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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왕릉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권정희
아들이 임금이 되어 돌아왔다!
15년간의 고통스런 세월의 끝
혜경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자결을 하려 했다"
한 많은 인생 80년, 그 끝은 어디일까...
1. 피눈물의 기록, <읍혈록>
<읍혈록(泣血錄)>, '피눈물을 흘리며 써내려간 기록'
<한중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인의 눈물은 인생 말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1800년 11월 순조 즉위년.
예순 여섯의 혜경궁은 몇일째 아들 정조의 처소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설움'
극도의 절망에 몸부림치는 여인.
혜경궁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그러나 삶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중만록> <한중록> <읍혈록>.
확연히 다른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름들은
그대로 혜경궁의 극적인 삶을 반영한다.
남편을 잃고 아들이 왕이 되길 바랐던 혜경궁.
과연 아들이 왕이 된 후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까?
서울 마포구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그녀가 직접 쓴 시 두 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희수(喜壽)'라는 두인(頭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혜경궁(惠慶宮)'의 궁호(宮號) 낙관(落款)입니다.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이런 식으로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77세, 희수에 쓰신 시입니다."
- 홍기원(77세, 풍산 홍씨 모당공파 14세손)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 통 술을 마시는가.
지난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의 꿈이 되었네'
시에 나타난 혜경궁의 마음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 남은 이의 허망함이었다.
28세에 청상이 되어
50년을 구중궁궐에 혼자 살아온 여인.
그 처절한 삶을 견디게 한 것은 오직 하나, 아들이었다.
"임금의 몸으로 어미 봉양을 극진히 하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2. 아들 정조의 즉위
- "어미의 마음으로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
1776년 3월 10일.
22대 정조 즉위.
사도세자가 죽은 지 14년만에 조선에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아들,
온갖 시련을 견디며 이날을 기다려 왔다.
"주상을 간신히 길러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는 모습을 보니
어미의 마음으로 어찌 귀하고 기쁘지 않으리오"
정조는 즉위 직후,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의 명예 회복에 나선다.
"이것은 사도세자의 비이고, 정조의 어머니이신
혜경궁의 호를 좀더 가상해서 '효강혜빈(孝康惠嬪)'이라 한,
'효강혜빈지옥인(孝康惠嬪之玉印)'이라고 새긴 옥보입니다."
- 서준 큐레이터(국립고궁박물관)
'혜빈(惠嬪)'.
그것은 그녀의 공식적인 호칭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쫓겨났던 그녀가
다시 입궐하면서 받은 이름이다.
시아버지 영조는
남편이 없는 혜경궁에게
'혜빈'이라는 공식 호칭을 내려
세자빈의 지위를 보장했다.
그러나 세자 없는 세자빈에겐 아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통속에 아들을 영조에게 보내야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한다.
이것은 혜경궁에게 법적인 부모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혜경궁에게 남편의 죽음 못지 않은 고통이었다.
"크나큰 죄요 한이니 즉시 죽고자 하였지만,
내 목숨을 뜻대로 하지 못하고 굳이 참았다."
"자신의 친아들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이제는 생모로서의 역할만 존재하고
공식적인 모자관계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 김문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
'사도장헌세자지옥인(思悼莊獻世子之玉印)'
그의 부인 혜경궁은 영원히 세자빈이었다.
아들이 왕이 되어도,
홍씨는 대왕대비가 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처지를 가슴 아파한 정조는
어머니께 또 다른 존칭을 부여했다.
'혜경궁'
비공식적으로나마 세자빈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혜빈을 혜경궁으로 삼다." - <정조실록>
1778년 4월 26일(정조 2년)
그러나 혜경궁의 법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혜경궁마마의 복색을 정해야 하는데 근거가 없습니다."
'別無可據' (별무가거 -별로 의거할 만한 것이 없다) - <정조실록>
혜경궁의 지위는 유례가 없는 특수한 것이어서
근거로 삼을 만한 기준이 없었다.
왕실의 의상은
신분과 용도에 따라
쓸 수 있는 색깔과 장식이 달랐다.
