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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한평생 벗인 문방사우(文房四友)
꼭 필요한 문방사우 사형제 중 단연 으뜸인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붓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벼루라 말하지만
글씨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양갱이를 닮은 까만 먹이다.
최고의 재료인 소나무 뿌리와 뜨거운 아궁이 속에서 불이 만든 그을음이 종이에 곱게 써 내려가면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되어
아름다운 탄생 먹의 효과만 남는다.
이번 걸음은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개인의 영광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청운의 꿈을 실현하고자 부산-밀양-대구 상주 문경을
지나 백두대간의 문경새재를 넘어 충청과 경기를 지나 한양으로 걸었고, 봇짐장수와 등짐장수 그리고 유배길과 임란 때 왜군들이 걸었던 그 길을 찾아보며 걷는 천리길의 여정이다.
출세의 지름길인 과거시험은 고려 제4대 왕 광종 때 수나라로부터 도입하여 조선 26대 왕인 고종 때 갑오경장 무렵에 과거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천자문을 외우고 유교경전의 47만 자라는 한자를 외워야 했는데 하루 200자씩 외워도 6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고
유교경전과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사기,한시 송시 당시 인문학을 고루 통달해야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걸 모두 다 안다고 해도 영남대로를 통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으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 그 길을 찾아보면
영남대로 따라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가면 14일
좌측의 죽령길은 15일
우측의 추풍령이나 괘방령은 16일이 걸린다.
올라가는 건 시험이 있으니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려올 때는 또 어찌 내려오나 왕복 이천리길 세월아 네월아 그렇게 걸었을까!
늦은 밤 동대구에서 구포로 가는 기차를 타고 다시 택시로 동래읍성에 도착하니 새벽 01시
이곳에서 시작해서 서울로 가는 길에 대구 반월성이 있었던 반월당을 지나야 하기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빠른 걸음으로 대구로 향한다.
6과 2분의 일일동안 걸음해야 하기에 하루 평균 70km가량 진행 잠은 주막이 있으면 잠시 자는 걸로 정하고
먼 길에 안전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천지신명 산천초목"에 기원드리고 무엇보다 비가 오지 않기를 산신님께 기원드린다.
그리고 자고로 선비는 비 오는 날이라 하더라도 절대 뛰면 안 되고, 얼어 죽을지언정 상놈이 피워놓은 곁불은 쬐면 안 되느니...
날짜:2023년 9월 30일-10월 6일까지
거리:446km
배낭은 첫날은 가볍게 둘째 날 대구부터 무겁게
전체구간중 길 찾기 애매한 구간이 있다면 야간에 서울 반교 jc와 경부고속도로 인근 양재동 찾아가는길은 맨탈 올정도로 정신없던 구간
그 외 구간은 거의 직선길이라 어렵지 않게 찾아간다.
동래읍성지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이며 대일 외교의 첫 관문격인 곳 하지만,
1592년 임진년 이른 아침 동래성 맞은편 황령산에서 봉수를 보던 봉수군이 왜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다급하게 보고 한다.
하루 전 부산진을 지키던 부산첨사 정발 장군은 왜군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낙동강 하구까지 왔다가 대규모 왜적이 침략한 걸 알고 수군이 가지고 있던 70척의 판옥선을
모두 불태워 버린 후 김해로 도망갔고
그리고 경상 좌병사 육군 사령관 이각이 병사 몇 백 명을 데리고 동래성을 왔으나 허접한 군인 몇십 명만 남기고 도주한다
이렇듯 고립무원의 부산 동래성을 구할 자(者)는누구인가.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힘 없이 전사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군 1만 8천 명은 곧바로 동래성 남문(현 동래시장)으로
쳐들어와 " 길 비키라"라며 목판에 글을 써 보내니
동래부사 송상현"택도 없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글로써 주고받았으나 서로간의 협상은 결렬되고
성안으로 민관군 3천 명이 있던 동래성 성외곽을 고니시 부대 1만 8천 명이 둘러싼다
6대 1의 전투
왜군은 귀신 형상을 한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공격하다.
2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민관군 3,000명이 죽었으나 왜군은 불과 100명 안팎만 죽었다고 한다.
고립무원의 땅인 동래성에서 전투는 이렇게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끝난다
동래읍성 북문에 관한 글이 보이고
지나간 경로와 거리
코스:부산-양산-삼랑진-밀양-청도-팔조령-대구-칠곡-해평-도개-낙동강-상주-문경-새재-충주-음성-이천-안성-용인-서울-경복궁
최대한 직선길로 간다고 걸었지만 446km가 나온다.
2층으로 구성된 서장대
늦은 새벽인데도 젊은이들로 붐비는 곳을 지나면 동래역이 나온다.
대부분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집으로 안 가고 체력들이 대단하니 우리 집 막둥이도 대학생이라 집에 들어오는 날 보다 안 들어오는 날이 더 많으니 지금 글 쓰고 있는 새벽 04시인데 이틀 동안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
어디서 뭘 하고 노는지..
이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 볼까요
오래전 삼국시대 때는 성골(왕족)이나 진골(반반) 혈통을 중요시하다 보니 자기들끼리 다 해 먹었고
당대 최고라던 고운 최치원 선생마저도 이를 극복하지 못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 짚신과 갓을 벗어 놓고
신선이 되겠노라 사라졌다
고려 때는 문벌 귀족의 권문세도가들만 살판났던 시절에는 일반 백성들의 땅은 바늘하나 꽂을 곳도 없었지만 광종 때 수나라로부터 과거제도를 도입해서 조선말까지 900년이나 사람들 골병들게 만들었다.
