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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문학》은 《문예사조》(성기조, 1995, 한국문화사)를, ‘문학도의 필독서’로 선정하여, 17호(여름호)부터 권두에 분재한다.〈편집자〉 * 강좌 순서 ⟹ 고대문학, 중세의 서양문학, ▣ 근세문학, 현대문학, 작가연구 |
근세 문학
근세 문학은 문학사의 시대 구분으로서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문학을 말하며, 17~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고전주의 문학시대에서부터 현대와의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흔히 유럽 문학사를 구분할 때 르네상스에서 현대까지를 근세 문학으로 구분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1) 그것은 고전주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절대적 권위와 도덕을 배척하며, 자아중심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 여러 경향이 그 특징이 되었고, 고전주의 시대에서의 일방적인 극문학의 번성에 비해서 소설, 시, 희곡, 비평 등 숱한 장르에 걸친 광범위한 문학의 개화開花를 보았기 때문이다.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서구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을 일컫는 르네상스2)에 대한 연대규정은 역사가들의 견해에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로 보며 유럽의 근대화를 열게 한 동인動人으로 본다.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탄생,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의 그리스 로마문화를 이상으로 삼아 이를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이었다. 그 범위는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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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희보 편 《세계문예사조사》(서울:종로서적, 1989), p. 145 참조.
2) Renaissances는 프랑스어로 본래는 재생, 부활이라는 뜻이었음.
1 르네상스의 어원과 의미
르네상스라 말의 어원은 역사적으로 보면 이탈리아에서 미술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및 역사가 빌라니 등이 잃어버린 고대의 문예 및 예술을 새 시대에 재현한다는 뜻으로 이탈리아어의 재생, 부활을 의미하는 리나시타rinàscita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테 둥의 저술에도 그러 한 사관史觀이 계숭되어 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미술가열전美術家列傳》(1550년 초판)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고트인에 의하여 독일식式,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 지오토 및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프랑스어로 르네상스라고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 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rinascimento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자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5세기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라고 파악하였다. 고대의 부흥을 통해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그들 나름의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 요소는 F. 패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문학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知的,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다.
2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 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한편 J. 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란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J. 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史》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아름 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觀은 프랑스 중심적인데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 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고,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오로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 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에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은 양편을 다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 갔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부르크하르트는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연구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오히려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너무나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부르크하르트적인 해석을 앞지를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예견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르네상스가 하나의 뚜렷한 구획이 되는 역사적 시대 구분용어로 분명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16∽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회의 혁신운동이다. 이로써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불리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한 가닥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광범하게 벌어져, 특히 17~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광의로는 역시 이에 포함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3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과 의의
로마 카톨릭교회는 14세기경부터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키 위해 공의회운동公議會運動이 활발히 일어나 피사, 콘스탄츠, 바젤 등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났다. 한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국민국가近代國民國家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계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다.
종교개혁은 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왈도, 롤러드파派를 일으킨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히미아의 후스, 피렌체의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殉敎한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序曲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출발점과 역사적 영향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나님의 뜻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가 탄생하였으며,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은 합리적, 과학적 태도로 표출되는 근대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근대인을 해방시켰다. 근대인을 진정한 의미로 해방시킨 것은 계몽주의나 비종교적 합리주의를 보이지만 사실은 종교개혁 정신이 근대사회의 특징으로 남는다.
가.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
종교개혁이나 르네상스란 말들은 교체, 재생, 그리고 반항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새 것이 옛 것에서 비롯되고, 옛 것은 또 갑작스럽게 새 것과 함께 변혁을 이루어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낳기도 한다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한편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동서양의 무역과 상공업의 번성으로 부르주아 문화가 제일 먼저 확립, 발전했기 때문이다.3)
비록 초기 자본주의 경제 형태에 지나지 않지만 중세 길드 조직의 통제성을 벗어나 자유 경쟁 경제가 발달하고 유럽 최초로 은행이 생겨 금융자본이 융성해진 것 등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의 이탈리아였다. 경제적 윤택은 예술의 소비를 고무하고 예술의 소비는 예술의 창작을 고무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이런 경제적 부흥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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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 하우저, 《문학과과 예술사》 백낙청 역,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0)p 19
흔히 문예부흥기 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봉건인습과 신학에 반대 하고 현세적인 것에서 인간성을 옹호하는 것을 찾아내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4)
문예부흥은 원래 ‘재생’의 의미를 가지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그들의 상업주의적 세계관에 많은 지식과 활력소를 제공했다. 그들은 고전의 부흥을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면서 학자, 정치 이론가, 관리, 귀족의 각 신분으로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인문주의였고 그들은 인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소위 인문학과 연관되는 것인데, 당시 인문학이라 하면 라틴어와 그리스어였다. 교양 있는 사람은 누구나 라틴어를 읽고 말하였으므로 서양의 지식인 공동체는 개별적인 국가를 초월하여 정신적인 ‘학문의 공화국’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근대적 ‘교양인’의 원형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외교가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라고 한다. 그는 후에 르네상스인들이 간직했던 이상들 -고대의 영광에 대한 강한 인식, 문학 예술에 대한 숭고한 개념, 훌륭한 삶에 대한 취향, 기본적인 평화주의- 을 앞서서 보여 주었다.5)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들인 단테, 보카치오, 초서는 중세적인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라틴어로 글을 쓴 것보다 그들의 속어로 각각 글을 썼다는 것이다.
특히 페트라르카의 경우, 그가 라틴어를 숭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어로 쓴 소네트는 이탈리아의 시 형식을 14행으로 완성한 점을 후세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지식인들은 고전(희랍, 라틴)을 수집하고 연구했는데, 휴머니스트라는 말은 고전 연구가를 뜻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그들은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통치, 전쟁수단 등 여러 분야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의 법칙까지도 합리화했다.6) 반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경제에 나타난 계획성, 목적성, 타산성의 상업주의적 합리주의가 모든 분야에 작용했던 것이다.
근세 합리주의는 르네상스 이후의 모든 발전 단계나 사회 계층에 통용되는 개님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발전 단계나 사회 개층에 따라 합리주의는 다양한 성격으로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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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철희 편 《문예사조》(서울: 이우출판사, 1985), p, 18.
5) 이재호 외 편, 《세계문예사조사》 (서울: 을유문화사, 1990), p. 127 참조.
6) A 하우저, 앞의 책, p, 22.
