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크루즈 낭만 여행
제21-2화 다뉴브 강의 흑진주 부다페스트
-2016년 7월1일-
이제 페스트 지역의 마지막 코스인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도나우 강변에 자리 잡은 대 성당 같은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다
1880년 헝거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페스트지역의 도나우
강변에 헝거리 민족의 자존심을 모아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설계도를 공모하여 임레 슈테인들(Imre Steidl1839-1902sus)
교수의 계획안이 채택되어 대망의 1895년에 착공식을 하고 오르지
헝거리 건축가들로 구성하여 헝거리의 기술, 자재만으로 최대한 화려하게
건축하였으며 19년간 건축하여 1904년에 완공하였다
길이가 268M 폭이 118M 총면적 5500여평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의사당이며 15세기 유행했든 돔 양식의 16각형 쿠풀라로 만든 건물로서
외부는 96M의 중앙 돔을 시작으로 일년 365일에 맞추어 365개의 크고
작은 돔을 화려하게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88명의 헝거리 왕과 지도자의
섬세한 조각 동상을 지붕 위에 만들어 화려함을 더욱 배가 시킨 건물이며
40KG 황금과 수 많은 스테인글라스와 보석들을 건물 내부의 장식으로
배치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랜드 계단의 붉은 카핏을 밟고 내려오면 큰 홀과 마주치는데 중앙 돔
아래의 16각 중앙 쿠플라 홀은 의사당의 핵심 장소로 16명의 헝거리 지도자
동상이 서 있고 그 중앙에는 2000년부터 보관되어 오는 성 이슈트반의
성물 왕관이 보관되어 있어 경비병이 항상 감시하고 있었다
내부에는 10개의 대 회의실괴 691개의 집무실이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바로크 양식의 복고풍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16간의 중앙 돔 장식은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헝거리 인구 일천만명을 대표하는 453석의 국회의원들이 본회의로 사용하는
장소도 화려하게 단장되어 특히 금 도금과 붉은 카핏으로 엄숙해 보였다
의사당 안은 온통 붉은색으로 되어 있었고 사용한 붉은 카핏의 총 길이가
3456M나 된다고 한다
의사당 주위의 4군데 정원에는 헝거리 역사적인 정치가를 조각해 놓았으며
이곳에서도 건국의 아버지 성 이슈트반 동상이 예외 없이 서 있었다
동남쪽 정원의 구름다리 위에서 중절모를 쓰고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중절모 신사는 러지 임레(Nagy Imre)수상이라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으나 임레 수상은 민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 쏘련군이 탱크를 몰고 헝거리로 쳐들어왔을 때 끝까지 투쟁하다가
체포 되어 처형 당한 정치가로 헝거리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동상으로 만들어 진 코슈트 러요시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지도자이며 민족주의자
였다고 한다 1849년에 그는 오스트리아로서부터 독립을 선언한 헝가리 왕국의 섭정
대통령이 되었으나 헝가리 혁명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외국으로 피신하였다가 망명 이후로도 헝가리의 민족주의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1894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헝거리의 전성기는 1800년대부터이며 건국 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 즉 영웅광장, 국회의사당, 성 이슈트반 성당, 언드라시 거리
국립 오페라 극장, 리스트 음악아카데미등 모든 중요시설이 이시기에 건설
되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 세계적인 석학들이 탄생하여 헝거리 현상
(hungarian phenomenon)용어가 생겨 났다고 한다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인재가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헤베시 하프늄 원소 발견 센트죄르지는 비타민 C 발견 가보르는 홀로그래피 창시자
1885년 출생한 헤베시는 하프늄 원소 발견 노벨 화학상을, 1893년의
센트죄르지는 비타민 C 발견 노벨 의학상을,1899년의 폰 벸케시는
달팽이 관의 원리 발견 노벨 의학상을, 1900년의 가보르는 홀로그래피
창시자이며 노벨 물리학상을 타는 등 노벨상 7명 울프상 2명등을
배출하며 헝거리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1940년대 소련의 공산화로
그 화려했든 문화들이 사라지고 유럽의 최빈국으로 남아 오늘도
그 옛날의 희망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대단하였다
우린 다시 부다로 가서 마지막 코스를 향하였다
헝거리는 아픈 역사를 너무 많이 가진 나라이다
