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 그 한 점의 빛을 아름답게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2024. 7. 4. 이 지 민
<이야기 나누기>
1. 함께 읽고 싶은 책 한 대목을 찾아 읽어보자. 왜 이 대목이 좋았나요?
7쪽 ‘오랜 친구가 대부분 그렇듯,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몇 년에 한 번쯤 만나는 가늘고 긴 인연을 어쨌든 이어오고 있다.’
→ 첫 문장부터 마음에 와닿았다. 옛 친구를 만나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문득 만나도 그렇게 반갑다. 물 흐르듯이 우연히 친구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36쪽 ‘오늘 내가 할 일은, 애써서 받은 그 ‘연구 면허’가 별무소용인 종잇장이 되지 않도록 연구자로서 할 일을 다 하는 것뿐이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누구나와 같은 그 삶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 모두의 삶이 다 똑같구나! 박사 교수의 삶이나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나.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 같다.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고 너나 없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는 듯이 편안했다.
→ 딸이 그림으로 꽤 인정받고 있는데 유학을 다녀와 그 아이의 삶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된다. 유학을 다녀와도 인정을 받아도 시간강사, 학원강사, 작가의 삶을 살아갈텐데 그 아이의 삶 역시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짠하다.
155쪽 ‘하지만 언젠가 아이도 내 품을 떠날 것이다. “엄마가 뭘 알아?” 하고 큰소리치면서 제 방문을 쾅 닫아버리겠지. 독립한다고 손바닥만한 집을 얻어 나간 뒤 숙제는커녕 어떤 조언도 구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게 되면 내 집에 남아 있던 제 짐을 마지막 하나까지 가져다 자기 보금자리에 옮겨 두고는, 나더러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으라는 둥 아프면 병원 좀 가라는 둥 타박을 할 것이다. 그 애가 마직으로 잠시 나를 돌아본 뒤 자신만의 우주를 향해 날아갈 때, 나는 그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아주리라.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저 멀리. ...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아이들은 그러할 것이다. 각자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를 떠나갈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런 나이가 되었다. 걱정을 하지만 그런 걱정의 말조차 어떨 때는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 아이에게 충고나 참견을 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너무 무심한 거 아니냐?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다 큰 아이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말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른 아이에게 우리가 살아봤으니 이렇더라 그러니 이렇게 하라는 둥의 말은 우스울 뿐이다. 듣지도 않는다. 아이 아빠가 한 번씩 그렇게 말할 때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은 바꿨다.
→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은 7~8년동안 보이저호가 그 지구를 보기 위해, 그 위험한 응시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아주 익숙해진 사진,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사진이 그렇게 만들어진 줄 몰랐다.
→ 나도 이 대목이 너무 감동적이라 남편에게 읽어줬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나는 너무 감동적인데 남편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딸아이조차 엄마 과학책 읽어? 하고 했다. 나는 너무 좋은데...
→ 아마 우리는 책 처음부터 보이저가 떠나기 전부터 아니 천문학자가 우주를 쳐다보면 미지로 보이저호를 떠나 보내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읽으면서 그 감동을 오롯이 느끼기 때문에 그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앞뒤 다 짜른 후에 그 대목에서의 감동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97쪽 <최고의 우주인>에는 ‘우주인 이소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주인 이소연의 이야기가 오도되어 ‘먹튀’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화가 났다.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잘못 알려지고 한 사람의 실재와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되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169쪽 <우주의 랑데부>도 좋았다. ‘숨막히는 어둠 속을 조용히 떠돌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 곁에 라디오를 든 작은 우주선 친구를 붙여주는 것이다. ...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소행성의 궤도에 발맞추는 '랑데부'다.’
→ 그런 랑데부를 눈에 그려보면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든다.
181쪽 <하늘의 어디> 에는 천문학자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과학 상식이 영화, 소설의 상황, 장면을 예를 들면 나온다. 정우성과 김향기 주연의 <증인>이라는 영화에서 “네 벽면에 난 창문이 모두 남향인 집을 지으려면?” 이라는 질문으로,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에 나오는 초승달의 오류 등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과학상식이 많구나를 느꼈다. 우주에 대한 상식을 너무나 재미있게 알게 되었다.
131쪽부터 시작하는 ‘관측하기 딱 좋은 날’이라는 경험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소용 없어져 버린 경험이라도 내가 경험한 그런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내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그 과정이 오롯이 상상되었어 좋았다.
2. 별을 바라보던 기억을 나누어보자. 그때 나는 어땠나요?
그리고 우리는 어떨 때 별을, 하늘을, 우주를 바라보고 상상하고 사랑하게 되는가?
- 아이러니하게 별을 본 기억은 서울이다. 서울이라고 하면 공기가 안 좋아 별을 잘 볼 수 없을 거라 생각든다. 그런데 젊을 때 잘 아는 언니가 서울에 있어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언니 사는 곳이 달동네였다. 집이 너무 허름해서 사실 놀랐다. 사는 곳의 사람들 옷차림 역시나 너무나 허름해서 여기가 서울 맞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언니 집에서 바라본 하늘에 별이 쏟아졌다. 너무 놀랐다. 그리고 그 언니가 나를 위해 아침에 대접해 준 커피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 내가 기억하는 별은 어쩌면 두가지 기억이 하나로 합쳐진 것같기도 하다. 남동생이 있는데.. 그 막내 동생이 남자얘기도 했지만 많이 아팠다. 너무 아파 이름도 개명하고 아플 때는 굿도 하기도 했다. 그 동생이 아픈 뒤 배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때가 겨울이였는데 엄마가 나보고 배를 사오라고 했다. 그 추운 날에 나는 동생이 먹고 싶다는 배를 사오기 위해 멀리 길을 나섰다. 그런데 그 배를 엄마가 나한테는 한 쪽도 주지 않았다. 그 배를 사 오는 길에 바라본 하늘에 은하수가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배를 밤에 사가지고 오지는 않는 듯 하다. 나는 겁이 많아서 밤에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배를 사가지고 오는 길에 은하수가 펼쳐지는 밤이었다는 기억은 아마도 두 개의 기억이 합쳐진 것 같다.