르네상스 부르주아의 합리주의는 당대 상황에 맞게 동적이고 반전통적이었다.7) 여기서 당대 상황이란 중세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이다. 문예부흥, 그러니까 인문주의의 가장 본질적 요소는 경험적 현실로의 전환과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 있다 르네상스 부르주아의 세속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만만찮은 반동이다. 중세는 신국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이상주의 속에 모든 인간적 욕구나 개인의 자유가 수렴되었다. 교황과 교회의 권위와 규칙에 대한 복종과 금욕이 유일의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복종과 금욕의 정적 생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인간의 발견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이고 그것은 그대로 인간적 삶의 해방이었다. 개인과 사상의 자유, 인격적 자율 등은 중세적 세계관을 극복한 몫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합리주의는 기독교적 전통에 반동적이면서도 생활의 활성화를 가져온 동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띠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자연 법칙의 연구 등 르네상스의 자연의 발견도 금욕주의의 중세적 세계관의 극복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자연 예찬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로운 현실적 삶을 포괄하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욕 해방의 관능주의 형태로도(르네상스의 조각도 마찬가지이다) 나타나 중세의 금욕주의 세계관과 교회의 권위에 투쟁하는 몫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라볼레는 인간 본성을 억제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그릇된 교육관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법률, 조례,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행해졌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시간에 일어나고, 무언가 그럴 생각이 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잔다. ……이 수도원의 모든 규칙, 가장 엄격한 규율은 다음 한 구절을 이행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이런 자연주의는 세속주의와 더불어 부르주아의 세계관인 합리주의의 중요한 한 양상이었다.
이런 합리주의가 극단적으로 세속화된 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외세로부터 이태리를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군주는 갖은 권모술수를 써야 하고 강력한 권력 통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함으로써 세속주의와 권력 정치를 옹호했다. 그리고 그는 정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현세의 시민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여 정치에 의한 세속주의를 더욱 극명하게 표방했다.
형식이 중요시되고 문체의식, 기술의식은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수확의 하나로서 이것은 고대 작가들을 읽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고대작가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미의 전형을 보여 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고대 작가가 모방되고 작품은 고대 작가의 실례가 인정하는 문학 형식에 따라 쓰게 되었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 고대 시세계의 모든 것이 차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형시의 문체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낭만주의 시대까지 계속된다. 고대 작가의 사상, 인간관, 시민의 관념도 차용된다. 고대인의 감정을 모방하는 시도도 보인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은 고대인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에 있어서 행해진다.
그리하여 시의 경우는 특히 인물과 작자, 현실적인 인물과 문학상의 인물에 부조화가 나타나 더욱 격화된다. 고대 작가의 영향 아래서 작가는 그가 표현하는 감정이나 사상을 포함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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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 하우저, 앞의 책, p. 143.
반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차츰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박학한 휴머니스트 외에 일반적인 휴머니즘의 사조가 르네상스 문학에 들어오게 된다. 요컨대, 르네상스 문학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열렬하고, 관대하고, 때로는 과격한 문학이며, 동시에 순종적이며, 자발적이며, 모든 방면으로 뚫고 나가는 문학이다.8)
이렇게 살펴볼 때,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서 비롯되어진 르네상스는 고전주의 문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절대적 권위와 도덕을 배척하고, 자아중심주의라든가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 여러 경향을 가진 근대문학을 형성케 하여 소설, 시, 희곡, 비평 등 광범위한 문학을 꽃피게 했다.
나. 종교개혁과 문학
르네상스의 세속적 합리주의는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종교개혁은 소위 면죄부 판매 등으로 부패해진 교회에 대하여 독일인 마틴 루터가 정면으로 도전한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당시 로마 카톨리시즘은 이태리의 상업 발달로 인해서 물질적으로 부패해 있었다. 카톨리시즘의 의식과 관행을 거부하고 기독교인의 신앙 자체를 강조한 루터의 개혁 운동은 독일의 봉건 제후들과 많은 평민들의 지지로 성공했다. 독일인의 돈이 로마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독일에 있는 수도원 재산을 몰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천하통일의 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경제적, 정치적 요인과 독일 국민감정 등이 카톨리시즘에 대립되는 퓨리타니즘의 성립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비록 반스콜라적이고 반교회적이었지만 기독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적으로 나타난 종교적 업적이나 교회의 격식보다 마음의 교회, 곧 종교적 신앙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종교적 신앙의 의의는 즐거운 생활과 귀중한 인간관계, 경제적, 정치적 현실의 목적에 도달하는 신앙에 있었다.
청교도들의 윤리관의 중심은 이처럼 현세적 생활에서 찾는 종교적 의의였다. 종교의 세속적 의의와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를 강조한 점에서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동일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이 그가 관여하는 모든 분야에 자율적이요 감독을 받을 필요없이 항상 스스로 선택한 목적을 추구할 특권을 가진 ‘이상적 존재'임을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서 배웠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룬 전인적 인간상이 그들 인간관의 이념이었다. 또한 그들은 천국이라는 비현실적 종교적 차원보다 현세에 관심을 두고 현세를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세속적 합리주의를 그들의 세계관으로 가졌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의 이념은 지상에서의 낙원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사상은 유럽 각국으로 전파되면서 후에 고전주의가 개화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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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P. V. Tieghem, 《근대 구라파, 미국문화사》 소림정 역,(서울:평론사, 1946). p. 8.
개인의 권위를 주장한 종교개혁운동은 문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도 유럽 각 국에서의 자국어로서의 성서 번역작업을 통해 국민들의 교양을 높여 주는 구실을 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간 수준이 낮았던 각 국의 국어가 문학적으로 향상되어 국민문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문학 발전에 있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이 갖는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근세문학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몇몇 작가와 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문학적 특질과 경향이 드러나는데 단테의 《신곡》과 《신생》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속어론》은 자국이 속어로 문학 작품을 써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글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의 라틴어로부터 벗어나 국민문학이 발생할 수 있게 한 맨 처음의 계기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언어 통일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목적에 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문주의 사상이 드러난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신생》에서 보이는 사랑은 그것이 과장된 감정의 소산이기는 하나 사랑의 감정이 미적으로 승화되는 한 예가 되고, 또 르네상스기의 문학적 수확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다.
《신곡》은 중세적인 특징인 기독교적 인간관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근대적인 요소가 중요한 것이다. 중세가 흉폭하고 전쟁을 일삼거나 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강조한 데 반하여, 《신곡》은 사색과 교양에 의하여 굳혀진 신앙을 나타내었다.
《신곡》 제5곡 ‘프란체스카’와 ‘파오르’의 불의의 사랑을 쓴 구절들은 단테가 애정 그 자체를 순수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문주의자로서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난다. 인문주의를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와 실천이라고 본다면 비록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기는 하나 구김새 없이, 왜곡되지 않게 그들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음은 인문주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단테가 기독인이고 도덕가였지만 그들의 사랑을 듣고 졸도하였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인 감동이다.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계관시인이었다. 그는 열성으로 고전을 연구하고 개인 도서관을 설치할 정도로 많은 고대 작가의 필사본을 모아들여 모범적인 고전 연구가가 되었지만 그가 이름을 얻은 것은 포에니 전쟁의 전쟁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기념한 시 〈아프리카〉를 통해서였다. 라틴어로 쓰인 이 서사시는 로마 원로원의 인정을 받아 페트라르카를 계관시인으로 만들었다. 페트라르카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것은 365편의 소네트로 된 시집 《칸조니에레》였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이 우수에 감싸인 서정시는 페트라르카가 라우라라는 여성을 성 클라라 성당에서 만난 뒤 21년 동안 마음속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순정과 갈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페트라르카는 시 이외에 여러 철학적 저술을 통하여 스콜라 철학과 중세 사상에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근대적 자연물을 발견하여 한적한 전원생활을 예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의 자기형성이라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고전의 교양과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페트라르카는 인간의 교양의 원리를 희랍과 로마의 고전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보카치오(1313∽l375)는 페트라르카와 깊은 친교를 맺었고 소설가로서도 유명하지만 고전 연구가로서도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피아메타라는 귀부인을 평생 혼자서만 사랑해야 하는 사랑의 고뇌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유명한 《데카메론》은 1348년에서 1353년에 걸쳐서 완성한 소설이다.
