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희의 인생고백
내 인생을 돌아보면 굽이굽이 어느 한구석 눈물이 안묻은 곳이 없다. 18세 나이에 나는 오빠 부부의 이혼으로 인해 오갈곳 없이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조카들을 안고 고단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스타가 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노래는 나에게는 바로 ‘빵’이었다. 그래도 어린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는 큰 어려움없이 미8군 오디션을 통과했다. 그때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하는 것은 서울대 합격하는 것 만큼 어려운 일로 인식됐었다. 첫 오디션에 합격해 활동을 하더라도 해마다 재오디션을 보고 급수를 조정받아야 했다. 급수가 떨어지면 개런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그야말로 열심히 노래를 했다.
일을 끝내면 늘상 통행금지가 임박한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고단한 일상이었다. 그래도 큰조카의 중학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내가 대학을 못갔을 때보다 더 서럽고 가슴 미어졌던 일은 무명가수 시절 나를 절제하고 인내하게 해준 디딤돌이 됐다.
무대에 서는 일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새로운 팝송이 나오면 그날 바로 다 외어 무대에서 불러내야 했다. 한번에 200여개 이상의 팝송을 읊어댈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외웠었다.
무명가수 시절, 무교동 맥주홀에서부터 청계천 세운상가에 있는 맥주홀까지 차비를 아끼느라 드레스를 걷어붙이고 뛰어다녔었다. 월급도 제때 못받는, 인기있는 가수들을 대신하는 막간가수로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월급봉투를 기다리는 엄마와 조카들을 볼 면목이 없어 집앞 대문에서 비를 맞으며 들어가지 못하고 꺼이꺼이 목놓아 울면서도, 몇푼이라도 보태겠다고 밤이면 봉투 붙이는 일을 하시는 엄마와 착하디착한 어린 조카들의 얼굴을 보면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인간은 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았었다. ‘인간은 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뛰어다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지금도 끝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든 ‘성공’이란 말은 이 삶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나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하다.
당시 두사람이 누워도 빠듯한 단칸방에서 고만고만한 조카들 세명과 엄마와 발디딜 틈도 없이 부대끼며 자는 잠자리였지만, 그래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날이기도 했다. 또한 그때의 어려움은 무명가수 시절에 나를 절제하고 인내할 줄 아는 여자로 만들어준 디딤돌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패배와 포기라는 말이 같은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절망을 첫 앨범을 발표한 후에 알게 됐다.
나는 음반을 내기에 앞서 서울 퇴계로에 위치한 지금의 대한극장 무대에서 처음 데뷔식을 치렀다. 윤항기, 윤복희, 남진씨 등과 함께 서는 ‘춤추는 함대’ 뮤지컬 공연이었다. 그때 맡은 역할은 우연히도 신인가수역이었다.
이후 밤무대 무명가수로 활동하던 나는 화려한 인기를 누리는 대선배님들의 배려로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됐다. 데뷔곡 ‘너무합니다’가 실린 앨범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일은 없었다. 앨범은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묻혀버리고 말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끈기와 오기밖에 없었던 나는 때로는 꿈도 절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이후 노래를 포기한 채 양가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됐다. 하숙집 아줌마, 파출부, 골동품 등을 팔고 사는 중계상, 빵배달 아줌마 등으로 온갖 일에 매여 살았다. 그때 나 스스로도 어머니를 닮아 강인한 생활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가 남산만한 젊은 임산부가 낑낑대며 이집저집 빵 배달을 하자 동네 여자분들은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도움을 주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유선방송에서부터 바람을 타기 시작한 내 노래가 대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고, 얼굴도 모른 채 ‘너무합니다’라는 곡이 세상에 알려지자 내 음반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제의가 여기저기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멍에’라는 앨범이 만들어졌다. 만삭의 몸으로 감기까지 앓는 최악의 컨디션에서 녹음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곡은 미처 마음의 준비나 정리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각 방송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인기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 신문사 여기저기서 내 사생활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고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모든 신문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KBS에서 5주째 골든컵을 받던 날, 나는 진실한 것 만큼 훌륭한 무기는 없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생방송이었던 그 프로에 딸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지금이야 아이를 낳고 활동하는 가수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아기 엄마가, 그것도 신인이 노래만으로 대중에게 나선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날 난 참 많이도 울었다. 자칫하면 공튼탑이 일순간 무너지는 아픔을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돼 버렸지만 노래보다 가정을 먼저 택해야 했던 기막힌 나의 현실이 너무 서글퍼서 많이 울었다.
