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담입니다.
사랑이 아이디를 잠시 빌렸어요
로드스꼴는 중부를 지나 지금은 북부 하노이에 있습니다.
중부 여행이 끝았으니 로드스꼴라 5기의 중부여행을 한번 볼까요?
2013.10.18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던 남부 여행이 끝났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뒤로하고 퀴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 사람들처럼 작고 아담한 크기의 비행기였다. 아쉬운 마음에 자리에 앉자마자 창밖을 바라봤다.
기껏해야 10일인데 그새 정이 들었나 보다. 차창 밖으로 남부 여행 중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기며
코가 시큰거려왔다. 그렇게 하염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눈 앞에 구름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들이민 해와 찬란한 햇빛이 펼쳐졌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카메라를 꺼내 찍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을 수는 없었다.
결국 카메라를 내려놓고 또다시 하염없이 창 밖만 바라봤다. 어느새 남부여행의 기억은 저 너머로 사라
지고 두근거리는 설렘만이 남았다. 중부, 또 하나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응
2013.10.19
햇빛이 뜨거운 2시, 빈딘성 박물관 맞은 편 바닷가 모래사장. 동그랗게 생긴 작은 물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일까? 그 안에 있는 노를 보고서 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원피스>의 한 장면을 따라해 보았다. 노를 젓고 있는 동동 선장과 망원경을 보고 있는 프노이마 부선장, 물고기를 찾고 있는 라파엘 선원, 파도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이치 선원, 쉬고 있는 산타 선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는 5기 남자 해적단이다.
-라파엘
2013.10.19
중부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현장과 학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저희가 처음으로 위령비 참배를 하고 이야기를 들으러 간 마을은 빈딩성에 따이빈싸 고자이 마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책으로 보고 듣던 것과 현장 느낌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고자이 마을은 1966년 2월 26일 한국의 맹호부대에 의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380명이 학살당한 곳입니다. 마을에 들어서서 위령비를 바라보고 있으니 저는 그제야 베트남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위령비 비문에는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름 하나 하나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갓 태어나 이름 없는 아기들도 있었습니다. 학살 이야기와 위령비를 처음 본 날이라 더 마음이 복잡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만나게 될 위령비와 이야기, 사람들이 두려워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라온
2013.10.19
“쭉 츄 한 푹”
런 아저씨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다급히 구수정 선생님께 달려가 베트남어를 알아냈다. 꼭 이 말은 해야 했다.
런 아저씨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이다. 그가 15살 때 일어났던 빈안 학살. 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 학살로 가족을 모두 잃는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말을 못 잇기도 숨을 다시 고르기도 했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왜 힘든 기억들을 다시 꺼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걸까. 런 아저씨는 그게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라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도대체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 뭐길래. 그 의문을 남긴 채 나로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말을 했다. 런 아저씨, 행복하세요. 런 아저씨는 꼭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사랑-
2013.10.20
프억흥사 아이들.
프억흥사로 걸어가던 우리들을 졸졸 따라왔던 아이들. 내가 “신 짜오” 인사를 하면 수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몰래 다가와서 툭툭 건들기도 한다. 뀌년 시에서도 가장 외진 곳, 가지고 있던 테니스공을 꺼내자 많은 아이들이 몰려와서 손을 뻗는다. 모두 자신에게 공을 달라는 눈빛을 나한테 보내온다. 나는 그중에 여자아이에게 주었고 여자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공을 던졌다. 이제는 떠날 시간,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줄 것이 없었던 나는 테니스공을 아이들에게 주고 왔다. 공을 받으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의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치
2013.10.20
사랑이가 뀌년에서 프억흥절 탐방을 끝내고 근처 마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프억흥절 탐방을 갔을 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온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모여 떠별들과 인사했다. 그리고는 절 까지 따라와 동글동글한 눈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저 한국인들이 무얼하나 구경하기 바빴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우리들의 신발 왼쪽오른쪽을 거꾸로 놓고 달아나기도 하고, 주지스님의 말씀을 듣는중에 자꾸 말을 걸기도 하던 꼬마들. 기쁘게도 마을을 떠나기 전 떠별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을 아이들과 공놀이하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내 눈에 띈 건 베트남 10대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사랑이였다. 옆에있는 나에게 "그래야아......하나도 못 알아듣겠엉......도와줘......"라고 울먹이다가도 베트남 친구들에게 활짝 웃어보이며 어떻게든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랑이가 예뻐보였다. 케이팝을 공유하고싶어 서로 아는 가수의 이름을 대고, 휴대폰에 있는 노래를 틀어보고, 춤 춰 달라는 아이들의 말에 못들은 척 넘어가기도하던 사랑이. 제대로 이해한 말은 반도 안되지만 모르는 말도 손짓 몸짓 썪어 물어 보는 노력이 대단했다. 진심 담긴 노력이 닿아 베트남 친구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이 됐을 것 같다.