조선시대는 삼국시대(혈통)나 고려시대(문벌귀족) 때와는 다르게 실력에 의해 인재를 등용했으나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아
이황(남인) 같으신 분도 소과에 3번 낙방하셨고 천재라 불렸던 이이(서인) 같으신 분은 9번 장원하여 구도 장원이라 불렸다.
공부는 하지 말라고 해도 죽어라 하는 사람과
하라고 해도 죽어도 안하는 사람들이있죠 (대부분 이와 같은 경우)
동래역에서 방향을 북쪽 낙동정맥이 지나는 지경고개로 정하고 명륜역-온천장-장천역-구천역까지 온천천 따라 진행하다가
범어사역까지 중앙대로 길을 따른다.
역사가 100년이 넘은 만덕고개로 올라 가는길과 지경고개로 올라가는길 중 만덕고개로 가는길이 조금 더 짧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만덕사가 있어 만덕 고개라 불리던 고개 그곳은 도둑이 많아 지경고개로 조금 더 돌아간듯 하고
이른 새벽이라 조용하기만 한 범어사 역
이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범어사가 있지만 왕복 3km를 해야 하니...
지난날 사진으로 대신한다.
때는 신라 문무왕 시절 자칭 설사(원효) 대사 보다 더 똘똘하셨던 의상대사께서 왕명에 의해 창건한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14 교구 본사 절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인 범어사
금정산 정상 부근에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은 금빛 우물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물고기가 그곳에서 놀았다고
해서 금정산으로 이름 짓고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란 뜻의 범어사(梵魚寺)라 했다
범어사 뒷산인 금정산의 산신(山神)은 고당 할매죠
신라시대 때 남자들은 허구한 날 전쟁하러 나가다 보니 집에 남아있는 여자들이 애기를 키우거나 농사를 짓어 모계사회를 이룰 때는 전국의 대부분의 산신은 여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없어지니 남자들이 농사를 짓으면서 부계사회를 이루어
그때부터 산신 역할을 남자가 대신한다
그리고 금정산성은 정확한 년대는 확인 할길 없으나 낙동강 하구,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여 신라시대 때부터 성이 있었다는 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숙종 (1703년) 때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경상감사의 건의로 동래부사가 성을 다시 쌓았다
길이 19KM에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숙종때 쌓은 성이 많지만 이곳 금정산성과 백제때 쌓다가 이후 숙종 때 완성한 북한산성 그리고 강화도가 마주 보이는 문수산성도 숙종 때 쌓은 성이다
범어사역을 지나면 곧바로 노포 삼거리가 나오는데 낙동정맥이 지나는 지경고개(사배고개)로 오른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영남땅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지경고개이며 이후에는 밀양으로 넘어가는 미산고개
대구로 넘어가는 팔조령, 칠곡으로 넘어가는 소야고개, 구미의 산동고개와 해평고개, 낙산고개, 돌고개, 부처고개
상주시 낙동면 부치랭이 고개, 성골재, 상주시 유곡고개, 문경시 마성면 꿀떡고개, 문경새재의 크고 작은 열다섯개의 재가
어서 오라며 기다린다.
이 중에 대구로 올라가는 관문격인 팔조령과 충주로 가는 문경새재가 가장 높다
지경고개에서 아래로 본 경부 고속도로와 부산 외곽 순환도로가 있고 그 넘어 부산 컨트리클럽의 골프장이 크게 자리한다.
낙동정맥 군자산에서 지경으로 이어져 계명봉으로 오르는 곳
백두대간 삼수령에서 남쪽으로 곧장 이어져 온 낙동정맥길에 경남 울주의 고헌산이 영남 알프스 첫 지붕 격이라면
수도하는 스님네가 밤길을 걷는데 방해가 된다고 원효가 법력으로 칡덩굴을 모두 말라죽게 했다는 천성산의 전설을
끝으로 영남알프스는 지나가고 훗날 국립공원의 반열에 오를 부산 금정산의 첫 관문격인 계명봉이 지척이다
의상대사께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금정산에 절터를 물색하던 중 어디선가 들리는 닭울음소리를 듣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그 봉우리를 계명봉이라 불렀다는 전설을 간직한 한 성질 하는 낙남정맥의 까칠한 산이다.
영축산(자장 율사)-천성산(원효대사)-금정산(의상대사) 당대의 이름날 스님들께서 이곳 인근에서 절을 짓거나 수도를 하셨으니
분명 낙동정맥의 살아있는 생기가 넘친 곳이라 여겨진다.
도로에는 새벽이라 차들이 무한질주를 하니 갓길은 너무 위험해 다방천을 건너 공사 중인 곳으로 지나 양산시내로 향한다.
다방 마을로 들어와 이른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고
양산에 왔으면 양산 시청에 들려야 하고
도로 따라 이동후 양산시 하북면 오봉산 동쪽에서 발원해 통도사를 지나온 양산천이 흐르는 곳으로 진행
양산천은 통도사를 빠져나온 물이며 이후에 상북면 공장 지대와 도심을 지나지만 주위에 영축산- 능걸산-선암산- 천성산 같은 이름난 명산에서 흘러온 물이 만아 깨끗한 편이다.
양산천 바로 옆 어느 회사에서 지은 정자가 보여 잠시 누웠다가 진행
남양산역을 지나 물금 중학교 앞을 지나 물금역으로 들어오니 날은 많이 밝았다.
