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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영적 공동체 만들기_용서와 축하가 있는 곳
누가복음 6장 12-19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밤에 고독한 기도로 산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아침에 내려오셔서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그리고 오후에 사도들과 함께 나가셔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역을 하셨다.
밤과 아침과 오후는 고독에서 공동체를 거쳐 사역으로 가신 예수님의 삶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들은 집으로 가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세 가지 훈련이다.
첫째, 고독은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는 함께 알아보고 모이는 것이다.
셋째, 사역은 세상에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147-148쪽)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그 기초는 고독이다
하나님과 함께 고독 속에 있는 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에 보면,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붙들고 사랑의 품안에 어루만진다. (...) 기도로 고독에 들어가 하나님과 말없이 교제할 때면, 나는 탕자가 돌아와서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14;23)." 내가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 가장 깊은 존재 안에 거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초청은 분명하여 혼동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그분의 집으로 삼으신 곳을 나도 내 집으로 삼는 일은 대단한 영적 도전이다. (148-149쪽)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쉬운 훈련이 아니다. 예수님이 기도로 밤을 보내셨음을 잊지 말라. (...) 기도는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통찰을 항상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직관 내지 내적 확신일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보다 크다는 확신, 하나님의 생각이 내 인간적인 생각보다 크다는 확신, 하나님의 빛이 내 빛보다 훨씬 더 커서 나를 눈멀게 하고 내가 밤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고독을 실천하려면 몸과 영이 고요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각자 꾸준히 확보해야 한다. 하루에 몇 분으로 시작하라. (...) 이것은 일기 쓰기나 신성한 독서를 통한 무언의 기도 내지 집중기도의 시간이며,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나 기다림의 부름을 듣기 위한 열린 공간으로 이어진다. 새벽녘이나 황혼 무렵은 고독과 기도의 시간으로 정말 이상적이다. 이런 고독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기초를 내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갈 준비를 갖추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영적 공동체가 시작되는 곳이다. (149-150쪽)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아침이 오면 고독과 고독이 만나서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 (...) 고독 속에서 당신은 자신이 인간가족의 일원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함을 깨닫는다. 새벽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가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 공동체를 이룬다는 말은 공식적인 공동체를 결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 공동체는 단체나 기관을 요하지 않는다. 공동체란 살아가는 방식이고 관계 맺는 방식이다. (...)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고 하셨다. (150-151쪽)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불교의 연기설과 정확히 일치함. (박희택)
공동체는 쉽지 않다. 모든 공동체 안에는 수용의 치유와 깊은 배신이 함께 벌어진다. 우리 인간성의 훌륭한 면과 아픈 상처가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공동체의 열두 자제를 하나씩 지명하시면서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도 포함시킨다(누가복음 6:16). 배신은 신뢰를 깨뜨린다는 뜻이다. 배신자란 '넘겨준다'는 뜻이다. 공동체 안에는 당신의 신뢰를 배신하거나 당신을 괴롭히거나 원치 않는 일로 넘겨줄 사람이 늘 있게 마련이다. 공동체가 생기는 순간 문제도 같이 생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은 "공동체란 당신이 가장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늘 살고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요구가 너무 많은 사람이 당신의 공동체 안 어딘가에 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꼭 한 사람만 배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그 사람일 수도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공동체 내의 어느 한 사람이 아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또는 자신도 모르게 늘 서로를 고생으로 넘겨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 오히려 우리는 공동체란 완전한 정서적 조화를 요구하지도 않고 가져다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더불어 살면서 깨닫게 된다. (151-152쪽)