-그래
2013.10.20
쯔엉탄 마을
베트남에 온지 12일 되는 날, 우리는 쯔엉탄 마을에 갔다. 넓게 펼쳐진 들판, 푸르른 산, 떼를 지어 다니는 오리 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 학살이라는 아픈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한국군에게 학살을 당하고 결국 마을 전부가 사라지게 된 이 마을과, 한국 사람들을 기다리는 듯 한 한국말로 쓰여 진 위령비문... 중부일정은 끝났지만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순심
2013.10.20.
쯔엉탄 위령비
로드스꼴라가 두번째로 찾은 위령비는 빈딘성의 쯔엉탄 학살 위령비다. 1966년 9월 24일 한국 맹호부대에 의해 58명의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는 쯔엉탄 위령비에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찾아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쯔엉탄 위령비 옆에는 마치 우리가 찾아올 것을 알고있었다는 듯 한글로 학살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위령비 앞에서 구수정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드스꼴라 떠별들에게 한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리곤 조용히 위령비에 적힌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도 한명 한명, 58명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그 이름을 다 불렸을 때 내리던 비가 멈추고 산 너머로 무지개가 나타났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는 당연히 이곳에 왔어야 했다는 듯 쯔엉탄에서의 일들은 신비로왔다.
-길담
2013.10.21
밀라이 박물관(선미 학살 박물관)에선 민간인 학살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적나라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생생한 장면들을 보고 베트남의 거리, 논밭, 마을 위에서 학살의 잔상을 희미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로드스꼴라 5기는 이곳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으로 조의를 표했다. 중부에서 향에 불을 붙이는 날마다 마음과 몸이 무거웠다.
-프노이마
2013.10.21
밀라이 학살을 만난 선미 학살 박물관. 사진 한 장과 이야기 하나를 만날 때마다 학살의 끔찍함이 나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오자 푸르른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조금은 숨이 트였다. 그러나 박물관 정원 길을 걸을 때, 숨은 다시 막혀버렸다. 길을 따라 나있는 군화자국, 바퀴자국, 동물발자국...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갔을, 마을사람들이 군인을 피해 도망쳤을 길. 길을 따라 걸으니 학살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은 곳이 나왔다. 잘려서 밑동만 남은 나무와 모조리 죽어있는 가축들. 들은 그대로 폐허였다. 그리고 그 곳에 놓인 향. 그저 묵묵히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그들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멀대
2013.10.22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에 있는 위령비다. 영국인 작가가 세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빈호아에서 일어난 학살은 한국군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세운 위령비는 없다.
한국인에 의한 학살지역에 아무 관련없는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 이건 어떤 의미일까?
왜 한국인은 위령비를 세우지 않은걸까?
그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에 참배를 하고있는 한국인인 우리들. 이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영국인 작가가 만든 위령비에서 내가받은 질문이다.
-동동
2013.10.22
(카메라가 고장나서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도안응이아는 생후 6개월 된 나이에 학살을 당하게 되지만 어머니가 그를 계속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시체더미의 맨 마지막에 깔려있던 통에 탄약이 섞인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시력을 잃게 되었다.