괴롭고 마음 쓰린 사람들에게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바라고 싶은 것이지만, 특히 이제까지 위로를 필요로 하였고, 그 누구에게선가 그와 같은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구나 그러한 것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옛 시대나 지금 시대에 일어난 사랑의 사연이나 애달픈 사연이나 그 밖의 모험적인 일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메론》 서문
라고 말하면서 문학이 위로의 기능을 갖추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이 작품이 야비하고 음란한 작품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카치오에게는 아마 그 시대상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구성의 산만함이 결점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감각적인 문장의 표현이나 개성 있는 인물들의 형상화가 높이 평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서구 소설의 가장 큰 모방체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국인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순교자 베게트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데카메론》과 같은 편제인 이 작품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중세적인 도덕관을 기사도 정신으로 집약하여 시대사조를 나타낸 작품이 있다. 또 속어를 사용한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의 공통적 특성을 보여 준다. 초서는 공적 임무 때문에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여행하여 르네상스 중심지의 문물을 익혔다.
그는 뒤에 세관장과 왕실 서기가 되는데, 이것은 그가 속어를 사용한 점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초서의 작품은 영국의 국어가 이제 영국문학의 발달에 중심 역할을 하게 될 때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여 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문필 없이도 성직자의 손을 벗어나 점차 세속화 되어가는 시대를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발표했다. 인간 운명을 극명하게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진부해져 버린 기사소설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스페인어로 쓴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서사시가 산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이 작품에서 구체화시켜 보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기사소설 최후의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평범한 일상적 사건이 서사시적 장엄성을 갖도록 고양시키며 현대 사실주의 소설의 원류가 되고 전범이 되어 주었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라는 용어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은, 속어를 써서 국민 문학을 발전시키게 했다는 사실이다.
고전 연구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가치에 고전을 융합시키고 중세적 인간관을 인간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이 살았던 당시대의 세속적인 것과 고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기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위하여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2. 고전주의 문학
가. 고전주의의 개념
고전주의Classicism는 일반적으로, 17∽18세기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일어났던 문예운동을 일컫는다. 원래 고전주의라는 말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고대 로마시민 6계급 중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제1계급의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을 2세기경의 문법학자인 아울루스 갤리우스Aulus Gellius가 최초로 문학적인 사건에 적용했던 것이다.9)
그는 《아티카의 저녁》이라는 저서에서 귀족작가라는 뜻으로 ‘Scriptor Classicus’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서민작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교양과 수입이 높은 작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고전주의’나 ‘고전적’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 ‘classicus’에서 온 것이다.10)
한편 ‘고전주의’를 영어로는 Classicism, 불어로는 Classicisme, 독어로는 Klassik이라고 하는데 넓은 뜻으로 그리스 로마 작가의 작품을 기준으로 하여, 이 지향점으로 도달하려는 문학정신과 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역사적, 범시대적 개념이다. 좁은 뜻으로는 17∽18세기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특유한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예술사조로서 한 시대를 지배하던 독특한 문예사조라 할 수 있다.11)
한편 박찬기는 고전의 일반적 개념을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첫째 : 고대적, 즉 옛 그리스의 미의 이상과 그들의 문화예술의 본질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반게르만적, 반중세적, 반기독교적, 반낭만적, 반근대적인 특성을 지닌다.
-. 둘째 : 제일급의 우수하고 모범적이라는 뜻으로 ‘classicus civis’의 어의적 해석이며, 따라서 반범속이고 불후의 가치를 지니는 뜻이 된다.
-. 셋째 : 중용과 절도, 빙켈만의 《조용한 위대성과 고상한 단순》에서도 표현된 바와 같이 고전의 가치개념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 넷째 : 귀족적인 성품 가운데 특히 세련, 미소와 경쾌는 부르거도 지적한 바이지만, 반게르만, 반고딕, 반바로크의 일면인 것이다. 쉴러는 우아와 품위로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 다섯째 : 인간성의 찬양과 인간 중심적 현세 긍정의 사상은 낭만의 중세 지향적인 신성과 종교 내지 내세로 지향하는 경향 등과 대조적이다. 즉 반카톨릭적이며, 그런 의미로서 반권위주의적인 것이다.
-. 여섯째 : ‘아폴로적' 특성이란 니체에 의한 명명으로서,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 신과 디오니서스 신을 대비하여, 전자는 광명의 신이며, 질서와 명석, 균형과 조화, 절도와 고결을 대표하는데 반하여 대지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디오니서스 신은 그 반대로 생성, 변화, 취기, 열중, 정열, 충동 등 무한계의 유동성과 가능성이 내포된다. 이와 같은 대조점을 ‘고전적’과 ‘낭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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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선영 편 《문예사조사》(서울:민음사, 1987), p. 17.
10) 박철희 편 《문예사조》(서울:이우출판사, 1985), p. 12.
11) 문덕수 《세계문예대사전》(서울:성문각, 1975), p. 104.
의 대립개념으로 구별한 것이다. 따라서 ‘고전’은 ‘아폴로적’이고 낭만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 일곱 번째 : 형식의 아름다움, 질서정연하고 법칙을 중요시하는 ‘고전’의 특성은 시적 표현에 있어서도 수사적이며, 비장한 미를 함유한다. 이것은 후일 프랑스 고전의 모방 등으로 미사여구를 농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나. 고전주의의 기본 성격
고전주의 이론가들은 무엇보다도 이성을 문학의 기초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본질상 단순 명쾌함과 조화와 질서 및 명석한 판단과 법칙 따위를 좋아하며 존중한다. 그것은 예술창조에 있어서의 천재의 역할을 경시하게 되며 천재성보다는 창작 기술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집중시킨다.
고전주의적 작가들은 문학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힘쓴 한편 모든 사람들이 공동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 특히 연애, 원한, 질투 같은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문학에 제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전주의적 경향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생겨났지만, 17~18세기에는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맞아 영국과 독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 이후 유럽의 지성인들은 그 경향을 경멸하여 의고전주의pseudo-classicism라고 불렀다. 질서와 통제를 문학의 원리로 삼는 고전주의는 어느 특정한 시대의 문예사조를 지시하는 명칭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현대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고전적 정신과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1 자연의 모방
고전주의적 이론과 그 기본적인 성격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진주의 문학은 문학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객관성과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고전주의 문학의 다른 특징들은 이 두 가지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는 무엇보다도 모방이론으로 특징지어진다. 모방론은 효용론, 표현론, 존재론과 더불어 네 가지 대표적 문학관 중의 하나이다.
