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여행을 3회에 걸쳐 다녀왔다.
처음에는 오사카 -나라 -교토 -고베를 두번째는 도쿄를 세번째에는 홋가이도를 다녀왔다.
2003년 첫여행 기억이 까마득하여 사진을 찾아 봤다.
그런데 사진도 많지 않았다.
오사카성, 오대사, 호류사 사진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억과 사진을 참고하여 글을 쓴다.
간사히 공항에 내려 가이드를 만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오사카성을 관광했다.
아침 호텔 식사는 최고 였으며 호텔 버스가 기본적으로 목적지 역까지 내려 줬다.
오사카성은 해자에 물이 가득 했으며 적이 침입 할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였다.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가 볏짚단을 해자에 묻고 건너가 점령 했다는데 많은 사무라이 들이 서로 죽이고 죽었을것이다.
조선왕조은 기선 3척, 복선 3척, 총 6척으로 1607년도 부터 1811년도 사이 12차례나 에도까지 외교사절단으로 통신사를 보냈는데 배로는 오사카까지 갔다고 한다.
그 다음 교토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로 갔는데 그때의 오사카성 모습이 지금과 같았을까.
그때도 지금 우리 여행자가 먹는 점심처럼 사각식판에 쌀밥, 국, 계란말이, 돼지고기, 닭고기 약간과 사케를 한잔 하였을까 !
유적지을 보며 생각해 본다.
통신사로 다녀온 정사, 부사, 사관들은 술안주용 상에 7가지 안주가 나오고 다섯가지, 세가지가 추가로 나오고 식사는 3가지 국에 15가지 반찬이 제공되었다. 그 외 수행원에게도 풍족한 밥상이 제공되었다.
가끔 신선한 회도 나와 와시비와 초장에 찍어서 먹고 떡과 모찌등도 나왔으며 각 지역을 지날때마다 특산물이 지급되어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 500명을 일본에서 3,000명의 수행원이 나와 에도까지 안내
하며 갔다 하니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까지 합세해 그야말로 축제한마당 이었단다.
지금 예산으로 500억엔(한화7,000억)이 소요 되었다니, 그때도 일본은 상공업이 융성하게 발전하여 있었는것 같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왜 200년간 조선통신사를 초빙하여 그렇게 많은 예산를 썼을까.
아마 1868년 메이지유신의 신군부에게 정권을 빼앗끼기 전까지는 긴 평화시기 였으므로 이벤트가 필요했던것 같다.
도쿠가와 쇼군 가계의 새로운 아들 탄신과 쇼군취임 축하연를 해주는 외국 사절단의 성대한 축하 공연과 조선왕의 선물을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받고 싶었는것 같다.
이제 나라에 있는 동대사에 입장한다.
오사카, 교토와 함께 백제인 즉 구다라인과 문화교류가 왕성하여 고대 일본 황실이 태동한 곳이다.
사슴들을 목장 처럼 풀어나서 관광객에게 엉겨 붙으니, 무섭기도 한테 다른 사람들은 자꾸 과자등 먹을것을 준다. 우리 일행들도 과자을 줄수 밖에 없었다.
걸어서 동대사의 청동 비로자라불을 보니 비정상적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컷다.
8세기 쇼무 천황때 제작 되었으며 높이가 14.9m 무게가 492톤으로 정교하지 못했다.
기타 불상들도 규모는 컷지만 예술감은 없었다.
고대 유물이 소박하지 않고 다들 너무 컷다.
황실의 권유를 상징할려고 했나 싶었다.
아마 일본에는 큰나무가 많으니 큰건물을 짓는법을 배워서 자꾸 발전시켜 큰불상을 안치했나 쉽었다.
1709년에 재창건 했다니, 조선통신사 일행도 가느길에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교토에 있는 요메이 천왕의 아들 쇼토쿠(성덕)태자가 지었다는 호류사(법륭사)에 있는 담징의 금당벽화을 보러 갔다.
이당시 섭정을 하던 쇼토쿠 태자의 요청으로 수많은 백제 건축 기술자들이 건너가 황궁과 각종 절을 지었는데 호류사 5층 목탑도 백제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사하여 지어다고 전해진다.
담징의 불화그림은 내부에 있어 볼수는 없었으나 고구려 지역에서 발견된 벽화 무용총의 수렵도와 쌍영총의 기마인물도, 주인공 부부도등 만여개의 고분벽화가 말하듯이 물감이 많이 수입 생산되고 화가들도 일반화 된것 같다.
이런 고구려 선진문화가 호류사에 불화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호류사 절 내부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하고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우리나라 대웅전에 모신 불전과 비슷 했다.
그리고 따로 백제관음상이 있었는데 새로운 건물을 지어 보관했다.
이 목재 백제관음상은 높이 2.8m로 백제 귀화인이 만들었다.
팔등신의 모습으로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 져 백제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구세 관음상 또한 호류사 별관의 팔각 건물인 몽전에 모셔져 있어서 개방시점을 잘 맞추어야 볼수 있다.
구세 관음상은 높이 1.8m로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이 구천 전투에서 신라 복병에게 잡혀 서라벌 월성에서 죽임을 당하고 목은 궁궐 계단에 묻히고 몸만 보내져 오자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얼굴이 있는 구세관음상을 제작하여 보관하다가 백제 아좌태자를 통해 일본에 보냈다 한다.