- 어릴 때 밤에 많이 놀았다. 평상에서 별보고 언니랑 이야기를 하고. 별이 쏟아졌던 것 같다. 어렴풋이 이야기하다 잠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좀 커서는 지리산에서 야영하면서 본 밤하늘이 떠오른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어릴 때 별을 본 기억은 없다. 어른이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달이나 별에 대해 알려줘야 할 때, 이야기 해주어야할 때 별을 보고 달을 보고 했다.
→ 세대가 많이 변했다. 우리 때는 밤늦게까지 놀면서 하늘을 볼 기회가 많았지만 다른 세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놀이조차 다르다.
3. 유니버스(Universe: 별, 먼지, 행성과 우리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환경), 코스모스(Cosmos: 질서와 조화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우주, 우주론cosmoslogy), 스페이스(Space: ‘공간’으로서의 우주. 특히, 인류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 같은 인공 물 체를 보내 탐사하는 공간을 칭한다) 이 단어를 말하거나 상상할 때 떠오르는 책, 영화, 그 외의 사건들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느 단어를 사랑하십니까?
- 우주하면 어릴 때 본 <은하철도 999>가 떠오른다. 철이, 메텔, 눈만 보이는 차장아저씨. 우주를 여행하는 만화를 보면 밤하늘, 별, 우주를 생각하게 된다.
-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우주에 관한 많은 영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는 영화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간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 유니버스라는 단어가 좋다. 정말 광활한 우주. 모든 것을 보여준다.
- 우주의 질서라는 말도 정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질서를 표현하는 듯하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질서로 내게 왔다는 생각은 정말 상상 이상이다.
- 별을 떠올릴 때는 어떤 공간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을 떠올린다. 어떤 공간에서 바라본 하늘, 그 공간과 구별해서 별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난 스페이스, 공간적인 우주라는 말이 좋다.
<책을 읽고>
하늘을 아니, 저 어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그 어둠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질서를 발견한다. 그 질서는 어쩌면 진리일 수도 있으며 우연, 발견, 탄생과 죽음…. 이러한 단어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이 제목은 아주 이공계답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보는가? 작가가 알고 있는 천문학자들은 마치 별을 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마치 놀이를 하는 사람, 별을 장난감처럼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어떤 것으로 여기며 마냥 들여다보고 즐기고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바친다. 그 별은 목성이 되었다가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달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달과 별을 완전히 구별하는데.)
“코스모스 COSMOS를 정관 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은 미지 未知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 칼 세이건
밤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다. 욕심이 나 지나치게 많이 먹은 날은 어김없이 한밤중에 자는 언니를 깨운다. 같이 따라나서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신문지를 들고 마당 가장자리로 가서 바지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곤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다 별일 없으면 신호가 나길 기다린다. 아래를 보다가 시간이 좀 더 걸리면 어느덧 시선을 위로 둔다. 그렇게 신호를 기다리며 어둠이 내려앉아 밝아진 하늘을 한동안 쳐다본다. 그런 기억이, 장면이 내 속에 있다. 그 시절에는 참 별이 많았다. 여름철, 평상에서는 누워서 은하수도 본 기억이 있다. “저게 은하수야!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거 보이지? 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하한~나무 토끼 한 마리~”
하지만 난 천문학자가 되지 않았다. 별을 자주 보긴 했는데…. 별보다는 성운과 은하 사진이 실린 과학잡지를 봐야 했나? 아니면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이 중년이긴 했으나 ‘연주시차’를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인가? 어쩌면 별을 보지 않는 천문학자보다는 별을 볼 기회가 많은 아이 넷인 엄마가 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이런 말놀이나 하면서 말이다.
겨울날, 유난히 쩡쩡하게 반짝이는 별을 본 날이면 인터넷으로 별자리를 찾아본다.(여름보다 겨울에 별이 더 반짝인다. 꽁꽁 언 대기 중에 ‘나는 여전히 빛나!’ 하면서) 오리온자리, 쌍둥이자리, 황소자리, 시리우스…. 복사해서 손에 쥔 별을 눈에 익혀 고개 들어 밤하늘을 한참 쳐다본다.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그리고 한참 헤매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다!” 외치기도 하고,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별은 내게 내려앉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내 속에서 반짝인다. 밝은 대낮에 뜬 반달을 바라보던 순간, 어두운 밤하늘 달을, 별을 바라봤던 순간들. 멍했지만, 바라보던 그곳은 참 아름다웠다. 그 순간에, 그 장면에 나는 한 피사체로 서 있었다. 내 기억 속에, 내 시간 속에. 그런 순간이 가끔 생각난다. 뭔가 한없이 바라보던 때가. 그 순간은 참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