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을 들라면 이슬람의 꾸란을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꾸란이 회교 원리주의자의 손에 들어가면 테러의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꾸란 보다 훨씬 먼저, 더 오랜 세월동안 인류역사에서 살인, 고문, 방화, 집단 학살의 근거로 사용돼 왔다는 것을 잊고 있다.
성서를 통해서 감화를 받고 인류구원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서 때문에 사람이 죽은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80년대 초 강원도 교육감 민병희 선생이 양구고교 교사로 교회에 나오고 있었다. 민 선생은 얌전한 모범 교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껄렁 껄렁한 신자여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한 번은 민 선생과 졸업을 앞둔 고 3학생들을 데리고 추곡 약수터라는 곳으로 수양회를 하러 갔다. 수양회라고 해서 무슨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는 것이었다.
지방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못간 십대들의 미래는 아무 계획도 없는 백지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씩 개인 면담을 통해서 함께 고민을 해보려고 하는 나로서는 마음먹고 시도 해보는 아주 의미 있는 행사였다.
그런데 한 녀석이 초저녁에 없어졌다가 잔뜩 취해서 한 밤중에 감히 우리 방으로 들어와서 술주정을 벌렸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우선 교회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술 먹고 떠드는 것도 창피한 일이지만 겨우 창호지 한 장으로 가려진 방음장치도 전혀 안된 시골 여관집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서 다른 손님들 잠자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녀석을 진정 시켜서 빨리 재우는 것이 덜 밑지는 장사라고 생각해서 살살 달래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내가 부드럽게 나올수록 오히려 녀석은 점점 기세가 등등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내 눈 앞에 보여줘 봐라.”면서 기고만장해서 떠들었다.
그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민 선생님이 나서더니 “이놈아! 내가 지금 너를 안 때리는 것이 하나님이 있는 거야.”라고 일갈을 했다. 민 선생의 그 한 마디에 녀석이 쑥 들어가 버렸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을 목격하고야만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그렇다. 감히 자기 학교 선생님 앞에 더욱이 무서운 학생부 선생님 앞에 술 먹고 나타나서 주정을 해도 때리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아닌가? 하나님 사랑이 아니었으면 녀석은 벌써 작살이 났을 것이다.
그 녀석은 가정도 불우하고 성격이 대단히 내성적이었는데 그 전에도 술 먹고 교회 유리창을 깨고 난리 친 사건이 있었다. 그 때도 나는 교인들 모르게 조용히 사태를 수습하고 훈계방면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테면 전과자가 재범을 저지른 셈이지만 녀석이 못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날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다. 이태리의 어촌에 사는 어떤 가족의 시력이 6.7로 독수리의 눈의 시력과 같아서 2 km 밖에 있는 간판의 글씨도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대대로 어촌에 살면서 멀리 보기만 했기 때문에 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이 있단다. 보통 사람의 시야가 180도인데 이 병은 시야가 점점 좁아져서 나중에는 음료수 빨아 먹는 빨대로 보는 것 같이 된단다. ‘얼마나 멀리 보느냐’는 곧, ‘얼마나 넓게 보느냐’일 것이다. ‘좁게’ 보아서는 ‘멀리’ 볼 수 없다.
성서가 이렇게 위험한 책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성서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성서를 좁게 보는 근본주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단자들이 지옥의 불쏘시개 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루터가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이런 사람들이 특히 많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이 있다. 중세 수도원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재밌고도 난해한 책이다. 수도사 윌리엄이 제자 아드소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서가 사람을 잠에서 깨우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잠을 재우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23:15)
예수는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온 천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를 얻으면 자기보다 더 편견과 완고함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교리’와 ‘성경’이 똑 같은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가 철석같이 진리로 믿고 있는 교리가 성서의 다른 구절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은 곳을 감옥이라고 한다면 생각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곳도 일종의 감옥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낀다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정신적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스스로 안전함을 느낀다. 오히려 안전하지 못한 것은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만들기 위해서 밖에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공격하기 때문이다.
중세기에 유대인들에게 일정한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경계를 제한해 주고 살게 하는 게토(ghetto)라는 것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일생동안 그 안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사람을 도무지 다르게는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다.
한 번은 동학의 교조인 최수운 선생에게 한 스님이 유교와 불교, 선(仙), 세 종교 중에 어느 것이 비교적 이치가 깊고 광대무량한가 하고 물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지요. 비해서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적고 큰 것을 비교할 수 있겠소? 살아 있을 때에야 사자의 힘이 강하고 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죽고 난 후에야 사자의 죽음이 개의죽음보다 무섭다고 할 수 있을 게 무엇이겠소?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혼을 넣어줄 수 없게 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 되면, 죽은 송장과 별 다름이 있겠소?"
생각해 볼수록 지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