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 피해 떠나는봄꽃 여행
남원 외용궁 마을
봄꽃 나들이는 한때다. 그 한때는 한곳과 짝을 이룬다. 예컨대 산수유는 전남 구례 산동면, 매화는 전남 광양 다압면이다. 해서 구례와 광양은 이맘때면 인파로 북적인다.
당연히, 산수유와 매화는 구례와 광양에서만 피지 않는다. 그곳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느긋한 꽃 구경을 할 수 있다. 전북 남원 외용궁마을(산수유)과 경남 하동 먹점마을(매화)이 그렇다.
딱 하나만 포기하면 된다. '이름난 관광지'를 찾고 싶은 갈망이다. 정말 한때뿐인 '봄꽃 나들이'를 위해, 올해는 조금만 눈을 돌려보자.
개별적으로 핀 산수유 꽃은 마을을 거의 돌아 나올 즈음 군락으로 뭉쳤다. 바로 산수유 밭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해 '시목'이라 불리는 거대한 산수유를 필두로, 50년 넘게 산 산수유가 까만 흙 위에 정렬했다.
이 고요한 정경의 마을에 한때 파근사(波根寺)란 절이 있었다. 뿌리가 흔들린 절이라니. 기이했다. 박근희(62) 이장이 그 연유를 설명했다. "본래 이름은 부흥사였지. 그런데 산수유 열매를 스님들이 따먹고 정력이 좋아진 게라, 그때부터 작폐(作弊)가 심해져 고승 선사들이 망하라고 절 이름을 파근사라 지은 거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전설을 간직한 마을, 바로 외용궁마을이다. 지금은 절도, 힘센 스님도 없이 다만 긴 세월을 버텨온 산수유만 남았다. 20여 가구, 80명도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3월 25일, 이 마을엔 가랑비가 내렸다. 비와 공기의 경계가 모호한 대기 속으로 산수유의 노랑이 어렴풋이 번졌다.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가 맑은 날 샛노랑으로 빛날 때 제일 아름답다면, 이곳의 산수유는 안갯속에서 자신의 중량감을 지울 때 오히려 오롯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까닭이다. 오래된 돌담 사이, 바짝 열 맞춘 과수원 내에서도, 꽃 산수유는 그저 그림자처럼 노랗게 번져 흔들린다.
그러나 중량감이 없는 만큼 꽃이 쉽게 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산수유의 만개는 두 번의 개화를 겪는다. 먼저 20~30여 개의 꽃봉오리가 꽃눈을 밀고, 2~3일 뒤엔 봉오리가 다시 열리며 수술과 암술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을 보려는 강한 의지로 만개하되,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다만 번진다.
그 모습은 외용궁마을 주민들의 삶을 닮았다. 작은 밭뙈기에 대파와 상추 등을 키우며 한편으론 과수원을 일궈 산수유를 키운다. 가을, 붉은 산수유 열매가 달리면 주민들은 일일이 열매를 따 씨앗을 버리고 과육만을 모은다.
- ▲ 산수유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위로 자라나지 않고 옆으로 가지를 넓게 드리운다. 그 넉넉한 품 안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노란 산수유꽃이 피었다.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의 가격은 작년 1만4000원(1㎏).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시목의 경우 30kg을 생산했으니, 1년에 42만원이다. 박 이장은 "지금이야 산수유 값이 많이 싸졌는데 수십 년 전만 해도 산수유나무가 대학나무로 불릴 정도로 값을 많이 쳐줬다"고 했다.
이곳 시목은 200~300년쯤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수원 한가운데 왕관처럼 두른 돌담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이 시목의 소유주는 문태근(48)씨. 문씨는 "정유재란 때 남평 문씨 일가가 살기 시작해 한때는 주민 절반 이상이 문씨였다"고 했다. 지금은 세 집밖에 남지 않았으나, 산수유 시목이 문씨 일가의 오랜 역사를 증명했다.
