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비가 예보되더니 기어이 봉수대에서 비를 만났다. 옥폭동(玉瀑洞)으로 가려던 길을 바꿔 다시 봉원사로 돌아와 삼천불전 긴 처마 밑으로 들어섯다. 비에 젖어 한기가 느껴졌지만, 산사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는, 이 익숙한 상황이 오히려 포근하다. 경필형은 버너 가져온 일수형이 앞서 길을 내렸다고 아쉬워한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봉원사를 벗어나 입구 버스 종점에서 허겁지겁 버스에 오르니, 박계수 고문님, 일수형, 영우가 자리하고 있고 등산학교 강의가 있어 먼저 간다던 산이형 손에 끌려 신촌역 곱창집에, 뒤늦게 온 재을군과 함께했다. 내가 술자리 모임에선 쭈뼛거리기만 하니, 오늘 시낭독으로 인문산행에 즐거움을 더해주신 고문님을 그냥 가시게 하기엔 산이형 마음에 걸렸나보다.
젖은 옷을 털며 부산을 떨다 쏘주를 떨군 글라스 한 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몸이 풀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오늘 찾은 봉원사는 기이한 인연으로 얽혀 있는 사찰이다. 가야사(伽倻寺)에서 옮겨온 범종과 대방으로 쓰이고 있는 아소당(我笑堂)이 결국 한 곳에 있고, 추사와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나란히 걸렸으며, 개화세력의 본거지에 이완용의 주련 글씨도 있고 정도전의 글씨를 사찰에서 보는것도 그렇다. 비로 인해 가보지 못한 옥폭동에 대한 얘기 끝에 드디어 ‘연희(蓮姬)’가 등장했다. 김려(藫庭 金鑢, 1766~1822)의 여인. 유월 유두날에 부령의 옥폭동에서 함께한 두 연인의 모습을 “그대 무얼 생각하나(問汝何所思)”로 시작하는 시로 읊조려 보았다.
蓮姬沐髮玉瀑洞(연희목발옥폭동) : 연희는 옥폭동에서 머리 감았지.
洞中蒼壁繞似屛(동중창벽요사병) : 병풍처럼푸른 절벽 빙 둘렀고
瀑水噴飛建萬甁(폭수분비건만병) : 큰강물 세워둔 듯 폭포수 쏟아졌지.
水色澄淸澈底冷(수색징청철저랭) : 맑디맑은 물 시리도록 차갑고
上有雲氣一道靑(상유운기일도청) : 푸르른 구름기운 그 위에 감돌았지.
我先脫衫跳水內(아선탈삼도수내) : 내가 먼저 옷 벗고 물 속에 들자
蓮姬匊手澆我背(연희국수요아배) : 연희는 내 등에다 물을 뿌렸네.
蓮姬端坐水邊石(연희단좌수변석) : 물가에 함초롬 앉은 고운 내 님의
水中月色照翠黛(수중월색조취대) : 눈썹을 물 속 달빛이 비추었지
-출처: 사유악부(思牖樂府) 289수, 부령을 그리며, 박혜숙 옮김, 돌베개(1997)
안산의 옥폭동은 경기감영의 반송지로 흘러드는 안산자락의 계곡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옥폭동의 폭포를 찾아 시회를 열었으며 아래쪽 동리인 영천동과 천연동의 천(泉)은 차고 맑아 으뜸으로 쳤다. 1819년 겨울, 귀양살이를 전전하던 김려(金鑢)는 김조순 등과 함께 안산의 봉원사를 찾았다. 옥폭동을 거쳐 안산 봉수대의 동쪽 능선으로, 봉원사 뒷길로 산을 오르면 이르는 승전봉(지금의 전망대 봉우리)을 올랐다. 그는 안산 봉화가 부령으로부터 옴도 잘 알고 있었고 동을 지나며 부령의 옥폭동을 기억했을 것이다. 봉원사 대웅전의 원교 이광사(圓嶠李匡師, 1705~1777) 글씨를 보고 부령에서 본 이광사의 바위글씨도 떠올렸을라나 모르겠으나 그 억울한 10여 년간의 귀양살이 중에 부령에서의 날들을 어찌 잊겠는가. 김려는 동봉을 옆으로 지나며 봉화불을 올려서 연희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은 들었을까? 그 때까지도 그녀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었을까?
