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갱도
강표성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그가 나와 있다. 머릿결이 부스스한 젊은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지만 변함없는 표정에 머쓱해진다. 낮달처럼 해쓱한 얼굴로 박제된 이, 오래전 떠나온 첫사랑을 만난 듯 마음이 아리다.
글자와 글자 너머 양복 한 벌이 공중에 걸렸다. 오랜 시간 불빛에 반들반들해진 옷은 무게중심을 잃었다. 입 다문 두 개의 단추에 생의 시접과 시린 말줄임표가 숨어있다. 한때 뜨거운 체온이었으나 지금은 전설의 시인, 기형도(1960~1989)를 기리는 문학관에 와 있다.
엄마가 맞춰준 새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매일 물 그림을 그리고, 엄마는 열무를 팔러 가고, 누이가 안양천 안개에 길을 잃은 이야기는 그만하자. 상장으로 종이배를 접어서 물에 띄운 날, 터벅터벅 돌아오는 발길에 나리나리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던가. 이젠 축축한 과거 대신 청량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괜찮다, 무사히 궤도에 진입했노라고 고개를 끄덕였겠지. 불온하고 불편한 세상에 대해 NO라고 할 수 있다. 중앙지의 신문기자로서 눈썹을 휘날리며 허무와 부조리의 현장을 생생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 와중에도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까지 한 그였다. 새로운 세상과의 접선, 멋진 출발이다.
그러나 신은 가혹했다. 29살의 영원한 청춘으로 올려놓고 말았다. 요절은 너덜너덜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니 좋은 것일까. 동어반복의 시를 쓰지 않아도 되고, 청춘을 울궈 먹는 노인이 되지 않아 산뜻한 것일까. 시인의 촘촘한 독서목록을 보면서 속이 쓰라렸다. 읽을 책이 얼마나 쌓였고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현실은 과거완료형이 되고 말았으니. 신이 십 년만 더 허락했다면 그는 한국 문학사에 어떤 획을 긋게 되었을지.
그는 시 ‘빈집’을 써서 우리 안의 공허를 드러내고, ‘엄마 생각’으로 유년의 소년을 보여주며, ‘안개’로 시대의 모습을 구현했다. 그 외에도 시인으로서 다양한 면모를 드러냈다. 최초의 시집이자 유고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이 구절의 검은 잎이 왜 내게는 검은 입으로 읽히는지, 때로는 슬픔의 갱도로 읽히는지.
그의 시를 읽으면 생의 통점을 파고드는 고독한 광부가 떠오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 안으로 파 내려가는 작업이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내기 위해서 내면으로 침잠한다. 시추선처럼 수직으로 직접 하강하면 좋을 터인데, 보이지 않는 금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갱도를 옆으로 조금씩 늘려가며 하향해야 한다. 돌고 도는 암중모색이다. 머리 위의 카바이트 불빛에 의지해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듯, 심연을 향한 외로운 행보다. 몇 번이고 영혼의 곡괭이를 내리치며 자기 안으로 몰입할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서 어렵사리 파낸 원석이 다 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깊은 갱도에 숨어있던 그것은 검은 광물에 불과하다. 유효성분이 담긴 돌들을 잘게 부신 후, 물속에서 걸러낸 다음에 제련소에서의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반짝이는 금을 얻는 것처럼, 시 또한 처음부터 빛나지 않는다. 갓 채취한 시어들은 빛이 없다. 수없이 갈고 닦는 과정이 필요하다. 들여다보고 흔들고 순서를 바꾸며 치밀한 장인정신으로 세공한 후에야 그만의 빛을 발한다.
금맥을 캐고 난 갱도에 물이 차오르듯, 그 물로 물고기가 자라고 식물이 자라듯, 순도 높은 시는 사람을 키운다. 유장한 울림으로 다가와 감응을 끌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를 보면 오래전 세상을 떠난 시인의 영혼 언저리를 배회하는 기분이다. 지독한 서글픔에 오히려 정화되는 것 같다.
슬픔은 자칫하면 낫이 되기 쉽다. 자신을 후려치고 주위를 내려친다. 안으로 휘몰아치는 연민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면 상처를 낸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신의 영혼을 벼리는 시금석으로 받아들인다. 삿된 것을 걸러내고 모난 것은 둥글게 갈고 닦으면서 새로운 영혼으로 변화한다. 제 감정에 무너지는 대신 그것으로 자신을 강화하며, 마침내 빛을 발한다. 어느 순간 수없이 갈고 닦은 동판 면경처럼 환하게 빛난다. 주위를 밝히는 그것은 타인의 거울이 되고 시대의 반사경이 된다. 깨지지 않는 슬픔이 된 것이다.
나의 슬픔은 얼마나 얇고 가벼운가. 외로움과 두려움에 질려 그것을 무화시키는 일에 고집을 부렸다. 깊이 내려가 또 하나의 혜안에 이르지 못하고, 영혼의 시금석이 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팔을 휘두르기 바빴다. 그 흔한 잡석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했나 싶어 부끄럽고 민망하다.
여전히 나는 가난한 광부에 불과하다. 어딘가에 있을 광맥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이지만, 작은 삽 하나 가지고 내려간다. 어둠이 깊다. 빛을 향한 외로운 행보,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리라.
종일토록 추적거린다. 천상의 시인들이 둘레둘레 모여 술판을 걸게 벌일 듯한 날씨다. 새삼스럽게 지상의 몇몇 얼굴들이 차창 밖으로 스친다. 못 먹는 술이지만 슬픔을 안주 삼아 어깨를 맞대고픈데, 영혼의 삽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데. 오늘따라 돌아가는 길이 참 느리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