리를 넘어 영원한 환희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