<여지도(輿地圖)> 중의 도성도(都城圖)에 보이는 옥폭동(玉瀑洞)
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김려는 문체반정으로 정조의 미움을 샀는데, 벗 강이천(姜彛天)의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어 32세(1797년) 겨울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중도에 정조의 배려로 부령으로 변경되었고 4년을 그곳에서 보내며 평생을 함께하고자 했던, 죽어도 잊지 못할 여인, 연희를 만났다. 그는 유월 긴긴 장마비로 개울이 넘쳐 한동안 연희 얼굴을 보질 못한 적이 있었다. 밤에 비 개이고 달이 모래밭에 떠오르자 그의 발길이 먼저 연희네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섯고 개울가 이르러 다리 서쪽 길을 보니 짧은 우산 무명치마의 연희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나무 그늘에서 달 떠오르길 기다리며 차가운 강 길 따라 쌓인 낙엽에 함께 앉아 얘길 나눴고 이야기가 끝나면 연희의 손을 잡고서 단풍나무 붉은 뜰을 함께 오갔었고. 북풍이 휘몰아쳐 골짜기엔 얼음이 가득하고 찢어진 창 문풍지엔 바람이 펄럭이는 그 찬 눈길을 걸어와 사립문을 두드렸던 연희. "삿갓 사고 도롱이 구해 나는 보습 잡고 너는 호미 들고, 평생토록 농사짓는 재미 함께 하자구나."고 언약했던 그녀.
부령 옥폭동의 달빛이 연희의 아름다운 눈썹에 비추었듯이 지난날, 연희와 함께 심은 살구나무 꽃피면 연희의 뺨에 비추었고 화사한 복숭아꽃 붉은 송이는 연희의 보조개를 닮았으며 “내 입술이 붉은가요 앵두가 붉은가요” 묻던 연희의 입술은 수정처럼 동글동글 영롱하게 빛나는 앵두보다 고왔다고 김려는 노래했다. 앵무 같은 정신에다 나비 같은 혼을 지녔으며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졌다던 그녀.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 김려는 서울로 압송되며 그렇게 연희와 이별을 하였고 재차 진해로 이배되었다. 그는 "서서도 생각하고 앉아서도 생각하며 걷거나 누워 있을 때에도 생각한다. 혹 잠시 생각하기도 하고, 혹 한참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잊을 수가 없다"며 연희를 향한 마음에 자신의 방 오른쪽 창문에 '사유(思牖,'생각하는 창문'이란 뜻)'라는 편액을 달았다. 땅 모퉁이와 하늘 끝 사이로 멀고먼 부령. 산과 강이 막혀 허공을 향하여 이별의 노래를 부질없이 불렀으니 그 사연이 <사유악부(思牖樂府)>이고 <연희언행록(蓮姬言行錄)>이다. “혼이 다 사위어도 사무치는 그리움 없어지지 않고(魂旣銷盡思不休), 취한 듯 미친 듯 얼이 빠진 듯(如癡如狂復如羞)”하여 “연희야 연희야 어쩌란 말이냐(蓮兮蓮兮奈若何)”를 목놓아 불렀던 김려. 어느날 꿈 속에, 눈물을 흘리며 나타난 그녀는 가을 접어들자 죽은줄 알았던 복숭아나무에 홀연 잎이 나고 가지가 무성해졌으니 어서 빨리 돌아와 함께하자고 하였건만, 두 연인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박계수 고문님은 글라스 몇 잔에 취흥이 오르셨다. 일어서시더니 “이봐! 심산 선생. 그럼 내가 연희에 대해 글을 쓸테니 한 번 봐줄텐가?” 시인도 연희가 마음에 와닿고 글을 쓰시고 싶었나보다. 작가인 산이형은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네. 그럼 고문님 가지세요“ 한다. 그런데 내가 ”안돼요. 연희는 안됩니다.“라고 소릴 질렀다. 이게 갑자기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연희가 마치 함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거듭, 나의 연희를 줄 수 없다고 노시인에게 댓거리를 해대었다. 산이형은 마치, 연희를 마음에 둔 노비가 상전에게 안된다고 대드는 상황처럼 보인다며 크게 웃는다.
