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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료원(전 강남시립병원)에서 원목실봉사와 더불어 호스피스봉사자로서 친구 김 경순막달레나와 함께 활동한지도 십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많은 임종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르며 갖가지 일화도 많았지만 이번에 만난 호스피스환자를 겪으며 큰 깨달음을 얻게되어 그 아름다운 소식을 올립니다. 그 분은 다름아닌 소금창고지기이자 호스피스봉사자인 나의 친구 김 경순막달레나의 집안 친척되는 형부였다. 소록도병원 16대 원장님이셨고, 그 이후에는 WHO(세계보건기구) 고문관으로서 가장 열악한 의료환경에 처한 아프리카(나이지리아, 말라위, 이디오피아) 지역에서 보건의료행정에 많은 공헌을 하신 윤 석우 박사님이시다. 국내에 계실 때는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서 숨은 공로가 많으셨던 분이셨다. 내가 특별히 그 분을 남달리 기억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지난 10월 말 그 분은 신내동에 새로 신축 된 서울의료원 12층에 자리잡은 서울의료원 호스피스완화 의료센터에 입원하셨다.
처음 나를 대하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정겨웠었다.투석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 오신 후 내게 짧은 시간에 빠쁜 호흡을 몰아쉬시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살아 오시는 동안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 내가 여쭤 봤을 때 대답 하시기를, 유치원 친구로 만난 지금의 부인과 스무살에 결혼한 일을 얘기하시며 행복에 넘쳤던 그 때를 회상하시는 듯 했다. 세브란스의전 시절의 봉사활동과 아프리카에서의 WHO고문관으로서의 일 등등, 그리고 특히 소록도에서의 추억에 오래도록 머무르셨다. 얼마나 오래도록 말씀을 내게 선물? 하셨던지 얘기를 마치시자마자 곁의 간병 아줌마에게 갈증나니 물 좀 달라고 청하셨다. 중간에 말씀하시길 내가 이 병원 호스피스봉사자회 회장인 것을 아셨던지 나중에 호스피스활동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시겠다며 다시 오라 하셨는데 병원측에서 마련한 빼빼로데이(11월11일) 행사를 함께 하신 며칠 뒤 급격히 신체 모든 기능이 저하되어 나와의 약속 된 숙제(호스피스에 대하여)를 못 마치신 채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기력이 쇠잔해지셔서 말 할 기운이 없었을 때에도 나만 들어서면 미스타 리 왔냐고 반기시며 시트안에서 힘겹게 손을 뻗쳐 올려 항상 악수를 청 하곤 하셨었는데 --- 이제 어디서 그 정겹고 따스한 손 맛을 볼까?
윤박사님과 함께한 호스피스봉사자 빼빼로데이 /신부님, 목사님, 사회복지사님과 함께
이러한 병상에서의 기쁨도 잠시, 윤 석우박사님은 닷새 뒤인 11월 16일 오전 11시 30분 그렇게도 예뻐하고 사랑하셨던 아내를 곁에 두고 소천하셨습니다.
생전에 나에게 들려 준 말씀, 그 분 뜻을 어기고 제가 드러내려합니다. 의료행정가와 후배 의사들이 어느 날 찾아와서 박사님이 걸어오신 봉사의 삶을 후학도들의 귀감이 되도록 책으로 펴 내자고 권유했을 때 박사님은 한사코 거절했다고 하셨습니다."왜? 그러셨어요?"하는 나의 물음에 박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한 일은 극히 보잘 것 없고, 작은 일에 불과 해!" 나는 그 때 살아계신 예수님, 겸손하신 예수님을 박사님을 통해 만났습니다. 요즘 쬐끄만 일에도 유명세만 타면 출판기념회를 열어가면서 자서전을 내고 난리인데 --- 윤 석우박사님 살아 생전, 병실에서 나로서는 네 번 만난 것이 전부였는데 그 분은 내게 커다란 영혼의 울림을 남겨 주셨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페이지의 제목을 '짧은 만남 큰 가르침'으로 정하게 되었지요. 숨겨진 아름다운 그분의 흔적과 잊혀져 갈 미담을 다시 떠 올리며 그 분을 추모합니다. 아래 글은 1965년도 당시 나환자(한센병)들의 사회적 냉대와 격리수용을 통한 고립의 서글픔과 편견에 의한 그들의 비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더욱 안타깝던 사실은 마냥 즐거워하고 귀염받으며 자라나야 할 어린이들 조차 부모가 한센병환자라는 사실만으로 일반아동과 분리해 학교를 보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빛이 들어 갔습니다.그 빛은 어둠과 장애와 편견을 몰아내는 희망의 빛 이었습니다. 작은 사슴의 섬이라는 뜻의 소록도(小鹿嶋)에 화합과 평화를 일구어 낼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의 빛이 소금이 되어 들어 갔습니다.