나는 소위 ‘엄마 가수’의 선구자격으로 인식됐다. 사실 그때부터 기혼여성도 가수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정서가 적극 번져갔다. 하지만 내 삶에서 어려움은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난 노래를 하지 않으면 흔들릴 지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금 이르다 싶은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났지만, 가정생활은 화목하지 못했고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 사람은 바람같은 남자였다. 1년에 한두번씩 집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남편의 좋지 않은 주변환경 때문에 나는 원치않는 구설수에도 자주 올려졌다. 그때 내게는 노래가 버팀목이었고,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원천이었다.
무명가수 10년의 한을 풀자마자 그 해 대마초 운운에 휘말려 그토록 어렵게 얻은 내 인기와 위치가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대마초를 피지 않았지만 그것을 변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남편 주변의 조직폭력배와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내 환경에서 나는 올바로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몇마디 변명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사람들도 내가 대마초를 피지 않았고 무혐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즈음 인터넷 악성댓글이나 잘못된 내용들이 특정 개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심하면 죽음에까지 몰고가는 부작용을 만드는 경우가 심심찮게 알려져있다. 당시에도 그릇된 매스컴의 가십성 기사 등등이 한 사람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또 대중들은 사실과 관계없이 매스컴의 이야기에 쉽게 호도됐다. 그때 매스컴을 통해 상처받은 기억은 오랫동안 매스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래, 너무 쉽게 온 거다. 아직도 나는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라며 떨어지는 인기가 아니라 너무 정리없이 올라와버린 내 자신을 질책했다. 그 사건은 인기곡 ‘멍에’를 통해 그해 골든디스크상 가수상을 기대하다 터져버린 스캔들이어서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소용돌이가 휘몰고 간 자리에 군데군데 생채기가 많이 났었지만 오히려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노래를 시작하던 날,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사무친 각오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들을, 분노와 화를 너무 안으로만 삭이고 절제하던 나는 큰 병을 얻고 말았다.
돈이나 명예, 지위가 죽음 앞에서는 백지 한 장의 값어치만도 못하다는 현실이 나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들이 하루가 다르게 나를 자학의 길로 몰고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낯선 타국 필리핀을 내 병상 은신처로 삼았다. 어두워져가는 여윈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매스컴에서는 또 내가 유방암에 걸렸고, 어디서 치유를 받았고 하는 온갖 말들을 떠들어댔다. 유방암이 아니었지만 당시 몇몇 신문들은 판매를 위해 나를 두 번씩이나 지면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했다. 정말 나는 언론 기피증을 겪어야할 정도였다.
93년, 이 해에 나는 평생 한번 받기도 힘들다는 골든컵을 안았다. 83년 ‘멍에’로 골든컵을 수상한 후 정확히 10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시기였다. 음악문화의 주도권은 완전히 신세대에게 빼앗겨버린 때였는데 ‘애모’는 기성 세대 뿐 아니라 신세대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으며 종횡무진 달려나갔다.
애모는 90년에 발표한 곡이었는데 사실 예상치못하게 전국을 들썩이는 인기를 누렸다. 이 곡으로 나는 KBS 가요대상을 비롯해 MBC 올해의 가수상, 서울가요 대상, 한국 노랫말 대상, 3대 일간스포츠지 올해의 가수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93년, 나는 수원교구 성라자로마을에서 세례를 받았다.
