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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선 “근거 없다” 반박… 통일신라 오악으로 부악·공산으로 불려 신성시
대구 팔공산은 신라 삼산오악 중 중악이다. 오악은 통일신라가 각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을 지정해서 국가적인 제사를 왕이 직접 주관해서 지내던 곳이다. 신라는 통일 전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삼산과 왕경오악이라는 형태로 산악숭배신앙을 가졌다.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이르러 중국의 호국신의 개념인 오악까지 수용, 삼산오악제도를 국가체제로 정비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이같은 기록이 그대로 전한다. 산악숭배신앙이 바로 산신으로 나타나는 호국신이며, 산신에게 지내던 산신제는 아직까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매년 3월 12일 전후해서 열리는 팔공산 산신제에 온갖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그중 어느 산신제를 가더라도 꼭 빠지지 않는 내용이 팔공산 산신제에도 그대로 보인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팔만사천 용왕대신’, ‘북두대성 칠월성신’, ‘천지신명 옥황상제’, ‘팔도명산 산신천왕’, ‘개국시조 단군천왕’ 등이다.
여기서 반드시 파악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우리 전통 사상인 천지인(天·地·人)과 관련된 부분이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장군과 지하에서 올라온 장군이 지상에서 수호신으로 좌정해서 마을을 지킨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 즉 음양 오행사상의 한 축인 하늘과 땅을 숭앙했던 전형적인 우리 전통신앙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팔만사천 용왕대신’은 우리 전통신앙에서 존재했던 바다의 신이다. 용왕대신은 뭍으로 올라와 해수관음보살로 화했다. 지금 한국의 4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는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여수 향일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모두 바다의 용왕신앙이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식으로 습합한 신앙 형태다. 이 사찰들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북두대성 칠월성신’은 개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다. 하늘의 신은 인간이 죽으면 돌아가는 곳에 있으며, 인간의 수명과 죽음을 관장하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그 사람 돌아갔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개념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의 대표적인 신, 즉 우리 전통사상인 천지인 삼재사상이 산신제에 그대로 반영돼서 등장한다. 이는 산신이 우리 고유 신앙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반증한다. 우리 전통신앙에서 말하는 삼신은 산신과 용왕신, 칠성신이다. 이 삼신이 산신제에서 모두 모셔지는 것이다.
역사 문헌에 팔공산 산신 수차례 등장
고대 신라인들에게 최고의 신앙은 산악(산신)숭배사상이었다. 통일 전에도 산신신앙은 존재했다. 이는 <삼국유사> 권1 기이 김유신조에 잘 나타난다.
‘(김유신은)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나서 등에 칠성(七星) 무늬가 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중략)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세 산신이 백석이 고구려 간첩이라는 사실과 고구려로 유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김유신은 백석을 죽이고 세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김유신은 호국신인 나림·혈례·골화 세 산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간다. 또 <삼국사기> 권41 열전 제1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이 공산 (산신) 난승에게 방술의 비법을 전수 받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통일 전에 이미 신라는 호국신을 모시는 산신숭배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편에 ‘3산·5악 이하 전국의 명산·대천을 나눠 대사·중사·소사(大祀·中祀·小祀)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사 3산은 첫째가 내력(奈歷 습비산: 지금의 낭산), 둘째 골화(骨火: 경주의 금강산), 셋째 혈례(穴禮: 청도 오리산)다. 이 3산은 이미 통일 전부터 신라의 호국신으로 숭배하던 곳이었다. 3산의 공통점은 신라 건국 시기의 3소국의 시조 탄강지(誕降地)와 관련 있다. 박·석·김 세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알로 내려와 탄생한 신화를 가진다. 이들이 바로 하늘에서 산신으로 강림한 것을 말하며, 신라지배계급의 조상신인 것이다. 따라서 산악숭배사상이나 산신신앙은 고대 신라의 전통신앙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오악은 중국에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통일신라는 국경의 개념과 더불어 국방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 전국을 방위 개념으로 5곳의 산에 왕이 주관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그 오악이 동악 토함산, 남악 지리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부악(父岳: 공산이라 하며 지금의 팔공산)이다. 지리산은 가야, 계룡산은 백제, 태백산은 고구려의 영토로 각 지역마다 대표적인 한 곳에 호국신을 둔 셈이었다. 일종의 국경의 개념이기도 했다.
