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례의식
一. 수시(收屍)
천시(遷屍)라고도 한다.
운명이 확인되면 눈을 감기고 깨끗한 솜으로
입과 귀, 코를 막고 턱을 받쳐 입을 다물게 한 뒤
머리를 높이고 반듯하게 베개로 괸다.
시신이 굳기 전에 손과 발이 굽어지지 않게 고루 주물러 편 다음
창호지나 천으로 양 어깨를 당겨 동이고
두 팔과 손을 곧게 펴서 배 위에 올려 모아 동여맨다.
이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한다.
다리는 반듯하게 펴서 무릎을 맞대어 동이고
발목도 동이고 발을 바로 서게 하여 동인다.
그리고는 요 위에 반듯이 옮겨 누이고
홑이불로 머리까지 덮고 병풍으로 가린다.
그 앞에 영정을 모시고 촟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다.
수시를 거두는 동안에는 상주 외에 모두 곡을 멈추고
정성을 다하여 수족을 거두어야 한다.
만일 소홀히 하여 사지가 뒤틀리면 염습할 때 큰 걱정이 생기게 된다.
수시는 남의 손을 대지 않고 가족들이 하는 것이 좋으며,
시체가 있는 방은 덥지 않게 한다
一. 발상(發喪)
초혼을 부르고 수시를 마치면 초상이 났음을 선포하는데 이를 발상이라 한다.
아들, 며느리, 시집가지 않은 딸들은 모두 관과 겉옷을 벗고 머리를 푼다.
복인들은 현란한 옷이나 장식품을 벗고 뗀다.
아들이나 주상의 손자는 두루마기를 입을 때
아버지의 상에는 왼팔을 꿰지 않고
어머니의 상에는 오른팔을 꿰지 않는다.
이는 슬픔이 복받쳐 총망중에 옷을 제대로 입을 겨를이 없음을 의미한다.
상주와 주부(主婦)를 정하고 호상과 사서, 사화를 정해
상사의 업무를 담당케 한다.
또한 호상소를 설치하고 상사에 필요한 조객록, 조위록, 부위록과
장책을 준비한다.
一. 상제(喪制)
죽은 이의 배우자와 직계비속(直系卑屬)을 상제라고 한다.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상례를 맡는다.
복인(복인)의 범위는 고인의8촌이내 친족으로 함.
一. 호상(護喪)
초상이 나면 먼저 호상소(護喪所)를 차려, 호상의 이름으로 부고(訃告)를 띄워 알린 다음, 사화(司貨)·사서(司書:상례에 드는 여러 물품과 돈을 관장하고, 조객의 이름 등을 기록하는 사람)로 하여금 신종록(愼終錄)과 부의록(賻儀錄)을 작성하도록 한다. 신종록이란 상례의 절차에 따라 맡은 사람의 이름, 거행일시와 함께 그 절차에 따라 미리 마련할 물품과 사용될 재화의 목적과 수량 등을 적은 것을 말한다.
부의록은 조의록(弔儀錄) 또는 애감록(哀感錄)이라고도 하는데, 문상객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부의의 내용을 적은 것을 말한다. 또한, 여러 절차에 따라 읽어야 할 축문(祝文)과 예서(禮書)를 참고로 하여 미리 마련하고, 축관으로 하여금 제대로 준비를 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욕자(浴者:시신을 목욕시키는 사람)와 염습자(殮襲者)와 함께 산역(山役)을 맡을 사람들을 미리 골라 일을 맡긴다.
그리고 무덤을 쓸 장소와 위치도 미리 상주와 지관과 의논하여 정하기도 한다. 또한, 상가에 조문하러 온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책임도 맡는다. 따라서, 호상은 상주를 대신하여 상가를 대표할 수 있는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야 맡을 수 있었다.
一. 부고(訃告)
부음(訃音)·고부(告訃)·부문(訃聞)·통부(通訃)·흉보(凶報)라고도 한다. 상례(喪禮) 중의 한 절차이다.
부고의 서식과 부고를 보내는 절차가 예서(禮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한국에서 부고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유교식 가례가 수용된 고려 말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예서에 의하면 초상이 나면 호상(護喪)과 상례의 모든 문서를 마련하는 사서(司書)가 상가를 위해 친지와 친척에게 부고를 써서 보내고, 호상이나 사서가 없을 경우에는 상주(喪主)가 스스로 친척에게 부고를 내고 친구들에게는 내지 않는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하면, 부고의 형식은 “00의 어른 00공이 오래 병을 앓으시다가 불행히 금월 0일 0시에 별세하였으므로 사람을 시켜(혹은 글을 띄워) 알립니다(某親某公 以宿患不幸於今月某日某時別世 專人(爲書)訃告).”라고 쓰고, 다음에 연호와 보내는 날짜, 호상 이름, 받는 자의 이름을 쓴다. 오늘날의 관행은 예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옛날에는 유월장(踰月葬)을 했으므로 부고에 장례의 날짜를 기록하지 않고 계고(啓告)라 해 따로 통보했다. 그러나 지금은 3일장 또는 5일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위의 서식에 이어 발인일자(發靷日字) 및 장지(葬地)의 소재, 또 영결식의 일자 및 장소를 함께 명시한다. 최근에는 한글로 문장화해 쓰기도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고에 아들(상주)·사위·손자 등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상주형제·사위 및 손자들의 이름까지 명시한다. 이것은 호상이 부고를 내는 원칙에서 지금은 상주가족이 중심이 되어 부고를 내는 형식으로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고를 보내는 것은 상례의 한 예의로 통한다. 즉, 보내야 할 사람에게 보내지 않으면 실례가 된다. 그리고 부고를 받은 사람은 대문 밖에서 펴본 뒤 대문 밖의 처마 밑이나 담장의 틈새에 꽂아두고, 절대로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을 ‘부고달아매기’라고 한다.