나는 30여 년 전부터 라자로마을의 자선공연을 다녔었다. 천주교와의 인연의 시간은 오래됐지만 세례는 다소 늦게 받게 됐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신앙을 갖고자 했었다. 그래도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불교 신자로 살아오셨다. 그런데 내가 이혼을 하고 일본에 있는 동안 외로움을 심하게 타신 어머니는 성당엘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입교한 것과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항상 나의 큰 의지처였고, 어머니를 믿었기에 그분이 선택한 종교에도 자연스레 더 큰 믿음이 갔다.
부부가 각자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니. 내가 내외적 선교를 올바로 못한 것도 미안해졌다. 사실 남편은 나와 비교도 안될 만큼 성실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참례한다. 나는 남편의 신앙생활을 존중한다. 남편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많이 아팠지만 나는 지금도 남편에게 성당엘 가자고 강요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가슴 속에서 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아이들도 자유롭게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만 절대자 하느님을 향한 마음만은 모두 같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을 집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늘 인사를 한다. 언제 어디를 오가든 가장 먼저 인사드린다.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자식으로 살겠다는 다짐도 담겨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지만 그 7년 동안 아버지가 내게 심어 준 많은 이미지들은 그 이후의 내 삶을 지배할 정도로 깊고 풍부했다.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정신과 만나고, 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의지를 충전했다. 내 인생을 꾸려가는 마르지 않는 원동력은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도 크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나의 뒷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다. 나도 내 자식들이 힘들 때 자기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나는 눈에 보이는 부모님도 제대로 안모시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효사상이 많이 희석된 현대사회지만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존중이변하는 시대는 아니다. 자신의 부모에게 잘 하지 못하면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굳은 생각이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요리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난 집에서든 어디서든 인스턴트는 먹지 않고 아이들의 밥도 꼭 내가 해서 먹인다. 우리 어머니는 유달리 음식솜씨가 좋은 분이셨다. 다행히 어머니의 손맛을 나도 좀 물려받은 듯 하다.
대형마켓 등에서 인스턴트 음식과 재료를 수레에 잔뜩 싣는 엄마들을 보면 대부분 맞벌이 등으로 바쁜 사람들이다. 나도 늘 바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의 먹거리로 컵라면 등을 사진 않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다음에 내 모습을 떠올릴 때 늘 바쁜 엄마, 일하는 엄마, 노래하는 엄마로만 기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번다는 이유로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을 해주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과 사랑의 향수를 나누고 싶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엄마의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엄마의 손맛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느끼는 사랑이다.
아이들에게도 뜻하는 대로 하라는 말을 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올바로 구심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이다. 나는 그러한 기본을 잡아주는데 노력을 한다. 누나와 띠동갑인 늦둥이 아들과도 그렇게 기본을 지키며 허물없이 지낸다. 무엇보다 나는 물질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등의 그런 잘못된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파경을 맞는 가정이 늘어가는 모습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나에게 있어 가족은 내 모든 생활의 중심이다. 외부에서 활동한다고 가정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내가 집에서도 늘 뭔가 하며 움직이는 일 중에 텃밭을 가꾸는 일도 있다. 지금 사는 집이 좋은 것도 근처 산 아래에서 밭을 일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채소 등은 대부분 내가 직접 키워 거둔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우리집에는 산더미같은 김장재료들이 쌓인다. 물론 우리가족들이 모두 먹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해마다 김장을 넉넉히 담궈 이웃 지인들과 연례행사처럼 나눠 먹어왔다. 조금씩이라도 내 손으로 담궈 정성스럽게 보자기로 싸서 드리면 다들 좋아하신다. 어머니의 요리솜씨를 물려받은 덕분에 낼 수 있는 맛인 듯 하다. 다들 우리집 김치를 너무 좋아해 나는 결국 식당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안양시 호계동에 문을 연 갈비집인데,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내가 담근 김치맛을 최고로 평가해주신다. 일부러 김치를 먹으러 오시는 분도 계시다고 해 감사할 뿐이다. 그래도 비장의 요리를 조금 남겨둔 것도 있다.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방문할 때 발휘하고 싶은 실력이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그렇게 안늙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나이에 비해 내 얼굴 주름이 매우 적은 듯 보이나보다. 내 생각엔 나의 열정이 내 노화를 멈추게 하는 듯 하다. 나는 사실 집에서도 한순간도 멍하니 앉아있거나 생각을 놓은 적이 없다. 늘 분주하게 움직이며 살았다. 사실 나는 피부가 매우 예민한 편이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계절이 바뀔 때나 화장품을 조금만 잘못 사용해도 알러지 반응이 온다. 게다가 남편도 습열이 있어 고생하고, 딸도 아토피 피부로 애를 먹었다.