문학은 회화, 조각 같은 다른 예술 양식에 ‘대비'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며 자연이란 용어도 많은 자연관이 가능하듯이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고전주의의 이론적 특성은 정작 이 자연의 의미에 근거하고 있다.12)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을 살아있는 유기체living organism로 보았다. 유기체란 부분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은 여러 가지 부분들이 적절하게 얽혀서 이루어진 유기적인 전체, 곧 생명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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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세영, 《문예사조》(서울: 고려원, 1938), p. 23.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을 자연의 모방이라 했을 때, 그것은 곧 유기체의 구성원리, 즉 질서와 균형을 모방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연의 모방은 인간본성과 질서의 모방으로 귀결지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인간성과 질서에 대한 논의는 신고전주의 문학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모방의 단일성과 동일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이론에서도 중요한 이념이 되어 있지만, 호라티우스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예술적 미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된다.
호라티우스는 문학의 본래적 창작의도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배려는 작품 전체의 질서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뒤에 큰 영향을 끼친 적합성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호라티우스가 힘써 내세우는 적합성은 일종의 모방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적합성의 개념에 따르면 문학은 역사와 달라서 특수한 인물의 특수한 행동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호라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모방 개념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훨씬 상식적이고 실용적이었다.
영국 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드라이든도 《극시론 An Essay Dramatic Poetry》에서 문학이 자연, 즉 인간 본성의 모방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에 따르면, 희곡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모방하는 것인데, 그것도 정확하고 생생한 재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하고 생생한 인간성의 모습은 인간의 감정과 기질의 재현에서 오며, 그 감정과 기질은 운명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성의 모습인 감정과 기질이 인간을 좀 더 박진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알렉산더 포웁도 그의 《비평론An Essay on Criticosm》에서 자연, 즉 인간성은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 자연을 따르라, 그리고 언제나 동일한
자연의 올바른 기준에 의해 판단력을 구성하라.
틀림없는 자연! 언제나 거룩히 빛나는
맑고 변함없고 보편적인 빛,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 힘 그리고 미를 주는 동시에
예술의 원칙과 목표 그리고 시금석이 된다.
포웁에게 있어서 자연은 예술의 근원이요, 목표요, 시금석이다. 동시에 그것은 예술에 생명과 힘과 아름다움을 준다. 그러므로 문학은 자연의 보편적 원리를 모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연의 모든 부분을 관찰해 보았을 때 자연과 호메로스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은 곧 고전을 모방하는 것이라 했다.
한편 벤 존슨은 시인이 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요건을 말하는 중에 셋째 요건으로 고전의 모범을 모방화하고 했다. 그는 모방은 손재간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형처럼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모방이 아니라 일종의 원형 모방이라 할 수 있다. 즉 노예처럼 흉내
내지 말고 꿀벌이 가장 좋고 정선된 꽃(훌륭한 인물)에서 꿀을 만드는 것처럼, 호메로스 같은 인물의 작품에 나타난 시적 기질이나 기술을 섭취하여 원작품과 동일한 그런 꿀(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규범적 모방론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의 방법을 잘 모방하여 《아에네이스》라는 대작을 남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 경우 모방은 고전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창작원리, 즉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영국 고전주의 이론을 완성한 새뮤얼 존슨도 그의 교양소설 《래실러스》 10장에서 시인을 ‘자연의 해설자’로 보면서 시인은 누구나 다 인지할 수 있는 보편적 본성을 정확히 재현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고전주의는 자연을 보편성과 불변성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런 자연관에서 자연 전형적인 인물이 제시된다. 전형적 인물은 인간 본성의 여러 면을 유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그런 모범은 고전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고전주의자들은 자연, 곧 고전을 모방
하라고 했다.
2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고전주의의 또 하나 커다란 특징은 이성과 판단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이다. 특히, 브왈로는 그의 유명한 《시법 L'Art·poetique》에서 작가들에게 이성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이성의 멍에에 고통 없이 각운에 순응하며
그 멍에는 각운을 부자연스럽게 하기는커녕
각운을 도와주고 풍부케 한다
그러나 등한시 되면 각운은 탈선하리라
그리고 각운을 붙잡기 위해 의미는 그 뒤를 따라간다
그러나 이성을 사랑하라. 당신의 글을
이성으로부터 빛과 가치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제1절 32~38행)
브왈로에게 있어서 이성은 창작의 원리이고 비평의 원리였다. 드라이든은 그 이성을 ‘위트’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다. 이성, 곧 위트를 창조적 능력으로 본 점에서 브왈로와 드라이든은 같다. 그러면서도 드라이든은 그런 창조적 능력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고전주의자들은 대부분 건전한 판단력을 중시하게 된다.
한편 드라이든은 문학적 표현 능력을 통제하는 한 방법으로 희곡 문장에다 각운을 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에 의하면 각운은 시의 구조적 요소로서 상상의 무질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판단의 우위성을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라이든과 마찬가지로 포웁도 그의 《비평론》에서 문학적 능력은 판단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솟구치는 시의 정신을 날개 돋친 용마에 비유하였다. 용마는 기운차게 날고 있지만 인도하는 주인이 없으면 힘 빠질 때까지 날 뛸 뿐이지 갈 만한 곳으로 가지 못한다.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러므로 힘센 용마일수록 더욱 튼튼한 고삐와 더욱 확실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13)
시 정신의 경우에 있어서 고삐와 확실한 목적지가 되는 것은 판단이다. 시적 능력은 판단에 의해 통제될 때 그 나름의 참다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적 능력을 통제하자면 자연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을 고전주의자들은 규칙으로 보고 있다.
시의 규칙은 브왈로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통제를 가하지 않으면 무질서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모르고서는 자연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신고전주의자들은 이성과 규칙을 동일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이성과 취미도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성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보듯이 취미도 옳고 그름을 미세하게 구별하는 능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취미에 의해서 이성적 기준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고전주의적 취미의 개념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이성과 판단, 규칙과 취미를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3 규칙의 준수
고전주의 이념 중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것은 시의 방법, 곧 규칙이라 할 수 있는데, 포웁은 합리성은 곧 자연의 본질이므로, 그 방법을 따르면 곧 자연을 따르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칙들은 방법화된 자연이라 한다. 자연을 구현하여야 한다고 하는 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시의 규칙인 것이다.
합리주의 소산인 상업자본주의는 16~17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이스파니아, 폴란드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장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보다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경제체제가 자유방임주의를 폐기하고 통제체제의 성격을 띨 때 소위 중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초기 자본주의가 이 시기에는 중상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중상주의는 많은 재화의 확보를 목표로 국민의 경제적 활동,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경제정책이다. 경제에 내려진 통제가 정치적, 행정적 영역에 가해졌을 경우가 절대주의다.
이처럼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로서 절대주의가 발생한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일반에 까지 국가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절대주의의 통제란 규칙에 의한 질서화다. 규칙에 의한 질서화란 ‘규격화’다. 이런 점에서 절대주의는 ‘규격화’를 달성하려는, 절대군주를 비롯한 소수자의 적극적 시도로 정의할 수 있다. 절대군주 체제에서 모든 국민은 철저하게 규칙을 준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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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상섭, 《르내상스와 신고전주의 비평》(서울:민음사, 1985) p.202
이런 규격화는 문학과 예술에까지 파급되어 고전극의 삼일치와 같은 문학적 법칙을 극단적으로 준수하고 개성적이고 특수한 것보다 규범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을 빚었다. 이 규칙의 준수가 바로 창작의 합리주의였고 따라서 이것은 정치, 경제의 규격화라는 합리주의 구조와 상응했다.14)
고전주의자들이 존중하고 있는 삼일치의 법칙은, 16∽17세기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연극 비평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권유한 행동의 일치unity of action에다 장소와 시간의 일치를 추가하여 소위 삼일치의 법칙을 만들었다.