산수유는 몇년 전엔 사라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일일이 손으로 열매를 따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 외지인이 몇몇 마을 주민을 꼬드겼고, 5년 전부터 한두 그루씩 산수유나무가 반출됐다. 그것이 '산수유 마을'이란 용궁마을 주민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2년 전 아예 반출을 금지했다. 올해 작지만 의미있는 산수유축제를 처음으로 치러낸 박 이장이 말했다. "우리 마을의 역사가 산수유의 역사인데, 지켜야지. 내년에도 축제를 열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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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 외용궁마을과 경남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은 19번 국도 중 봄꽃길로 대변되는 남원~구례~하동 구간의 양 끝자락에 있다.
외용궁마을에 들어서기 전 잠깐 길을 에둘러 에덴식당(남원 주천면 고기리 706·063-626-1633)에 들러 산나물비빔밥(7000원)으로 요기하자. 외용궁마을과 먹점마을 사이, 쌍계사 인근 단야식당(하동 화개면 운수리 207·055-883-1667)에선 들깨 국물에 메밀국수를 만 사찰국수(6000원)를 맛볼 수 있다.
숨어있는 마을, 숨막히는 매화
본래 매화의 매력은 군집에서 온다. 구름처럼 경계선이 모호한 매화 떼에, 빨갛거나 푸른 꽃받침이 은은한 색채를 더한다. 청매실농원을 비롯, 광양 다압면을 수놓은 매화의 물결이 그와 같다.그러나 최근 광양 다압면을 뒤덮는 것은 매화만이 아니다. 주차장 인근에서 틀어놓는 가요와 몰려드는 인파의 소란이 어디에서도 들려온다. 본래 매화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꽃의 몽롱함에 어울리는 고요이니, 선명한 소음으로 혼곤한 분위기가 깨진다면 그 풍경은 어딘가 모자란 면이 있다.
섬진강을 경계로 광양 다압면과 마주한 하동 먹점마을은매화가 적되 고요함으로 봄 정취를 풍기는 마을이다. 먹점마을의 고요는 마을을 둘러싼 산세에서 온다. 지리산 자락 구재봉 아래 위치한 이 마을은 협곡을 지나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 지척인 19번 국도에서도, 아랫마을 흥룡마을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 마을주민은 "꼭 일부러 숨긴 듯해 6·25 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마을"이라 했다.
- ▲ 하동 흥룡마을에서 먹점마을로 북진 중인 매화.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먹점마을 오르는 길은 그 매화의 북진을 따르는 길이다. 길 위에서 매화는 물결 치며 나아가고, 그 흐름 사이로 거대한 돌들이 완강하게 서 있다. 환영 같은 매화와 땅에 못 박힌 돌은 그 대비만으로도 숨 막힌다.
협곡을 지나면 바로 먹점마을이다. 해발고도 300~400m 평지에서 20가구 남짓한 주민들이 거주한다. 대다수가 매실을 키운다. 이들에게 매화나무는 삶의 필수요소다. 20년 넘게 매화나무를 가꾸고 있는 송춘자(50)씨는 "꽃 필 때가 제일 한가하다"며 "꽃이 진 뒤엔 겨울까지 퇴비 주랴 열매 따랴 늘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했다. 다른 주민 조기찬(71)씨에게 이 마을은 자신의 인생을 넘어선다. 창녕 조씨 가문이 6대에 걸쳐 이곳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번듯한 기와집이 바로 창녕 조씨 제실이다. 한때 집성촌이라 불릴 정도로 많았던 이들 가문은 이제 세 가구만 남았다.
마을은커녕 조씨에 빗대어 봤을 때도, 먹점마을 매화의 역사는 짧다. 조씨는 "한때 이곳이 밤골이라 불렸을 정도로 밤나무를 주로 키웠다"고 했다. 그러나 밤나무 소득 감소로 30여년 전 한두 가구가 매화를 심기 시작했고, 그것이 토대가 돼 밤골이란 이름을 버리고 현재 모습으로 변했다.
