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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간귀신(측신) ①형태 - 뒷간 귀신은 대체로 젊은 여성신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인데, 치렁치렁한 긴 산발로 얼굴을 가리고 미인이 아니라 지저분하고 마녀의 이미지를 지닌 여성신이다. - 장난기와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엿보이며 길고 마른 팔, 가느다란 손목, 긴 손톱의 지저분한 손을 지녔으며 그 손으로 뒷간 일을 보는 사람들의 몸을 만지는 장난을 한다. - 처녀귀신처럼 한복을 입고 맨발을 하고 있으나 흰 한복은 더러운 변소 간에 있으므로 깨끗하지는 못하며 얼룩이 져 있다. - 악신이기 때문에 해를 끼치는 데 빈 뒷간에 있다 갑자기 들어오는 사람에 놀라면 그 사람을 놀래키며 복수한다. 이에 노여움을 잘 타고 포악한 성격을 나타낸다. - 이 귀신은 매달 6일, 16일, 26일에 변소에 와 머물면서 자기의 쉰 다섯 자나 되는 긴 머리카락을 발가락에 걸고 세는 것이 일과로, 긴 머리를 변소에 늘어뜨려 놓고 머리카락 세는 데 홀로 열중하고 있다. 키득키득 웃는 웃음소리와 괴상한 숫자놀음이 변소간에 울려 음산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만든다. - 이에 사람이 변소에 올 때 기척을 하지 않고 문을 갑자기 열면, 머리카락을 세는 데 열중하고 있던 귀신이 놀라 긴 머리카락으로 사람의 머리를 덮쳐 변소에 빠뜨린다 한다. ②특징 - 변소를 관장하는 신으로 악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 변소에 빠진 사람은 며칠 안에 죽게 되거나 재액을 얻게 된다. 똥떡을 만들어 변소 앞에 가서 비손하고, 그 떡을 먹으면 재액이 소멸된다고 한다. - 가신(家神)의 하나로 측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변소에서 병을 얻거나 사고가 나는 것은 바로 이 신의 소행이라고 믿어진다. - 늘 뒷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6'이 든 날짜, 매월 6일·16일·26일 등 6자가 든 날에 한해서만 있고, 그 외의 날에는 외출해서 없는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6자가 든 날에는 그날 변소 가는 것을 되도록 피해 왔다. - 이러한 관념은 어두운 밤 멀리 떨어져 있는 변소가 공포의 대상이 된 것에서 생겼을 것이다. 또 측신이 놀라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한국의 재래식 변소를 갈 때 지켜야 하는 인기척을 유도하려는 방편에서 생긴 설화로 보인다. - 제의는 정초에 지신밟기를 할 때 제물을 바치고, 그 외에 뒷간에서 아이들이 신발을 빠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는 측신이 노해 탈이 생긴다는 징조이므로 시월 상달의 고사 때 반드시 고사떡과 메를 바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제의를 갖지 않는다. - 강원도에서는 변소를 지으면 길일을 택해 주부가 변소 앞에 제물을 간단히 진설하고 촛불을 켠 뒤 ""변소에서 대소변을 볼 때 탈이 없게 해 주소서.""하고 비손한다. - 안동 지방의 뒷간신의 신격(神格)은 여성 뿐 만이 아니라 남성의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③ 출몰지역 - 전국적이다. 민간에서 전래되어온 토종 귀신이다. ④ 배경설화 -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 (1) 줄거리 우리나라에 있어서 측간귀신의 내력 이야기는 제주도의 심방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는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에 그 유래가 나타난다. 집안의 각철로 관장하고 있는 신들의 형성유래담인 이 신화에 의하면, 노일제대귀의 딸은 남(南)선비의 첩이다. 그가 본부인을 죽이고 그의 일곱 아들까지 죽이려다 흉계가 드러나 전처소생의 아들에게 쫓겨 측간으로 도망가 55자나 되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매어 죽어 변소귀신이 되었다 한다. <문전본풀이> 중 측간부인 설화 본문 「옛날에 남선 고을의 남선비는 여산 고을의 여산 부인과 부부가 되어 아들 7형제를 두었다. 아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배를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 위해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간악하기로 소문난 그녀는 남선비를 집으로 불러들여 내기 장기를 두어, 남선비의 배와 곡식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오갈데 없이 가련한 신세가 된 그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첩으로 삼아, 그녀의 집에서 끼니를 얻어먹게 되었다. 간악한 첩이 남편을 잘 모실 리가 없었다. 