모든 사건(행동)은 하나의 플롯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그 가지 노릇을 하는 곁 줄거리는 그 중심이 되는 하나의 플롯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원리이다. 시간의 일치는 연극의 사건이 하루 24시간 안에서 완결되어야 한다는 규칙이고, 장소의 일치는 그 사건이 한 장소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규칙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새로 해석 보완하면서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을 수정한 이래, 벤 존슨은 그것을 지켜서 작품을 쓴 최초의 영국 극작가였다. 밴 존슨은 《각기 기질이 다른 인간Every Man in His Humour》이라는 작품의 서문에서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나는 인간의 사건을 한 극중에서 재현시키는 것이 셰익스피어 류의 극이 갖는 당대의 악습이라고 비꼬고 스스로 고전적 법칙을 이상으로 하는 작가로 자처했다. 드라이든도 《극시론》에서 삼일치의 법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을 엄격히 지키면 내용의 빈약성을 면할 길이 없고 상상력의 법위가 좁아진다고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프랑스 비평가들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삼일치의 법칙은 대체로 영국의 문인이나 관객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드라이든은 현대의 프랑스 희곡보다도 영국의 희곡을 더 우수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삼일치의 법칙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의 정신 곧 다양성과 생명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서설》에서 새뮤얼 존슨은 더욱 삼일치의 법칙은 겉치장의 기술에 불과할 뿐 희곡에 필연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삼일치의 법칙은 신고전주의의 한 강령이기는 하지만 영국에서는 프랑스나 이탈
리아에서처럼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고전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시의 법칙에서 적합성은 ‘정황에 알맞게 처신함’, 곧 예절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후일 문학적 원칙으로 사용되게 된다. 이 적합성의 원리는 이미 고대 로마의 호라티우스가 그의 《시법》에서 제일 먼저 주장하였다.
각 등장인물은 그의 대사로 자기의 성격을 묘사하게 하라
확실히 현저한 차이가 있다.
등장인물이 신인가 영웅인가에 따라~
그에 의하면 한 계급의 등장인물은 그 계급에 맞는 말씨를 쓰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은 웃음거리가 되고 실패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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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세영 편 《문예사조》 (서울:고려원, 1983), p. 17.
이러한 이론은 르네상스 때 비평의 주종을 이룬다. 르네상스 때 비극과 서사시는 왕, 영웅이 주인공이고 무대도 주로 궁중이었다. 희극은 중류계급이 주인공이고 소극은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 등장하였다. 이 적합성의 법칙은 로마시대의 수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강조되었고, 17~18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에 와서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이다.
토머스 라이머의 주장에 의하면,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시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죽여서는 안 되며(여자의 신분이 남자보다 우위에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 하인이 상전을 죽일 수 없으며 보통사람이, 더더구나 백성이 왕을 죽일 수 없으며, 그 반대도 안 된다. 결투의 법칙에 따르자면 결투장에 같이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 살해하는 것을 어울림의 규칙은 용인하지 않는다.’15)
라이머의 주장에 따르면 적합성의 규칙은 일종의 사회의 규범인 동시에 문학의 내용을 지배하는 규칙이 된다. 드라이든의 다음과 같은 말도 적합성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승전보를 접한 임금의 기쁨은 애인에게서 편지를 받은 어릿광대의 황홀 같이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우리 영국 비희극은 우리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적으로 야만스럽다. 웃음과 심각함은 서로를 파괴시킨다. 유쾌한 과부가 상복을 입은 채 웃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으므로 허용될 수 없다.l6)
시적 정의도 보다 높은 의미의 적합성의 이념으로 볼 수 있다. 이 용어는 17세기 후반의 영국 비평가 토머스 라이머가 만든 말로, 여러 작중 인물들의 선행이나 악행의 정도에 따라서 그 작품의 끝에 가서 주어지는 상벌을 뜻한다. 시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적격율과 도덕율의 지배를 받아야지 불합리한 현실적 사물의 이치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드라이든도 선한 사람이 행복을 얻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을 보여주어 관객을 즐겁게 한다는 이유로 시적 정의의 원칙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애디슨은 신고전주의자들이 불멸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시적 정의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비극적 효과를 말살시키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
고전주의자들은, 애디슨 같은 부정적 반응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비극에서는 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어울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볼 때 이 시적 정의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면 효과는 비교적 줄어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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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상섭, 앞의 책. p. 153에서 재인용.
16) 이상섭, 앞의 책. p. 154에서 재인용.
4 교훈성
문학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프랑스가 쾌락을 더 강조한 반면 영국은 교훈을 더 강조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전주의 이론은 문학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하는 데 그 특성이 있다.
호라티우스는 가르침과 즐거움, 그 둘을 다 겸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시인의 목적은 가르침이나 즐거움을 주든가 아니면 즐거움과 삶에 대한 교훈을 결합하는 데 있다. 그러나 교훈과 즐거움을 결합해서 문학의 목적으로 세운다면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주된 목적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호라티우스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즐겁고도 유익한 것을 문학의 효용가치로 본 점에서는 시드니도 마찬가지다. 시드니는 《시의 옹호》에서 시는 자연의 모방이며 자연은 인간이 이상을 관조하도록 영혼을 고양시킴으로서 인간을 개선하는데 기여한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신고전주의 문학론에서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호라티우스나 시드니에게 있어서처럼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고전주의 견해를 가진 비평가 존 데니스가 《시비평의 기초》에서 ‘시의 종속적 목적은 즐거움이요, 궁극적 목적은 가르침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시 교훈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즐거움을 더 강조하고 영국의 고전주의자들은 가르침을 더 강조한다고 하지만, 고전주의는 문학을 이성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지주의적이고 즐거움보다는 문학의 도덕적 기능을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5 이상적 미
고전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진실과 미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자연의 본질은 균형과 조화이고, 균형과 조화가 있으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근거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균형과 질서에서 온다는 것이다. 윌리엄 콩그리브도 ‘균형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균형과 조화가 부족할 때에는 눈도 귀도 즐거울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블랙모어는 구조적인 의미에서 다양한 행위의 통일 그것을 아름다움의 근본적 요소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조적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자연의 본질적 균형과 조화를 작품 구성의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부분들이 하나의 유기적 동일체로 구성되어 균형과 질서가 깨뜨려지지 않으면 이상적 미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또한 고전주의자들은 단순성을 미적 요소로 강조한다. 존 허즈번즈가 성경은 두 가지 아름다움, 곧 단순함과 숭엄함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고전주의적 미의 한 요소를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함의 최고 상태는 침묵과 절제다. 그래서 포웁은 ‘극단을 피하라’고 하였다. 극단을 피하라고 하는 것은 곧 절제와 중용을 요구하는 것이고, 절제, 중용의 요구는 단순성의 미학으로 연결된다.