이렇게 피부에 문제가 있다 보니 자연히 바르는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집에서 혼자 자연 재료로 이래저래 화장품을 만들고 연구해 쓰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오랜 기간 화장품에 관심을 갖고 만들어 쓰기도 하다 보니, 남들과도 나눠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우선 내가 뭐든 올바로 알아야했다. 그후 나는 몇 년 동안 난 화장품과 관련한 것에 대해서는 뭐든 섭렵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아토피 피부 개선 등에 탁월하고, 재생과 치료 효과도 있는 피부에 맞는 좋은 화장품을 찾다보니 기능성 화장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2000년 미국 공연은 또다른 눈을 뜨게 한 계기였다. 그곳에서 한 피부연구기관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는데, 남들보다 민감한 피부로 고생하는 나는 연구기관 방문으로 눈이 확 뜨였다. 이후 나는 화장품 관련 연구에 매진했다. 미국의 피부연구기관도 수시로 방문하며 동양인에게 맞는 원료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위에서도 기능성 화장품 박사가 다 됐다고 말하곤 했다.
6여 년간은 그야말로 화장품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이었다. 수년 간의 노력 끝에 나는 드림 로투스 코스메틱 (DREAM LOTUS COSMETIC)이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올해는 국내 시판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동안 나는 무대 위에서 뿐 아니라 수많은 사업실패 등으로도 온갖 고난을 헤쳐와야 했다. 그러한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과정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소위 ‘성공’의 문에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한 이들에게는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일에서든 ‘성공’을 한 이들에게만 지나온 과정이나 혹은 변명 등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나는 지난 삶을 통해 뼈져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내 삶이 ‘성공’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의 삶에서 나는 ‘성공’을 위한 ‘성공’은 만들고 싶지 않다. 내 꿈과 내 희망에 대한 ‘성공’만이 있을 뿐이다. 내 목표는 ‘돈’이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아니다. 내가 줄곧 품어온 꿈과 희망을 향해 쉼없이 달릴 뿐이다. 그래서 나는 본의아니게 ‘독하다’는 평도 많이 받아왔지만 내 신념의 끈을 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살아가면서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짓겠다고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고 모두 동의해주었다. 또 나는 후배가수들의 내외적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최근 연이어 터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었다. 처음 가수활동을 시작할 때 나는 ‘나의 정체성’을 갖추는데 무진장 노력했었다. 나 자신의 내면을 올바로 가꾸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가수로서의 삶도 없다는 고민을 해왔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리는 현대인들, 특히 후배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줄 구심점도, 위로의 샘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가수가 되려면 ‘가수’를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아닌지부터 먼저 고민해야한다. 직업이라면 ‘나’ 자신과는 분리해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나’라는 본연의 모습을 탄탄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소문이나 험담 따위는 쉽사리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인기가 좀 하락했다고 힘겨워하고 대중적인 인기에만 연연하는 모습도 일종의 ‘준비되지 않은 자’의 모습이기에 생기는 부작용이다. 등산을 할 때도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사고가 더욱 빈번히 생긴다. 나도 각종 가십성 기사에 혹독한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러한 경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깊이 했다.
<출처: 2007.5.20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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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련꽃이 질 때 원문보기 글쓴이: 어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