창조주는 의인, 죄인 / 부자와 빈자, / 병든 이와 건강한 자를 구분치 않고 골고루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건만 왜? 사람들은 경계의 선을 긋는가? 45년 전 소록도에선 과감히 편견의 담장을 무너뜨린 의인이 있었다!
소록도에는 당시 직원 자녀들이 다니는 소록도 초등학교와 미감아동(未感兒童)이 다니는 소록도초등학교 갱생분교가 있다. 갱생분교에서 따로 교육을 받고 있는 미감아동들은 부모가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벽을 쌓고 따로 마련한 분교를 만들어 격리교육을 시킨다. 이들 대부분 미감아들은 나환자 부모와 장기간 생활 해 온 관계로 감염의 우려가 있어 매월1회씩 정기검진을 실시하였는데 해방 후 미감아동 보육소가 관사지대로 옮긴 이후 이때까지 실시해온 면회제도는 경계선으로부터 병사지대로 통하는 한길 양편에 환자와 미감아를 갈라 세워 면회를 시켰다. 아동들의 수가 많을 때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환자들은 이 면회를 통하여 그리움을 달래고 그간에 있었던 일상을 이야기하며 마련해온 용돈을 꼭 쥐어 주기도 하였다 또 졸업을 앞둔 아동들은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부모와 상의 하면서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였는데 상급학교에 진학을 한다는 것은 소록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이별을 뜻한 것이기 때문 이었다 면회시간이 끝나 갈 때면 어린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나이든 아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쑥스러워 하였다 영아원의 아동들의 면회는 아동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부모들이 직접 찾아와서 면회를 하였다. 이 면회 장면은 어찌나 눈물겨웠던지 아이들을 보살펴 주고 있던 천주교 수녀들이나 직원들이 뒤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소록도 초등학교 김갑출(金甲出) 교장은 “나병은 불치병도 아니며 유전병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록도병원 내에서 아직도 미감아동들을 별도 취학시킨다는 것 자체부터가 모순된 일이다”고 지적했었다. 이건 어른들의 잘못이고 언젠가는 꼭 개선되어야 할 일이다. 그들의 심정이 일반아동과 격리되어 생활하여야 하는 외로운 처지가, 아래와 같은 시(詩)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조그만 어항 속에서
꼬리치는 금붕어야
넌 무슨 잘못이
그다지도 많아
날이면 날마다
조그만 어항 속에 갇혀 사니.
국립의료원 윤석우(尹錫宇) 부원장이 16대 소록도 원장으로 부임(1965.1.1일자)하면서 미감아동(未感兒童) 의학적 구분은 과현 정당한가? 라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이 불합리한 격리의 벽을 허물기 위한 스스로의 조치로 단안을 내려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던 자녀(여상11, 여진6)들도 소록도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나환자 마을에 새 역사가..., 원장 두아들 미감학교에 취학, 그릇된 인식 불식(拂拭)』 (1965.4.6 전남매일) 『이젠 장벽은 없다. 미감아 멀리하던 적선(赤線)을 지워. 병원장 윤씨의 종용으로 혼합편성』(1965.4.7 서울신문)『미감아는 나환자가 아닙니다. 벗이 될려 애써요』(1965.5.25 조선일보) 윤 원장은 부임초부터 미감아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보육소(미감아동 격리보호 기관)의 미감아동을, 직원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통합하여,"이 아이들에게 슬픔 대신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평소에도 자주 피력하셨으며 그 꿈을 아들들을 통해 몸소 실천하셨다.