당대 귀족들에게는 ‘장중함’으로 수용된 단순성은 명료성, 간결성과 함께 원래 부르주아의 문학적 취미였다.
단순성은 무절제와 괴기성, 야만성의 바로크적 요소와 복잡성과 신기성의 형이상학파적 요소와 대립되는, 신고전주의의 미적 요소다. 그것은 규칙 준수와 지적 이해를 요구하는 합리주의의 표본적 산물이다.17) 즉, 절제와 중용은 단순성의 미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실로 쉬운 글은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고전주의자들의 미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성은 창작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 고전주의의 모든 미적 특질을 규정하고 규칙과 문학적 기교를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전주의 문학은 이러한 문학이론과 세계관을 바탕으 로 하여 프랑스, 영국,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다. 프로방스의 고전주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본성과 이상을 탐구하고 문학 장르에 형식적 규범과 전형을 세운 르네상스 문학의 특징은 프랑스나 영국, 독일에서 극복, 계승되면서 고전주의로 개화했다.
한편 프랑스는 이태리와의 상업무역과 지적교류가 촉진되고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따라 그리스의 고전학자들이 대거 프랑스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 전반기에 걸쳐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궁정 시인인 마로는 복음주의 교도였기 때문에 겪게 된 빈곤, 투옥, 망명의 역경 가운데서도 귀족과 승려의 횡포를 풍자하는 많은 시를 남겨 놓았다.
라블레는 이 시기의 인문주의와 복음주의의 특징을 가장 훌륭하게 대변한 문학가였다. 의사이기도 한 그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거인왕 부자를 동일 인물로 한 일련의 산문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초인적인 영웅의 모험담이지만 중세의 기사도 문학과는 달리 황당무계하지 않고 유머와 풍자가 깃들어 있으며 사실의 정신과 복음주의를 반영하면서 중세를 비판했다. 그리고 몽테뉴는 라블레를 거쳐 전승되어 온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을 프랑스에 뿌리박게 한 사상가이다.
라블레, 몽테뉴의 문예부흥기를 거쳐 개화된 프랑스의 고전주의는 대체로 1660년을 경계선으로 하여 전, 후 두 시기로 나눠진다. 루이 14세가 친정하기 직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롱을 중심 무대로 전개된 전반기 문학과,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통제체제 아래 전개된 후반기 문학이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4세의 통치시대(1589~1610)인 16세기 말엽으로부터 르네상스 정신이 변모하면서 중용과 고상한 취미를 존중하고 조화와 질서를 으뜸으로 삼는 고전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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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세영, 앞의 책, p.37
선구자로서는 말레르브(1555∽1628)라 할 수 있고, 산문에서는 발자크(1799∽1850)같은 소설가가 그 개혁을 대표하게 된다.
루이 14세 시대, 그것도 1660년으로부터 1685년에 이르는 25년간이 고전주의의 최전성기였다. 파스칼, 몰리에르, 라신느, 라 퐁텐느, 보쉬에, 브왈로 등이 고전주의의 황금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외 정세가 1685년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아름다운 균형의 시대는 기울게 된다.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 사상이 권위에 대해 비판의 눈을 돌리게 되며, 신구논쟁을 계기로 하여 고전파의 예술은 치명적인 반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18) 그런 경로를 거쳐 루이 14세 만년에는 고전주의의 쇠퇴를 보게 된다.
말레르브는 앙리 4세와 루이 13세를 섬긴 궁정시인이었는데, 그는 프랑스의 국어를 순화하고 시의 규율과 형식을 혁신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00년 이후지만, 그보다 먼저 그는 인간의 보편성을 제재로 다루는 일과 복잡하고 장황한 문장이나 어귀를 물리치고 명쾌하고 간결한 말을 사용하는 일이나 질서와 규칙을 세워나가는 일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의 《마리드 메디시에게 주는 오드》를 비롯한 125편의 시는 잘 다듬어진 힘차고도 완벽힌 것들로 고전파 시들을 낳게 한 원동력이 된다.
한편 17세기 문학의 온상으로 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살롱이었다. 살롱은 문학에 대한 관심이 현학적인데서 인격 세련과 사교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바뀐 시기에 문학의 감상법과 평가 기준의 확립을 필요로 한데서 발생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랑부이에 후작 부인이 주재한 살롱인데, 그 전성기가 1620년부터 1645년까지였다. 이 살롱의 모임에서는 고전주의적 속성이자 귀족의 태도인 품위와 절제를 갖도록 했고, 또한 우아한 예절과 세련된 취미를 길렀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를 비롯한 언어 순화를 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살롱에 모인 귀족들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한 것이 뒤르페의 긴 소설 《아스트레》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사교인들은 이 소설에 그려진 변함없는 사랑과 우아한 예절, 남성적인 희생정신과 헌신을 그들의 이상으로 삼았다.
루이 13세 때 당시의 재상, 리셜리외가 이 살롱을 공공기관화 하기 위해서 l637년 40명의 회원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스를 설립했다. 이 아카데미의 임무는 프랑스어의 순화를 위해 사전과 문학서적을 간행하는 일과 문학에 대한 공식적 평가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데카르트, 파스칼의 철학과 코르네이유의 희곡이 등장하여 프랑스의 신고전주의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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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붕구 외, 《새로운 프랑스 문학사》, (서울:일조각, 1983), p.59.
코르네이유는 1636년에 비극 《르 시드》를 발표하여 프랑스 고전주의의 기초를 구축했다. 《르 시드》는 사랑과 명예의 갈등을 그린 5막 32장의 운문극인데, 이 작품은 삼일치의 규칙에 어긋났다 하여 소위 ‘르 시드 논쟁’을 가져왔다. 그래서 그 뒤 그는 삼일치를 준수하는 극작품을 써 그 후 조국애를 다룬 《오라스》(1640), 죄를 용서해 주는 관용을 다룬 《신나》(1640), 신앙을 위해 애정과 생명을 희생하는 순교를 그린 《폴리외크트》(1643) 등과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코르네이유의 공적은 등장인물들의 심리 문제를 파고든 데 있다. 그 특색은 자기의 극을 인생과 닮게 하기 위해 삼일치의 법칙을 적용하고, 단일한 줄거리를 정확하고 웅변적인 문체와 자유롭고 힘찬 운율로 표현한 데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당대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문학사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전통을 깨뜨리고 프랑스말로 쓴 《방법서설》이 프랑스 근대 산문의 발달사상 큰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이 이성의 힘에 대한 강력한 자각을 일깨웠으며 인간정신의 보편적 형식을 탐구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하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논리를 으뜸으로 삼은 그의 사고는 명쾌한 표현을 낳았고, 그것은 고전주의 정신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
한편 파스칼은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와 《팡세》이다. 전자는 보편적인 생활 규범을 탐구하며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를 갖는다. 후자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 노트해둔 메모지들을 사후에 정리해서 출판한 것으로, 열렬한 논리와 억압된 정열, 인간성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성실성과 내적 몸부림으로 가득 차있어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시정은 언제나 간단하고 그 표현은 간결하고 정확해서 고전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662년부터 고전주의의 황금기로 들어가는데, 이 시기에 활약한 작가로 제일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은 라 로슈푸코이다. 그는 1665년 《잠언집》을 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을 비판한다. 즉 모든 덕은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듯이 이기심에 귀착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심정을 가장 날카로운 성실성과 정확하고 명료한 문체로 파헤치고 있다.
