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요3:31~36 제목 :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심" 설교 : 이하빈목사 날짜 : 2010년 10월 10일 9시, 11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심"
지난 9월에 중국 신학교 강의 차 나갔을 때였습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보통 성경을 보는데, 게스트 룸에서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마음 편하게 영어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읽다가 핵폭탄이 터진 듯, 아주(X2) 커다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전에 한글로 볼 때는 그 의미가 영어성경만큼 살아나지 않았었나봅니다. 34절 -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4절 - For the one whom God has sent speaks the words of God, for God gives the Spirit without limit.(NIV)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끝도 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충격과 감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으면서 가슴 벅차오르는 뜨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저는 이럴 경우 그냥 있지 않습니다. 바로 선교사님 부부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선교사님도 이 말씀의 은혜를 만나지 못했던지; 정말로 힘이 되는 말씀이라면서 함께 그 감격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끝도 없이 넘치고 또 넘치도록(without limit)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감동이 없으세요?! 사실 초대교회의 흐름을 살펴보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세례요한이란 청년이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라는 청년을 ‘그리스도, 메시야, 구원자’로 소개했습니다. 정말 예수는 구원자였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기적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려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가 왕이 되는 날, 자기들은 높은 직위에 오를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일반 대중들도, ‘드디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나귀에 태우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참혹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모략에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숨어들었습니다. 예수의 수제자라고 자처했던 베드로는 참으로 부끄럽게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가룟 유다가 ‘은 30’이 탐이 나서 저지른 ‘비극적인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의 농간이었다고 대제사장의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일들이 ‘꿈이었거니~’ 하면서 다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신 예수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또 다시 자기들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두 번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한 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떠났습니다. 그 떠남 앞에 제자들은 아무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실망했습니다. 무기력했습니다. 의욕도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한 번의 떠남은 부활하시고 40일이 지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떠나심’ 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앞선 이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을 내었고,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에 가면 베드로의 장황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그 핵심이 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또 23절 이하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도다!” 여러분~ 우리는 친숙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핵폭탄과 같은 선언입니다. 그 분위기를 우리로서는 너무 두려워서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서 예수를 죽였다.’는 표현입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참람죄, 신성 모독죄, blasphemy)라는 법에 따라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법 없는 자‘라고 하니 이 얼마나 큰 대적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모욕이겠습니까? 어딜 감히 이런 표현을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란 사람은 전에 여종을 보고도 두려워서 ‘3년간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예수 / 배와 아비를 버려두고 선택했던 예수’를 부인했던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념도, 신앙도, 용기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렇게 해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셨다.’는 선언입니다. 지금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명분은 ‘여호와 신앙’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방법을 택해서 확실하게 죽인 것입니다. 그 증거도 있었습니다. 신21:22~23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와 보라!” 이 조롱은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나무에 달려 죽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어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저주하여 나무에 달려서 죽도록 내버려두겠느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길 바랐습니다. 내려오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 완벽한 이론이 성립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예수는 결국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정황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렸다고 하니,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지금 이 일을 누가 주도했다고 선언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 편’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죽여 버린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려냈다고 하니, 자기들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까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스데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시다고 합니다. 기절할 노릇 아닙니까? 자기들은 확신에 차서 ‘참람죄, 신성 모독죄’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까지 확인했는데; 그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시다고 하니 (죄송합니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데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베드로나 스데반의 증언이 얼마나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고백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여러분~ 베드로나 스데반이 몰랐을까요? 자기들의 선언과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선언과 고백인지 몰랐을까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경험, 예수를 부인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입을 열어 설교했고, 스데반은 고백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변하게 했습니까? 예수와의 두 번째 이별 뒤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달라졌을까요? 행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의 권능, 급하고 강한 바람 같으면서도 불의 혀 같이 임했던 성령’이 한없이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부끄러웠던 베드로를, 용기 없어 도망쳤던 베드로를 이토록 강력한 복음증거자로 세우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복음증거와 성령의 권능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이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마음조차 열 수도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온 강력한 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 증거자에게는 반드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 그 분의 권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복음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복음은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과 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감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런 복음을 어찌 이 땅의 것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강력한 역사,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성령,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성령, 흘러넘치는 성령께서 베드로와 스데반으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도록 돕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좀 길지만 고전2:9~1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바울이 아주 강력한 어조로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성령의 강력한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외에는 아무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또한 성령의 권능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 영혼의 울림이 있고, 우리의 영혼의 감동이 있고, 우리의 영혼의 감격이 있는 것 또한 성령의 강력한 터치하심의 결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전하라고. 오늘 오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마가복음 5장에 가면 혈루증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자기로부터 치유의 권능이 나간 줄 아시고 묻습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숨어 있는 여인을 밖으로 끌어내서 그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마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얼굴을 가지고 숨어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임한 예수의 영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즉시 마을로 갔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둔 여인으로,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아무도 오지 않을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으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떳떳하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하고, 그 증거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믿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죄 많은 여인이 전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믿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담대히 외치는 여인도 기적이지만, 그 증거를 듣고 믿는 사람들도 기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의 결과라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새생명축제를 위해 사람들을 작정하고 초청하는 일을 성령께서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마음으로 작정하고, 만나서 초청만 하시면, 그 다음은 성령이 하십니다. 진정으로 이 약속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한량없이, 끝도 없이, 넘치고 또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