양산시 물금역에 도착하여 세수하고
밤에는 별이 몇 개 보이더니 동쪽 산능선에 있어 할 햇님은 보이지 않고 어째 하늘이 심상찮은 게 비가 올듯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산(山)과 천(川)에 관한 행정지명이 많이 있는데 아마도 산아래 곁들어 살다 보니
산과 관련한 지명으로 경상도에 부산, 양산 울산, 경산 충청도에 논산, 괴산, 예산, 전북에 익산,경기도에 안산이 있고
하천으로 된 지명으로는 강원도 춘천, 화천, 경기도에 동두천, 이천, 포천, 부천, 그리고 인천, 충청도에 진천, 제천, 서천, 옥천
경상도에 합천, 사천 영천이 있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 하천이 있는 경우는 조금 따뜻한 동네겠죠 강원도에 양양(설악과 남대천), 충청도 단양(소백과 남한강), 경상도 광양(백운산과 광양 동천), 밀양(화악산과 밀양강) 그리고 경기도에 안양(관악산 안양천), 한양(북한산과 한강)이 있고
이곳 양산시도 산으로 된 지명이라 금정산과 낙동강을 곁에 두고 있네요
물금의 서부마을
이제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첫 관문인 작원관이 지척이며
밀양시 삼랑진까지 낙동강가 길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에 삼량진으로 가던 길이며 보부상인과 과거 보러 다닐 때 이용하던 황산잔도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대륙으로 침략 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1904년 12월 말에 경부선을 완공하면서 흔적만 조금 남아있는데 4대 강 공사를 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길도 대부분 사라졌다
황산 잔로비석
잡풀로 보이지 않아...
빗 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지만 우산을 펴고 진행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 더 가다보면 많이 내릴 듯
주변으로는 온통 뿌연 풍경 오전 내도록 맑은 하늘은 보이지 않을 듯 하고 비는 올듯 말듯
이쯤에서 하늘에 보이는 짙은 비구름이 우리 지구 대기에 얼마나 만은 물(수증기)을 가지고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보셨죠
대략 1억 4천만 리터의 물이 있으며 1톤은 1천 리터의 물이니 천천히 계산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어딘가 맑은 곳이 있으면 여기처럼 흐린 곳이 있게 마련이니 오늘은 이곳에도 비가 좀 내릴 모양이다.
鵲院棧道(작원잔도)
영남대로 구간 중 棧道(잔도)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 있다.
이는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도로를 내었는데
이 길은 조선왕족 실록에 잔도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작천(鵲汘)이라 불렀다.
영남에는 이곳 황산잔도, 작천잔도와 점촌-문경의 토끼벼루가 대표적이다.
자연의 일부인 거대한 암석,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아무리 튼튼한 바위라도 세월이 지나면 햇볕에 바람에 깨지고 부서져
바다로 흘러들어 고운 입자의 갯벌이 된다.
작원관 옛터
이곳을 지나야 밀양이며 청도 그리고 대구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을 수 있다는 말
조선시대 2대 國防(국방) 관문인 작원관, 그리고 한양 입성을 하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문경새재의 조령관
작원관지는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며
조선시대 때에는 공무로 여행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
였다. 이곳 작원관은 관원의 숙소와 일반인의 검문을 위해서 지은 시설로 남해에서 올라오는 왜적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
고 작원관은 낙동강 강가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철도 건설로 삼랑진 방향으로 700m 정도 옮겨 복원한 것이다.
작원관 전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낙동강변을 따라 이곳 밀양으로 가는 관문 작원관에서 이틀간
조선의 민관군과 이틀간 전투를 치른다.
조선 박진 장군이 이끄는 민관군 병사 300명
일본 소서행장의 주력 부대 18,700명
이곳 작원은 밀양에서 40리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부산-양산 -밀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러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곳으로 오려면 황산잔도(작원 잔도)라는 낙동강이 흐르는 절벽길을 지나야 하기에 지세만 잘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 많은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임진년 1592년 4월 17일
박진 장군은 민, 관군 병사들을 불러 놓고
"두려움에 떨지 마라 일당 백도 안 되는 일당 60이다.
함부로 죽지 말고 죽으려면 왜군 60명씩 죽이고, 나한테 확인받고 죽을 수 있도록!~우리는 최정예다" 일장 연설을 하고
하루동안 치열한 혈전(血戰)을 벌인다.
다음날 임진년 4월 18일
일본군은 원동면 용당리 신곡천 골짜기로 돌아 토곡산을 넘어 안태리 마을로 넘어 작원관 반대편으로 돌아와 황산잔도에서
싸우던 민관군은 양편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혈전 중 모두 전멸한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목숨
죽음이 용기이며 변변찮은 무기를 가지고 조총을 든 일본군과의 치열한 접전 인데 어찌보면 그냥 도살이 아니였을까
무엇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민관군은 모두 이곳에서 전사를 하였지만 박진 장군은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했으나
이후 박진장군은 정유재란 때 청나라 장수에게 맞아서 죽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긴다.
삼량진으로 들어와 몇백 년 된 당산나무를 만나고
삼랑진을 지나는데 갑자기 누군가 불러 보니 앞에 부산의 귀한 장군님께서 지나가다가 저를 보고 차를 멈춰 주셨고
달달한 샤인 포도 한 송이 사주고 사모님이랑 어디론가 가신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밀양시내로 가기 전에 짧은 미산고개와 청용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새고개(임천마을로 넘어가는 )가 있어 어디로 향할지
인근 어르신을 만나서 여쭈어 보니 미산고개를 통해서 강가 옆으로 난 경부선 기찻길 따라 밀양으로 가는 게 빠르다고 하신다.
삼량진에서 밀양으로 가기 전에 오르는 미산고개 앞에서 대전에서 부산으로 걸어간다는 젊은 대학생 세분을 만나서 인사를 나눈다.