부고를 대문 밖에 꽂아두는 이유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죽음을 가장 큰 불길함과 재앙의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알리는 부고도 불길함과 재앙으로 동일시해 집안에 들여보내기를 꺼리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상가에 문상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 대문 밖에 모닥불을 피워서 그 위를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행위도 이와 비슷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一. 염습(殮襲)
염·습염이라고도 한다.
습이란 시신을 목욕시키고 일체의 의복을 갈아입히는 것이다.
염은 소렴과 대렴으로 구별하는데
소렴은 옷과 이부자리로 시체를 묶는 것이고,
대렴은 시체를 완전하게 묶어서 관에 넣는 것까지를 말한다.
옛날에는 습은 당일에, 소렴은 이튿날에,
대렴은 3일째 되는 날에 했으나,
오늘날에는 염습한다고 하여 한 번에 한다.
습을 하는 사람은 습할 옷과 목욕 및 반함할 기구를 준비한 뒤에,
시신을 시상 위에 올려놓고 목욕시킨다.
목욕은 향수(물에 향나무를 넣은 것)를 솜에 찍어
시체를 씻기는 것이다.
옛날에는 몸 전체를 목욕시켰으나
오늘날에는 몇 군데 향물을 찍어 문지르는 것으로 그친다.
시체를 목욕시키면서 조발낭(베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에다
떨어진 머리카락과 손톱·발톱 등을 담아서
시신과 함께 관 구석에 넣는다.
지방에 따라서는 습의 속이나 버선 속에 넣기도 한다.
그런 후에 관의 빈 곳에는 옷과 피륙으로 채운다.
지방에 따라 염습의 방법이 다소 다르다.
경상도의 어느 지방에서는 입관 후 염습한 묶음을 풀어놓기도 하는데 이때는 관까지 함께 묻는다.
一. 입관(入棺)
입관은 상례(喪禮) 중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관에 넣는 과정이다. 대개 사망 후 하루가 지나 염습이 끝나면 곧 입관한다.
입관할 때에는 보공(補空)이라 하며 시신과 관 벽 사이의 공간은
깨끗한 백지나 마포(麻布) 또는 고인이 평상시에 입었던 옷 중에서
자연 섬유 계통의 옷 등으로 메워 시신이 관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홑이불인 천금(天衾)을 덮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
나무못(隱釘)을 친다.
그리고 관 위에는 보통 누구의 관인가를 나타내는 명정(銘旌)을 쓰는데, 명정은 2m 정도로 자른 빨간 천에 흰 분가루를 개어 붓으로 쓴다.
一. 영좌(靈座)
영좌는 영위(혼백 魂帛)을 모시는 자리이다. 고
례에는 습이 끝나면 영좌를 설치했으나,
요사이는 발상과 동시에 영좌를 설치한다.
먼저 교의를 놓고 그 앞에 자리를 깐 다음 제상을 놓는다.
제상 앞에는 향상을 놓고 그 위에는 향합과 향로를,
향상 앞에는 모사그릇을 놓는다.
영좌가 마련되면 교위에 혼백(魂帛)을 만들어 안치하고
동편에 명정을 걸어 세운다.
一. 명정(銘旌)
명기(銘旗)라고도 한다.
장렬도(葬列圖)에 의하면 장렬의 제일 앞에는 방상시(方相氏)가 서고
그 다음에 명정이 따르게 되어 있다.
이 명정은 일반적으로 붉은 천을 사용하나
가세에 따라 고급 비단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흰 종이에 붉은 물을 들여서 사용하는 서민층도 있다.
규격은 너비 2자, 길이는 9자이며
분가루나 은물 등 흰색으로 글씨를 쓴다.
아래와 위에 축(軸)을 만들고 가장자리에 수술을 단다.
예설에는 일정한 규격이나 제도가 없지만
우리나라 풍속에는 명정대에 나무로 새긴 용이나 봉의 머리를 꽂아
화려하게 장식하고 채색으로 단장을 하며
용의 머리에는 구슬을 물려 영원불변을 표시하기도 한다.
명정에 쓰이는 작위는 왕으로부터 임명된 관직을
큰 것부터 차례로 쓰며
부인은 남편의 직위에 따라 책봉된 직위를 쓴다.
생존시에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계에 따라 다르지만
처사(處士)·학생(學生) 등의 용어를 쓴다.
* 學生 ○○(本貫) ○公 ○○(姓名)之柩
* 孺人 ○○(本貫) ○氏 之柩
一. 상복(喪服)
상복을 엄숙하게 갖추어 입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은 사람을 예로써 보내기 위한
산 사람들의 예의 표현방법이다.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成服)한다고 하는데,
초종(初終)·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이 끝난 다음날 성복한다.
성복은 상복을 입어야 할 유복자(有服者)들이 각기 해당되는 상복을
입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원근(親疎遠近)과
존비(尊卑)의 신분에 따라서 참최(斬衰)·자최(齊衰)·대공(大功)·
소공(小功)·시마(緦麻) 등 다섯가지의 상복,
즉 오복(五服)을 입는 것이다.