몰리에르의 주요한 걸작으로는 《아내의 학교》, 《타르튀프》, 《돈 주앙[염세자]》, 《구두쇠》, 《여러 학자》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박진감이 넘치는 성격묘사로 보편적인 여러 전형, 아르놀프(허영적 인간), 타르튀프(호색적 위선자), 돈 주앙(신앙 없고 방탕한 호색한), 알세스트(허위를 미워하는 정의파), 아르파공(구두쇠), 필랑멩트(현학적인 여학자) 등을 창조했다. 이처럼 인간의 성격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파악하여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다.
서정적 우화시를 쓴 라 퐁테느는 《우화집》에서 일회적인 이상한 사건을 피하고 인류에게 반복되는 사실을 논증하는 등 보편성을 지향하는 태도를 보여 주면서 비평력과 창작력을 겸한 작가가 고전주의 작가라고 했다.
프랑스 고전극을 완성하고 심리 해부극을 창시한 라신느는 삼일치를 엄격히 지킨 《앙드레 마크》로 극단에서 자기 위치를 굳혔다. 그는 개인적 체험보다 당대인들의 흥미를 끈 역사적 사건과 신화에서 주로 소재를 택했다. 따라서 그의 등장인물은 고대역사나 신화의 이름을 차용했다. 그의 모든 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징은 삼일치의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 성격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 구성이 긴밀하고 표현이 간결하다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브왈로는 고전주의 문학이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시작법》에서 시적 천재의 중요성과 이성과 규칙의 존중, 인간성과 자연의 모방 및 정확한 표현 등을 역설했다. 이러한 고전주의는 18세기에 들어와서 과거의 규칙과 권위를 거부하고 문명과 사회를 비평하는 성격을 띠면서 그 꽃은 시들기 시작하고 점차 계몽문학으로 변모하게 된다.
라. 영국의 고전주의
영국의 고전주의는 엘리자베스 시대와 청교도 시대를 거쳐 왕정복고 시대에 개화되었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에드먼드 스펜서는 본질적으로 낭만적 시인이지만, 고전의 길을 걸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립 시드니는 로망스를 쓰기도 했지만, 영국 최초의 문학비평 논문인 《시의 옹호》(1595)에서는 그의 고전주의적 입장을 분명하게 하였다. 두드러진 특징은 영국비평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소개한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시론은 주로 호라티우스의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시드니의 문학이론체계는 독창적인 것은 거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준거하고 있다.
엘리자베드 시대의 르네상스 정신을 집약적으로 구현한 것은 셰익스피어이지만 그 당시 가장 깊은 고전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벤 존슨이었다. 그는 윌리엄 캠든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받아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을 많이 읽었다. 따라서 존슨의 작품에는 그리이스 로마의 시인이나 극작가 또는 사상가의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존슨 극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 대사에 고전 작품의 문구를 답습한 곳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존슨의 극이나 시 중에 고전 작품의 문구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인용한 것은 거의 없다. 다만 고전 작품의 작풍이나 고전 작가가 설정한 법칙을 자신의 창작 기준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삼일치의 법칙을 준수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희극의 성격은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할 수 있어 누구나 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의 상황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그의 사실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밴 존슨은 극 작품 이외에 320여 편의 시를 썼는데, 이 시들도 대부분 개인적인 생활 경험을 표현한 것이거나 고전적 색채를 띤 것 또는 풍자성이 강한 것들이다. 그는 고전주의적 문학이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문화와 고전주의 문학사상이 쏟아져 들어 왔다. 이런 문학사상은 드라이든이나 포웁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고전주의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드라이든은 《그라나다의 정복》 또는 《오렝-지브》 등이 그의 대표되는 영웅비극이라 할 수 있다. 왕정복고기에 있어서 영웅비극은 주로 용기와 아름다움과 사랑을 세 가지 미덕으로 찬양했지만, 드라이든 자신도 사랑과 용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극 중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명예를 선택하느냐, 사랑을 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서로 모순되는 입장에서 괴로워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극적 장면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영웅 로망스의 세계인 것이다.
또한 드라이든은 《극시론》(1688)에서 광범위한 문학이론을 전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고대인과 근대인과의 우열 비교론, 둘째 프랑스 극과 영국 극과의 우열 비교론, 셋째 압운시극의 변호론 등으로 되어 있다.
드라이든은 프랑스의 고전주의 문학 이론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드라이든이 포함하고 있는 문학이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오늘에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초오서, 셰익스피어, 스펜서, 벤 존슨, 밀턴, 존 단과 같은 영국 작가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왕정복고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는 드라이든이지만 18세기 대표적인 시인은 포웁이다. 포웁은 18세기 전반부의 소위 오거스틴 문학의 일인자였다. 병약과 인간 혐오증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는 호머의 서사시를 완역하고 창작은 고대 작가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포웁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즉 고전문학에서 그 규범을 구했으며, 표현형식으로는 프랑스 고전주의적인 격조 높은 시형과 간결, 명료하며 경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정열적인 심장보다는 질서 있는 구상과 단순 명료한 사고를 존중했다.
신고전주의라 칭하게 되는 이유는 형식은 고전에 준거하고 있지만, 그 내용과 정신은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 인간, 문학론을 시의 형태로 썼는데, 그 전형적인 것은 《비평론》(1711), 《인간론》(1733) 등이다.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성 존중인데, 그 입장은 비평적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풍자설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전반을 포웁이 대표한다면, 후반은 새뮤얼 존슨이 대표한다. 오거스틴 문학은 존슨에 와서 황금기를 갖는다. 존슨은 고전의 양식에 따라 《인간 욕구의 공허함》(1749)으로 영국 풍자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업적은 《영어사전》, 셰익스피어의 교정본 서문과 주석, 《영국시인열전》 등 비평에 있다. 특히 《영국시인열전》에서 셰익스피어로부터 포웁에 이르기까지 과거 1세기 동안 영국 시문학을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평설했으며 고전주의적 취미에 위배된 형이상학파 시에 까지도 불편부당의 판단력으로 그 장점을 밝혀 놓았다.
이런 시민 계급의 문학과 이론은 영국 고전주의의 장점인 동시에 쇠퇴를 의미했다. 문학의 도시화에 거역하여 자연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신고전주의도 점차 쇠퇴하여 낭만주의 문학에 길을 내주어야 했다.
