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戌) 이야기
우리말은 참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언어이다. 오늘날의 우리 또한 세종대왕 후손답게 언어감각이 탁월하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발한 표현들이다. 「남녀가 서로 배가 맞았다」 「눈앞이 캄캄하다」 「미친년 널뛰듯 한다」 「내가 하면 로멘스」 「더불어 만진당」 「국민의 짐」 등 수도 없이 많다. 그것에 더해 청소년들은 선생님을 「샘」이라고 하듯이 많은 말들을 줄여서 말하는 현상이 언제부터인가 유행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기나름대로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도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을 텐데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이 시의적절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우리말 속에 상당부분 고질적으로 사용하는 접두어가 바로「개」이다. 「개새끼」 「개같은 놈」 「개보다 못한 놈」 「개판오분전」 「개망신」 「개고생」 좌우간 단어앞에 「개」만 붙이면 그럴 듯한 말이 된다. 개가 인간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길래 나쁜 의미로 의도하면 무조건 「개」를 붙인다. 「개팔자」는 좋은 뜻일까 나쁜 뜻일까 모르겠다. 중국어도 영어도 이런 언어유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일본어의 뿌리는 우리말이니 일본어는 이런 식의 표현이 가능할 것 같다.
개는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함께 했다고 한다. 즉 원시시대부터 인간의 옆에는 개가 있었다고 한다. 세계 어디가도 개가 없는 나라는 없다. 세상의 모든 동물과는 달리 개만은 아주 충실하게 사람을 따른다. 고양이도 염소도 인간과 가까이 있는 가축이지만 좀처럼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고양이의 경우만 봐도 언제나 한 발 물러나 있는 자세이다. 몇 달 동안 밥을 주고 옆에서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겨우 사람 발 가까이 와서 냄새를 맡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개는 전혀 딴 판이다. 사나운 투견이나 경찰견조차도 옆에 붙어서 하루 새끼 끼니를 주고 주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주인에게 끔찍이 복종한다. 혹시 개의 유전자 속에 태생적으로 인간친화적인 인자가 내재되어 있지 않을까. 개는 사람을 그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밥을 주는 주인에게 끔찍히도 따르고 달겨붙는다. tv방송프로에서 본 이야기이지만 주인이 아침 일찍 외출한 다음 cctv로 개의 모습을 관찰했더니 개는 하루종일 현관문만 바라보고 끙끙 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즉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는 하루내내 지루함을 견디며 애가 달아서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인이 늦게라도 집안에 들어와 보라. 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꼬리를 치고 짖고 풀어두면 개는 사람에게 엉겨붙고 사람의 사타구니속으로 파고든다. 그야말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물론 많지는 않겠지만 더러는 가족끼리도 서로 소 닭보듯 하는 데 자신을 반겨주는 개의 모습을 보고서 어찌 정이 가지 않겠는가.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실제 키워보면 생각이 많이 바뀐다. 나는 개를 무서워하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키웠기 때문에 또 형이 개에게 물려 몇 달 동안 주사를 맞는다고 개고생을 해서 나는 개를 잘 알고 있다. 짖궂은 형들이 방망이로 개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즉시 바로 오라고 손가락질하며 휫바람을 불면 개는 또 다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그게 개의 태생적 본능이라면 본능이다.
지날 날 일본의 베스터 셀러 구로야나기 테쯔꼬의 『창가의 톳토짱』이라는 소설을 보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하는 톳토짱과 키우기를 반대하는 부모들과의 대화를 보면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유가 나온다. 인간에 비해서 개의 수명은 별로 길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를 키우는 사람의 대부분은 개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이별의 슬픔을 겪아야 하니 부모들이 반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를 키워 본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실제 개의 죽음을 당한 사람은 사람과의 이상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인가 보았다. 그만큼 개를 키우다보면 정이 들어버린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1950년 남북전쟁때 전국 대부분이 북한에게 점령당하고 이제 대구도 피난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 즈음 국가에서 집의 개들을 모두 한 곳으로 거두어 들이라는 포고령이 있었고 국가는 개들을 일괄적으로 도살한다고 했다. 이유는 청각이 민감한 개들이 탄환의 폭음으로 인해 미쳐버리고 미쳐버린 개는 사람을 해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도 집에서 키우던 개를 끌고가 국가에서 지정한 장소에 가서 개를 접수시키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자다 말고 어머니는 문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우리집의 개가 집결지에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개는 집으로 돌아와 보니 문이 잠겼으니 끙끙 거리며 발로 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개를 안고 개집 안에 넣어 두고 잠자리에 다시 누웠더니 마음이 심란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노라고 했다.