궁중 여인들에게 복색은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치마의 금박도 두 줄, 한 줄, 금박 한 줄도 못 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식구로는 노리개나 첩지가 있는데,
머리에 장식하는 첩지도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위계가 초창기부터 갖춰져 있습니다."
- 이영희(전통 복식연구가)
조선의 예법서인 <국조오례의보(國朝五禮儀補)>.
궁궐의 복식에 대한 규정이 있다.
왕세자빈의 예복은 검은 비단으로 입혔다.
반면 왕비의 예복은 붉은색이다.
"왕세자빈 예복은 검은 비단으로 한다."
"왕비 예복은 붉은 비단으로 한다."
또한 왕실의 공식 예복인 적의(翟衣)는
왕비와 왕세자빈 등 적통 서열의 여인들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정조는 어머니를 배려해 특별히 이 적의를 입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적용할 색깔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혜경궁의 복색을 천청색으로 정하라."
천청색은 당시 조선 궁궐에선 흔치 않은 색이었다.
"천청색은..
청색에 검정색을 덮어서.. 색깔이 은은하게 새어나오게 한 것입니다.
중국의 황태후의 복색인데, 정조가 어머니께 입히게 됩니다.
천청색은 '밤하늘의 색'이라고 합니다."
- 이영희, 전통 복식연구가
정조는 어머니께
황태후와 같은 색깔을 지정하여
궁궐 최고의 어른으로 대우한 것이다.
"선왕(정조)은 지극히 효에 힘쓰시는 성품이었다.
근년에는 효도가 더욱 지극하여 날로 못 미칠듯이 나를 섬겼다."
아들의 효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주로 왕실 여성들의 거처였던 창경궁(昌慶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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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이곳 한 켠에 새로이 건물을 지었다.
자경전(慈慶殿).
혜경궁을 위한 거처였다.
정조가 혜경궁을 위해 지은 <자경전>
"이곳은 아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위해 지어드렸던 자경전터입니다.
정조는 즉위한 이듬해인 1777년 8월에 자경전을 지은 후 어머니를 모시게 됩니다."
- 박경혜(창경궁 관리사무소)
정조는 어머니의 새 거처에 '경사스런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자경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침, 저녁으로 혜경궁을 모셨다.
혜경궁에게 아들은 삶의 전부였다.
"선왕(정조)이 아니면 내게 어찌 오늘날이 있으며
내가 없었다면 선왕이 어찌 목숨을 보존하셨겠는가.
우리 모자 두 사람이 근신하여 서로 의지하였다." ('상의' - 相依)
모자는 세상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혜경궁이 아프기라도 하면 아들 정조는 더 극진했다.
어머니의 고통은 곧 아들에게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초조하고 절박한 일이었다.
직접 의서를 집필할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
그는 어머니를 직접 치료했다.
" '초조하고 절박했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焦迫言)" - <정조실록>
"선왕은 침수를 폐한 채 의대도 끄르지 않고
손수 탕약을 올리고 고약을 붙였다.
옆사람에게조차 이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비록 모자사이였지만 내 감격한 마음을 어찌 다 측량하겠는가"
남편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다.
이 시절 혜경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머니였다.
"임금의 몸으로 살아 있는 어미 봉양을 극진히 하니
내 또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정조의 즉위와 함께 혜경궁의 인생에도 봄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즈음 정국은 폭풍전야였다.
비극은 이곳 안국동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安國洞)
"당시 이곳은 북촌이라 해서 노론계 정치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곳입니다.
혜경궁의 친정 집안 풍산 홍씨 외척세력하고,
영조의 두 번째 부인이자 혜경궁의 시어머니셨던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 김씨 외척세력들이,
서로 시대 상황을 이끌어 가기 위해(권력을 잡기 위해)
갈등 관계를 일으킨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각순 박사(서울시사편찬위원회)
혜경궁은 임금의 어머니이자 한 가문의 딸이었다.
그 어느 하나도 부정할 수 없는 이중의 정체성은
평생 그녀에게 눈물이 되었다.