1,500년 전의 성왕의 전신상 인것이다.
이를 죽은 성왕이 일 황태자 성덕으로 환생하였다고도 한다.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일본 지폐에 제작되어 있다.
이제 교토의 금각사로 갔다.
쇼군의 별장으로 금 20kg로 금박을 입혀 1~3층을 지었는데 층 마다 건축양식이 다르며 연못 정원과 함께 명승지가 됐다.
무로마치시대 아시카가 요시부치 쇼군이 천황과 친교하고 있다는 과시용으로 황궁 근처에 별장을 짓고 자신의 세력을 과시 했다 한다.
연암 박지원이 쓴 글중에 우상전을 보면 중인출신 우상 이언진이 20살에 조선통신사 통역관으로 갔을때 수많은 수묵화, 시, 글을 적어서 일본인에게 선물하였는데 아직도 수천편이 남아 있다.
오사카에서 글을 써주고 도쿄를 갔다고 다시 오사카에 오면 큰서점에는 본인이 써준 수많은 글들이 책들로 출간되어 있었다.
인쇄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많은 서양서적들이 책방에 가득했고 통신사로 간 이언진등 14인의 초상화도 책으로 제작 되어있다.
이렇듯 도쿄나 오사카에는 백만명 이상 규모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며 통신사들이 지나가는 도시마다 시장이 발전하여 서민들의 생활이 풍요로워 보였다.
남녀가 혼천탕에서 목욕을 즐기고 유곽과 여관업이 성업중이었고 수많은 직업군들이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카스테라가 가장 맛있었다고 하니, 빵 제조 기술도 발전 했는것 같다.
이제 청나라에 간 연행사들 이야기다.
연암 박지원은 견륭황제의 70세 생일 축하연에 연행사로 참여했다.
연행사 규모는 400~500명으로 정사, 부사, 사관등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며 기행중 관사가 없는 곳에서는 길에다 솥을 걸어 밥을 해먹고 천막을 치고 잠을 잤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면 중국측 안내를 받으며 북경까지 갔었는데 여각을 청나라 관병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 연암이 왜 경비를 하냐고 물어보니,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인의 돈 1,000량을 도둑 맞았는데 이일로 이지역 현감이 징계도 받고 배상도 해주었야 했단다.
그런데 실제 도둑이 신의주에 사는 장사꾼임이 밝혀져 청나라 관리들이 신의주 장사꾼들을 싫어하며 신의주 백성들도 국경 넘어 청나라가 부유하니 조선을 배신하고 중국으로 편입 받을려고 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한다.
여러 식당과 여각에 머물며 식사 대접도 받고 북경에 도착하여 보니, 마침 황제가 열하에 있는 별궁에 여름 휴가중이라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사신단을 열하로 초빙하니, 열하의 화려한 여름 궁전을 볼수 있었다는 것이다.
열하에 가는길에 다른 나라 외교 사절단을 만나며 낙타을 탄 사람들, 코끼리의 마술, 원숭이의 재주등을 봤으며 온천수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강물이 따뜻할 정도 였단다.
열하일기에는 여행중 청나라의 발전상에서 배워야 할것들을 기록했다.
우물 물을 도르레를 사용하여 잡아 올리니 편리하고 수월하다고 생각했으며 여러 기계류사용과 수례로 인한 도로의 발전, 벽돌집의 견고성과 큰 규모의 주택, 견고한 다리, 가는 도시마다 시장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나라가 안정되게 보였단다. 그러고 청나라 자금성내의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고 필담으로 그시대의 세계정세와 지동설등도 대화로 나눴다.
수많은 서양서적등을 볼수 있었고 가져 올수 있었다
연행사로 갖던 이들을 보면 홍대용, 김정호, 김정희, 허균등 조선왕조에 이바지도 하고 반역을 한사람도 있다.
연행사로 간 많은 이들이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으나 조정에서는 오랑캐 문화라며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봐서 조선의 왕들은 세계정세를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세계지도도 있었고 연행사와 조선통신사로 갔던 사절단이 서양 물품인 유리거울, 안경, 망원경, 자명종, 램프, 성경과 서양서적등을 가져 왔으며 다녀온 여행내용과 친서를 왕에게 최종 보고 했기 때문이다.
순방중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때는 죄를 물었다니까 말이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무덤에 참배했던것을 숨겼다고도 한다.
이러한 교류의 영향으로 조선내에서도 각종책들을 필사하는 직업이 생겼고 많은 서적들이 유통되어 백성들에게 읽혀졌다.
십자가와 천주학도 이때 필사 되어 읽혀지고 예배당도 생겼다. 그런데 조선의 왕들은 천주교 박해로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왜! 천주교를 공인하지 않고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
상공업을 장려하고 시장경제를 활성화 시켜 외국과 통상을 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백성들의 고혈만 짰을까.
그 내부에는 조선왕조 자체가 군사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한 원죄로 인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개화시키지 않고 모든 자유을 억압하여 조선내에서 현상 유지만을 원했는것 같다.
스스로 약소국임을 자인하며 부국강병을 하지 않고 주변국에 잘 보이려고 눈치만 봤지 않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