오악은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통일 이후 이질적 집단을 하나로 묶는 화엄사상의 화엄종 명찰이 전국적으로 창건되면서 산악에 기존 산신사상과 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태백산 부석사, 토함산 불국사, 지리산 화엄사, 계룡산 갑사, 팔공산 미리사 등 대표적 화엄사찰이 잇달아 창건된다. 오랜 고유사상인 산신신앙에 외래 종교인 불교가 융합되면서 한반도만의 새로운 불교문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고유의 산신신앙은 민간에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중악 부악도 화엄사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반도 다른 지역의 그 어느 산보다 더 깊은 불심을 드러냈고, 팔공산 곳곳에 대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 유산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중악 부악은 유일하게 별칭을 가진 산이었다. 부악이며 공산이었다. 부악은 ‘아버지의 산’이란 의미다. 왜 부악이란 지명이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신라가 신문왕 9년(689) 팔공산으로 천도를 고려할 정도로 중요시됐던 산으로서 아버지의 산이란 지명이 붙은 것이 아닌지 추정할 뿐이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신라의 지배세력인 김씨 족단의 발상지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김씨 족단들은 경주로 들어가기에 앞서 대구 부근에 정착한 까닭에 팔공산을 아버지의 산이라 불렀던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부악을 앞에 내세우고 공산을 괄호 속에 병기하고 있다.
공산은 국가의 공식적인 산이라는 의미와 신성한 산이란 주장으로 나뉜다. 국가의 공식적인 산은 김씨 족단이 경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거주했던 산인 만큼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이었다는 의미다. 경북대 사학과 문경현 명예교수는 공산은 신성한 산이란 의미라고 말한다. “공산의 어의는 곰뫼란 뜻이다. 곰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공으로 적었고, 곰은 북반구에서 널리 숭배됐던 토테미즘사상의 하나로 신성시 되던 동물을 말한다. 따라서 공은 신성을 나타내고, 뫼는 산으로 신성한 산이란 의미”라고 주장했다.
오악의 중악으로서 공산 혹은 부악으로 불리며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팔공산은 원효의 수도처로서, 김유신의 훈련장으로서, 일연의 도량 터로서 역사서에 매우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산신에 관한 기록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권4 심지계조(心地繼祖)조에 동화사 창건 설화에 팔공산 산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심지가 속리산의 영심(永深)으로부터 간자(簡子)를 받아 중악으로 돌아오자, 산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그를 맞이해 산기슭으로 데려갔다. 산신은 심지를 인도해 바위 위에 앉히고 그들은 엎드려 삼가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어 심지는 “이제 적당한 땅을 가려서 성간자(聖簡子)를 봉안하려 하는데, 이는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아니니, 그대 세 사람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간자를 던져서 점을 쳐보자”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들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니, 간자가 바람을 따라 날아갔다. 이때 산신이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가렸던 바위, 멀리 물러나 숫돌처럼 평탄해지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이 밝아지네. 부처의 뼈로 만든 간자를 찾아내어, 정결한 곳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리라.”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숲속 샘에서 간자를 찾아 그곳에 당을 짓고 간자를 모셨다. 지금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여기다.’
김유신·심지왕사 팔공산 산신 각각 만나
여기서 등장하는 심지는 헌덕왕의 아들로서 심지왕사로 불리던 승려였다. 중악의 산신이 진표의 간자를 중악으로 전해 온 심지를 맞이해 함께 길지를 택해서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다는 내용이다. 산신이 심지로부터 정계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왕사는 이외에도 산신의 힘을 얻어 팔공산 동쪽에 천성사, 북쪽에 중암암과 묘봉암, 서쪽에 파계사, 남쪽에 동화사를 창건했다.
이 가운데 중암암(中巖庵)은 바위에 뚫린 구멍이 절의 출입문 구실을 하는 ‘돌구멍 절’로 통한다. 중암암에서 김유신이 17세 되던 해인 611년 삼국통일의 웅지를 품고 찾아 수련하면서 산신 ‘난승’을 만난 장소로 전한다.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4km가량 들어가면 나온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마찰 없이 자연스럽게 습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이 삼국통일 전 팔공산에서 훈련을 하면서 산신을 만났다는 기록도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자세히 전한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많이 있었다. 나이 18세 되던 해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됐다. 이때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신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기 위해 밤낮으로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 일을 알고 유신에게 고하기를 “제가 공과 함께 먼저 적국에 들어가 정탐을 한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이 기뻐하며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따라 왔다. 여인이 말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를 잘 알겠으나, 원컨대 공께서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우리와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말하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문득 산신(山神)으로 변한 낭자들이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유인해 가는데도 낭이 그것을 모르고 따라가므로 낭을 말리려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고 했고, 말을 마치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중략) 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춰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나타나서 음향했다.’
