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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석계 그림/초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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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시간이 되어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에 다시 뵐께요”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녀가 빈 찻주전자와 집기들을 챙기고는 소축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떠나자 갑자기 장평의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감정의 공백이 생겨났다. 방금전 찻주전자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그의 흔들리는 마음인양 나무 탁자위에 상흔처럼 번져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저녁으로 가까와질 무렵에는 장평이 마음과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외원인 표국의 업무장으로 향했다. 표국외원은 내원과 또 다른 생동감이 감돌고 있었다. 영화표국을 상징하는 태양을 두른 청룡의 표식이 새겨진 깃발이 전각 기둥위에서 창공으로 비산하듯 표표히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태웅전이라는 전각앞 빈터에는 표사와 보표와 쟁자수들이 열심히 짐을 수레에 실으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표사의 우두머리인 표두들과 부국주의 분주한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장평이 방해할까봐 멀찌감치 서서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다가 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표국이 설립된지 십년이 넘었고 항주에서도 세손가락에 드는 큰 표국인지라 이끼낀 기왓장과 돌장식 하나하나가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찾아오는 의뢰자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듯 했다.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표국내의 깊은 우물곁에 와 있었고, 우물 바로 옆에는 커다란 물푸레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물푸레나무 아래 응지에 쌓였던 눈은 이제 모두 녹아 질펀한 푸른 잔디와 흙만이 저녁 햇살에 빛나고 있었으며, 물푸레나무 에는 능소화 덩굴이 높이 하늘을 향하고 자라나 있었다. 능소화 노란꽃 피면 가을장마가 시작된다 했다. 그때쯤이면 이곳 항주와 영화표국에서의 그의 낯선 생활도 적응되었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키큰 능소화 넝쿨 같이 그의 마음의 키도 훌쩍 자라나 있을 것이다. 장평이 첫날 하루를 그렇게 표국내부를 살펴보며 소일을 했다. 그리고 저녁무렵에는 국주인 황대녕이 돌아왔으며 기분이 몹시 좋아보였다. 마침 같이 국주를 동행한 표두의 말을 빌면 큰 표물을 수뢰했다고 했다. 어쩜 국주인 황대녕이 직접 표행을 맡아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 국주 황대녕이 생각하기에 칠일이 걸리는 표행의 최종 목적지인 읍속으로 가는 표행의 길은 큰 위험이 없었다. 표행을 무사히 수행하기 위해 안면 칠푼에 실력 삼푼이 필요한 이 바닥에서 그는 이제껏 잘 해온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축하는 의미에서 표두 이상의 간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고 물론 장평에 대한 환영식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표국의 바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모두 내원의 넓은 별실에서 술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었으며, 밝은 유등이 장내를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처럼 맡은 큰 표물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서 장평이 부인했으나 내심 마음속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황유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친과 두 남동생 역시 참석한 편한 자리였으나 그녀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는 화산파의 무관인 유천무관에는 오늘 아침부터 한 중요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 행사는 화산파 본산의 장로가 마침 이곳에 발걸음을 했기에 겸사하여 무술대련과 신입관원들의 승급시험이 있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뒤 모든 제자들과 관원들이 참석하는 연회가 있는 것이다. 화산파와 같은 대문파의 장로는 평소 하늘과 같이 보기 힘들었고 그들은 작은 문파 한두 개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 화산파 본산에서 수학하기를 희망하는 황유정 역시 그러한 모처럼의 본산의 높은 위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일찍 귀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은 남아서 술자리를 계속했다. 표국의 식솔들 대부분이 국주가 젊은 시절에 호남성 벽지의 한 이름없는 공산이라는 사문에서 무공보다도 오히려 그 다급한 성격에 맞지도 않게 도경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림문파라기보다도 실제적으로 도문에 가까운 작은 사문의 출신인 장평이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태양혈도 튀어나오지 않고 비록 눈빛은 맑으나 정광이 형형하지 않고 골격도 굵지 않은 외모때문에도 그의 무공실력을 그저 그런 정도로 생각했다. 세상에는 무당파와 공동파 같은 정통 도문의 이름을 도용하여 사람을 속이는 혹세무인의 인간들은 밤하늘 별같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자들이 사용하는 무공초식 또한 겉으로는 요란했으나 사실 싸움에 임하여는 보잘 것 없었고 잘못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장평은 젊은 나이었으나 자신의 실력을 알고서 겉모습과 명칭만 거창한 삼류무공을 강호의 노련한 그들 앞에서 어리석게 내세우지 않는 것에 그들은 흡족했다. ‘겸허한 젊은이군, 세상이 넓은 것을 알고 스스로의 분수와 지닌 능력을 바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청년이다. 앞으로 선배 표사들이 잘 가르치고 이끌면 향후 이 방면에서 훌륭한 표사가 될 것이다’ 얼굴에 구렛나룻이 무성하고 사십대 초반의 방탁효 표두가 장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의 낯선 자리에서 사람을 어려워 하고 행동을 조심하는 태도를 지켜보다가 마음에 들었던지 호감어린 목소리로 장평에게 제안했다. “소형제, 자네도 국주님을 본받아 한번 이름난 표사가 되어 보게.” “강호경험도 없는 제가 어떻게...” 표행을 책임지는 표사란 그가 그제껏 되고자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때 국주인 황대녕이 그 소리를 곁에서 듣고 말했다. “그래, 사제도 이제 호호탕탕 사나이의 길을 가게나. 표사란 그렇게 세인들이 생각하듯이 위험한 직업이 아니다. 표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각지역의 녹림의 호걸들과 안면을 터두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스럽지 않다. 녹림의 영웅들도 계란을 한번에 많이 얻기 위해 암탉을 잡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결코 벌이지 않지. 그러다가는 그들 역시 무림공적으로 몰려 제명에 죽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사제도 돈을 모으고 마음에 드는 여인과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장평의 낯이 붉어졌고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 했다. 그때 그러한 소란스런 장내에 갑자기 황유정이 나타났다. | ||||
첫댓글 마음의 키가 어디까지 자라날지.....p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