"이제 부산 다 왔다"며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더니 급하게 내려간다
체력이 부럽고 대단한 친구들이라 부럽기도 하고
화이팅을 외쳐주고
밀양으로 넘어가는 두 번째 미산고개
넓은 밀양강을 앞에 두고 하천 길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며
구룡터널을 지나며 대나팔 초식으로 항구의 남자 노래 한곡 부르니 터널 안은 쩌렁쩌렁 울린다.
지나온 구룡산 아래 구룡터널 방향과 미산고개 방향
밀양역에 도착
고만 기차 타고 집으로 가뿌까...
저녁까지 청도땅 팔조령 인근까지 가야하니 주막은 지나치고
멀리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고헌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경주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댐을 지나오는 밀양강
밀양강을 건너오면 커다란 팔짝 지붕의 영남루를 만난다.
밀양강가 수려한곳에 자리 잡은 영남루
신라 경덕왕 때 이 자리에 있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 공민왕시절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영남사 절 이름을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는 영남루 그 외 북쪽땅의 평양의 부벽루 ,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가 있다.
평양의 부벽루는 가본 적이 없으니 할 말 없고
진주의 남강 절벽에 자리 잡은 애절했던 촉석루
남원 평지에 자리 잡아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을 이용해 너무나 깨끗한 광한루
이곳 역시 밀양강이 흐르는 언덕 위에 웅장하게 서있다.
만덕문 안에 천진궁 1665년에 건립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곳
정면에 단군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왼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의 始祖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오른쪽에는 신라 백제 始祖왕과 발해 고왕(高王)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헌병대가 이곳을 감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밀양 관아지 앞의 19개의 공덕비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의 부사와 관찰사등 재임기간 동안에 베푼 선정과 애민정신을 널리 후세에 알려 포상으로
삼고자 밀양 주민들이 세운 비석들
맨 앞은 통정대부행 도호부사정후회병하애민 송덕비이고 나머지는 불망비와 애민 선정비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나는 착한 놈이요 하는 것들이 고 실제로 이분들의 성품은 어땠는지 그건 모를 일이다. 현재 정치인들과 비교해 보면
거기서 거기인 듯
밀양 관아지
나랏일을 처리하던 관아가 있던 자리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광해군 때 새로 지었다.
이런 곳에 오면 그저 죄가 있건 없건 궁둥짝 내놓고 볼기를 치던 사령들이 생각난다
조선후기까지 우리나라에는 약 334개의 관아가 있었으니
조선팔도 360주 고을마다 거의 모든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보면 될듯하다.
죄가 있건 없건 두들겨 패면 누구나 자백하게 된다는 묻지 마 고신과 형벌
누구를 위한 관아일까 사극을 많이 봐서 그럴까 허구한 날 잡아다가 패던 것만 생각나니
밀양읍성 동문
새로 복원한 건물로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다.
밀양시를 한 바퀴 돌아가는 밀양대로 도로 따라 나오면 밀산교를 건너는데 그 당시 양반님네들이 허연 다리를 드러내고 밀양강을
건넜다고 생각이 들지 않아 밀양강을 우측에 두고 경부선 기찻길 옆길로 이용해 청도방향으로 진행한다.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부터는 교통량이 많아 청도땅 유천면에서부터는 청도천 자전거길로 진행해서
경남에서 드디어 경상북도로 들어와
우리나라 조선 8도 탄생 시기는 전라도가 가장 빠른데 고려 1,018년이니 현종 9년때 부터 천년의 세월을 이어왔고 ,
가장 늦은 곳은 함경도 1,509년 중종4년에 탄생했다고 한다.
경상도는고려 1,314년에 경주와 상주를 이어 보리문둥이의 천국이 된다.
다른 지역은 과거 보러 올라가는 길에 충청과 경기에 대해 몇 자 더 쓰도록 하고
저녁이 되고 청도천 건너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읍이 지척에 보이고
청도역 앞은 온통 추어탕 집만 즐비하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 격인 국밥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 많다
서울에는 설렁탕. 곤지암의 소머리 국밥, 병천 순대국밥, 공주 국밥, 전주 콩나물 국밥,
남원에는 추어탕, 광주 국밥, 나주 곰탕, 함안 국밥,
부산 돼지 국밥, 통영 굴국밥, 밀양 돼지국밥, 청도 추어탕, 창녕 수구레국밥.
현풍 할매 곰탕, 대구 국밥, 영천 소머리 국밥, 칠곡 순대국, 예천 순대국밥, 청도 추어탕, 원주 추어탕,
추어탕집이 수두룩하지만 초롱 초롱한 눈망울의 붕어와 수염 달고 나도 어른이라며 버티는 미꾸라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추어탕은 입에 대지 않으니...
그나저나 오늘은 어느 주막에 가서 밥을 먹을꼬..첫날이라 90km도 진행 못했는데
청도 읍성에는 애민 선정비와 영세 불망비들이 줄지어 서있다.
읍성의 정확한 연대는 알길 없고 고려 때 축조되어 조선 선조 때 지금의 규모로 만들어졌으나
임란 때 허물어져 다시 증축과 보수하여 왔고 고종 때 남문을 건립하며 4문을 갖추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시화와 도로 건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은 훼손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복원한 상태다
청도 읍성 안의 고마청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도주관
도주는 청도의 옛 이름으로 도주관은 조선시대 때 청도군의 객사를 쓰던 곳
오늘밤 저곳에서 유하면 좋겠으나 조금더 가면 주막이 있으니 오늘은 그곳에서 자기로 한다
서문루의 웅장한 모습
달밝은 추석 무렵 한양으로 과거 시험 치러 가는 길
예나 지금이나 살면서 수많은 시험을 치르는데
조선시대 때는 과거시험 은 하나이지만 지금은 대입시험부터 취업, 공무원시험, 진급시험, 각종 자격증 시험 그 종류도 천태만상이고 다양하다.