그래서 인지 1989년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민주국가로 발전되면서 의회는
구 공산주의의 잔재들을 청산하면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든 소비에트의 상징
동상들이 시민에 의해 파손될 것을 우려하여 한곳으로 이동하여 기념 동상
파크인 메멘토 파크(Memento Park)를 만들 것을 1990년 승인하고
소비에트 정권의 상징물 동상 42점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기념 동상의 관광지라기 보다는 아픈 역사의 잔해를 버리지 않고
공원의 이름 Memento처럼 후세를 위하여 교육적으로 만든 공원이라고
해야 타당할 것 같았다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공산주의가 최선이라고 선전하든
동상도 있었고
1956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성난 시민들이 스타린 동상을
파괴하고 신발만 남은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조 신발을 전시 해
놓았다 하며
공산주의는 거져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역사적인 사실도 있었고
가장 위대한 혁명 사상가이며 뛰어난 혁명 지도자인 레닌은 적은 체구
였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했으나 복잡한 여자 관계가 하나의 험으로
회자되고 있었다고 하며 위대한 웅변가이기도 헀다고 한다
우린 마지막 코스인 겔레르트 언덕을 올라갔다
부다 왕궁을 멀리서 지켜 주는 높다란 언덕이 도나우 강변에 걸쳐
있는데 이 언덕이 바로 겔레르트(Gellert) 언덕이다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서 바로 앞에 보이는 푸른 나무가 뻬곡한 높다란
언덕의 정상에는 종려나무 잎을 두손으로 들고 있는 여인상이 보이고
조금 아래에는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서 있는 성인의 동상이 보였다
이 여인상이 자유의 여신상이며 이 동상은 이 언덕의 이름과 같은 이태리사람
제라르도 사그레도(Gerardo Sagredo 980-1046) 신부라고 하며 헝거리 말로
켈레르트 신부이다
헝거리 건국의 아버지 성 이슈트반 왕의 초청으로 헝거리에 와서 헝거리를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에 전념을 하였으나 1046년 반란세력에 잡혀 안으로
수많은 못이 박힌 통나무에 넣고 이 언덕에서 굴려 떨어트려 죽였다고 하며
후일 성인으로 추대되어 헝거리의 제1수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언덕의
이름도 "겔레르트 언덕"이라고 명명하고 언덕 중간에 기념상도 세웠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 바로 뒤에는 1848년 오스트리아가 헝거리 사람들의 항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길이 220M 높이 4M 폭이 60M로 평풍처럼 펼처 진
요새를 만들어 “치터텔러”(Cutadella) 즉 작은 도시라고 명명하였으며
부다페스트를 향해 60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1897년까지 오스트리아 군대가
주둔 했다고 한다
그후 독일이 헝거리를 점령했을 때에는 이 요세를 대공포 기지와 전범 수용소
로 활용하였으며 1956년에는 소련군 탱크가 이곳에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들의 아픈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하여 외벽에다가 안내판을
설치해 두고 있었다 일부는 카페와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내부는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언덕 정상에는 종려나무 잎을 두손으로 받여 들고 있는 여인의 동상은
1945년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 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소련군이 26M 높이의 좌대 그 위에서 14M높이의 타워를 세워
여인의 상을 만들고 “헝거리를 해방 시킨 소련의 영웅들을 기념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헝거리 국민들이 바치다 1945년“ 라고 음각하여 만든
여인상은 페스트쪽을 보지않고 모스코바를 향하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이 붕괴되고 나자 소비에트 동상들이 다 철거되는데
이 동상 만은 철거하지 않고 자유의 여인상이라고 하며 현판도 “헝거리의
독립과 자유와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사람에게 바친다“라고
수정하였다고 한다
2일간의 부다페스트 관광을 전부 마무리하고 나니 가이드는 우리가
예약해 놓은 온천 호텔 겔레르트까지 대려다 주었다
우리가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는 온천호텔로 헝거리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온천하러 찾아 오는 호텔이기 때문이다
우린 간단한 스낵으로 저녁을 먹고 호텔 내 실내 온천 로얄 탕에서
1시간 동안 온천 욕을 즐기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