3. "조금도 내 집이 다시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
1776년 3월 27일. 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하고 17일후 한 통의 상소가 올라왔다.
한 원로대신의 탄핵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그 원로대신은 바로 홍봉한(1713~1778)이었다.
그는 혜경궁의 친정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였다.
임오화변 당시 영조에게 뒤주를 제공해
사도세자를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홍봉한은 곧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의 역적입니다." -<정조실록>
"뒤주를 갖다줬느냐,
이것은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홍봉한이 당시 '영의정'이란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과 국정에 가장 중요한 정보와 말할 권한이 있는 위치였는데,
그 당시 그는 영조에게 자기 사위인 '사도세자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목숨을 건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홍봉한에게 사도세자 죽음에 역적이라는 비난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 박현모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학예연구원)
아들이 왕이 되자 아버지가 역적이 된 상황.
혜경궁에게 아버지는 각별한 존재였다.
"나는 일찍 부모 슬하를 떠나 있다가 중도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정을 겸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내 운명과 재수가 서러워 아픈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일은 내 뜻을 받들어 힘쓰셨다."
혜경궁은 분하고 억울하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몬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았다.
'무함'
"내가 생각하니 죄인의 자식이 예사롭게 행동하는 것이 염치와 인사가 다 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게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생사화복을 같이 하려고 지게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정조는 고민에 빠졌다.
세손시절, 집권 노론은 집요하게 그를 공격했고,
그 중심에 외가가 있었다.
1775년 11얼 20일(영조51년).
"동궁께서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조판서니 병조판서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대해 또한 알 필요가 없습니다.
(東宮不必知老論小論 不必知吏判兵判 尤不必知朝事矣)"
'삼불필지(三不必知)' - "세 가지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 -<영조실록>
세손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대담한 말을 한 이는 홍인한(洪麟漢).
정조의 작은 외조부였다.
왕이 된 정조에게 외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들과 친정 사이에서 혜경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슴앓이를 하며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
"대전이 오셨을 때에는 머리를 들었는데
주상이 어찌 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였겠는가.
주상이 매번 나를 대하시면 불안하고 몹시 근심해하시기에
내가 주상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얼굴빛을 좋게 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정조는 심장과 간이 타는 듯 했다.
"심장과 간이 타는 듯하다(心肝如焚)" - <정조실록>
"(풍산 홍씨 집안은)
현실적으로 사도세자나 정조에게 위해(危害)를 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정치 보복 같은) 피해를 최소한의 선에서 끝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문식 교수
정조는 결단을 내렸다.
홍인한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사면을 했다.
왕권을 세우되 어머니를 배려한 처사였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즉위 다음해 1778년 7월 28일.
정조가 머물던 경희궁(慶熙宮)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목표는 임금 정조였다.
'자객(刺客)'
자객들은 암살 시도에 실패하자
1777년 8월 9일.
열흘만에 다시 2차 공격을 단행한다.
'반정(反正)'
이들은 정조의 배다른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역모의 배후를 추긍하던 중 놀라운 이름이 나타났다.
홍낙임(洪樂任)
혜경궁의 친동생이었다.
역적들은 홍낙임이 임금의 친척이니 권세를 얻어
나중에 병권을 잡으면 같이 반정을 일으키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홍 아무개는 임금의 외척이니 지금은 쓰이지 못할 것이나
장래에는 스스로 병권을 잡을 것이니
만일 그러하거든 진법을 연습하여 거사를 할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또 다시 상소가 빗발쳤다.
홍낙임은 물론 아버지 홍봉한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이 이리 되었다.
생각할수록 내 몸이 없어져 불효를 사죄하고자 하나,
하늘을 우러러 처분을 기다렸는데.."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들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조선의 여성들,
특히 대궐 상황에서는,
어떤 공식적인 권한도 주지 않지만,
사실 이 여성들은 물밑에서는 엄청난 정치적 책무를
감당했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식적인 상황에 맞딱들였을 때는
이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혜경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조혜란 교수(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어머니와 정치 사이에서 정조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1778년 2월 21일. 정조 2년.