조선시대 때는 사대부 양반가들의 일생의 숙원인 과거시험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 때 수나라로부터 도입되어 조선말까지 약 900년이나 숱한 양반님네들의 영예를 위해 죽을때까지 괴롭혔으니 43만 자 되는 한자를 모두 외우고 사서삼경을 통달해야 했기에 먹고살기 바쁜 사람은 과거시험 보기 어려워 이러한 이유로
과거시험은 양반의 전유물이 되었다.
소과에만 합격해도 부역과 군역이 면제되었는데 아무리 양반가라 하더라도 3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대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니 3 부자가 함께 과거시험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은 3년에 1번 33명 합격시키는데 특별시험이 있다 보니 1년 3개월마다 1번은 과거를 볼 수 있었는데 난다 긴다 하는 사대부들이 모여들다 보니 경쟁률이 대단하다
조선 초기에는 10대 1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지만
중기에는 100대 1 부처님께 삼천일기도로는 부족하고 만일 정도는 기도해야 할 듯
정조 때는 110,000명이 응시했으니 3,333대 1 부처님께서도 야!~그건 힘들다며 돌아 앉으셨을 듯하다
등용문
중국의 황하(黃河) 강 상류에 용문이란 거친 폭포가 있는데 그곳 용문을 통과한 물고기를 등용문에 통과하였다고 한다
용문에서 유래된 등용문(登龍門)은 훗날 청나라 과거 시험을 볼 때 중국 각지에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한 사람은 2차 시험은
현재의 자금성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각지에서 1차 시험에 장원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중국 각 지역에서 장원한 사람들이
자금성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등용문에 올랐다고 한다.
시험보다 중국 각지에서 어떻게 자금성까지 3천리 이상 걸어갔는지 그게 더 신기할 정도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잠시 눈 감았다가 다시 일어선다.
청도와 대구를 이어주던 고갯길인 팔조령을 찾아가는 길에 청도 연지못에 도착
새벽이라 연지못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생각해 본다! 과거길은 지가 좋아서 간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었거나 모함을 받았거나 신분에 관계없이 떠나는 유배길은 또 어떨까?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로 유배를 간다면 모를까 멀고먼 곳으로 간다면 ...전국에서 유배지가 가장 많은 곳은 또 어디일까?
사형 다음으로 힘들었다는 조선 초기의 대명률에 따른 유배길은 나라가 좁아, 돌고 돌아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3 천리길
의금부에서 고신과 궁둥짝 얼얼하게 얻어맞고, 걷는데 이골이 나지 않은한 걸어야 했던 유배길
가장 많은 유배지로는 한양에서 멀고 섬이 많은 전라도나 여진족이 지척에 있는 함경도가 아닌 아름다운 산수를 간직한 경상도에
유배지역이 가장 많았으니 무려 71곳에 이른다.
유배를 향한 길은 하루 평균 80-90리 이상을 걸어서 가는데 30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던 과거길
난 죄가 없다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힘들게 걸었던 유배길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많은 이문을 남기겠지라며 떠났던 보부상들의 웃음소리길
그리고 부산에서 밀양 청도를 지난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 가던 길이다.
굽이 굽이 돌아가는 팔조령 옛길
영남대로중 문경새재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부산에서 양산-밀양 -청도땅을 지나면 만나는 곳이건만 예전에는 도둑이 출몰하던 산 고갯마루라 여러 사람 잡았을 듯하다
과거 보러 가는 길에 괴나리 봇짐 속에는 책과 문방사우, 갈아입을 옷 몇 벌 그리고 엽전 몇 잎... 그리고 쌀 한말을 짊어지고 갔다니
어찌해서 서울로 올라간다고 해도 이 길을 다시 내려와야 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하고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간다지만 왕복 2 천리길 결코 쉬운 걸음은 아니다.
떨어지면 3년뒤 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유자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부처를 생각하면 안 되었지만 아이고 부처님 소리가 절로 나올 과거길
부산에서 250리 지점인(100km) 지점 팔조령
팔조령을 넘어가면 곧바로 대구에 도착할 것 같지만 가창땅도 꽤 길다,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의 지석묘군
대구시내로 흐르는 신천 유역에 많이 있던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들은 거의 없어지고
상류인 이곳에 8기가 존재한다.
돌의 규모로 보아 꽤나 계급이 높았던 족장 급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내갈길 간다.
대구시내로 흐르며 동-서를 양분하는 신천 강가에 자리 잡은 그늘바위
그리고 그늘바위 뒤로는 용두산성이 이어지는데 대구를 지키는 관문 같은곳이다
마실 주막이 있으나 식전 댓바람부터 막걸리 한잔 하기는 그렇고
조선 전기에는 거의 없던 주막이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널리 보급되면서 조선 후기까지 전국에 약 12만 개의 주막이 난립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시골 구석까지 자리잡은 편의점 보다 더 많은 숫자다.
조선 전기에 10대 1의 과거길로 떠난 사람들은 이불과 가마솥까지 짊어지고 갔다고 하니
대단한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대봉동 대구천 옆에 자리 잡은 건들바위
지금은 도시 개발로 아스팔트 아래로 사라진 대구천은 보이지 않고
200년 전만 하더라도 건들바위 앞으로 많은 물이 흘렀는데 과거에는 대구의 중심하천이었다.
