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 정서희
읍내 시장통의 어물전을 지나자 ‘희망 전당포’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전당포 이름 치고는 꽤나 밝고 역동적이었다. 쇠문을 열자, 이층으로 난 나무 계단이 가파른 산길처럼 험했다. 나는 문제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부축하고 그 좁은 계단을 오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전당포가 뭐람’ 나는 붉어지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 전당포 안의 두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팔순은 돼 보이는 두 노인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노인이 전당포의 주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아버지에게 들은 관상 그대로였다. 귀가 얇은 아버지는 몇 년 전 부동산업자에게 평생 모은 돈을 다 잃고 그 후유증으로 병마를 얻어 치료중이다. 이번에는 은행에서 대출까지 내서 전당포에 빌려주고 어음 한 장 달랑 끊어온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당포 주인을 가리켜 “그 양반 관상을 보면 눈동자가 작고 빛이 나, 귀와 귓불이 두툼해서 재복이 여간 많은 게 아녀, 게다가 명이 길어서 장수할 팔자여, 돈 떼먹고 도망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여, 재산도 수 십 억이여, 아파트만 해도 몇 채인지 아나, 너희들은 아무 염려들 말아라” 하고 큰소리를 쳤다. 아버지는 사주 명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낯선 사람과 잠시 마주할 기회가 생기면 관상과 사주를 봐주며 그 사람의 앞날을 예측하기도 했다. 나는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아버지의 그 말도 안 되는 운명 철학을 비웃고 있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이 화두인데, 그런 케케묵은 역술을 쫓아서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다니’ 하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인간의 운명이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언젠가 백범 일지를 읽다가 김구 선생이 관상학에 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풀이를 하면, 얼굴의 좋음이 몸의 좋음만 못하고, 몸의 좋음이 마음의 좋음만 못하다는 글이었다. 나는 그 글을 보며 관상보다는 심상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통쾌했다.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마음씨가 좋은 것이 잘생긴 얼굴이나 튼튼한 신체보다 낫다는 말은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전당포 주인은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앉으라며 소파를 가리켰다.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또 궂은일을 당할까봐, 긴장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편견인지 몰라도 ‘전당포’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물건을 담보로 잡아서 금전을 빌려주는 곳이지만, 불법이 성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당포 주인을 보자, 세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매정한 유태인 샤일록이 생각났다. 살 1파운드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고리대금업자인 그는 인정사정 안 봐주는 철면피로 묘사되어 있다. 나의 예상대로 전당포 주인은 돈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그동안 몸이 많이 축이 났다는 둥, 이제는 돈 생각을 하지 말고 좋은 것만 먹고 몸을 챙기라는 등의 사설만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옛 정리 때문인지 돈 얘기를 꺼내기가 어색했는지 “아무렴요. 고맙습니다.”하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내 나이가 지금 몇 살 인지 아나? 시방 여든 아홉이여” 그래도 이렇게 정정한 것 봐, 하더니 부리나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한약건재상 주인과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한약재의 이름을 부르는데, 하늘이 내렸다는 명의 화타와 편작이 울고 갈 형국이다. 숙지황 40그램, 산수유, 백하수오, 건삼은 잘게 조각을 내어서 보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보약으로 지어먹고 원기를 회복한 약재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부자는 적은 돈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한의원의 탕약이 비싸다고 건재상에서 싼 값으로 약재를 구해 다려 먹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참 짠돌이 영감이구나, 약속한대로 오늘 차질 없이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서 좌불안석이었다. 전당포 주인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혼자서 차 한 잔 마시러 오는 일도 쉽지 않을 거라면서 손수 만들었다는 대추차를 한 잔 내놓았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수표 한 장을 꺼내주며, 나의 초조함을 깨끗이 불식시켰다. 평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의 심층 속에는 여전히 편견이 존재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몹시 부끄러워졌다.
오 개월을 앞당겨서 우리의 편의를 봐준 전당포 주인은 아버지의 관상 대로 믿을 만 했다. 거기다가 후덕한 성품으로 아버지의 몸을 걱정하며 보약까지 지어준 것을 볼 때, 돈만 아는 냉혈한은 아니구나 싶어서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전당포의 나무 계단을 다 내려와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은 듯 편안해 보였다. “봐라, 전당포 사장, 사기꾼 아니지?” 의기양양해진 아버지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묻는다. ‘아버지, 저번 그 부동산업자의 관상은 어땠어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하도 환해서 그만 그 말이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첫댓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표를 받아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