정조는 외삼촌을 직접 심문하기로 했다.
이 역모사건의 자초지정을 기록한 <속명의록(續明義錄)>
여기에 정조의 처분이 담겨져 있다.
정조는 홍낙임의 결백을 공표했다.
"공술한 말이 마디마디 조리가 있다.
(홍낙임은) 단정코 딴 뜻이 없다.."
왕의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
"정조로서는 혜경궁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친정,
외가집 식구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백한 중거가 있다면,
사도세자나 자기(정조)를 죽이려고 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달리 처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홍낙임의 경우에는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정조가 친국을 통해
(외삼촌 홍낙임을) 살리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라 봅니다."
- 김문식 교수
동생은 석방됐고
죄를 청하던 아버지도 목숨을 이을 수 있었다.
"동생에 대한 성은이 천지화해와 같아 만고에 드물었다.
주상께서 내 동기를 살려내니 그 감격을 어찌 형용하겠는가."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린 후 처음으로
혜경궁은 친정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3년만이었다.
"3년간 망극한 변고와 숱한 일들을 겪은 까닭에 노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손잡고 만수무강 하실 것과,
우리 집안이 나아져 다시뵙기를 마음으로 빌며 눈물로 헤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1778년 12얼 4일 정조 2년.
열 달뒤 홍봉한이 죽었다.
정 9품 말단 관리에서 영의정까지
수직 상승하며 최고의 권세를 누렸지만
그 끝은 허망했다.
급전직하하는 외척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은 혜경궁은
그녀의 집안 식구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남긴다.
"조금도 내 집이 다시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4. "임금인 아드님을 둔 보람이 있나 봅니다 !~"
아들의 치세는 안정 되어갔다.
친정 식구들의 목숨도 위태롭지 않았다.
재위 18년.
정조는 다른 방법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그리고 임금 자신의 명예회복을 준비했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華城).
조선의 첨단 기술이 총동원된 이 신도시는 정조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바로 이곳은 조선 제22대 계몽군주 정조가 건설한 도시입니다.
자기 아버지 묘소를 이 고장으로 옮기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한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를 신원시키기 위해서,
한마디로 효심의 발로에서 이 도시를 세웠습니다."
- 최홍규 박사(수원학연구소)
1793년 정조 17년.
정조는 기득권 세력의 근거인 한양을 떠나
통치의 중심을 수원으로 옮기려 했다.
그는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짓고
강력한 군대와 친위세력을 양성하면서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이제 그 힘을 어머니를 위해 쓰고자 했다.
"어마마마, 원행(園行)을 같이 가시지요."
원행(園行).
그것은 남편 사도세자와의 만남을 의미했다.
"오늘날에야 임금인 아드님을 둔 보람이 있나 봅니다."
원(園)이란 '세자의 무덤'을,
행(行)은 '임금의 행차'를 말한다.
'능행도'엔 당시 혜경궁과 정조의 행차가 자세히 담겨져 있다.
1795년 2월. 수원 화성이 완성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을 맞아 화성 행차에 나선다.
무려 6천명이 동원된 대규모 퍼레이드였다.
행렬의 중심엔 정가교(正駕轎), 아들 정조가 있었다.
그는 가마를 타지 않고 말위에 올라 직접 행렬을 지휘했다.
어머니 혜경궁의 가마도 보인다.
'자궁가교(慈宮駕轎)'
겹겹히 에워싼 군사들과 푸른 장막에 가려져 철통같은 호위를 받고 있다.
그녀는 사실상 이 행차에 주인공이었다.
'군자가교(君子駕轎)'
혜경궁의 두 딸도 함께 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수원 남쪽 화산에 위치한 현륭원(顯隆園)
나중에 융릉(隆陵)으로 추숭된다.
사도세자의 무덤이었다.
아들 정조는 화성 건설을 하기 5년전,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란 호를 올렸다.
1795년 윤 2월 12일 (정조 19년)
아들에 손에 이끌려 이장한 남편의 묘를 처음으로 찾은 혜경궁.