이처럼 삶과 매화와 마을이 한껏 얽힌 곳, 먹점마을에서 매화 만개 시기는 흥룡마을보다 일주일가량 늦다. 3월 26일, 흥룡마을의 매화는 만개했으나 먹점마을의 매화는 반도 채 피지 못했다. 그러하니 이번 주말이면 흥룡마을 매화는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질 것이요, 먹점마을 매화는 만개해 곳곳을 수놓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일까. 이 정신 못 차리는 날씨 속에서 봄꽃의 절정은.
각 마을의 토박이 어르신들이 입을 모은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빼앗긴 들에도 꽃은 피듯이, 이 추웠던 봄에도 마침내 꽃이 왔다. 제주도에서 벚꽃이 활짝 폈고(3월 30일 기준), 경기도 이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는 오늘(1일) 만개한다는 소식이다.
- ▲ 남원 외용궁마을을 뒤덮은 산수유 꽃.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매화는 북으로 진군(進軍) 중이다. 전남 해남 산이면 보해매실농원 임순택 관리부장은 "지난달 5일부터 꽃을 틔웠지만 날씨가 추워 봉오리가 더디게 연다"며 "4월 초까지는 예쁘게 피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 창덕궁 관리소에서는 "낙선재 앞 매화가 지난달 30일 막 피기 시작했다"며 "6일쯤 보러 오라"고 했다.
진달래는 등반(登攀) 중이다. 여수 영취산은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스님의 피가 꽃으로 변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진달래 명산. "시인 이원수씨가 그리워하던 '나의 살던 고향'은 경남 창원의 천주산"이라고 이 산의 진달래축제위원회 서봉균 사무국장은 말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꽃향기가 산허리를 물들이는 4월 초순에 정상을 향해 올라가라"고 조언한다.
벚꽃은 '삼일천하'다. 영등포구청 문화관광과에서는 "봄꽃축제의 주요 행사가 시작되는 9일부터 여의도 벚꽃이 만발할 것"이라고 했다. 아차 하는 순간 한발 늦었다면 충북 제천을 찾을 것. "제천은 분지지형이라 오는 15일, 육지에서 가장 늦게 벚꽃이 만개한다"는 제천시축제추진위원회 조청자 사무처장의 말을 믿어봐야 할 것이다.
산수유는 두 번 핀다. 겉 꽃과 속 꽃이 차례로 피는 것. 경북 의성 사곡면 화전리 산수유마을 축제추진위원회 노해석 사무국장은 "지금 나무가 노랗게 물들었으니(3월 29일 현재) 열흘 더 지속하다 하얗게 바랠 것"이라더군요.
분홍빛 복사꽃을 보려면 "17일쯤 배꽃과 복사꽃, 사과꽃이 함께 피는 지품면 복숭아 마을에 오라"고 경북 영덕 복숭아마을 김명순씨는 추천했다. 충남 금산 남일면사무소 변상만씨는 "진분홍 홍도화(紅桃花)를 볼 수 있는 곳은 금산의 신정리 홍도마을뿐"이라고 했다.
이 봄꽃 지도는 전국 30곳 시·군·면·리의 대표들이 말하는 봄꽃의 만개(滿開) 시점.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던 어르신과 지역축제 담당자, 문화관광과 등 토박이 전문가들의 현장 정보를 담은 예상도다. 꽃은 다섯 종류. 매화, 산수유, 진달래, 벚꽃, 복사꽃을 골랐다. 하동의 매화, 경주의 벚꽃처럼 그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꽃의 만개 시점을 한자리에 모은 것. 하도 변덕스런 날씨니만큼, 일기에 따라 실제 만개 시기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군청이나 마을 회관, 면사무소에 전화해보고 들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