고대 우리 나라의 상복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三國志≫ 동이전(東夷傳) 고려조(高麗條)와 ≪수서 隋書≫
백제조(百濟條)·신라조(新羅條)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와서 유학의 보급은 조상숭배 사상을 부각시키고
불교의 화장법에서 다시 매장법으로 변화 하였다.
고려 성종 때 관원에게 상가기한(喪暇期限)의 시행 방법 등을
규정한 법이 있었고 공양왕 3년(1391)에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본 따 복제(服制)를 정비하였다.
민간에게 상제(喪祭)의 예가 보급된 것은
고려 말기 주희(朱熹)의 ≪가례 家禮≫가 전래된 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도 오복제도를 규정하고
중종 이후 상제에 대한 예법은 사대부에게 철저히 시행되었고,
서민들에게도 삼년상이 일반적인 장례가 되었다.
그후 조선 중기의 상제는 예론화되어 정착되었으며,
상복제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고,
상례절차와 복식제도가 다양하게 분화되었는데,
지금도 가가례(家家禮)라고 불릴 정도로 지방별,
집안 별로 상장제례(喪葬祭禮)가 서로 다른 것은
조선중기의 예론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예서로는 초기의 ≪오례의≫,
중기의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
후기의 ≪사례편람 四禮便覽≫이 대표적이며,
오복제도도 이에 기초를 둔 것이다.
상복을 다섯가지로 차등을 두는 오복제도는
가족과 친척 사이에 친소와 원근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상을 당한 사람이 죽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기(喪期)의 장단(長短)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오복제도는 ≪사례편람≫의 본종도(本宗圖)에 의거하여 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위로는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고조부까지
4대를 올라가고, 아래로는 아들·손자·증손자·고손자까지
4대를 내려가는 수직관계를 이룬다.
수평관계로는
형제자매·종형제자매(從兄弟姉妹)·재종형제자매(再從兄弟姉妹)·
삼종형제자매(三從兄弟姉妹)까지 가므로
자기로부터 상하좌우로 퍼져나가면서,
자기에게 가까울수록 상복을 무겁게 입고,
그 입는 기간도 길어지게 되며,
자기로부터 멀수록 가벼운 상복을 입게 되고 또 그 기간도 짧게 된다.
오복인 참최·자최·대공·소공·시마 중에서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과 시마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오복을 입는 기간이 각기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다르다.
본종오복제도(本宗五服制度)는 본가에 대한 친소에 따른 제도인데,
여자가 출가하여 부당(夫黨)을 위하여 처위부당복지도(妻爲夫黨服之圖)
와 같이 상기와 상복이 달라진다.
처위부당복지도는 남편과 시아버지에 대해서는 참최 3년을 입고,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자최 3년을 입으며,
큰아들에 대해서도 자최 3년을 입는다.
큰아들을 제외한 아들들[衆子]과 조카·질녀·큰며느리에 대하여는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朞)를 입는다.
부인이 시가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본종오복제도보다 약간 가벼운 정도로 거의 중한 상복을 입는다.
외가[外黨]와 처가[妻黨]를 위하여는 매우 가벼운 상복,
즉 소공과 시마밖에 입지 않는다.
(1) 참최 참최의 상복을 입는 기간은 3년이며 그 대상은 아버지와 큰아들이다. 가계를 이어나가는 종법사회(宗法社會)에서 당연한 수직관계의 혈통의 존엄성을 표현한 것이다. 참최는 오복 중에서 가장 중복(重服)으로서 상복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재료로는 가공을 전연 하지 않은 마포인 극추생마포(極麤生麻布)를 사용하여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만드는데, 자른다는 뜻의 ‘참(斬)’자가 의미하는 것과 같이 옷의 가장자리를 꿰매지 않고 자른 대로 놓아두고 시접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슬픔의 극한상태를 나타내고, 모든 장식을 하지 않는다.
(2) 자최 자최의 상기는 3년, 장기(杖朞), 부장기, 5월, 3월의 다섯 가지가 있다. 자최 3년의 대상은 어머니이다. 자최 3년은 참최 3년과 같이 부모를 위하여 입는 3년상인 것에서는 같지만, 상복을 만드는 재료에 차이를 두어서 아버지와 큰아들보다는 약간 중하지 않게 표현한 것이다.
자최 장기의 대상은 처(妻)로 상기는 1년이다. 3년상인 부모·큰아들 다음으로 무거운 상복이다. 자최부장기의 대상은 할아버지, 할머니, 백숙부모(伯叔父母), 고모, 형제자매, 큰아들이 아닌 아들과 딸들, 큰며느리, 조카, 장손, 장증손, 장고손으로 상기는 1년이다.
자최 5월의 대상은 증조부와 증조모이고, 자최 3월의 대상은 고조부와 고조모이다. 자최의 재료로는 약간 가공을 하였으나 거친 마포인 차등추생마포(次等麤生麻布)를 사용하여 상복을 만드는데, ‘자(齊)’가 ‘가장자리를 꿰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상복의 가장자리를 꿰맨다.
(3) 대공 대공의 상기는 9월이며, 대상은 종형제, 종자매, 조카며느리, 큰며느리가 아닌 며느리, 장손이 아닌 손자이다. 대공의 재료로는 공을 들여 잘 가공한 삼베, 곧 초숙포(稍熟布)를 사용한다.
(4) 소공 소공의 상기는 5월이며, 그 대상은 종조부모(從祖父母), 종조고모(從祖姑母), 종숙부모(從叔父母), 종고모(從姑母), 형제의 처, 재종형제자매, 종질녀, 종손, 장손부, 종손녀, 장증손부(長曾孫婦), 장고손부(長高孫婦), 장현손부(長玄孫婦)이다.