모자의 한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우리 모자가 손을 잡고 분상(봉분)을 두드리며
억만 가지 아픔을 울음으로 고하였다.
하늘과 땅이 망망하고 저승과 이승이 막막하여
새로이 망극함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10살이었던 정조.
무수한 고비를 넘기고 왕위에 오른 아들과 서자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가 밀려왔다.
"당신의 골육을 간신히 보전하여 거느리고 와서
내가 당신 자녀의 성취함을 마음속으로 알렸다.
이 한 부분은 내가 살아 있음이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정조대왕능행도병풍> 中 혜경궁의 가마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현 융릉)
남편을 만난 혜경궁은
화성에 정조가 마련한 임시궁궐 행궁(行宮, 수원 팔달구)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그녀를 위한 특별한 행사가 준비중이었다.
"봉수당(奉壽堂). 이곳은 화성 행궁의 중심 자리입니다.
원래 이름은 '장낙원'이었는데,
1795년 윤 2월 정조대왕께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진찬연'을 위해서
봉수당이란 이름으로 새로 세운 편액입니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받들어 빈다'는 뜻입니다.
정조대왕은 이 봉수당 앞에서,
이 넓은 마당에서 어머니 회갑 잔치를 위해 특별무대를 만들고
의빈(儀賓)과 척신 모두를 모아 이곳에서 회갑잔치를 베풉니다."
- 김준혁 학예사(수원화성사업소)
봉수당에서 이뤄진 회갑연은 국가적 이벤트였다.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한양에서 따라온 궁궐무용수들은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춤을 추었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휘장을 두른 좌석에 앉아서 연회를 즐겼다.
잔치에는 백여 명의 내외빈이 참석해 혜경궁의 환갑을 축하했다.
역적으로 몰린 후 뿔뿔히 흩어졌던 일가친척들도 모였다.
그녀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미망인으로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상의 변천을 무수히 겪으면서
온갖 슬픔과 기쁨을 맛본 내 신세가 이상하였다.
자고로 옛날 역사책에 나온 태후와 왕비 중에
나와 견줄 이도 없을 것이다."
원행 이후 정조는
당시 7살이던 원자(순조, 純祖)를 앞에 두고
혜경궁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한다.
"갑자년(1804년)이면 원자의 나이 15세입니다.
족히 왕위를 전할 것입니다.
저 아이 때에는 외조부의 누명이 풀리고
마마께서는 저 아이의 효양을
제가 한 것보다 더 낫게 받으실 것입니다."
손자가 왕위를 물러받으면
역적이 된 친정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다 같이 잘 사는, 화합하는 사회,
정조는 실제로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거론합니다.
정조는 노론이나 소론이나 많이 복권을 시킵니다.
'대동사회'를 위해,
어머니 혜경궁의 친정 홍씨 집안도 복권하고,
십 년쯤 후면 서로 죽이고 싸우지 않는 그런 세상 만들 수 있다고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 갑자년을 약속합니다."
- 박현모 박사
"그때에 내 나이 칠십입니다.
혹 오늘의 약속을 어기면 어쩌시겠습니까?"
"설마 칠십 노친을 속이겠습니까?"
친정은 혜경궁의 큰 아픔이었다.
젊어서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늙어서는 아들과의 사이에서,
친정때문에 늘 가슴을 조려야 했다.
아들의 약속은 평생 쌓인 한의 타래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에야 임금인 아드님을 둔 보람이 있나 봅니다.
내가 구차하게 산 낯이 있습니다."
5. "자결을 하려고 하였다!"
오랜 고통끝에 혜경궁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창경궁 영춘헌(迎春軒).
아들 정조가 머물던 곳.
그녀는 다시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빌 뿐이다."
서기 1800년 6월 28일.
정조 24년.
영춘헌 지붕위에 임금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정조가 죽은 것이다.
어머니의 모든 한을 풀어주겠다던 갑자년을 4년 앞둔 때였다.
자식을 앞세운 고통으로 혜경궁은 몸부림쳤다.
