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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제안해본 문화번개~! 새롭고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
먼저, 국립고궁박물관이 신종플루로 인해 안내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고
거의 매일 전화를 해서 안내를 조르고 박물관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결국 서유정 도슨트님께서 "안해주면 안될 것 같다"며 직접 안내를 해주시는데...
오신 분들과 함께 최고의 설명을 들으며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한 유물 한 유물에 대한 넘치는 애정으로 설명을 해주셨기에
고궁박물관 제1전시실~제4전시실 중에서도 중요유물만 볼 수 있었음에도,
우리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깊이있게 알려주셔서 좋았습니다.
뒤이어 방문한 경복궁에서도,
안내하시는 박동환 선생님(실감나는 연기력과 잔소리가 일품! "그걸 알고 보셔야 되요~","그걸 알아야되요~")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구요.
그렇게 돌다보니 시간과 체력이 고갈되어 국립민속박물관은 다음에 가기로 하고,
삼청동 길목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서 차도 마셨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는데 다이어리에 워낙 휘갈겨써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아요. 윽...
기억을 토대로, 그 중 몇 가지는 자세한 정보를 첨가해서 말씀드릴게요.
(쓰고 보니 너무 기네요. 아래는 관심있는 분만 보세요!)
1. 국립고궁박물관
1) 창덕궁(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시대 궁궐 건물 중 지붕이 유일하게 청기와인 선정전이 있기에,
옛 그림을 볼 때 선정전이 있으면 이곳이 창덕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정전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2) 정조교명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으로 오방색을 쓰고있다. 교명의 내용은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 주는 것.
☆ 오방색 - 음양오행사상과 관련된다.
청(靑) 동(東) 木 봄 청룡
적(赤) 남(南) 火 여름 주작
백(白) 서(西) 金 가을 백호
흑(黑) 북(北) 水 겨울 현무 - 당시에 말하는 흑색이란, 지금의 흑색이 아니라 짙은 청색에 가깝다(교명의 맨 왼쪽 바탕색).
황(黃) 중앙(中央) 土 土用-환절기
3) 우리 기록문화의 우수성
ㄱ.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기록들(총 7가지)
: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하권), 승정원 일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ㄴ.조선왕조의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문서로,
기존의 다른 문서들이 편년체로 서술된 것과 달리 의궤는 1권당 1행사가 기록된다.
처음에는 아주 세밀한 그림으로 묘사되었으나 뒤로갈수록 판화 또는 글씨의 형태로 간소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반차도를 비롯하여 형형색색 그림이 장면장면마다 세밀하게 기록되어있기에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자료~
어람용(표지를 비단으로 싸고 작은 꽃잎모양의 쇠장식을 얹음)을 포함하여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많은 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다는 말을 들어 안타까웠던...
조선에서 가장 왕실의 자제다운 교육을 받고 제대로 만들어진 왕인 정조는 생각이 무지 많은 임금이었다.
의궤가 훼손될까봐 강화도에 따로 보관을 했으나(당시만해도 외침은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밀고 올라오는 형태였다고 하죠)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당시 증기선을 개발하여 강화도에 바로 상륙해버렸고,
점령지는 초토화한다는 원칙에 따라 철수하면서 다량의 의궤를 가져갔다.
ㄷ.승정원 일기(국보303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조선왕조실력의 무려 10배나 되는 양이라고 한다. 번역하신 분도 한탄했다고...
(실컷 번역했지만, 평생을 읽어도 조금밖에 못 읽게 생겼다고)
조선왕조 500여년의 역사 중 288년 역사를 담고 있으며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가지 사건들과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4) 태조어진
: 다른 왕들의 어진이 모두 붉은색 용포를 걸친것과 달리, 태조는 어진에서 유독 푸른 색의 용포를 입고 있어 논란이 된다.
이는 고려의 문화를 따른 것이라는 설이 다수설이지만 조선이라는 국가의 태조이기 때문에 차별성을 두려했다는 설도 있다.
어진은 종이가 아닌, 올이 아주 세밀한 비단에 그렸으며 9~10명의 화가가 분업을 했다.