소공의 재료는 공을 들여 손질한 세소포(細小布)인 초숙세포(稍熟細布)를 사용한다. 소공의 의미는 정밀하고 섬세하게 손질하고 다듬은 것으로 장식이 가장 적은 것이다.
(5) 시마 시마의 상기는 3월이다. 그 대상은 종증조부모(從曾祖父母), 종증조고모(從曾祖姑母), 재종증조부모(再從曾祖父母), 재종증조고모(再從曾祖姑母), 재종숙부모(再從叔父母), 재종고모, 삼종형제자매, 재종질(再從姪), 재종질녀(再從姪女), 종질부(從姪婦), 재종손(再從孫), 종손부(從孫婦), 중손부(衆孫婦), 재종손녀, 종증손(從曾孫), 중증손(衆曾孫), 중증손부(衆曾孫婦), 종증손녀(從曾孫女), 중고손(衆高孫), 중현손(衆玄孫), 중고손부(衆高孫婦), 중현손부(衆玄孫婦)이다.
시마의 재료로는 지극히 공을 들여서 손질한 아주 고운 15승의 삼베인 세숙포(細熟布)를 사용한다. 시마는 오복 중에서 가장 고운 베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으로 실과 같이 고운 베[布]의 질감으로서 이름 붙여 진 것이다.
(1) 남자상복 남자의 상복은 최의(衰衣)·최상(衰裳)·중의(中衣)·상관(喪冠)·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상장(喪杖)·구(屨)·행전(行纏)을 갖추어 입는 것이다.
① 최의 : 최의는 상복의 상의이다. 원래 ‘최(衰)’란 최(摧)의 의미로 ‘최’를 가슴에 다는 것은 효자가 슬픔을 억누르는 애최(哀摧)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달았는데, 그 뒤 이것을 ‘눈물받이’라고도 하여 양쪽 앞가슴에 달기도 하였다.
‘최’는 너비 4촌, 길이 6촌의 베조각을 가슴에 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최의(衰衣) 전체를 ‘최’라고도 한다.
최의의 형태는 ≪사례편람≫·≪세종실록≫ 상복조(喪服條)에 있는 도양(圖樣)을 보면, 길이는 2척2촌이고, 폭은 한쪽이 2척2촌, 좌우의 폭이 소매를 포함하여 각각 4척4촌이다. 소매폭은 2척2촌인데 소매의 부리가 1척2촌이고 그 밑의 1척은 꿰맨다. 여기에 애최의 표현인 최(衰)·부판(負版)·적(適, 辟領)의 세 가지를 붙인다.
최는 심장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으로, 너비 4촌, 길이 6촌의 삼베를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다는 것이며, 때로 눈물받이로 쓰기 위하여 양쪽 가슴에 달기도 한다. 부판은 슬픔을 등에 짊어진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방 1척8촌의 삼베를 등 쪽의 옷깃[領] 밑에 단다.
적은 슬픔을 어깨에 짊어진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벽령(辟領)이라고도 하며, 각기 사방 8촌의 삼베를 사용하여 그 양쪽을 꺾어 서로 붙여서 너비가 4촌이 되게 만들어 꿰맨다.
이 세 가지 외에도 가령(加領)·겁(袷, 동구래깃)·임(袵)·대하척(帶下尺)이 있다. 가령은 깃으로서 너비 8촌, 길이 1척6촌의 삼베에서 양쪽 밑의 사방 4촌을 잘라내고 중간 위를 정점으로 하여 좌우로 접어내려 앞깃으로 달고 뒷부분은 활중(闊中 : 뒷목둘레)에 꿰맨다.
겁은 가령 속에 들어가는 속깃이다. 임은 양쪽 옆에 붙이는 옷섶으로서 3척5촌의 삼베를 사용하여 오른쪽 아래에서 1척을 남겨놓고 6촌을 잘라 들어가고, 왼쪽 위에서 1척을 내려와 남겨놓고 6촌을 잘라 들어가서, 자른 곳까지 서로 맞닿게 비스듬히 잘라서, 이것을 반대로 양쪽 좌우를 서로 마주보게 의(衣)의 양쪽 옆에 꿰매고 이를 아래로 향하게 하는데, 형상이 제비꼬리[燕尾]와 같이 상(裳)의 옆을 가린다
대하척은 임을 붙이고 남는 부분에 대는 것으로 앞길이는 1척으로 하나 너비는 임을 붙이고 남는 아래쪽의 너비에 맞춘다.
이러한 최의 형태는 조선왕조 말기로 오면서 지방에 따라 약간씩 변하게 된다. 최의에 있어서 참최에서 시마까지 모두 형태가 같으나, 참최와 자최에는 최·부판·적이 있고 대공 이하는 그것이 없다.
오복의 차이는 삼베의 거칠고 고움에 있어, 참최는 극추생마포로 만들고 단을 꿰매지 않는다. 자최는 차등추생마포로, 대공은 초숙포로 만들고 단을 꿰매며, 소공은 초숙세포로, 시마는 세숙포로 각각 만들고 단을 꿰맨다.
② 최상 : 치마는 앞쪽 3폭, 뒤쪽 4폭으로 하여 전부 7폭이며 길이는 키에 맞춘다. 매 폭마다 3첩(첩)의 주름을 잡는데, 그 주름은 한번은 오른쪽으로 접고 또 한번은 왼쪽으로 접어 맞닿는 곳을 꿰매어 그 속을 비게 한다. 한 폭의 너비를 2척2촌으로 하여 2촌이 시접으로 들어가 2척이 되므로, 앞쪽은 6척, 뒤쪽은 8척이 되어 전체 치마폭은 14척이 된다.