앞산에서 흘러온 대구천은 대구 도심 반월당을 거처 달성토성 앞으로 흘러 신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건들바위 모습
제가 살고 있는 인근의 대구 향교
조선 태조 7년에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지방교육의 기관으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가운데 명륜당과 동제와 서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말에서 7세기경에 지구에는 인류의 미래를 인도할 거대한 문명이 태동한다
철학 100문장의 노자의 도덕경에서 시작
동양에는 공자의 유교
인도에는 석가의 불교
그리스에는 소크라테스의 그리스 사상
중동에는 예수의 유대교가 깨어난다
이 모든 걸 다 믿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소원 빨리 들어주는 신이 최고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며
다른 지역의 많은 향교에 보이던 학자수 나무인 커다란 은행나무나 향나무는 보이지 않고 소나무 한그루가 달랑 서 있다
향교에서 나와 반월당으로 가기전에 집에 가서 커다란 등짐을 짊어지고 나온다
예전에 반월성이 있던곳인 발월당에는 아무것도 없고 약전골목으로 들어가
영남대로
부산에서 최단거리이며 그 중심에 문경새재가 버티고 있다.
크고 작은 재는 모두33개 정도이며 경상도에 15개의 재를 넘어야 충청도 땅이다.
그리고 양반님네들이 지게 작대기 보다 더 가느다란 다리를 드러내고 물길을 건너야 할 곳은 부산의 양산천, 밀양강
청도천, 대구의 신천, 금호강, 구미의 한천, 의성 낙동강, 상주 병성천과 북천, 이안천
문경 영강과 조령천을 건너야 새재에 다 다른다.
그 외 자잘한 도랑들이 양반님네들을 기다리는데 징검다리라도 있으면 좋고
지체 높은 양반님네 아리따운 따님을 업고 도랑을 건너가는 머슴들은 더 좋고
약령문
읽어 보시죠
경상 감영의 선화당
경상감영의 정청(政廳)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 34년에 이곳에 세운 건물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큰 화재로 불탔으나 순조 때 들어와 새로지 었고 70년대에 중수하였다
경상삼영 조선 초기에는 경상부윤이 경상도 관찰사 를 겸했는데 그 감영은 경주에 있었고
3대 임금이시던 태종때 경상도가 다른 8도에 비해서 커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측인 경주에 좌윤
우측인 상주에 목사를 두어 각각 관찰사를 맡도록했다.
이후에 조세체계에 따른 문제점과 부작용이 있어 감영을 경주에서 상주로 옮기고 상주목사가 관찰사를 겸했다
그뒤 11대 임금이던 중종때 다시 경주와 상주로 각각 감영을 두었다가 같은해 다시 원상태로 옮겼다가
성주에 감영을 두었고 그뒤 달성(대구 달성공원)에 두었다가 정류재란때 안동에 두었다가 다시 지금의 대구로 옮겼는데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했던 감영이다.
경상감영 모습
서문 옆 달성토성이 자리하는 예전 정유재란 이전에 경상 감영이 있었던 달성공원
동물들이 있어 냄새가 심하게 나고 갈길이 멀어...
앞의 말을 타고 한양으로 가야 하는데 주인장께서 빌려주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말은 한양으로 가자는 눈치다.
말을 보니 조선시대때 힘좋은 노비 3명과 말 한마리 가격이 같았고
임진왜란때는 조총 한자루와 노비 40명
예쁜 여자 노비 한명과 남자 노비 다섯명과 소1마리를 더 주고 바꿨다니 이쁘고 볼일이다.
저놈도 예전에 태어났으면 ...
북비산 4거리 인근의 영남로 대구 옛길 읽어 보시죠
역과 주막촌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있는데...
참고로 조선시대 주막과 역
역이나 원은 조선 초기에는 관리들만 이용 가능했으나 후기로 들어서면서 선비나 장사꾼들 모두 묵을수 있었고
주막은 조선 중기까지 주막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나 이후 조선말까지 전국에 주막이 12만 개 정도 있었고
그 이전에는 주막과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17세기까지 술은 팔아도 밥은 팔지 않아서 짐을 싸서 다녀야만 했는데
관리들이 이용하는 역은 시대에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30리마다 하나씩 전국에 507개에서 537개 정도였다고 한다
경상좌 즉 이길은 대략 70개정도
말 타고 다닐 팔자가 아니라면 걸어 다닐 팔자이니 주막만 많으면 있으면 장땡 아닌가
원대 5 거리를 지나 팔달시장으로 가서 만평로터리를 지나고 팔달교로 이동
금호강을 건너는 팔달교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 가사봉에서 발원하는 금호강은 영천과 경산을 지나 대구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지척에 금호강과 와룡산이 보이고
대구에 사는 용은 남쪽에 청룡과 서쪽으로 와룡이 있는데 두 마리다 맥아리가 없어 그런지 대구 사람사는 경기는 별로이나
비를 부르는 용이다 보니 대구에 많은 비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덥기는 디지게 덥다.
칠곡 향교
칠곡군 동명을 지나는 길에
예전 5번 국도
길가의 은행나무가 지난해보다 영 힘이 없어 보이는데
왕복 2차선 길가의 길이는 짧아도 늦가을이면 제법 운치가 있어 찾는이도 있다
멀리 가산 줄기에서 이어지는곳에 소야고개가 있고 그곳을 넘으면 다부원과 천평이란 동네가 나온다
소야고개에 편의점을 하시는 사장님이 이 길을 지날 때 김밥이며 음료수를 챙겨 주신다고 했는데
추석 연휴라 어딜 간 건지 문은 굳게 닫혀있다.