병원에서 몇 번 뵙고 대화를 나눌 때 조차도 저는 그분께서 크리스챤이신지 몰랐었습니다. 뒤 늦게 가족을 통해 아프실 때도, 교회를 못 가실 때는 늘 집에서 기독교방송을 듣고 보았다며, 그리고 교회 집사님이신 줄 저는 뒤 늦게 알았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여쭤 봤을 때,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하셨을까? 병실을 나와 문득 스치는 생각, 맞아! 인도의 성자 간디가 했던 말,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 예수를 믿는이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을 때 이방인보다도 못한 삶을 산다면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돌아가시기 직전 윤 박사님께서 나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고귀한 유산이었다.'너도 입술로 주를 말 하는자 되지 말고, 행동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내어라!'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다했지요. 그 숭고한 사랑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이들 곁에서 펼치신 아버지. 그 영향권 아래서 성장한 두 아들과 두 딸은 모두 잘 성장해서 주님의 축복을 누리며 아버지의 정신을 삶 속에서 이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안치실에서 운구차로 모셔지는
고인과 이를 뒤따르는 유족들
유가족들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구차에 오르시는 고인
청양군 정산면 장지까지
안락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준비 된 버스
서울시립 승화원에 도착해서
운구대기 중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미천하며
병들고 낮은자들을 위해
기쁘게 희생하셨던
고인의 삶을 반영하듯
앞 자리(화로)를 모든이에게 양보하시고?
당신은 맨 끝 자리를 택하셨군요.
-이곳 화구는 1번부터 23번까지 있다.-
서울시립승화원(화장장)에는
유해를 사르는 화로가 1~23기 있습니다.
대기중인 유가족들의 모습
수골실(이곳에서 분골, 쇄골)에서의 유가족들
화장을 마친 후 목사님을 선두로하여
영정과 유골함을 안고 주차장으로 ---
-추모의 글 2-
“소록도의 3.8선이 트이는 날”
그 동안 간소화 되었던 개원 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키로 하여, 평소에는 전염병 지역이라 하여 철조망을 치고 제한하던 병사지대를 이 날 만큼은 자유롭게 출입하여 구경하도록 크게 배려했다. 인근 주민들은 개원기념일을 “소록도의 3.8선이 트이는 날”이라며 일손을 놓고 관광에 나섰다. 운동장은 환자들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한 구경꾼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환자들은 오랜만에 다른 외지 사람들을 역으로 구경하기에 바빴다. 눈썹이 없는 여자 환자들은 눈썹을 곱게 그렸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환자들도 이날 만은 수갑을 풀고 나오는 은전(恩典)을 누렸다.
윤석우원장이 기념행사를 치른 2개월 후인 1965년 7월 31일 소록도에 부임한지 7개월 만에 떠나게 된다. 부임하기 전 부터 나이지리아 주재 W.H.O 고문관으로 내정되어 있었기에 원장직을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당시 그의 갑작스런 이임은 소록도 미감아동이 다니는 분교와 통합문제 등이 남아 많은 미련과 아쉬움을 남겼다.
고인의 유골이 안장 될
백곡리의 아름다운 전경,
멀리 예배당 첨탑이 정겨워 보입니다.
안장 될 묘역으로 오르는 상주와 유족들
모든 장례의 절차를 마무리 짓고
돌아서는 가족들 뒤로
묘소를 다지기하는 미니 포크레인이 보입니다.
뿌리를 찾아서!
아들을 데리고 올라가 윗대 조상의 산소에
참배하며 설명하는 아버지.
하산하는 가족들 위로
따스한 석양이 내리 비추입니다.
상경길에 천안 휴게소에서
다과를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가족들 모습
-추모의 글 3-
님께서 살아오신 숭고한 삶을 존경합니다. 병든 자 곁에서, 가난한 이들 곁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해 오셨습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영생의 구원을 박사님에게 베풀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특히 소록도 부임 후 인간의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그 통합의 정신 자신의 자녀들까지 미감아와 함께 교육 받도록 하여 스스로 사회 불신의 벽을 허물어내신 그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한 평생 애덕을 실천해 오신 박사님을 하늘에 천사들도 기뻐하며, 하느님이 내리신 승리의 월계관을 들고 천국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압니다.
