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호령에게 부탁하여 노파를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
나의 수호령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라고 하는 중국 밀교의 승려였다.
그리고 나서 2,3일이 지난, 밤의 일이다.
예의 그 노파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옛날에 악한 짓을 일삼던 노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둥근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파는 말하였다.
<저는 크고 넓은 저택에서 사는데
너무나도 조용하고 외로워서 잠이 안 옵니다.
저에게 맞는 집을 다시 부탁하고 싶은데 너무 제멋대로입니까>
상당히 겸허한 마음이 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지옥계에 살고 있어도
그들은 지상계의 이해력이 부족한 인간하고는 다른 것이다.
의식도 90%는 표면에 나와 있기 때문에
신리를 알면 깨닫는 것도 빠른 것이다.
노파도 신분에 맞게 만족할 줄을 아는 마음이 싹트게 된 것이었다.
나의 지도령과 수호령들은
이와 같이 지옥계와 천상계의 구조를 현상으로 보여주고 가르친 것이었다.
그것도 무리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리 스스로가 깨우치도록 하려는 배려는 지상계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타력본원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의문에 부딪쳐 그것을 추구하고
올바른 생활실천이라는 노력으로 탐구의 결과,
궁극의 신리(神理)에 접근하였을 때,
비로소 마음에 광명이 비추어 지도령이랑 수호령의 영감이 주어지거나 현상화되는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여, 결점을 수정하고,
중도의 마음과 행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용기 있는 사람인 것이다.
<선반 위의 떡>은 결코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을 올린다는 것도 같은 행위이다.
백만 번 경(經)을 올려도 마음의 본질과 행위가 따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경 자체 속에도 이러한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경을 읽고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림의 떡과 다른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맛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맛은 떡을 먹어 볼 때 단것인지 매운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 중에는
법화경을 고마운 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고맙냐고 질문해도 올바른 대답은 들을 수 없다.
반야심경에도 똑같은 말이 적용된다.
고대인도의 시대, 대부분이 문맹인 중생에게
고타마 싯다르타가 지금의 법화경에 있는
어렵고 철학화한 설교를 하였다면
어쩌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 않았을까?
당시 설파한 것은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진흙 속을 보라. 아름다운 연꽃이 피고 있지 않은가?
중생들이여,
그대들의 몸은 깨끗한가?
깨끗하지 않을 것이다.
저 진흙과 다름없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더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눈을 보라, 눈에는 눈꼽.
코를 보라, 코에는 콧물.
그리고 귀에는 귀지. 이에는 치석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느 것 하나 깨끗한 것이 없다.
땀, 대소변.
그것은 진흙보다도 더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 무상한 육체도, 잠들어 버리면,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다.
눈을 뜨면, 또 고통과 슬픔을 기억해내고, 또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고통이랑 슬픔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오관이, 객관적으로 파악한 것이,
마음속에서 만들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비록 더러운 육체라도,
저 진흙 속의 연꽃처럼 아름답게 평안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중생들이여,
마음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저 연꽃처럼 대자연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자>
이렇게 자연의 변화를 비유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으로의 길을 설파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수호령인 마이트레이야의 설명이었다.
고대인도 시대 마이트레이야 등 비구니의 일은,
마하카샤파나 샤리프트라, 마하몬가라나, 마하카챠나 등이
설법하는 장소에 많은 중생을 모으는 것이었다고 한다.
<깨달은 자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나는 아내의 수호령에게 질문하였다.
마이트레이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 깨달으신 붓다는 윤회에서 해탈하고 있기 때문에
생사를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켄토마티 쟙도버(일본 도쿄)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것을 고타마님은 그 무렵 미래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쟙도버는 동쪽나라로서,
거리에는 루비,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커다란 건물들이 있고,
길에는 먼지도 없으며,
앉아서 먼 나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알려졌습니다.
그 거리의 나라는 만데아듀슈(중국)의 동쪽나라라고 불려졌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인도까지는 배로 가든가, 비행기이겠지요.
그리고 택시나 버스, 또는 전차를 타거나 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승객인 당신은 변함없지만
교통수단은 목적지에 가기까지 많이 바뀔 것입니다.
일본에서 중국, 베트남, 타이국의 상공을 지나서 인도에 들어가겠지요.
타고 있는 당신은 변함없을 터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도 저 세상과 이 세상을,
몇 번이고 육체주를 갈아타고, 지금 켄토마티에 있습니다.
붓다는 이처럼 저 세상도, 이 세상도,
자유롭게 가서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체의 번뇌에 현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포로키티슈바라(관자재)로 되어 있기때문에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없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다.
즉 전생윤회(轉生輪廻)에 있어서 생(生)과 사(死)를 해탈하였기 때문에
태어난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붓다가 되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