정사라고 평가받는 <삼국사기> 권41 열전 제1 김유신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공의 나이 15세에 화랑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기쁘게 따랐다. 그의 화랑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적국을 정벌할 뜻을 품었다. 홀로 중악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적국이 무도해 이리와 승냥이 범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략하여 거의 편안한 해가 없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라인으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뜻을 화란을 맑게 하고자 하오니 상천은 굽이 살피사 나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했다.
수도한 지 나흘 만에 문득 한 노인이 거친 옷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많은 살모사와 맹수가 있어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 와서 혼자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했다. 유신이 말하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노인이 “나는 일정한 주소가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무르네. 이름은 난승(難勝)일세”라 했다. 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재배하여 나아가 “나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라옵건데,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방술을 전수해 주옵소서”라 했다.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여 마지않고 6, 7차례에 이르니 노인이 그제야 “그대는 어린데도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장하지 않은가” 하고는 비법을 전수하면서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불의하게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여 2리쯤 갔는데 좇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과 같은 찬란한 빛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동국이상국집>에 공산 산신을 대왕으로 호칭
여기서 등장하는 난승이 바로 팔공산 산신의 구체적 이름이라고 문경현 교수는 말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다른 부분에서도 팔공산 산신이나 국가적 제사에 관한 비슷한 기록이 상세히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무신집권 세력이 경주, 영천, 청도, 대구, 청송 등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토벌작전을 펼쳐 난을 평정한 뒤 공산에 올렸던 3번의 제사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그대로 나온다. ‘헌공산대왕문(祭公山大王文)’, ‘헌마공산대왕문(獻馬公山大王文)’, ‘공산대왕사제문(公山大王謝祭文)’이 이의 기록이다. 요약하자면, ‘여러 산을 호위로 삼아 구름을 타고 기운을 부리시는 신령으로 뭉쳐진 공산 산신이 관군에게 손을 빌려 주어 무사히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같은 제사기록으로 볼 때 고려까지 국가가 산신제를 주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교가 국교로 정해짐에 따라 불교가 상대적으로 밀려나고 산신제도 관심에서 멀어진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산을 두고 ‘해안현 북쪽 11리 거리에 있다. 신라 때는 부악이라 일컫고, 중악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 대구도호부에는 ‘공산·팔공산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이라 일컫고, 중악에 비겨 중사를 지냈다. 팔공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대구도호부 및 하양, 신녕, 부계, 인동, 칠곡 등의 읍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지도서> 대구 산천조에는 ‘팔공산은 해안현 북쪽 17리에 있는데, 신라 때 부악 또는 중악이라 했으며, 중사를 지냈다. 팔공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부(府)와 하양(河陽), 신녕(新寧), 의흥(義興), 인동(仁同), 칠곡(漆谷) 등 읍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고, 고려 태조의 고적이 있으며, 신녕 화산으로부터 이어왔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같은 기록은 팔공산 산신이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팔공산 산신의 호칭은 ‘공산천왕’ 혹은 ‘공산대왕’으로 통한다. 지리산 산신을 천왕이라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격이다. 그 천왕의 거처가 바로 천왕봉인 것이다. 천왕봉은 대개 천신(天神)이 산신으로 산에 내려오면서 붙은 지명과 관련이 깊다. 같은 신격이지만 위계가 있는 것인지, 수평적 관계인지 규명하기란 아직 쉽지 않다.
속리산 산신도 천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보은현조에 ‘속리산 산신은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이다. 그 산신은 하늘에 있는 천신인데 10월 인일(寅日)에 속리산 법주사에 내려와 45일간 머물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신라시대 산신에 대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이 기록만으로 볼 때는 천신이 곧 산신이고, 산신이 곧 천신인 셈이다. 태백산 산신도 다르지 않다. 태백산 산신은 태백산천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4 삼척도호부 사묘조의 태백산사 분주에 ‘태백산 정상에 천왕당이라는 부르는 산신사당이 있어 이를 대천왕사라 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가야산 산신은 일반적으로 정견모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정견천왕 또는 정견성모라고 칭한다. 가야산 해인사에는 정견천왕사가 있다.
