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필은 가족의 이야기를 즐겨 다룬다. 가족은 그만큼 나에게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미 깊은 존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헌신적인 어머니나 아버지 상은 수필 뿐아니라 모든 문학과 예술의 불멸의 주제일 것이다. 무엇인가에 평생을 다 바쳐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 대상이 자식일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식들 본인에게는 그 부모의 헌신의 의미는 각별하다. 더구나 그 부모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상황은 정점에 다다르게 되고 부모의 생애는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또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해서 부모의 헌신에 관한 이야기는 보편적 주제에 속한다. 그러나 등장하는 부모가 매양 희생적이라면 조금은 식상하다. 실제 현실적인 우리 부모들이 작품에서만큼 그렇게 희생의 화신들만은 아니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봐도 일정 부분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 부분은 있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들의 이기적 욕망들과 얼마나 선명히 구별될 수 있을까? 그래서 부/모성애를 다루는 수필은 그 주제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보다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파악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김용삼의 '화투의 꿈'은 그러한 우리의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며 한 인간의 삶의 굴곡을 상당히 객관적이면서 개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일찌기 노동력을 잃은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자식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무기력한 사람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나름대로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는가 하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의 생애는 다소 역전적이며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 감동은 단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관습적 희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 배경에 한 사람의 실패한 삶과 좌절된 꿈이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인 것이다.
그즈음 동네에 경로당이 생겼다. 어머니가 어쩌다 집에 머무는 날이면, 종종 싸움이 벌어진다. 이유는 뻔했다. 채 오십도 안 된 아버지가 경로당에 머리를 드밀었던 것이다. 역할을 다해 낡고 귀빠진 정물 같은 노인들이 지난 날을 되새김하는 경로당에는, 화투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놀이였다.… 아버지는 동전도 모으면 작은 태산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 간파했을 것이다. 대개는 경로당이 파할 쯤 짜장면이나 막걸리로 개평을 대신하지만 아버지는 예되였다. 어르신네 눈총 따윈 아랑곳없이, 그날그날의 전리품은 아버지의 쌈지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종일품을 판다한들 얼마나 모을까마는, 온 동네 지청구를 귓등으로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대하는 날은 화투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노인들을 상대로 화투를 쳐 욕을 먹으면서까지 따 모은 돈(동전들과 꼬깃꼬깃한 지폐)은 어쩌면 아버지의 말기암처럼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작가에게 유산으로 남겨진 그 돈은 작가에게도 마찬가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고통이 주는 역설적 감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표현력도 풍부했고 우리 삶과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리했다. 그의 다른 응모작 역시 뛰어났으니 에세이스트의 동반자로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