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모세가, 왕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예의 자식으로서 성장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었을 것인가.
운명의 아들, 모세의 생애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그 화려했던 후반생도,
매우 다른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거두어졌기 때문에,
노예로서는 배울 수 없었던 문자를 배웠고,
품성(品性)을 도야했으며, 왕궁의 체제의 뒷면을 알고
사회 전반을 두루 볼 수 있는 소양을 몸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용자(勇者) 모세는,
마침내 자기가 노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에 눈 뜨게 된다.
그래서 육십 몇 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안주할 땅을 찾아, 모세는,
사십 몇 년에 걸친 긴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환경에 따라,
세상사를 보는 시각, 성격,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도 성취는,
고락의 양극단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도의 마음은 찾으면 찾을수록, 실은 심오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중도의 마음을 일상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길 이외에, 길은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자아가 나온다.
이기적인, 자기보존의 싹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고락(苦樂) 속에 있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의 결점을 고치지 않는 한,
깨달음의 경지에는 숫제 근접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반성이라는 행위를 잊지 않고,
정신과 육체의 조화, 환경의 조화를 명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중도란, 글자 그대로, 한가운데의 길이다.
한가운데란, 원으로 말하면,
원의 중심, 욧점이다.
이 세상은, 남녀, 선악, 미추와 같이 상대적으로 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상대 속에서 혼을 닦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善惡)이 혼합되어 있는 현상계만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좋은 수행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선인(善人)뿐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라면, 수행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장님의 인생을 통하여,
열심히 구할 때, 비로소 빛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광명의 세계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전생윤회의 비밀을 알고,
이 현상계에서 육체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위대한 의의(意義)를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깨닫는 것 없이,
고계(苦界)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번뇌 속에서 일생을 보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태어나기 전의 둥근 마음을 왜곡된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되돌아가도,
그것 역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저지른 스스로의 죄는,
엄한 지옥계에서 그 값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떠한 괴로움도 견디고,
위대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욕망의 바다에서 방랑하고 있는
길 잃은 중생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구해 주어야 한다.
그 실천 행동이야말로,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자는,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사상에 취하여,
중도의 길을 그르치고도 그것을 대의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금 대의와 명분이란 것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류는, 본디 모두가 동포이다.
지구는 하나이고,
거기에는, 애당초 국경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류생존의 긴 역사에 의해서,
저마다의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따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권력이 생기고, 지배가 생겨,
경계가, 대중의 희생 위에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나라들의 경계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인류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각 나라의 민족 에고이즘이 되어,
그것이 인류의 한 척도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인류의 큰 잘못이다.
그리고 개인의 마음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선악의 감정에 지배되어,
이념보다도 자기의 이익, 가족의 행복이 선행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일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선인(善人)이고,
자기를 매도하는 사람은 악인(惡人)으로 몰아 부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개인 생활도,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모두가, 자기의 형편, 자기 나라의 형편,
자기 민족의 형편이라고 하는, 자기 보존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선악(善惡), 정*부정(正*不正)의 기준은,
지금 완전 엉망인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법률이 있어도,
법률 이전의 개개인의 자기 보존의 감정에 의해,
선악(善惡), 정(正)*부정(不正)의 척도를 정하고 있다.
이래서는 중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중도의 마음은, 자아를 떠난 객관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중도의 마음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백지의 상태로 있는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머리속에 채워져 있는 기성관념들을 일단 옆으로 밀어내 놓고,
자기의 모습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개개인의 지식이나 경험같은 것은 뻔하다.
그러한 얄팍한 척도로서,
세상사를 보게 되면,
자기의 척도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고,
상황의 판단도 흐려지고 만다.
중도의 마음은, 사심이 없는 것이다.
곧 신의 마음이요, 신의 척도이다.
이 신(神)의 척도에 섰을 때,
비로소 바른 판단이 되고,
정신과 육체, 환경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을 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가족도 평화롭고, 나라도 번영하고,
이웃나라와의 조화도 유지되며 불국토,
즉 유토피아의 완성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사상에 의해서는,
인간의 대조화도 없으며, 투쟁과 파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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