그녀가 끓여다 주는 겨죽으로 몇 해를 연명하는 사이에 남선비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한편, 여산 부인은 3년 동안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네가 준비해준 배를 타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오동 고을에 닿은 그녀는 남편의 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눈이 어두운 남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밥을 해 올리자, 남선비는 그녀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단 정화를 나누었다. 그 때에 집에 돌아온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 부인에게 예까지 오느라고 고생을 했다고 하면서 목욕을 가자고 권하였다.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인 여산 부인은 귀일의 딸 뒤를 따라 주천강 연못가로 목욕을 나갔다. 귀일의 딸은 등을 밀어주는 체하다가 여산 부인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여산 부인의 옷을 벗겨서 입고는 남선비에게 돌아가 큰 부인 행세를 하면서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행세가 나빠 주천강 연못가에 데리고 가 죽였다.”고 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남선비는 자기 원수를 갚아주었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선 고을을 향해 떠났다. 부모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아들 일곱 형제는 선창가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들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아는 지와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자기들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날부터 일곱 형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안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꾀병을 부리며 일곱 형제의 생간을 먹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막내 동생 녹디성인은 청태산 마구 할망의 도움을 받아 산돼지의 간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형들의 간이라고 하였다. 귀일의 딸은 여섯 개의 간을 먹는 체하며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는 척 마는 척하였다. 녹디성인은 귀일의 딸 머리채를 잡아 엎질렀다. 그러고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형들을 불렀다. 형들이 동서에서 달려들자, 귀일의 딸은 도망을 치다가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었다. 그래서 주목지신(株木之神)·정살지신이 되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변소로 도망을 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변소의 신인 측도부인(厠道婦人)이 된 것이다. 일곱 형제가 달려들어 죽은 위에 다시 복수를 하려고 두 다리를 찢어발겨 드딜팡(용변을 볼 때에 디디고 앉는 납작한 돌)을 마련하고, 대가리는 끊어 돝도고리(돼지먹이통)를 마련하였다. 머리털은 끊어 던지니 바다에 가 해초가 되었고, 입을 끊어 던지니 바다의 솔치가 되었다. 또 손톱·발톱은 쇠굼벗·돌굼벗(딱지 조개의 일종)이 되고, 배꼽은 굼벵이가 되었으며, 항문은 대전복·소전복이 되었다. 그리고 육신은 빻아서 바람에 날리니 각다귀·모기가 되었다. 일곱 형제는 황세곤간이 관리하고 있는 서천꽃밭으로 가서 도환생꽃을 얻어와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의 주천강 연못가로 달려갔다. 하느님께 축수를 드려 연못물을 마르게 한 다음, 뼈만 남은 시체에 도환생꽃을 올려놓고 금붕체로 후리쳤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살려내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춘하추동 사시절을 물속에서 지냈으니 몸인들 안 추울 리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 세 번 더운 불을 쬐면서 조왕할망으로 앉아 얻어먹기 마련하십시오.”라고하면서 조왕신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 형제는 제각기 자기의 직분을 차지하여 신들이 되었다.」 ⑤기타 - 위 설화에 의하면 본부인 조왕(부엌을 관장하는 신)과 시앗인 측도부인은 원수간이라 하여 부엌과 측간은 멀리 짓고, 측간의 돌멩이 하나, 나무 하나라도 부엌으로 가져오지 않으며, 부엌의 물건 역시 측간에 가져가지 않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 그 밖의 지역에서 측신의 유래에 관한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성주신(城主神, 城造神) 밑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신’이라고만 전한다. - 주관사업자 : 최래옥 (한양대 교수), 강현모 (한양대, 문학박사), 김봉진 (한양대, 문학박사) - 자문위원 : 최인학 (인하대 명예교수), 김균태 (한남대 교수), 신원선 (동덕여대 교수), 하수경 (전주대학교 교수), 김용덕 (한양대 교수), 장장식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⑥변소 명칭 - 대변소大便所, 똥둑간, 뒷간, 변소便所, 서각西閣, 세수간洗手間, 시뢰豕牢, 요처要處, 위생간衛生間, 정방淨房, 측간厠間, 측소厠所, 측실厠室, 측청厠圊, 해우소解優所, 혼측溷厠, 화장실化粧室, 회치장灰治粧, 동숫간(전북,충남), 드나딧간(함남), 먼데(완), 작은집(완), 정낭(함경), 진잿간(특), 통시(제주), 명상실(신조어), 절대자유공간(신조어), WC. Toiler(외래어), 2) 여산부인 여산부인은 부엌신인 조왕할망신이다. 