#. 위 글(추모의 글 3)은 선종하시기 며칠 전 찾아 뵈었을 때 그 분은 의식을 가누기조차도 힘겨워하셨다. 그 때 박사님 귀에대고 "제가 편지 써 왔는데 읽어드릴까요?" 하였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내게 신호를 보내셔서 그 날 읽어드린 내용을 그대로 다시 올렸습니다
- 글을 마치며 후기-
돌이켜 보니 모든 일정은 주님께서 주관해 주셨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을 다니시며 오랜 투병생활을 하셨던 박사님께서 하늘의 시간을 이미 알고 계셨던지, 아니면 부족한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려고 제가 호스피스봉사자회 회장으로 있는 서울의료원으로 오셔서 입원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입원해 계신 동안은 날씨도 비교적 포근했었습니다.찾아오시는 분들 춥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 사랑의 배려였지요.저는 박사님을 생전에 병원에서 네 번, 돌아가신 뒤도 네 번 만났습니다, 빈소에 세 번 찾아갔었고, 장지로 떠나는 날 함께 하였으니 네 번입니다. 생사의 현장에서 만난 여덟번은 제게 큰 변화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분을 떠나보내는 제 마음을 아셨던지 장지로 떠나는 날 새벽 장례예배에 참석하고자 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제 머리 위로 슬픔과 위로의 눈물처럼 빗방울을 뿌리셨습니다. 빈소에서도 아름다운 신앙의 하모니가 이루어졌습니다. 발인예배는 압구정동 광림교회 유 성원목사님께서 정성껏 집례하셨고, 마지막 축도는 성수동 성락성결교회 지형은 담임목사님께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집도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아가신 윤 박사님을 위하여 날씨를 찬조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날 새벽부터 청양에 들어설 때 까지 내내 흐렸었는데 장지인 정산면 백곡리에 운구 행렬이 들어서는 순간 하늘의 구름은 걷히고 황금같이 밝은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안장을 마칠 때까지 주변을 따스하게 비춰 주셨습니다. 연로하신 아내를 위해 박사님의 영혼이 하늘의 아버지께 부탁하셨나 봅니다. 다음 날은 서울의 기온이 영하의 날씨로 몹시 추워진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자 축복이었음을! 고인은 선친들이 잠들어 계신 곳에 자연장[自然葬]에 맞갖은 잔디장으로 봉안되었습니다.
2011년 11월 22일
윤 석우 박사님을 그리워하며,
서울의료원 호스피스완화 의료센터
봉사자 이 후안디에고
2016년 11월19일 고 윤석우박사
5주기 추모예배 참석
장소: 강남구 잠원동 자택
2018년 10월4일 서북병원
직접 쓰신 카드입니다.
2018년 10월 요양원에서
첫댓글 숨겨진 사람들, 겸손의 작은 불씨 참으로 빛을 내는 선함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사람들 입니다.
참 많은 걸 생각해 주는 글입니다... 저 또한 짧은 시간이지만 윤석우선생님을 옆에서 뵐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짧은 만남, 큰 가르침... 저에게 굉장한 힘이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창고가입도 환영해요. 함께 그리스도의 소금으로 녹아봅시다.
먼저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살다가신 故 윤석우 박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짧은 만남 큰 교훈 이 글을 보며 가슴 뭉클해집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일들을 모두 이루시고 또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신 가족들 또한 너무도 훌륭하고 아름다운분들이라 생각이듭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라도 꺼리는 한샘병환자들을 위하여 젊음을 다 바치신 박사님과 가족분들
그 숭고한정신 그 고귀한 가르침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글을 보며 가슴저미고 뭉클해 지는것은 아마도 박사님의 아름다운마음이 제게 전해져서 그런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사님 이제는 천국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내가 한 일은 극히 보잘 것없고, 작은 일에 불과해."
"너도 입술로 주를 말하는 자 되지말고, 행동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내어라."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이 울림이 되어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네요.. 그 분께서 남겨 놓으신 그 감동 되새기며 그 사랑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아버지께서 박사님 이야기를 집에서도 종종 하셨습니다. 박사님 귓가에 읽어드리신 편지를 제게도 읽어보라 하셨었는데,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사랑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신 박사님의 삶을 본받으라하시는 뜻인 줄 이 글을 읽고 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 주일 전에 아빠와 서울의료원에 들렀다가 박사님 계신 병실 앞에 갔었는데, 주무시고 계셔서 못 뵙고 돌아온게 너무 아쉽네요..^^:: 겸손한 마음과 사랑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신 박사님의 삶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삶 속에서 닮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밀알하나가 떨어져 묻힘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고있나이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나무는 자라서 그곳에 새들도 깃들어 노래하고 그늘에선 더위에 지친 나그네도 쉬어가리라. 주님, 박사님의 영혼이 천국복락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시편에 " 야훼 나의목자 아쉬울것 없노라,푸른 초장에 나를 뉘시고 " 생각났었습니다.
하늘에서 축복하는 아름다운 주의사람 이셨던 형부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장미심안젤라 11.11.24. 18: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삶에 보이지 않게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시는 이런 아름다운 분들이 있기에...
후안디고 형제님의 감동적인 글과 정성이 들어간 사진들 저희 가족들 잘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감사합니다! (저희 남편 왈 "형제님의 직업이 작가?)
[#. 윗글은 미국에 계신 안젤라님의 댓글 복사해서 제가 다시 올렸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가셨네요. 지금은 주님과 의 만남으로 얼마나 평화로우실지 짐작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