"거의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수라를 들지 못하였다." - <정조실록>
1800년 7월 4일. 순조가 등극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손자 당시 11살, 조선 23대왕이었다.
아직 정사를 맡을 수 없었다.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예순 여섯에 새로 맞은 부인이었다.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그녀 가문 경주 김씨는 당대의 명문으로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씨와는 정치적 맞수였다.
혼례를 올릴 때 나이가 열 다섯.
며느리 혜경궁보다 열 살이 어렸다.
"대전 문안의 순서는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혜경궁, 가순궁 순으로 하라."
(問安之次 大王大妃殿 王大妃殿 惠慶宮 嘉順宮)
권력을 잡자 궁궐내 서열을 정한 정순왕후.
혜경궁을 며느리보다도 낮은 자리에 위치시켰다.
친손자인 순조의 혼례때도 폐백조차 받을 수 없었다('불가헌폐-不可獻幣')
"왕실의 법도에는 맞습니다.
대비가 높으니까요.
그러나 정조때에 왕비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던
혜경궁으로서는 지위가 추락한 것이지요.
이것을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정순왕후가 주도하는 경주 김씨 세력하고,
혜경궁을 둘러싼 풍산 홍씨를 두고 본다면,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세력이
혜경궁의 풍산 홍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히는 조치입니다."
- 김문식 교수
자신은 물론 아들 정조까지 무시하는 행위였다.
"흉한 무리는 때를 얻어 선왕(정조)을 저버리고
어린 임금(순조)을 업신여겨
선왕의 어미를 이리 핍박하였다."
다시 친정에 정치적 탄압이 가해졌다.
'역괴(逆魁)'
정조가 무죄를 선언했던 홍낙임이 또 다시 역적으로 몰렸다.
실록은 당시의 정국을 '박격(搏擊)'이라고 쓰고 있다.
"박격포 할 때, 그 박격입니다.
친다, 부순다, 박살낸다는 뜻입니다.
정적을 향해 몰아치는 '박격 정국, 공안 정국'이란 뜻입니다."
- 박현모 교수
아들의 죽음에 이은 가문의 몰락.
혜경궁은 극도의 절망에 사로잡힌다.
목숨까지 끊으려 했다.
'자결'
"11월에 내가 하고자 했던 일(자결)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영춘헌으로 와서 선왕의 자취를 어루만지며 내 신세를 서러워하였다.
하늘을 향해 통곡하다 정신을 잃고 누웠으니
만고에 이런 광경과 정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정순왕후는 냉담했다.
오히려 홍낙임이 혜경궁을 충동질한다며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충동을 하는 놈이 있으니 그 놈을 다스리려 한다.
홍낙임을 삼수갑산으로 귀양 보내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슬프고 분한 마음이 복받쳤다.('비분강개')
혜경궁이 나섰다.
"엄한 교지가 어찌하여 이와 같습니까. 너무 이리 마십시오"
하지만 소용없었다.
1801년 5월 29일. 순조 1년.
홍낙임은 결국 사약을 받았다.
그것은 정치 보복이었다.
동생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내 분수에 살아 앉아서 동생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나 같은 흉독하고 잘못된 사람이 다시 어디 있겠는가.
하늘아! 하늘아!
나를 이 세상에 머물러 두었다가
동생의 원한을 푸는 모습을 보고 죽게 하실까.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빌 뿐이다."
6.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니…
혜경궁의 절망은 후손에게도 이어졌다.
혜경궁의 5세손인 홍영식씨(서울 서초구, 70세).
한 때 정권을 주도했던 권문세족이지만
홍씨는 남편마저 모르게 풍산 홍씨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정조가 돌아가신 후에 풍산 홍씨는 몰락했습니다.
혜경궁의 친정이 너무나 핍박을 받고 모함을 받아서 집안이 망하다시피 했습니다."
250년전, 왕족을 배출하던 가문의 영광은 사라졌다.
5대조 할머니 혜경궁이 남긴 기록.
그것만이 지난 세월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니'
모든 희망은 사라진 듯 했다.
요동치는 운명을 혜경궁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듯 했다.