산정에는 정견천왕의 주처인 천왕봉이 있다. 비슬산(포산) 산신을 정성천왕, 영축산 산신을 변재천녀로 부르는 것도 산신의 본신이 천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영남알프스에 있는 재약산 동남의 가지산 최고봉 천황봉은 천황의 거주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의 명산으로서, 천신이 산정 봉우리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산신의 호칭을 천왕이라 하는 것으로 볼 때는 정상 봉우리 지명도 천왕봉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짐작도 가능하다. 지금은 비로봉으로 알려져 있다. 명산 팔공산에 천신인 본향 산신이 당연히 좌정했을 터이고, 그 이후 인신도 좌정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통상적으로 명산에는 본향산신과 인신이 동시에 좌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팔공산 산신은 과연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팔공산과 관련한 숱한 인물들이 거론된다. 원효부터 김유신, 승려 일연, 왕건, 신숭겸 등 역사적 인물들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김유신 장군을 팔공산 산신이라고 주장한다. 김유신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대관령 산신이다. 하지만 강릉에 침범한 말갈족을 무찌르기 전 이미 팔공산에서 오랜 기간 화랑도로서 훈련했다. 산신 난승으로부터 비법을 전수해 말갈족을 쫓아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기반을 쌓았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충분히 팔공산 산신이 될 만한 자격은 갖추고 있다.
김유신이 팔공산 산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팔공산이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점을 든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 영령은 경주의 무덤 대신 팔공산 장군봉 장군당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김유신 영령은 김유신사(祠), 효령사(孝靈祠) 등으로 불리는 자신의 사당에 머물며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귀화한 당나라 장수 이무의 혼령에게 팔공산 구석구석을 안내한다. 그가 수도한 은해사 골짜기의 중암암, 그 옆의 깊은 샘인 장군수, 건들바위, 삼인암, 만년송, 말 형상 바위에서 무예를 연마한 말머리바위 등 김유신의 흔적은 팔공산 곳곳에 남아 그의 영령과 같이 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경현 교수는 “김유신 산신에 대한 공식기록이 역사 문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갓바위에 기우제 지낸 기록 있어 산신 가능성
사실 김유신이 팔공산 산신이라는 주장은 내용적으로도 맞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심지왕사는 팔공산 산신에게 정계를 주어 동화사를 창건한다. 반면 김유신도 팔공산 산신 난승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산신 ‘난승’은 그의 이름에서 삼국통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려운 승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김유신은 난승을 완승으로 이끌어낸다. 김유신과 심지왕사는 시기적으로는 약 200년 시차가 있어 연결될 수 있으나,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대된 인물이며, 심지왕사는 그냥 왕사로 존재한다. 그런 관계에서 김유신 산신이 심지왕사에 엎드려 정계를 받았다는 내용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만약 산신이 여러 명 존재하며, 다른 산신이 심지왕사에 다가와 정계를 받았다고 보면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산신이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혀진다.
팔공산 산신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팔공산 갓바위가 산신의 한 전형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춘실 교수가 대표적으로 해당한다. 김 교수는 “팔공산에서 중사의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어딘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며 “하지만 어디에도 흔적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팔공산 산신제는 일찌감치 불교에 흡수되어 전통적인 단묘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까지 마을 주민들이 ‘관봉 석조여래좌상’에 기우제를 지내던 것에 비춰보면 갓바위가 바로 팔공산 산신의 흔적일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김 교수의 근거는 <삼국유사> 심지왕사와 관련된 내용을 든다. 심지왕사가 정상 바위 위에서 산신을 앉히고 정계를 주었다는 내용은 중악의 산신이 심지왕사를 마중 나온 곳이 바로 관봉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시기적으로는 맞아떨어진다. 전문가들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일명 갓바위가 9세기 즈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9세기면 심지왕사가 활동했던 시기다. 김 교수는 “관봉 석조여래좌상에서 처음 보이는 보개(갓)는 일반 불상과 다른 국가수호의 천신, 즉 산신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는 신앙적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안된 장치가 아닐까 여겨진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팔공산은 오악에 대한 전통의 산신제사가 불교적 의례로 바뀌면서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했다.
김 교수는 결론적으로 “전통적으로 높은 산정에 산악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는 곳이 불교사원으로 흡수되었건 또는 흡수되지 않고 병존하건, 같은 영역에 사찰이 들어오고 불상이 조성된 점은 국가수호를 전통의 산신제사에만 의존했던 것에서 불교의 확산과 더불어 부처의 위신력과 교화에 의해 국가안위를 빌게 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는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산악숭배나 바위신앙이 불교와 융합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실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산악신앙은 치병과 기우, 용왕숭배 등 주술적인 면이 강한데, 이 점이 불교로 환원되면서 현대에 약사도량으로 부활한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주장은 공식기록은 없지만 하나의 이론으로서 충분히 검토될 만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팔공산 제단의 흔적은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중봉의 꼭대기라고 한다.
어쨌든 산신신앙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고유신앙이다.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 산과 물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절대적 존재로 여겼다. 그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이치였다. 그 가운데 하늘은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연물이었으며,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산은 그 다음으로 여겼다. 하늘에는 천신이 있고, 산에도 늘 머물면서 지키고 있는 주인이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바로 산신인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모든 산에 해당한다고 민속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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