치마의 앞쪽 3폭은 기수(奇數)로 양(陽)을 상징하고, 뒤쪽 4폭은 우수(偶數)로서 음(陰)을 상징한다. 포(布)의 생숙(生熟)은 최의(衰衣)의 등급에 따라서 최의와 같이 하며, 참최인 경우는 최의와 같이 최상도 가장자리를 꿰매지 않고, 자최 이하인 경우는 가장자리를 꿰맨다.
③ 상관 : 상관은 굴건(屈巾) 또는 굴관(屈冠)이라고도 하는데, 상관 속에는 효건(孝巾)이라고 하는 두건을 받쳐 쓴다. 상관은 최의보다 고운 베로 만드는데 3년상은 생마포(生麻布)로 만들고, 기년 이하는 숙포(熟布)로 만든다.
상관은 폭이 5촌2푼반 정도 되는 심지에 베를 싸는데 길이는 머리 크기에 따라서 머리 위를 충분히 씌울 수 있는 길이로 한다. 세로로 3개의 주름(三辟積, 三梁)을 잡아서 대공 이상은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접어서 음의 방향인 우향의 흉(凶)을 상징하고, 소공 이하는 왼쪽으로 접어서 양의 방향인 좌향의 길(吉)을 상징하게 한다.
상관의 받침인 무(武)는 참최는 마승(麻繩) 한 가닥을 사용하여 이마 위로부터 이를 묶어 정수리의 뒤에 이르러 교차하여 앞을 지나 각각 귀에 이르러 이를 맺어서 무를 만든다.
굴관 양쪽 끝을 무 안으로 넣어 밖으로 향해 도로 꺾어 무에 꿰매고 무의 남은 끈은 아래로 드리워서 영(纓)을 만들고 턱 아래에 맨다. 자최의 관은 참최의 관과 형태는 같으며, 무영(武纓)을 삼베 1촌 정도로 접어서 만드는 것이 차이가 다르다.
참최의 무영이 마승이고, 자최에서 소공까지는 포영(布纓)이며, 시마는 조영(澡纓)으로 한다. 상관 속에 받쳐 쓰는 효건은 두건의 형태인데 머리 둘레의 폭을 뒤 중심에서 꿰매어 양쪽을 접어 머리 높이를 충분히 쓸만한 길이에서 위를 꿰맨다.
④ 수질 : 수질은 관 위에 쓰는 것으로서 참최의 경우는 씨 있는 삼(苴麻 : 有子麻)으로 만들고 자최 이하는 씨 없는 삼(枲麻 : 無子麻)으로 만든다.
참최의 경우 삼의 밑둥치를 왼쪽 귀에 오도록 한 다음 이마 앞에서부터 오른쪽을 향해 이를 둘러서 정수리 뒤를 지나서 그 끝을 밑둥치의 위에 가하게 하고 노[繩]로써 영을 두 가닥 만들어, 끈 하나로는 왼쪽 포개진 부분을 단단히 매어 밑으로 늘어뜨리고, 또 한 끈은 오른쪽에 묶어 늘어뜨린다.
자최 이하는 삼의 밑둥치를 오른쪽 귀에 오도록 한 다음, 이마 앞을 돌아 그 끝이 밑둥치 아래에 포개지게 한 다음 두 가닥의 포영으로 좌우를 각각 묶어 아래로 늘어뜨린다. 수질의 영은 상관에서의 영과 같이 턱 밑에서 맨다. 참최의 수질의 둘레(굵기)는 9촌이며, 자최 이하는 5분의 1씩 줄어든다.
⑤ 요질 : 요질은 허리에 매는 대(帶)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참최의 요질은 수질과 같이 씨 있는 삼으로 만드는데, 둘레(굵기)는 수질보다 5분의 1을 줄인 7촌2푼으로 한다. 자최 이하는 여기에서 5분의 1씩 줄어든다.
요질은 두 가닥의 삼을 꼬아서 만드는데, 허리를 두르고 양쪽 밑둥치가 앞에서 교차하여 맺으며, 각각 삼의 밑둥치를 내려뜨리는데, 그 밑둥치에 있는 뿌리 가닥을 산수(散垂)라고 하며, 그 길이를 3척으로 한다. 맞잡아맨 곳의 양 옆에는 각각 가는 노로 묶는다. 50세 이상인 사람과 부인들과 소공 이하는 산수하지 않고 묶는다.
⑥ 교대 : 교대는 허리에 매는 띠로서 요질 아래에 맨다. 참최의 교대는 씨 있는 삼을 사용하여 굵기가 요질보다 줄어든 5촌7푼으로 한다. 약 18척 정도되는 한 가닥의 노를 가운데를 꺾어서 양고(兩股)를 만드는데 각 1척 남짓하게 하며, 허리를 둘러서 왼쪽으로부터 뒤를 돌아 앞에 이르러 그 오른쪽 끝으로 양고 사이를 뚫어서 도로 오른쪽으로 당겨 요질 아래에 오게 한다.
자최 이하의 교대는 베로 만드는데 자최의 교대는 너비 4촌의 베를 호아 오른쪽 끝을 1척 정도 접어서 수질과 같게 한다. 교대는 혁대를 본떠서 한쪽 머리에 고리가 있게 가운데를 꿰어 이에 묶는다. 베의 폭은 대공 이하로 차차 좁아지고 생숙은 상복과 같이한다.