「사람은 도살하라고 보냈는데 개는 주인이라고 또 그 속에 자기의 집이 있다고 찾아 온 것을 보고 아무리 동물이지만 가슴이 섬뜩하더라」라는 내용이었다.
개를 유심히 보고 있으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민의 감정으로 보면 사람의 삶도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불쌍하다든가 불행하다는 그 원인을 알고 있고 또 누구에겐가 위로받을 기회가 있고 참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는 왜 자기가 목에 목줄이 채워진 채 자신이 가보고 싶은 길을 가보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지 이유를 모른다. 주인이 어느 날은 귀여워했다가 왜 어느 날은 자신을 발로 차는지 이유를 모른다.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자각하지 못한 채 당하는 고통은 옆에서 보면 더 불쌍하다. 동물보호단체에서 개사랑은 끔찍하다. 그나마 그것은 큰 다행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갈비탕을 맛있게 먹으면서 돈까스를 맛있게 먹으면서 개를 사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소와 돼지 등은 뭔가? 소와 돼지도 꼭 같은 생명을 지닌 동물이 아닐까. 옛날 어른들 이야기로 소가 도살장에 들어갈 때는 소의 큰 눈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 본 듯하다. 동물보호는 개만 해당된다고 말하고 싶은 그들은 소와 돼지는 옛날부터 관습적으로 사람이 먹어오던 가축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잔치집에서 돼지를 잡는 현장을 본 적이 있다. 바로 돼지의 목을 따는 것이다. 돼지가 힘이 좋아 남자 서넛이 칼을 들고 돼지를 잡고 목에 칼을 들이대도 힘이 딸린 듯 했다. 드디어 칼로 돼지 목을 오려냈다. 그 순간 목이 짤려 머리 없는 몸통이 피를 줄줄 흘리며 마당을 세바퀴 네바퀴 도는 모습을 본 나는 기절초풍 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지만 인간의 잔인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극한 상황에 달하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고기를 너무 먹는다. 옛날에는 일주일에 소고기국 한번 먹으면 괜찮게 사는 집이었다. 국으로 끓이면 불갈비 삼겹살보다 소요되는 고기의 분량이 훨씬 적을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시절 소고기파동이란게 있었다. 세상에 석유파동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소고기파동이라니. 고기를 너무 많이 먹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나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 심지어 생선 조차도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채소만 먹는 스님들도 아주 건강하게 지내니 걱정할 게 없다. 나무같이 움직일 수 없는 생명체는 먹이를 하늘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개처럼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의 먹이는 그 개체 자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사람이 돈을 벌어서 자식교육도 시키고 문화생활도 하지만 돈이 적어진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국 먹는 것에 올인하게 된다. 읍내로 가는 길가에 개집이 하나 있고 그곁에 누더기를 깔고 앉아 춥고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개를 바라보며 지나가노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난다. 개짖는 소리가 난다고 성대수술을 하는 사람들. 개의 발이 아프다고 발에 천을 감아주는 사람들. 오줌을 싼다고 욕을 하는사람들. 내 눈에는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학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나도 개를 키우고 싶다. 개에게 잘 해주고 싶다. 그러나 개는 개답게 키우는 것이 개를 편하게 해주는 것으로 안다. 그냥 개집하나 지어주고 밥 제 때 주고 마당에서 키우고자 한다. 그리고 목줄 없이 마당에서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뭐 대단한 인심을 쓰는 척하지만 개나 사람이나 살아가는 것이 허망하기는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