다부원을 지나며 본 유학산
학이 노닐었다는 삼학(유학.황학.소학산)을 지척에 두고 학처럼 고귀한 곳이라기보다 처참한 역사의 땅이며
낙동강 전투 최대 격전지여서 피아간에 3만 명이라는 목숨을 땅에 묻은 곳이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
낙동강 전투 6.25 전쟁 한 달여 만에 국군은 이곳 다부원까지 밀려 배수의 진을 친다
유학산은 지키기 위한 사람과 빼앗어야 하는 사람과의 치열한 전투는 유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5km 지
점 사진으로 보이는 끝 837고지에서 더욱 치열했다고 하며 지키이 위한 곳은 경사가 급하고, 빼앗기 위한 곳은 경사가 완만 한 곳
그 가운데 이름 없는 학도병들의 고귀한 목숨
급경사면을 무거운 무기와 전투 중에 군인들에게 주먹밥을 날아야 했던 이름 없는 노무자들
또 하나 다부동은 왕건과 견원의 싸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6,25 전쟁을 격은 역사의 땅이기도 하다
천평땅에 들어가니 마침 문을 연 주막이 있어 들어가 한상 거하게 들고 밥을 먹으며 인근에 잠잘 곳이 없냐!고 여 주인장께
여쭈어 보니 여관이나 모텔은 모두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지 오래고 모텔에 가려면 다부동으로 다시 걸어서 올라가라고 하신다.
그곳까지 다시 올라가는 건 너무 멀고 식당에 빈방이 있으면 하루 유하고 가면 안 되냐 하니
방에 이불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으면 그렇게 하라며 하신다.
밥값과 방값이라며 조금 더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새벽 일찍 가야 해서 배낭에 넣어둔 침낭을 꺼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새벽 01시에 일어나 짐 싸서 넣고 잠잔 곳 흔적은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은 맑고 별이 참 많다.
대구에서 상주로 이어지던 25번 국도와 예전 왕복 2차 국도를 번갈아 오고가며 지나는 구 도로길
해평이나 산동 방면
장천면에서 한천을 건너 927번 강동로길을 따라간다
시골길이라 야간에는 차량이 이동의 거의 없어 조용하기만 한데 어째 좀 쌀쌀하다
산동면을 지나고
해평면 문량리 마을을 지나며
이른 아침인데 아주머니 두 분이 마을길을 쓸고 계시는데 성격들이 모두 밝아 잠시 이야기 나눈다.
커다란 지렁이가 도로가에 꽤 많아
아하!~ 지렁이 잡아다가 푹 끓여 신랑분들 드리면 정력에 아주 좋을 텐데... 라며 한마디 하니
안 그래도 힘이 넘쳐 백 여자 간수하고도 모자랄 판이라며 절대 안 먹인다고...
잠시 웃고 갑니다.
멀리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가 있는 냉산이 지척이고
군위 의성 비행장 소음 문제로 결사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남의 일이 아닌 듯 팽팽하게 달려있다.
이른 아침이라 어느 주막에 문을 열었을까 찾아보다 보니 어느덧 끝머리에 서있다.
주막이라면 국밥 정도는 먹어줘야 하는데
조선시대 때도 국밥만 팔았는데 한국 사람들의 성격상 빨리 먹고 가야 해서 국에 발을 말아 후루룩 먹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까지 전국에 12만 개의 주막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철도와 교통이 발전하면서 주막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해평면 금호리 마을 앞의 연지
역사가 아주 오래된 연못인데 신라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이 연못에 연꽃이 길이 피거든 나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알아 달라고 했다고 전한다
당대부터 조선말 철도나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을 연지를 지나며
들판으로 곡식을 누렇게 익어가고
도리사 일주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로서 신라 최초의 사찰
아도화상이 겨울인데도 복숭아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걸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칭했다고 한다.
예전 25번 국도인 곳에서 본 구미보와 왕복 4차선의 25번 신국도가 보이고 가끔 시원스레 지나가는 자전거들도 보인다.
낙산리를 지나며
구미시 낙산리 고갯길에 만나는 고분군
낙동강 동쪽 언덕에 250기 정도의 옛 무덤군이 조성되어 있다.
의구총(義狗塚)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 무덤
선산해평 산양에 사는 김성원 혹은 노성원으로 전하는 이의 집에 황구를 한 마리 길렀는데 하루는 주인인 이웃 마을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월파정 북쪽 길가에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불이 나서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가 낙동강에 뛰어가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구하고, 죽고 말았는데 개 때문에 살아난
주인이 감동하여 관을 갖추고 매장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전라도 임실의 오수의 개(고려시대 때 김개인) 이야기와 너무나 닮아있다.
이러한 개들이 있는 걸 볼 때 개 같은 욕은 안 하는 게 좋을 듯 하니 우리 모두 개로 시작된 쌍욕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개보다 못한 인간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 황구 무덤에 절이라도 하고 싶어 진다.
일선리 문화마을
안동시 임하면 임하댐 수몰로 인해 집단 이주해서 사는 분들의 마을이다.
돌고개
해평면 문화마을을 지나면 돌고개를 지나는데 이곳부터 행정 구역은 구미시 도개면으로 들어와 주막은 있지만 장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도개면에 들어와 그늘 없는 길을 걷다 보니 마을 주민께서 시원한 생수 두병을 건네주시며 어디까지 걸어가느냐? 물으신다.