⑦ 상장 : 상장은 지팡이로서, 상제가 상중에 슬퍼한 나머지 병들게 되므로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3년상을 치르게 하기 위함이다.
참최에는 저장(苴杖)을 짚는데, 저장은 거무스름한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다.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드는 것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는 하늘이니 대가 둥근 것으로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안팎에 마디가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안팎에 슬픔이 있음을 뜻하며, 대나무가 사시를 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추운 때나 더운 때를 지나도 변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최에는 삭장(削杖)을 짚는다. 삭장은 오동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게 만드는데, 위의 끝이 둥근 것은 어머니를 위하여 속마음으로 슬퍼함이 아버지와 같음을 뜻하는 것으로, 동(桐)은 동(同)의 뜻을 가진다. 아래를 네모나게 만든 것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⑧ 구 : 구는 신발인데 참최에는 관구(菅屨)를 신는다. 관구는 왕골로 만든 신이다. 자최에는 소구(疏屨)를 신는데, 소구는 짚으로 만든 신이다. 자최부장기 이하는 승구(繩屨)를 신는다.
⑨ 행전 : 행전은 행등(行藤)이라고도 하는데, 무릎·종아리에 치는 것으로서 베로 만든다. 참최에서 시마에 이르는 오복의 등급에 따라 각각 그 복과 같은 등급의 베를 사용하여 만든다.
(2) 여자상복 여자의 상복은 대수장군(大袖長裙)·개두(蓋頭)·포총(布總)·계(筓)·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상장(喪杖)·구(屨)를 갖추어 입는 것이다.
① 대수장군 : 대수장군은 큰 소매가 달린 상의와 긴 치마를 연결하여 만든 의상연의(衣裳連衣)이다. 남자들의 최의와 같이 길에 큰 소매를 달아서 상의를 만들고, 치마 12폭은 상의 앞 좌우 길에 3폭씩 하여 앞쪽 6폭, 뒤쪽 6폭의 12폭 치마[裳, 長裙]를 연결시킨다. 가슴 앞에 최를 달고, 등에는 부판, 어깨에는 적을 달아 애최를 표현한다. 깃도 다는데 임과 대하척은 달지 않는다.
대수장군의 참최복은 극추생마포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꿰매지 않고 시접을 밖으로 보낸다. 자최복은 차등추생마포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꿰맨다. 대공은 초숙포로 만들고, 소공은 초숙세포로 만들며, 시마는 세숙포로 각각 만들고, 자최 이하는 모두 가장자리를 꿰맨다.
길이는 키에 따라 맞게 한다. 남자의 최의는 길이 2척2촌, 소매가 2척2촌인데, 여자에게는 너무 크고 길므로 입을 사람에 따라 품과 길을 맞게 하고 소매는 1척2촌 정도로 하여 체형에 맞게 만든다.
② 개두 : 개두는 머리에서부터 써서 몸을 가리는 너울과 같은 것으로 3폭의 가는 베로 만든다. 개두 대신에 여립모(女笠帽)를 쓰기도 하는데, 여립모는 대나무로 위를 뾰족하게 만들고 밑을 넓게 만들어 그 위에 12폭의 베를 꿰매어 씌워서 만든다. 또한 개두 대신에 소(素)족두리를 쓰기도 하는데, 소족두리는 백목으로 족두리 모양을 만들어 베로 싸는 것이다.
여인들의 머리에 쓰는 것은 남자들의 상관에 해당하는데, 여인들은 시대와 신분에 따라 머리에 쓰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너울을 쓰던 사람은 개두를 쓰며, 입모(笠帽)를 쓰던 사람은 입모를 최관과 같이 오복에 따라 같은 등급의 베로 만들어 쓴다. 족두리를 쓰던 사람은 소색(素色 : 베의 색)의 족두리를 만들어 쓴다.
③ 포총 : 포총은 머리를 묶는 헝겊인데, 베의 생숙(生熟)은 남자의 상관과 같이 오복 등급에 따라 한다. 길이는 참최에는 6촌이며, 자최 이하는 그보다 조금 길다. 이 포총은 속칭 백댕기[白唐只]라고 하며 상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드리운다.
④ 계 : 계란 비녀를 말하는데, 참최에는 대나무비녀[箭筓]를 꽂고, 자최에는 개암나무비녀[榛筓]를 꽂는다. 그밖에 수질·요질·교대·상장·구는 모두 남자의 것과 같으나 크기가 약간 작고 가늘게 만든다. 또한 요질에는 산수가 없다.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 이러한 전통 상·장례는 많은 변화를 거쳐 간소화되었다.
일제시대에 편찬된 ≪현토주해사례편람 懸吐註解四禮便覽≫에는
신식상례라고 하여 종교인과 비종교인으로 구별하여 행해지는 상례를 기록하였다.
그 당시에도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실상 완고한 사람 이외는 대공·소공·시마복은 그 명칭도 아는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해방과 6·25 이후 서구 문물의 영항으로 급격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상례는 매우 간소화되었다. 1956년 재건 국민운동본부에서 ‘표준의례’를 제정하였는데 상례는 성복제(成服祭), 명정(銘旌), 우제(虞祭), 졸곡(卒哭), 상식(上食), 삭망(朔望), 소상(小祥), 담제(禫祭)를 폐지하고 3일장을 기준으로 삼았다.
1969년 보건사회부에서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을 공포하여 법률화하였다.