도안응이아는 주워온 것처럼 낡고 군데군데 부서진 기타를 들었다. 나는 그 기타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데 기타를 칠까 생각했다. 우리는 몇 평 되지 않는 공간에 앉아 그의 노래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간 살아왔던 인생 중의 고통, 시련 등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해준 어떤 이야기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제비
2013.10.23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증사 하미마을에 있는 팜티호아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신짜오’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5기가 베트남에 오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 영정사진으로 뵙는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고우셨다. 아들 록아저씨와 구수정 선생님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는 동안 나를 비롯한 다른 떠별들은 흘러나오는 눈물과 콧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때 문득 “팝티호아 할머니를 뵌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울컥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묘에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연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길 위에서 한 사람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길위의 연대’일까? 그래서 내가 할머니 이야기에 울컥한 것일까? 그날의 만남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알로하
2013.10.23
강물에 초를 흘려보내다.
호이안 쩐푸거리
강을 따라 흐르는 강물위로 색색깔 초들이 흐르고 있다. 흐르는 강물에 떠 있는 초들은 어두운 강물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강 옆으로 초를 파는 상인들이 보였다. 얼마냐고 묻자, 만동이라고 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을 내는 초들의 값치고는 싸다는 생각이 든다. 불이 켜진 초를 바라보자, 지난 2주간의 여행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반겼던 덥고 습한 공기, 색색깔의 달콤한 열대과일들, 길 위에서 마주친 베트남의 풍경들, 길 위에서 만나온 역사의 순간들, 베트남의 길 위에서 나는 변해가고 있다. 앞으로의 여행이 지금까지의 여행 같기를 바라며 손위에 고이 올려놓았던 초를 강물위로 흘려보냈다.
-화이
2013.10.23
꽝남성 호이안.
호이안 투본 강가의 구시가지. 오래된 목조건물들, 집집마다 달린 빨갛고 노란 전등들, 중국식건물들과 사당, 실크 옷을 파는 가게, 도장을 즉석에서 파주는 젊은 베트남 남자, 해금과 북을 연주하는 거리공연단. 호이안의 밤거리를 걷다보면 마치 몇 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오래된 집에서 치파오를 입은 여자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호이안은 참파 왕국과 응우옌 왕조 시대에 걸쳐 중국, 인도, 이슬람을 연결하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훗날 항구도시가 다낭으로 넘어가면서 호이안의 번성은 막을 내린지만 구시가지는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매력적인 거리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동
2013.10.26
플래그 타워
응우옌 황궁의 외곽 성벽에 있는 게양대다. 베트남 전쟁때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곳이라 많은 것들이 부수어졌지만 1969년에 현재의 모습이 완공되었다. 깃발의 높이는 총 합 29.5m 이다. 마침 바람이 불고 있어서 빨간색 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하늘은 흐리고 바람이 불고 성벽들이 늘어선 가운데 우뚝 선 모습이 웅장하게 보였다. 게다가 어두침침한 성벽가운데 빨간색 기가 흩날리고 있어서 더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 봐도 좋지만 흐릿한 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가서 보는 것도 좋다.
-싼타
2013.10.28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다. 한국도 아닌 베트남에서. 기차는 아직 올 생각도 않는데 귓속엔 벌써부터 뿌, 뿌- 하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손에는 열대과일 용과를, 다른 한손에는 김이 슬슬 나는 옥수수를 들었다. 아무리 60리터짜리 여행배낭이 어깨를 짓누른들 이 두 녀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어두컴컴한 방 침대이불에 반 쯤 파묻혀 지나가는 가로등불빛에 비추어 먹고 싶다. 저 멀리서 예상을 뒤엎는 거대한 기적소리에 나는 귀를 막았다.
-조아
로드스꼴라 5기 떠별들은 하노이와 마이쩌우 여행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5기 떠별들을 기다려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사진 _ 로드스꼴라 5기 떠별들
로드스꼴라 홈페이지에서 복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