"마음 놓고 살려고 하여도 살 길이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다 나의 죄가 무겁고 운수가 흉악해서이다."
그러나 그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혜경궁은 다시 붓을 들었다.
<한중록>의 또 다른 제목인 '읍혈록'을 집필한다.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제목은 당시 혜경궁의 절박한 상황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게 없었지요.
정순왕후처럼 정치 일선에 뛰어들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더구나 남편이 폐위되고 아들이 죽은 상태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집필을 선택한 것이죠."
- 이선형(<한중록> 편역)
정조가 죽은 2년후.
혜경궁은 <한중록>의 두번째 책을 집필한다.
이때 이르면 글을 쓰는 목적이 확실해진다.
"주상(순조)이 옳고 그름을 가려
내 지극한 원한을 풀어주실 날이 있을 줄 안다."
격한 감정도 거침없이 드러냈다.
'원통' '흉험' '죄악' '원망'
"'이렇게 억울할 때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슬픈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라고 해서
항상 감정적이고도, 의문형으로 많이 씁니다.
이 여성의 삶이 너무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절대로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감정적 의문형'으로 자기 뜻에 동조를 유도합니다.
이 여성의 말하기 방식, 글쓰기 방식으로 인해
우리는 또 이 여성의 견해에 공감하게 됩니다."
- 조혜란 교수(이화여대)
팔순에 가까운 나이.
이제 그녀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글로 쏟아냈다.
"나는 열(烈)에도 죄를 지었다.
나는 자(慈)의 도리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효(孝)도 저버린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 그림자를 보아도 얼굴과 등이 뜨거워
밤이면 벽을 두들기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몇 해였는지..."
1803년 12얼 28일. 순조 3년.
아들 정조가 죽은 지 3년.
혜경궁에 인생에 다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손자인 순조가 친정을 시작한 것이다.
혜경궁의 글을 통해
할머니의 한을 알게 된 손자는 그 한을 풀어준다.
1808년 8월 10일 순조 8년.
순조는 먼저 왕명으로 외증조부 홍봉한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아버지 정조가 편찬했던 홍봉한의 문집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를 발간한다.
그리고 홍낙임의 관작을 복구한다.
"기록이라는 것이 우선은 자신이 보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일기도 원래는 자기를 위해 쓰지만
사후가 되면 다른 사람이 보게 되는 것처럼요.
<한중록>은 그런 면에서 혜경궁의 자전적 기록이지만,
'그 기록을 볼 사람들을 의식하고 쓴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록을 본 사람은 아들 정조, 손자 순조,
그리고 그 이후 조선의 국왕들까지 실제 다 이 <한중록>을 봅니다."
- 김문식 교수
혜경궁이 사망하고 80년후
<한중록>을 본 고종(조선 26대)은 이렇게 평가했다.
"혜경궁의 <한중만록>은 언문으로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실로 오늘날의 확증이 된다."
- <고종실록>
그리고 고종은 혜경궁의 마지막 한을 풀어준다.
"이것이 혜경궁이 사도세자 죽은 후
'장조후'로 승격을 한
1899년에 고종 황제께서
황제국에 걸맞게 '의황후옥보'로 봉해 만들 게 한 것입니다."
- 서 준 큐레이더(국립고궁박물관)
10살에 입궐에 죽을 때까지 71년간 세자빈이었던 여인.
혜경궁은 사후 80년만에 비로소 왕의 비가 되었다.
비극의 역사를 견디어 그것을 기록한 여인 혜경궁.
그녀의 책 <한중록>은 시대적 약자였지만,
그 불명예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한 조선 여인의 처절한 삶의 기록이다.
환갑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쓰기 시작한 기록이
피눈물의 기록이 되도록 혜경궁은 말년까지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글은
혈육을 잃고
홀로 남은 혜경궁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혜경궁은 섬세하면서도 집요한 문장으로 지난 세월을 기록했고
그 글은 그녀의 사후에도 살아남아
조선 왕조 가장 비극적이었던 60년을 증언하고 있다.
- 한국사전을 보고 (늘 평온한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