고독이 공동체를 앞서는 것, 공동체가 고독에서 나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임을 모른다면,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한테서 기대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참된 공동체는 "나도 너무 외롭고 너도 너무 외로우니 우리 함께 뭉치자"는 식으로 외로움이 외로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기가 두려워서 생겨나는 관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관계는 하나님과의 고독만이 채워줄 수 있는 필요를 궁극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공동체는 고독과 고독의 만남이다. "나도 사랑받는 자이고 너도 사랑받는 자이니 우리 함께 집을, 환영받는 곳을 지을 수 있다." (152쪽)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내 아집을 버리고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터득한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참된 겸손을 배운다.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없으면 우리는 개인주의적이다 못해 때로 자기중심적이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어렵지만 영적인 삶에서 선택사항이 절대 아니다. 공동체는 고독에서 비롯되며, 공동체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식탁으로 함께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영성 개발에는 언제나 공동체 생활의 개발이 포함된다. 우리 모두는 고독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께 가는 귀향길을 찾아야 한다. (153쪽)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는 영적 귀향
예일대학교로 초빙될 당시에 내 나이 마흔이었다. 나의 주교는 몇 년이면 될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곳에 10년을 있었다. 나는 내 야망의 수준에서 잘하고 있었으나,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순종하고 있을까? 내가 되고 싶었던 사제가 된 것일까? 예일이 정말 내집일까? (153쪽)
라틴아메리카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것이 내 소명이 아님을 나는 금세 깨달았다. (...) 하나님은 나를 그곳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내가 쫓겨서 갔을 뿐이다. (...) 그 즈음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에서 나를 교수로 초빙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나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영적인 고충과 그곳의 사회정의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기도와 명상에 대해서 대화하고 싶은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내게 내면의 영적인 삶과 사역에 대해서 물었다. (...) 하버드가 내게 안전한 곳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설 일이 너무 많았고, 알려질 일이 너무 많았다. 너무 다 드러났다. 영적인 통찰보다는 지적인 이해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 내면의 목소리들은 자꾸만 "네 자신의 영혼을 잃으면서 다른 사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마침내 나는 내 깊어가는 어두움, 거부당하는 기분, 과도한 인정 및 애정 욕구, 소속감의 깊은 부재 등이 내가 하나님의 영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들임을 깨달았다. 성령의 열매는 슬픔, 외로움, 분리가 아니라 기쁨, 고독, 공동체, 사역이다. 하버드를 떠나자마자 나는 엄청난 내적 자유, 엄청난 기쁨과 새로운 에너지를 느꼈다. 이전의 인생을 돌아보니 스스로 갇혀 있었던 감옥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다만 장바니에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라르쉬 공동체와 깊은 소통이 있었을 뿐이다. (155쪽)
1986년 8월 말에 나는 데이브레이크의 뉴 하우스로 이사했다. 로즈, 아담, 빌, 존, 트레버, 레이먼드 등 장애인 여섯 명과 봉사자 넷이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 집 모든 식구들과의 사이에 점차 우정이 자라갔다. 그러나 이 우정의 끈에는 값비싼 대가도 없지 않았다. 나 자신의 장애들을 인정하는 대가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라르쉬 공동체는 점차 내 집이 되었다. 정신장애를 지닌 남녀들이 축복의 몸짓으로 내게 손을 얹어주고 내게 집이 되어줄 줄이야 내 평생에 꿈도 꾸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 속에서 안전과 안정을 찾았었다.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계시된 것,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 것을 거의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의 따뜻하고 겉치레 없는 영접을 경험하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의 품을 경험하면서, 나는 진정한 영적 귀향이란 천국의 주인인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56-157쪽)
데이브레이크에서 보낸 세월을 통해서 나는 공동체란 사랑과 지지가 가득한 곳이자 견디기 힘든 곳임을 배웠다.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어둠이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를 라르쉬로 이끌었던 그 빛이 또한 나 자신 안의 어둠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정말로 자신을 알게 된다. 시기, 분노, 거부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기분, 소속감의 부재, 이 모두가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장 안에서 표출되었다.