옷보다는 얼굴을, 얼굴 중에서는 눈을 그리는 화사가 최고의 어진화사(:어진을 그리는 화사,당대에 도화서에서 가장 높은
실력을 인정받는 화사)이다.
밑그림의 개념도 아주 독특한데, 그림 뒷면에서부터 얇게 채색하여 앞면으로 비치는 실루엣과 색을 칠한 것!
그래서 색감이 더욱 생생하고 변색이 적다고 한다.
용포의 금장식은 진짜 금을, 어좌 등에 들어가는 금장식은 금을 물에 개어서 쓴 것이며
조선 초기의 어진은 손을 옷깃으로 모두 가리고, 명암없이 평면적으로 나타낸 데 비해
후기로 가면 중국의 영향으로 명암도 들어가고 포즈도 달라진다고 한다.
어진 아래에는 양 끝에 용모양으로 생긴 돌(?)을 놓는데 이것의 역할은 서예를 한 후 놓는 문진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어진을 고정하는 역할이다. 어진의 양옆과 위쪽에도 장식을 늘어뜨린다.
태조어진은 경기전(전주 소재)에도 있으나 진본(보물 931호)은 국립전주박물관(전주 소재) 수장고에 있다고.
5) 종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도슨트님께서 가장 힘주어 설명해주신 곳. 건축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이 보고 놀라는 곳.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꼭 가봐야 할 건물이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안는 듯한 모습이며 월대의 곡선을 통해 건물의 수직적인 느낌과 조화를 추구하였다.
4계절의 모습이 모두 아름답고, 대부분 배흘림 기둥이지만 동쪽 끝으로 가면 배흘림 양식이 사라진 것도 살짝 보인다
(시대에 따른 증축의 흔적이다. 서→동쪽으로 증축한다). 기와장 위로 자연스럽게 푸르른 산이 걸쳐지는 모습이다.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격조있는 건물.
진짜 명당이란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는 곳으로, 종묘 주변에는 높은 현대식 건축물도 짓지 않는다고 한다.
문에 영혼이 드나들라고 만든 작은 틈이 있이 있는 것도 특징.
화려한 궁궐과 달리 단청(주로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래된 나무의 갈라짐 등을 가려주고, 나무를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을 쓰지 않았다.
참, 기와 위에 석회와 점토질로 하얗게 얹은 부분은 '양성바름'이라고 한다.
궁궐에서만 쓸 수 있는 특권인데 시멘트로 흔히 착각한다고;
6)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국보 제 288호)
발굴경위가 재미있었는데, 원래 도시락 펼치고 밥 먹던 자리의 돌을 성신여대 모 교수님이 어쩐지 이상히 여겨 발굴을 의뢰했다는 정도만 기억이 난다. 별자리를 크게 보아 일곱영역으로 나눈 것과 적도, 황도, 은하수를 표시해 놓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
태조는 이를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밝히는 데 적극 활용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그다지 중하게 여기지 않은 별자리까지
많이 표시하고 있다(정확한 발굴경위나 기타 설명을 메모하신 분은 알려주세요.^^).
2. 경복궁
◈ 사정전(思政殿)
국왕의 일상 집무실. 특히 중종은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사정전에서 조광조에게 많이 혼이 났다(?)고 한다.
중종은 조광조를 총애했으나 훈구파가 꾸민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사건으로 이곳에서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기묘사화의 발원지가 된 곳.
◈ 경회루와 '흥청망청'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1300명 가량의 흥청(궁중에 뽑혀온 기생)과 더불어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나는데,
흥청과 놀아나다 나라가 망(亡)한 거라는 비유에서「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것. ^^
◈ 잡상(雜像, 어처구니)
흔히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힌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다. 보통은 어처구니를 맷돌의 손잡이를 뜻하는 단어로 알고 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 전각의 추녀마루 끝에 익살스럽게 생긴 인형 조각도 어처구니라고 부른다. 한자어로 잡상(雜像)이라고 부르는 어처구니는 그 형상이 기기묘묘하다. 잡상이란 '여러 가지의 형상'을 뜻하며 추녀마루 끝에 일렬로 앉히는 여러모양의 조상을 말한다. 잡상의 설치 시기는 중국의 송대에 나타난 잡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임잔왜란 이후에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잡상의 설치는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한정된다.