여산부인의 식구들도 모두 집과 관련된 신으로 좌정했다. 여산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일반본풀이 중 하나인 '문전본풀이'에 잘 나타나 있으며, 평안도의 '성신굿', 함경도의 '살풀이', 전라도의 '칭성풀이' 등과 내용 면에서 비슷하다. 옛날 여산 고을의 여산부인과 남선 고을의 남선비가 혼인하여 7명의 아들을 낳고 살고 있었다. 식구는 많아 생활이 어려워지자 여산부인은 남선비에게 장사를 하자고 권하게 된다. 남선비는 여산부인이 마련해준 장사 밑천을 갖고 오동고을로 간다. 남선비가 오동고을에 배를 대고 들어서자 주막집 딸인 노일저대 귀일의 딸이 애교를 떨며 남선비를 홀린다. 남선비는 여산부인이 마련해준 돈을 모두 놀음으로 탕진하고 귀일의 딸을 첩 삼아 살게 되었다. 돈이 없으니 초라한 움막집을 지어 살며, 귀일의 딸이 조금씩 가져다주는 겨로 죽을 쑤어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였다. 남선비는 먹는 것이 부실해서인지 눈까지 멀게 되었다. 3년을 기다려도 남선비가 돌아오지 않자 여산부인은 직접 남편을 찾아 오동고을로 간다. 남선비를 찾아 헤매다 새를 쫓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요 새 저 새, 너무 약은 체 말아라. 남선비 약은 깐에도 노일저대 귀일의 딸 호탕에 들어 수수깡 외기둥 움막에 앉아 겨죽 단지 옆에 끼고, '이 개 저 개 주어 저 개' 쫓고 있다. 요 새 저 새 주어 저 새!"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산부인은 남선비의 이야기인지라 아이에게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달라고 하고는, 남선비가 사는 곳을 물어 찾아간다. 남선비의 집을 찾아 낸 여산부인은 하룻밤 묵어가자고 들어가, 남선비에게 정성껏 밥을 지어 올린다. 눈이 어두운 남선비는 부인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상을 받는데, 그제서야 여산부인은 자신을 밝히고 회포를 푼다. 집으로 돌아온 귀일의 딸이 이 광경을 보고 화를 내자 남선비가 큰부인이라 소개하니 상냥하게 대한다. 그러고는 여산부인에게 주천강 연못에 목욕이나 하러 가자고 꾀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고는 여산부인을 못에 빠뜨려 죽여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여산부인인 것처럼 꾸미고, 남선비에게 귀일의 딸이 행실이 괘씸하여 죽이고 왔다고 말하고는 남선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 도착한 어머니를 본 아들들은 집도 못 찾아가고, 아버지의 상과 아들들의 상도 구별하지 못하는 귀일의 딸의 행동을 보고 여산부인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아들들의 눈치를 알아챈 귀일의 딸은 아들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먼저 남선비 앞에서 배가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며 점을 봐다 달라고 한다. 남선비가 점을 보러가자 노일저대는 점쟁이로 변장하고 "일곱아들의 간을 먹여야 병이 낫는다."고 말한다. 점을 여러 번 보았으나 노일저대가 변장한 점쟁이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남선비는 할 수 없이 아들들을 죽이기로 하고 은장도를 간다. 마침 남선비의 집에 불을 빌러 갔던 뒷집 할망이 이런 사실을 아들들에게 알려준다. 한참을 울던 아들들은 난관을 헤쳐갈 방법을 생각하는데, 별 수가 없었다. 막내아들인 녹디셍이가 형들에게 숨어 있으라 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이 형들의 간을 내어 올 테니 그것을 먹은 어머니가 병이 나아가면 자신까지 죽이라고 한다. 남선비는 그리하기로 하고 녹디셍이에게 칼을 준다. 아버지에게서 칼을 받아 형들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간 막내아들이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여산부인이 나타나 이쪽으로 달려오는 노루를 잡으라고 말한다. 아들들이 꿈에서 깨어보니 노루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노루를 잡으니 뒤에 산돼지 일곱 마리가 내려온다. 어미는 남겨두고 새끼 여섯 마리를 잡으라고 한다. 녹두셍이는 그 새끼 산돼지의 간을 내어 형들에게 밖에 있으라 하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귀일의 딸에게 간을 주고 나서 방 밖으로 나와 창호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피만 입술에 바르고 먹는 체하고 간은 모두 자리 밑에 숨기는 것이었다. 