용서와 축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특징이다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나는 진정한 영적인 전투에 눈뜨게 되었다. 어둠이 너무도 절절한 바로 그때에 계속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씨름이다. 예컨대 공동체 안에서 나는 너무 높아서 아무도 부응할 수 없는 요구들을 사람들에게 내놓을 때가 있다. (...)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기대는 왜 이렇게 높을까? 다루어지거나 채워지지 않고 있는 내 안의 욕구는 무엇일까? (157-158쪽)
이런 의문들 덕에 나는 다시 기도로 돌아가고, 내 영적인 삶에 그리고 공동체 속의 내 관계들 속에 영성 지도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고독이 공동체에 선행하는 것, 가정생활을 본질상 어려운 일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우치게 된다. 일단 고독을 품고 나자, 비록 도전들이 있을지라도 용서와 축하가 진정한 공동체의 특징이 될 수있음을 나는 배웠다. (158쪽)
필요를 버리고 용서하다
공동체 생활의 훈련 안에 용서와 축하라는 쌍둥이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열어서 꾸준히 사용해야 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내 모든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 우리는 다 상처가 있다. 우리는 다 고통과 실망 속에 살아간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모든 성공 이면에는 외로운 감정이 도사리고 있고, 모든 칭찬 밑에는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숨어 있으며, 사람들이 나를 대단하다고 말할 때에도 허탈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바란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머잖아 요구를 일삼고 조종하게 된다. 우리가 서로를 계속 용서하되 어쩌다 한 번씩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에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요구를 버리고 용서의 자세로 함께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가능해진다. (158-159쪽)
원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데 얻는 것은 그 일부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게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계속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한된 방식으로밖에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당신을 용서한다. (...)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차 있다. 그들은 무한한 사랑을 유한하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영적인 교제, 우정, 결혼, 공동체, 교회 등 당신이 어느 관계에 들어가든 그 관계는 늘 좌절과 실망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용서야말로 인간의 정황에서 신의 사랑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태복음 18:22)" 서로 용서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 완전한 사랑을 심령에 갈구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서로가 그 완전한 사랑을 일상생활 속에서 주거나 받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야 한다. (...) 우리가 서로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용서해야 한다! (159-160쪽)
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 친구를 나는 서서히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용서해야 했다! 그것은 지식적인 일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그것은 내가 타인에게 원하는 것을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알고 진리 안에 자라갈 수 있는 놀라운 기회였다. 그 경험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였고,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으며, 내가 경험한 것이 지극히 중요한 것임을 나는 마음으로 알았다. 내가 공동체를 떠날 필요가 없고, 관계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으며, 우리가 함께 그것을 수습해나갈 수 있음을 나는 알았다. (...)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방식이었다. (...) 용서하고 내려놓는 그 모든 고통과 씨름 끝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화해의 기적이 일어났다. (162-163쪽)
용서는 축하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당신이 용서할 수 있게 되면, 이제 당신은 그들이 하나님의 반사체이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큰 사랑의 반사체임을 축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당신은 줄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은 축하의 가치가 있다." (...) 상대방의 은사를 축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한 반사체로서 그 사람의 인간됨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축하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은사들과 은혜들을 하나님의 무한한 선물인 사랑과 은혜의 반사체로서 높이고, 인정하고, 굳히고, 기뻐한다는 뜻이다. (...) 공동체란 어떤 면에서 하나의 모자이크다.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색깔의 작은 조각이다. 모든 조각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나 각각의 작은 조각 자체는 그 크신 사랑의 아주 제한된 반사체일 뿐이다. 축하는 사랑의 아주 구체적인 표현이다. (...) 축하란 사람들의 은사들 즉 기쁨, 평화, 사랑, 오래 참음, 자비, 양선(良善) 등을 높인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높인다. 그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반사체인 까닭이다. (163-165쪽)
데이브레이크에 온 후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내 진짜 은사들은 내가 저술 활동을 하고 있거나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나를 잘 알고 사랑하는 공동체 식구들이 내 진짜 은사들을 발견하여 도로 내게 반사해주었다. (...) 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용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용서의 한복판에서 축하가 솟아난다. 용서와 축하가 있을 때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의 은사들을 불러내고 그것을 높여주는 장(場), "당신은 사랑받는 딸이고 사랑받는 아들이다. 나는 당신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장이 된다. (165쪽)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임을 고독 속에서 알게 되면, 당신은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 또한 사랑받는 자임을 보게 되고, 그리하여 사역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불러낼 수 있다.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알면 알수록 인간가족 안에 있는 당신의 형제자매들 또한 얼마나 깊이 사랑받는 자들인지 더 잘 보인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신비다. 다른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면 할수록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자신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으면 받을수록 당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인지 더 깨닫게 된다. (165-166쪽)
당신의 귀향길을 찾는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표현되고, 삶이 되는지 배우는 것이다. 성 요한이 아주 명쾌하게 기록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이라(요한1서 5:7-8)."
* 성 요한은 사도 요한을 말하며, 제베데와 살로메의 아들이고, 큰 야고보(산티아고 순례길의 성인)의 동생임. (박희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