마. 독일의 고전주의
독일의 고전주의 문학은 근대적 국가를 배경으로 경제적 번영 속에서 부르주아 또는 귀족화 된 부르주아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16세기 농민반란 후 봉건적 대지주들인 지방 영주들은 농민과 부르주아를 문제집단으로 위험시했고 종교개혁 당시 과감하게 교황과 대결했던 루터도 민중을 외면하고 독일의 교회들을 이 영주들의 지배하에 두었다. 더욱이 17세기 30년 전쟁은 지방 영주들에 의한 지방분권 체제가 강화되고 상업 자본주의가 좌절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부르주아는 영주들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나약한 계층이 되거나 현실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이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고전주의는 프랑스와 영국의 쇠퇴기에 해당하는 18세기 말에 겨우 개화되기 시작했다.19)
이 계몽주의 시대에 활약한 작가로는 클로프스토크, 비일란트, 레싱, 헤르더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 문학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일의 국민문학을 건설하려는 의욕을 품고 그리스 문화로 경도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클로프스토크는 인간의 구제를 노래한 종교적 서사시 《구세주》를 남겼고, 비일란트는 정신적으로 뛰어난 인물의 내적 생활을 그린 《아가도온》과 낭만적 영웅시 《오베론》을 남겼다.
레싱은 프랑스 고전극의 모방을 배격하고, 《민나 폰 바른헤름》(1767), 《에밀리아 갈로티》(1772)와 같은 평민적인 희곡을 써서 성공했다. 그의 대표작은 종교상의 자유와 관용을 다룬 《현자 나아단》(1779)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그의 예술론을 피력한 《라오콘》(1766) 등과 같은 평론을 남겨 독일 고전주의의 선구자가 된다.
1770년경 계몽주의가 지나치게 이성만을 존중하게 되자 이에 반동하여 이성보다 감정과 정열을 앞세우는 새로운 경향의 문학이 발생한다. 이것을 흔히 ‘질풍노도의 문학’이라 한다. 질풍노도란 말은 원래 클링거의 정열적인 희곡 작품명인데 그대로 하나의 시대사조의 명칭이 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헤르더였다. 그는 《근대 독일문학에 관한 단상》에서 문학적 식민지를 극복하고 독자적 독일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성보다도 직관을 중시하고 감정을 인식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일민요 40수가 수록된 《세계민요집》을 내어 독일 국민문학의 기초를 쌓았고 민요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시켰다. 여기서 그는 특히 기교의 산물인 예술시와 감정의 자연발로인 자연시를 분류하여 프랑스 고전주의의 인위적, 귀족적 취미를 배격하고 살아 있는 인간의 싱싱한 감정을 작품화할 것을 주장해서 괴테에게 영향을 주었다.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연감정과 인습적인 구사회의 풍속과 권위에 대한 영향을 테마로 한 것으로 질풍노도의 사조를 집약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고전주의는 이 질풍노도에 대한 반동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질풍노도란 그 성격상 ‘고전주의적’이 아니라 ‘낭만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고전주의는 질풍노도의 반명제로서 초기 고전주의와 그리고 질풍노도의 비합리주의와 초기 고전주의의 합리주의가 융합된 전성기 고전주의로 나누기도 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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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세영, 앞의 책, pp. 50-51.
20) 김용직 외 편, 《문예사조》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7), p. 39.
실상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독자적 결합에 독일 신고전주의의 특색이 있으며 고전주의를 극복하고 낭만주의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를 지양해서 고전주의가 형성된 인상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독일의 고전주의는 괴테와 실러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괴테는 그의 희곡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티》는 인문주의적 이상을 조화로운 양식을 갖고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본격적인 고전주의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토르쿠아토 타소》도 그 원숙한 운문과 전체적인 통일로 인해 고전주의 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호리티우스와 같은 고대 로마시인을 연구해 본 그는 관능적인 삶의 충실을 고대의 2행시 형식을 가지고 노래한 《로마 비가》을 썼고, 호메로스의 서사시 형식을 갖고 프랑스 혁명의 파괴성을 비판한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썼다. 그러나 《신과 무희》는 그리스로 기울어졌던 그로 하여금 게르만적인 독일 고전주의로 나아가는 전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양 소설의 대표격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그는 정관적이고 개인주의적 생활 태도에서 활동적이고 사회적인 공동체 경험을 중시하는 인간상을 제시했고, 세계적인 걸작 《파우스트》에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삶에 충실한 인간상을 보여 주었다.
실러도 처녀작 《군도》로 프랑스 혁명정부로부터 명예시인 칭호를 받을 만큼 초기에는 질풍노도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괴테와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 《발렌시타인》, 《오를레앙의 소녀》, 《빌헬름 텔》같이 민족애와 자유, 평등, 정의를 테마로 한 성숙한 정치극들을 썼다.
그는 또한 칸트의 철학을 공부하여 《의미와 존엄》, 《숭고론》, 《소박문학과 감상문학》 등 일련의 미학이론도 썼고 괴테와의 공동 집필인 《희곡 문학과 서사시 문학》이란 장르론을 펼쳐 실제 이에 맞추어 희곡 《발렌시타인》을 창작했다.
괴테와 실러에 의해 완성된 독일의 고전주의는 단순히 고전의 형식을 모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는 생명의 약동을 추구하고 외적으로는 장중미를 형성하고자 하는 고전의 정수를 파악하였으며, 영원히 보편타당한 인간의 본성을 균형과 조화의 미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독일의 고전주의는 전형적이고 규범적이며 지속적인 것을 이상으로 하면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낭만주의 문학으로 옮겼다.
바.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18세기에 들어와서 신고전주의는 과거의 규칙과 권위를 거부하고 문명과 사회를 비평하는 성격을 띠면서 계몽문학으로 변모했다.
계몽주의는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를 말하는데 문학 면에 있어서 신고전주의와 거의 일치한다. 형식은 이성의 한 표현인 질서와 조화를 구현하기 때문에 존중되었다. 문학적 법칙도 기하학의 공리처럼 자연을 이성에 의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시대를 합리주의 시대라고 한다.21)
계몽주의는 과거의 전통이나 지배자(예컨대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체제)에게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유와 자신의 사유와 비판력으로써 과거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자유주의 사상이다.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볼테르는 산문소설 《깡디드》와 《자디그》에서 당대 사회와 사상의 불합리성을 비판하였다. 그의 통렬한 풍자는 시와 극, 그리고 논문의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디드로가 기획하고 여러 학자들의 참여로 나온 《백과전서》는 단순히 지식의 집대성이 아니라 절대주의 체제하의 정치, 사회, 교회의 제도와 모든 편견들을 비판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한편 루소는 볼테르가 주지적 계몽주의자로서 이성에 의해 문명이 진보하면 인간은 이성과 지식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입장인데 반하여 감정을 역설하고 문명의 인위성이 도리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하여 성선설의 입장에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명제는 《인간 불평등론》, 《에밀》, 《사회계약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도 이성 만능에 대립하여 감정을 예찬하고 감정의 해방을 주장한 작품이다.
한편 18세기에는 목가문학도 유행했다. 소설 장르에서는 과거의 전형성이 없어지고 복잡하고 모순된 인물을 제시하며 심리학적 내면 묘사에 치중하고 주인공이 비영웅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처럼 프랑스의 고전주의는 중산 계급이 절대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상승되는 것을 의미한 계몽주의로 변모, 쇠퇴하면서 낭만주의 문학의 발생을 기다려야 했다.〈여름호(21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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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서울:민음사, 1988), p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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