막내아들이 다시 들어가 '이제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자, 귀일의 딸은 '좀 나아지긴 했으나 하나만 더 먹으면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막내아들은 귀일의 딸의 자리를 들춰 숨겨놓은 간을 찾아내고는 형들을 불러낸다. 이에 놀란 남선비는 정낭에 부딪혀 죽어 정낭신이 되고, 노일저대 귀일의 딸은 도망치다 변소에 목을 메고 죽어 측간부인(변소 신)이 된다. 아들들은 죽은 귀일의 딸의 두 다리를 변소의 디딜팡을 만들고, 머리는 돼지 먹이통을 만들고, 머리카락은 잘라 바다에 던지니 페(해조류)가 되고, 입은 솔치, 손·발톱은 쇠굼벗·돌굼벗, 배꼽은 굼벵이, 항문은 전복이 되었다. 그리고 육신을 빻아서 던지니 바람에 날려 각다귀·모기가 되었다. 아들들은 환생꽃을 구해다가 주천강 연못에 가 여산부인을 살려내고, 어머니가 죽어 누웠던 흙으로 시루를 만들어 하늘에 축원을 한다. 한 명에 하나씩 시루에 구멍을 내니, 그때부터 시루 구멍이 7개가 되었다고 한다. 여산부인은 죽었을 때 차가운 물 속에 오래 있었다 하여 하루 세 번 따뜻한 불을 쬐는 부엌의 신인 조왕할망이 되게 하고, 아들들은 위로 다섯 명은 각각 집의 동, 서, 남, 북, 중앙을 지키게 되었고, 여섯째는 뒷문전(門前), 막내는 문 앞의 일문전(一門前) 신이 되었다. 참고자료 현용준(1976),『제주도 신화』, 서문당 현용준(1988),「부엌신 여산부인」,『제주여인상』, 제주문화원 장주근(2001),『제주도 무속과 서사무가』, 도서출판 역락 제주도(1985),『제주도 전설지』 김순이(2001),『제주도 신화와 전설1』, 제주문화 김순이(2001),『문화, 영웅으로서의 제주 여신들』 고대경(1997),『신들의 고향』, 도서출판 중명 3)조왕(竈王)신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여성 전용의 공간이었다. 여성들은 그곳에서 불을 다루어 가족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고 방에 온기를 불어넣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부엌에서 부뚜막은 집안의 화복(禍福)에 관계된 조왕신(王神)을 모시는 장소였기에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고, 부뚜막의 청결 정도가 바로 그 집안 여성들의 근면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조왕(王)은 부뚜막을 지키는 신(神)으로, 보통 ‘조왕각시’·‘부뚜막신’·‘조왕할매’ 등으로 부른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계하는 조왕은 질병과 액운을 막아주고, 삼신(三神)처럼 아기를 점지시켜 주기도 하며, 특히 부(富)를 안겨주는 재물신(財物神)으로 믿어졌다. 그래서 아녀자들에겐 삼신과 더불어 성주신(成主神 혹은 城主神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중요시 되었다. 조왕은 부뚜막의 뒷벽 한가운데 작은 턱에 모셔졌는데, 그 신체(神體)는 쌀을 담은 항아리나 백지, 헝겊 조각, 한지를 접은 것, 명태 등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화수가 가장 보편적인 신체의 형태이다. 이밖에도 불교의 부적과 같은 형태를 취하여 신체로 하는 경우, 제의(祭儀)를 행할 때마다 솥뚜껑을 엎어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떠놓는 경우, 신체가 없는 건궁(신의 형체가 없이 그냥 모시는 신)인 경우, 그림을 모시는 경우 등이 있다. 제일(祭日)은 특별한 날이 없고 정화수를 매일 아침 한 주발 떠다 놓는 것이 일반적이고,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향을 피우고 음식을 놓는 것이었다. 조왕과 관련한 속신(俗信)으로는 불씨를 꺼뜨리면 집에 재앙이 온다는 것을 비롯해서 부뚜막 앞에서 옷을 벗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욕을 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것 등이 있으며, 화장실과 부엌의 거리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하고, 칼·도끼 등의 위험한 물건을 부뚜막 위에 올려놓거나 하면 안 된다는 금기(禁忌)도 있다. 또한 아녀자들이 부엌에 들어와서 밖의 일을 험담하거나 불평을 하게 되면, 집안에 병고가 생기거나 특정인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이러한 조왕의 성향은 『전경』 행록 4장 36절의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상제께서 김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던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라는 구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조왕은 음력 12월 23일에 하늘로 올라가 한 해 동안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염라대왕에게 빠짐없이 보고한 뒤 정월 초하루 새벽에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무언가가 켕기는 사람은 조왕이 승천하는 날 밤에 아궁이에 엿을 발라 두기도 했다. 