노시인은 또 다시 동해안을 따라 국토 순례를 떠난다고 하시며 지난 순례에서 만난 어느 해변가 카페의 여주인을 얘기하신다. 산이형을 쳐다보니, 작품속에 몰래 감춰뒀을 연희를 떠올리는 듯하다. 인문산행 전담 사진작가인 영우군은 그날 또래의 처자들 사진만 잔뜩 찍었다는 소식이 언뜻 들리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주말 산서회 회원 친선행사를 백운산장에서 하고 일요일 길을 내리며 북한산 자락의 인수재를 찾은 허재을군은 “인수재의 연희 찾아가는 길”이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인수재에 연희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는가 보다. 재을군은 요즘 작은 인연만 있으면 연희를 들먹이고 다닌다. 오늘은 나도 퇴근길에 당산역을 내려 ‘나의 연희’와 함께 노닐었던 선유도를 찬찬히 거닐다 가련다. 일수형은 짐작이 안간다. 그리고 국토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들려줄 노시인의 ‘연희’ 얘기를 기다려보자.
첫댓글 ㅎㅎ 잘읽고 갑니다~~ 4.19탑의 연희도 함 봐보세요^^
아름다운 이야기...맛깔나는 글 감사드립니다...
선배님의 글투,..좋네요..~~~
연희'라는 이름....기생인지요?
김려에 관해 '정확성'은 담보하지 못하지만 몇마디 말추렴할까 합니다.
김려의 글을 번역한 '부령일기'이던가에서 읽은 시인데.시 중에 '두충나무'가 등장합니다.
그즈음 읽은 식물도감에서인가
두충나무가 한반도에 자생하는 게 없고,
근대에 외국에서 들여온 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김려의 글이 그 반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려가 마지막에 제 고향 함양군수로 재직하다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등산박물관(김진덕) 두충나무가 나오는데 그런 사연도 있군여.ㅎ
@등산박물관(김진덕)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는 1933년 조선에 와서 8개월동안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코레아'라는 대작을 남겼는데, 그 중에 조선인들의 골격을 말하면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뉜다고 하면서
미인은 대체로 북방계라고 하더군요.경성과 평양의 기생들도 거의가 북방계이고요...
함경도는 북방계의 고향이었을테니...
당시 걸핏하면 귀양을 보냈는데 남쪽으로 갈까부다보다는 북쪽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요즘 말하는 카자흐스탄에는 밭메는 여자도 김태희보다 더 예쁘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지배계급의 여자 품평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등산박물관(김진덕) 수령의 보직을 받거나 귀양을 가서 북방계 미인들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고, 그리고 '책임감없이', '미래를 기약하지 않고' 순수^^하게 놀았던 이들이 기하일까요?
'내입술이 붉은가요? 앵두가 붉은가요?'라는 도발적 언사를 보면,
북방계 여자들의 성정도 남쪽보다 좀 더 자유롭고 당차고 그랬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질질 짜면서 '아리랑..아리랑 십리도 못가서 발병도....'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북방계 여자들에 관한 글들이 많이 남아 있을까요?
김려는 저렇게 애절하게 글을 남긴걸 보면,전형적인 감수성 풍부한 남방계 선비인 것 같고..^^
문득 그들에 대한 글들을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등산박물관(김진덕) 연희는 우리완 다른 북방계 여인. 말갈족인가그 머시여. 그 짝 사람들.
난 더이상 자료를 안 찾아 볼텨. 국역 책도 안보고 걍, 지금 알고 있는 수준에서 간직할라고. 혹, 환상이 깨지면 워뜩혀.ㅎ
우즈벡 김태희~~
좋은 자료입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지금 북녁 여자의 대부분은 옛적 북방계(여진족)의 후예인데. 키가 작고 앙증맞은 미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ㅎ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그 당시로 한번 가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연희를 알고 가네요~
모두들 마음속에 연희 하나 쯤 담아두고 있을 것이라는...^^
읽고난 끝은 이렇습니다.
이 깔끔한 글
좀 더 이어주시지...
문득 이수익 시인의 그리운 악마가 뇌리를 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