부산에서 서울 경복궁에 과거도 볼 겸 주상전하 뵈러 간다고 말씀드린다
도개면에 들어와 오래전에 한번 찾았던 국밥집에 들러 국밥 시키니 추석 연휴라며 제사 때 쓰고 난 음식 몇 가지 맛보라며 식탁 위에 올려 주신다
아침 겸 점심 맛나게 먹고
임호마을을 지나
아무도 찍어 줄사람 없으니 내 사진은 내가 찍고
드디어 고향 의성땅에 도착
부처고개를 지나면 이제 낙동강을 건너 가면 과거에는 대도시였던 상주땅이다
낙동강 건너는 벽화
낙동강 강가 절벽에 자리 잡은 관수루
사대강의 흔적인 낙단보
이곳까지 500리 (200km) 진행
예전에 4대 강 사업하기 전에는 걸어서 낙동강을 건너거나 나룻배가 있어 건넜는데
낙동강 건너 옛 25번 지방도로 따라 부치랭이 고개로 향한다.
부치랭이(불망비) 고개의 선정비
목사나 군수로 지내다가 소임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지역에서 유지들이 세원 준 선정비, 불망비
맨 앞에 사각의 고종 때 상주목사를 지냈던 목사 조영화 선정 송덕비이며 이후에 경상도 동학교도들을 취조한 사례가 조선왕조 실록에 있다.
가운데 돌거북 비석은 유언헌 영세 불망비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록의 거두 유척기의 아들로 노론이면서도 유연한 정치를 한인물이다.
그다음 군수 이관하 불망비 영조 때 정 3품인 경상좌수사를 지낸 적이 있는 인물이고
이곳의 불망비는 부치랭이 고개 정상 오른쪽 숲 속에 있어 찾기가 힘들지만 눈 여겨본다면 찾을 수도 있다.
첫댓글 한양에 오셨으면 미리통보라도 해주시지 플래카드라도 걸어놓구 환영이라도 해주었건디 아쉽습니다 긴걸음 수고하셨습니다
연락을 드릴려다가 집에 급히 올 일이있어
경복궁에서 주상 전하만 뵙고 곧바로 내려왔습니다.
훗날 다시가게 되면 곡 연락 드리겠습니다.
방장님~ 긴 걸음만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미난 이야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먼길 걷고 피곤하실텐데..
크게 쉬시지도 못하시고..ㅜ
고생많으셨고.. 감사합니다!!
대간길 200km축하드리구요
대간길 무사한 걸음 기원드리겠습니다.
아니 지경고개에서 양산시청으로 갔으면
분명 우리집 대문 앞으로 지나갔을텐데
연락도 없다니 미워요
집앞이 과거길이였음
그나마 인연이 있는지
고향땅에서 만나 반가웠습니다
새벽 4시무렵이라 연락 드리면 주무실것 같았습니다.
다방리가 집인가 봅니다.
그리고 얼굴봐서 무지 좋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잠시 뵌 걸로 만족합니다.
건강 하십시요
@배병만 사송신도시 동면 사무소 앞 입니다
담 주변 지날땐 꼭 연락
주세요
예나 지금이나 공부 쉽지않네요 과거 보러가는 양반이야 그렇타 처도 솥이며 이불까지 지고가는 하인은 먼죄고.....
하인들 데리고 가다가 돈 없으면 그냥 팔았답니다.
그 당시에 안 태어난게 천만 다행이죠
밀양 차타고나 지나며 한번씩 보던 영남루 ㅋㅋ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가끔 산책가는 관수루도 너무 반갑구요.
이번에는 연락 한번 안주시고 생~~ 지나가셨네요.
도개 유명한 오복맛집에서 따끈한 짬뽕이라도
한 그릇하고 가시지 ㅎㅎ
먼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락 드리려다가 길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늘 감사하고 고마운 분입니다.
감사해요
예전에는 무조건 걸어다녔으니
다리 아픈것보다는 한양가서
과거시험 치르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을것 같습니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 같구요.
옜 정취를 물씬 풍기는 글 즐감하였습니다.
과거 시험 보다가 집안의 전재산 날린 선비들 한,둘이 아니겠죠
그래도 개인의 명예와 가문을 위해서 공부 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글 감사합니다.
시대가 흘러 지난날의
이동수단이 오로지 걷고또걷고
먼길을 나서는데는 위험과
두려움이 있었을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양천리 과거길 주변을 걸으면서 무슨생각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많은 학식과 정보도 공부를 많이
해야되겠네요
여러가지 새롭게 접해봅니다
먼길 수고하셨습니다
주간에는 눈으로 보고 야간에는 생각으로 보고
그 생각을 다시 글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눈보다 더 신났던 생각이란걸로...
대장님 글 감사합니다.
발끝에서 손끝으로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후기글
사진을 타고 전해져 오는 글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생각지도 못한 글들이 담겨 있어서
놀라울 따름입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거의 한 줄로 이어지는 과거길 여정
봇짐 대신 커다란 배낭 짊어지고 걸었을 고된 길
고생 많으셨구요.
덕분에 이것저것 찾아볼게 많아졌습니다.
^^ 역시 방장님 글.
내가 과거보러 가는 선비라면 어땟을까
그런 마음으로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의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글 고마운분 산 공부 대한민국 공부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저런
모든것들을 생각하고
천리길 한발한발 장원급제
~~~~~~~
응원합니다
1990년 초 1년간 재수를 한 후 약해진 체력에도 부산~임진각까지 보름간 걸어보겠다고 나섰다 이틀만에 청도까지 갔다 넉아웃 되어 기차 타고 귀가했더니 딱 1시간 걸리데요. 좌절감 많이 느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