엿이 끈끈하게 눌어붙어서 조왕이 승천을 못하거니와 승천을 했더라도 입이 붙어 염라대왕 앞에서 말을 못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조왕신앙의 내력에 관해서는 타지방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다만 제주 지방의 무가(巫歌)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옛적에 남선고을의 남선비는 여산고을의 여산부인과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고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두 내외가 부지런히 일했지만 흉년이 겹치는데다 식솔이 많아 끼니 잇기가 힘들어서 어떻게 하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만 했다. 궁리 끝에 아내는 갓을 만들어 팔아 모은 돈으로 남편에게 곡식을 사오게 하였다. 남편은 곧 배 한 척을 마련해 오동고을로 곡식을 구입하러 떠났다. 그런데 오동고을 선착장에 도착한 남선비는 그만 주막집 딸 노일제대귀일의 꾐에 빠져 눈까지 멀게 되고, 또 가져갔던 돈마저 다 털려 이제 그 여인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되었다. 고향에서는 여산부인이 몇 년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자 배를 띄워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남편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그를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다. 결국 수소문 끝에 남편을 찾았으나 이미 신세를 망친 남편의 몰골이 거지나 다름이 없자 여산부인은 깜짝 놀랐다. 여산부인은 초라한 행색의 남편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 가져다주고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듣게 되었다. 이때 밖에 갔다가 돌아오던 노일제대귀일이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짓이 들통 날까 두려워 여산부인을 연화못의 낭떠러지에 데려가서 등을 밀어 물에 빠져 죽게 하였다. 그런 후 노일제대귀일은 남선비를 데리고 남선고을로 돌아와 여산부인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일곱 아들은 몇 년간 자취가 묘했다가 나타난 아버지를 보며 반가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어머니 모습은 간데없고 한 여자가 어머니 노릇을 하자 그들은 그녀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노일제대귀일은 꾀병을 내어 남선비에게 병을 낫는 점을 봐 달라고 한다. 꾀병에 속은 남편이 점을 보자, 노일제대귀일은 점쟁이로 변하여 일곱 형제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고 남선비를 부추겼다. 그러자 남선비는 아들이야 또 낳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칼을 갈았다. 이를 알게 된 막내가 자신이 형들의 간을 대신 가져오겠다며 형제들을 일단 산으로 대피시켰다. 중간에 형제들은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노루의 간을 가져가라고 일러주었다. 과연 여섯 마리의 노루가 나타나니, 막내는 그 간을 떼어 계모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녀는 먹는 척 하면서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자, 이를 문틈으로 엿보던 아들들이 뛰어 들어가서 자리를 걷었다. 당황한 노일제대귀일은 방 밖으로 달아나 뒷간에 목을 매었고 결국 뒷간귀신인 측도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남선비도 덩달아 도망을 치다가 올레(제주도 가옥의 입구)의 정낭에 걸려 죽자, 그는 정낭신이 되었다. 이제 일곱 형제는 서천꽃밭에서 환생꽃을 얻은 후 연못으로 달려가 “하느님! 하느님! 연못이나 마르게 하여 주십시오. 어머님 뼈만이라도 찾으리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연못의 물이 삽시간에 마르더니 곧 돌아가신 어머니 뼈가 형제들 눈앞에 드러나게 되었다. 곧바로 형제들이 그 환생꽃을 어머님의 뼈 위에다 놓자 신기하게도 어머님은 곧 살아나셨다. 형제들은 기뻐하며, 어머님께 “어머님은 춘하추동 물속에서 지내셨으니,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조왕할머니가 되셔서 하루 세끼 따뜻한 불을 쬐며 편히 얻어 자십시오.”라고 하여, 추운 물속에서 고생한 어머니를 따뜻하시라고 부엌의 조왕할머니로 모셨다. 그리고 측간귀신이 된 노일제대귀일과의 악연으로 인해 이때부터 부엌의 물건은 뒷간에 못 가져가고 뒷간의 것은 부엌에 못 가져가는 풍습이 생겼다. ≪제주도 지방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문전본풀이」 중에서≫ -김종상 고문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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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귀설화 잘읽었습니다.
조왕신 측간귀신의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