중국에서는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든 주술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잡상을 홀수로 배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기와지붕의 크기에 따라 홀수나 짝수로 배열하여 상징적 의미로 사용했다. 맨 앞에는 삼장법사를 필두로 해서 동물이 뒤따라 배열되고, 맨 뒤에는 큰 개 형상의 귀신을 배치하여 조형미를 살리고 있다. 이것(귀신)은 잡상 수에 해당되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잡상은 황제가 있는 건물은 11개, 태자가 있는 건물은 9개, 기타는 7개 이하로 하고 있다고 하나, 조선은 건축균형미에 맞춰 잡상 수를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의 예를 들면, 임금이 머물던 근정전은 잡상이 7개인데, 연희를 하던 경회루는 11개, 세자의 자선당은 9개, 수정전은 6개, 협길당은 5개, 자경전은 4개, 청연루는 3개 등에서 알 수 있다(문화재청 자료 참고) .
◈ 부연(附椽)
솜씨가 빼어나 대궐을 짓는데 뽑힌 도편수가 있었다. 궁궐에서 다량의 나무를 받고 잠깐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아들이 그만
나무를 (짧게)조각조각 내버렸다고 한다. 어찌 할 바를 몰라 고심하고 있던 중 현명한 며느리가 이 조각들을 이어 홑처마 위에 덧대면 어떠겠느냐고 제안을 했고, 그 말에 따라 겹처마를 만드니 서까래만 얹었던 홑처마보다 더 권위롭고 웅장하여 왕으로부터 큰 칭찬을 듣게 되었다. 지혜로운 며느리의 아이디어로 나무 조각을 이어 만든 겹처마 부분을 이후 지어미 부(婦)자와 서까래(이을) 연자를 써서 '부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홑처마부분 서까래의 단면이 원형인 데 비하여 부연은 네모지고 짧다.
* 보통 '부연설명을 한다'고 할때의 부연과 같은 한자를 쓴다고 해서 찾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한자가 다르다!
부연 [敷衍/敷演] :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덧붙여 자세히 말함.
◈ 근정전
현판은 서사관 이흥민이 썼다.
하지만 1915년 9월 11일, 조선에 임명된 첫 일본총독인 테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버젓이 용상을 범하기도 했다는
아픈 역사가 있다.
◈ 침전에만 용마루가 없는 것은 왕(또는 왕후)이 가위눌리지 말라, 편히 쉬라는 뜻이다.
◈ 제후의 나라는 봉황을, 황제의 나라는 용문양을 즐겨 쓴다.
◈ 기타 고유어
기와 1000장 = 1눌, 중전을 더 높여 부르는 말 = 곤전
기타 등등...(권제양님께서 대부분 설명해주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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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빼먹은 부분을 이리도 설명을 잘 해주시니 복습 잘하고 갑니다^^도편수와 흥청망청 및 어진을 그릴 때 금을 썼다는 부분 등등 들었었는데 메모를 안 해서 빼먹었더라구요. 감사해요^^
저도 가물가물해서 여기저기 찾아보며 쓴거랍니다. 제양님이 먼저 정리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이렇게할 생각을 못했을지도 몰라요. 성실하고 발빠른 제양님의 생활태도 존경스러워요.~*
음 한줄메모라 정라하자면 박수갈채로 가득찬 공간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누린곳이랄까요.
문화번개시즌2를 기대해봅니다. 담박에 달려보겠습니다. 10:40 new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으실 정도면 독서세미나에도 오실거죠? ㅋㅋ 또 뵈어요 박재한님~ ^^ 말씀도 재미있게 해 주시고 함께하는 시간이 참 즐거웠어요.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모두들 멋지십니다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복습잘하고 갑니다
휴일에 편하게 쉴수도 있었을텐데 나오신 것도 함께해주신 것도 정말 좋았습니다. 패션리더 조재숙님~~ 다음에도 종종 뵈어야죠~ 반가웠어요! ^^*
와우~ 시작과 끝이 모두 꼼꼼하시군요.. 흘려보낸 것들을 덕분에 새록새록 떠올려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