상례에서 성복제, 굴건제복 착용, 만장, 음식접대 및 조화를 폐지하고 3일장과 100일 탈상을 기준으로 하여 대폭 간소화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 상장례는 크게 유교식, 불교식, 기독교식, 절충식의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정의례준칙은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시대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절차로 간소화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상·장례는 더욱 간소화되어 입관을 마치면 남녀 상주들은 성복을 하여 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성복제를 올린다. 남자의 경우 상복은 두루마기, 행전, 건이며, 여자의 경우 흰 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한편에서는 서양복의 영향으로 남자의 경우 검정색 양복과 검정색 넥타이에 베로 만든 건(巾) 또는 완장·행전을 하며 때로는 완장 하나로 상제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복(服) 중임은 베로 만든 상장(喪章:리번)을 가슴에 다는 것으로 나타낸다. 여자들의 상복은 남자 상복보다는 변화가 느리지만 일부에서는 검정색 치마·저고리를 입기도 하며 머리에는 리번을 달거나 검정색 양장을 하기도 한다.
一. 성복(成服)
상례 절차의 하나로, 모든 유복친(有服親 : 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이 성복을 마친 후 행하는 의례.
성복전에는 문상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성복을 마치고 나면 유복친 상호간에 문상을 하고, 유복친 중 연장자의 집례에 따라 분향, 재배하는 형식의 제를 올리는데, 이것을 성복제라 한다. 성복제를 마치고 나면 조석으로 전(奠 : 영전에 음식, 술 등을 올리는 일)을 올리며, 식사 때가 되면 상식(上食)을 올린다. 이때부터 상주는 수시로 곡을 한다.
현재 성복이 간략해진만큼, 성복제 역시 매우 간략화되었다. 대부분이 장례식장을 이용하게 된 관계로, 입관실에서의 일정에 따라 성복 및 성복제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아울러 3일장이 보편화되었으므로 성복 전에도 문상을 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一. 조문(弔問)
조상(弔喪)과 문상(問喪)를 합쳐 조문이라고 한다.
조상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인사하는 것으로
빈소에 예를 갖추는 것이며, 문상은 ‘죽음을 묻는다’는 의미로
상주에게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한다는 뜻이다.
一.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 만사·만시라고도 한다.
형식은 대개 5언절구와 5언율시 또는 7언절구와 7언율시이다.
때로는 장문시의 글이나 4자체로 쓴 경우도 있으며,
고인의 일대기 중에서 뽑은 행장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글이 모이면 종이에 쓴 뒤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고인의 초상집에 비를 맞지 않게 세워둔다.
글을 쓴 사람이 직접 비단 등에 써서 가져오기도 한다.
학문이나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의 초상 행렬에는 으레 수많은 만장이
뒤따르므로 그 숫자로 고인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기도 한다.
이름난 선비가 죽으면 각지에서 추도객들이 만장의 글을 써서
들고 와서 곡을 하며 상여 뒤를 따른다.
묘지에 도착하여 산역(무덤을 만드는 일)을 끝내고 나면
만장을 태운다.
그러나 만장의 글들을 모두 모아 뒷날 문집이나
일대기를 담은 행장록을 만들 때 부록으로 싣기도 한다.
또는 사당을 만들 때 글들을 목판에 새겨
사당에 현판으로 걸어두기도 한다.
一. 장일(葬日)과 장지(葬地)
사망일로부터 3일이 되는 날로 한다.(5일, 7일장도 있음)
매장 또는 화장을 하며, 가족묘지나 공원묘지 또는 선산을 이용하며,
합장일 경우 남좌여우(男左女右)로 한다.
一. 천광(穿壙)
천광이란 묘자리를 파는 일인데 1.5미터 정도로 하며 출상
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때에 토지신을 달래는 개토제를 지내는데 대개는 일꾼들이
땅에 술을 뿌리며 말로서 하지만 주과포) 등을 진설하고
개토고사= 참파축을 읽는 관습이 있다.
묘소의 왼편에 제상이 남향이 되도록 차려 놓고 고사자가 신위 앞에
분향하고 술을 부어놓고 개토고사를 읽은 뒤 두 번 절한다.
그리고 선산내에 장사하려면 먼저 선영에게 고사를 지내며
제일 위의 어른이나 또는 묘소에서 가까운 분에게 지낸다.
*참고: 개토고사지 분향을 하지 않는 가문도 있다
一. 횡대(橫帶) 및 지석(誌石)
횡대는 나무판 또는 대나무로 하며
이것은 하관하고 석회를 덮을 때 회가 직접 관에 닿지 않도록 덮는 판이다.
지석은 돌, 회벽, 질그릇을 사용해 거기에 글자를 쓰거나 새긴다.
지석에 쓰는 글은 위쪽은 누구의 묘라는 것을 밝히고
밑바닥에는 약력과 인적 사항을 기록한다.
一. 발인제(發靷祭)
발인제는 영구가 상가 또는 장례식장을 떠나기 직전에 행한다.
발인제는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을 하는 의식으로서
상가의 뜰이나 혹은 특별히 장소를 마련하여 행하기도 한다.
장레식에서는 영구를 옮길 때는 천구고사를 읽고
그리고 시신을 상여나 영구차에 싣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서 제물을
갖추고 축관이 분향하고 술잔을 올리고 견전고사를 읽은 다음에
상주 이하 복인은 곡하며 두 번 절을 한다.
발인 식장에는 영구를 모시고 그 앞에는 망인의 사진 또는 혼백을
모시고 그 옆에는 명정을 세우며 촛대, 향로, 향합, 위패를 준비한다.
