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칭별칭
자 자배(子培), 호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 문강(文康)
- 유형
인물
- 시대
조선
- 출생 - 사망
1389년(창왕 1) ~ 1456년(세조 1)
- 성격
문신, 학자
- 출신지
선산(善山)
- 성별
남
- 본관
선산(善山)
- 대표관직(경력)
사예
정의
1389(창왕 1)∼1456(세조 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 선산 출신.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은유(恩宥)이고, 아버지는 관(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이다.
내용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사서오경』·『자치통감』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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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숙자 [金叔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숙자신독 담경불이)
김숙자는 신중하고 진실했으며, 화담 서경덕은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
신독(愼篤)의 김숙자
비록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유학사에는 성현(聖賢)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사림을 대표하는 김숙자(金叔滋)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들 중에는 조선이 개국한 후에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면서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後進) 양성에 힘쓴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북 구미에 은둔한 야은(冶隱) 길재(吉再)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김숙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길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경서(經書)와 『소학(小學)』을 배웠습니다. 길재는 비록 자신은 조선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지만, 자손과 제자들에게는 벼슬길을 허락했습니다. 길재 말년에 세종대왕이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자손들에게 벼슬자리를 내주자, 길재는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자손과 제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고려의 임금을 섬기고 고려의 녹봉을 받은 자신은 고려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의 임금을 섬기면 두 나라와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이 되지만, 자손과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하튼, 이 때문에 김숙자 역시 과거시험을 치르고,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자, 벼슬을 내팽개치고 낙향합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결코 섬기지 않는다는 스승의 정신을 보고 자란 김숙자로서는, 도저히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숙자는 그 후 경남 밀양에서 길재로부터 물려받은 성리학의 학통(學統)을 아들인 김종직(金宗直)에게 전수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렇듯 김숙자는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아들인 김종직에게 물려주었고, 김종직은 다시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에게, 김굉필은 다시 조광조(趙光祖)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따라서 길재를 고려 왕조의 신하로 본다면,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시작은 김숙자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김숙자를 비롯한 전기 사림파들은 성리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신을 닦고 백성을 다스린다)' 중 '수기(修己)'를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유학의 여러 경서(經書) 가운데에서 특히 『소학(小學)』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 군상의 온갖 행태를 지켜본 길재에게 가르침을 받은 만큼, 김숙자 등 전기 사림들은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철저한 자기 수양을 통해 올바른 인성(人性)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듯싶습니다. 이에 그들은 『소학(小學)』을 규범으로 삼아, 수신(修身)과 수기(修己)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김숙자는 '신독(愼篤 : 신중하고 진실하다)'을 삶의 도덕적·실천적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가 부모의 상중(喪中)에도 여막(廬幕) 옆에 서재를 만들어 돌아가신 분에게 조석(朝夕)을 올린 뒤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평소 어떤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생활했는지를 엿보게 해줍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길재의 학통을 고스란히 그 아들 김종직에게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종직의 문하(門下)에서는 정여창과 김굉필, 김일손 등을 비롯한 대유학자들이 수도 없이 많이 배출될 수 있었습니다.
불이과(不二過)의 서경덕
조선의 유학 하면 대부분 성리학(주자학)만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과는 다른 다양한 유학의 흐름과 경향들이 존재했습니다. 주자를 비조(鼻祖)로 하는 정통 성리학을 숭상한 사림파와는 다르게 유학을 해석한 선구자로는 단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기(氣)를 중시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서경덕은 하나의 원기(元氣)를 철학의 근본 주제로 삼아, "기(氣)는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으며, 태허(太虛)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것(空無)이 아닌 기(氣)의 본체(本體)를 말한다."라는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기(氣)로 충만한 우주공간에서 양기(陽氣)와 음기(陰氣)가 움직이거나 고요하게 정지해 있는 상태에 따라 변화하고 감응(感應)하여 현상계(現象界)가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양기(陽氣)와 음기(陰氣)의 움직임을 주재(主宰)하는 것은 리(理이)고, 리(理)는 기(氣)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제시했습니다. 좀 복잡하지요? 좀 더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은 만물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리(理)와 변화하는 현상태(現狀態)를 기(氣)로 나누어서 보는 반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은 기(氣)가 만물의 본체(本體)이고, 리(理) 기(氣)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서경덕의 기철학(氣哲學)은 머리 아프니까, 이쯤에서 끝내고 정통 성리학과 서경덕의 또 다른 차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송 성리학의 태두(泰斗)인 주희(주자)의 학문하는 방법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독서(讀書)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서경덕은 18살 때에 이미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을 부정하고, 먼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한 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서경덕이 일찍부터 주희(주자)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 나오는 '潭敬不二(담경불이 : 화담 서경덕은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는 서경덕이 20세가 되는 해에 세운 자기 수양의 목표였습니다. 즉, 서경덕은 공자(孔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 나오는 '불이과(不貳過)'를 통해, 평생토록 쌓을 자기 수양의 길을 밝혔습니다. '불이과(不貳過)'는 공자가 노(魯)나라의 제후인 애공(哀公)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안회(顔回)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好學 不遷怒 不貳過)"고 대답한 내용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서경덕은 젊은 시절부터 공자가 진실한 마음으로 아낀 유일한 제자인 안회의 경지에 도달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학문과 수양에 온 힘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까지도 서경덕을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송도3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숙자와 서경덕의 삶과 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