*발인제의 순서(유명인의 가족장이 아닌 경우)
(1)개식 (2)상주 및 상제들의 분향배례 (3)고인의 약력보고 (4)조사 (5)조객 분향 (6)호상 인사 (7)폐식
*참고: 弔辭(조사)와 護喪人事(호상인사)는 편의대로 할 수는 있으나 가정의례 준칙에는 어긋난다.
一. 운구(運柩)
운구는 영구차 또는 상여로 한다.
다만 상여에는 과분한 장식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옛 관습으로는 명정을 선도로 공포. 만장. 요여와 배행원
그리고 영구와 시종. 상인과 조객의 순서로 하는데
이것은 상여로써 운구할 경우이다.
그리고 묘지까지 가는 도중에 고인의 친구나 친척이 스스로 제물을
마련하고 지내는 제사가 노제이다.
이 때 조전자가 분향하고 술잔을 올리고 제문을 읽으면
상주 이하는 모두 두 번 절한다.
*운구의 행렬순서
사진→명정→영구→상주→상제 및 조객의순
一. 하관과 성분(下棺 . 成墳)
영구가 장지에 도착하면 먼저 명정을 풀어서 관 위에 덮은 다음
상제들이 마주서서 두 번 절한다.
그리고 하관할 시간을 맞추어 결관을 풀고 좌향을 바르게 한 뒤에
천개 즉 회. 동. 송. 죽 등으로 만든 것으로 덮고 평토하되
이때 지석을 묻고 성분을 한다.
하관시에는 산폐(山弊-폐백)를 드리는데
이것은 현(玄-파랑실) 훈(纁-붉은실)이라 하며
집사자가 상주에게 주면 상주는 축관에게 주어
축관이 현은 관의 동족 위편에 훈은 서쪽 아래편에 놓고
또한 雲亞(운아)를 넣는데 운은 현과 아는 훈과 같이 넣는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운아를 넣지 않으면 자손이 발복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一. 위령제(慰靈祭)
성분이 끝난후 영좌를 묘소 앞으로 모시고 간소한 제수를 차려놓고
다음 순서로 위령제를 지내는데
화장시에는 혼령 자리를 유골함으로 대신하고 제를 올린다.
*위령제의 순서
(1)焚香(분향) (2)獻酌(헌작) (3)讀祝(독축) (4)再拜(재배)의 順(순)
返虞(반우)란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 온다는 뜻으로
神主(신주)를 靈轝(영여)에 모시고 집사가 분양하고 술을 부어 놓고
상제들이 꿇어 앉고 返魂告辭(반혼고사)를 읽은 다음 곡을 하고
두 번 절한 뒤에 모시고 처음왔던 길로 뒤돌아 오는 것이다.
*위령제의 축문
아들(또는 손자) ○○는 아버님(또는 할아버님) 영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늘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였아오니 고이 잠드시고
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어머니, 할머니의 경우도 위에 준한다.)
년 월 일
一. 성묘(省墓)
성묘는 상주와 복인들이 편의대로 하되 그 배례 방법은 再拜(재배)
또는 묵념으로 하며 제수는 마련하지 않는다고 하나 간단하게 마련
하는 것이 좋으리라.
우리 관습으로는 장례를 지낸 3일만에 가는 것이 관례인데
첫 성묘를 가기 전에 먼저 虞祭(우제)를 지낸다.
우제는 혼백을 편안하게 모신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이며
초우는 묘소에서 돌아온 그 날 저녁에 영좌에 혼백을 모시고
祭禮(제례)로서 지낸다.
再虞(제우)는 장사 지낸 그 이튿날 식전에 지내되
만일 그 날의 일진이 강일(剛日=甲 丙 戊 庚 壬)이면
그 다음 날인 유일(柔日=乙 丁 己 辛 癸)에 지낸다.
삼우(三虞 또는 終虞)는 재우를 지낸 다음 강일(剛日)날 식전에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강일 유일을 가리지 않는다
一. 탈상(脫喪)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喪期(상기)는 사망한 날로부터 百日(백일)로 하되 기타의 경우에는 葬日(장일)까지로 한다.
상기 중 几筵(궤연)은 설치하지 아니하며 脫喪祭(탈상제)는 忌祭(기제)에 준한다.
*脫喪祭 祝文(탈상제 축문)
옛날의 관습으로 보면 脫喪祭(탈상제)는 초상 난 날로부터
(*어머니, 할머니의 경우도 이에 준한다.) 복을 입으면서
매월 초 하루와 보름날 마다 아침에 朔望奠(삭망전)을 올리고
명절에 차례를 지내며 小祥(소상)과 大祥(대상)의 祭禮(제례)를
지낸 후에 있는 마지막 祭禮(제례)순서인 것이다.
(1)小祥(소상)은 초상 난 뒤의 만 1년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인데, 이 때에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어머니의 소상일 경우에는 열한 달이
되는 그 달의 첫 丁日(정일)에 지내고
만 1년이 되는 날에 大祥(대상)을 지내게 되며
이때의 소상을 練祭(연제) 또는 練祀(연사)라 하기도 한다.
(2)大祥(대상)은 初喪(초상)난 뒤 만 2년이 되는 날에 지내는데
대상을 마치면 상복과 喪杖(상장)등은 불에 사르고 영좌를 거두고
혼백을 묘소 근처에 安埋(안매)하며 탈상을 한다.
아들(또는 손자) ○○는 아버님 영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상기를 마치게 되었사오니
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접하옵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니 강림하시와 흠향하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