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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877년 |
943년 |
고려 제1대 왕 태조(재위 918~943년). 혼인 관계를 통해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자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를 두었다.
918년 궁예를 폐위하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고려를 세우고, 융화 정책, 북진 정책, 숭불 정책을 건국 이념으로, 불교를 호국 신앙으로 삼았다.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를 유훈으로 남겼다.
민족 대통일의 위업을 이루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 고려의 초대 왕 태조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불교를 호국 신앙으로 삼아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왕건의 시작은 궁예의 부하가 되면서부터이다. 한반도 중부를 석권한 궁예가 지금의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왕건은 아버지를 따라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궁예 아래에서 왕건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광주, 충주, 청주, 괴산의 군현을 평정한 공로로 900년에는 아찬에 임명되었고, 903년에는 후백제를 공격하여 금성군을 함락했다. 인근의 군현 10개를 빼앗아 나주를 설치하고 해상권마저 확보했다. 왕건이 출전하는 전투마다 크게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하자 궁예의 신망은 계속 높아졌다.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문제는 궁예의 실정이었다. 그는 점점 폭군으로 돌변하며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고, 민심을 잃어 갔다. 결국 918년 신숭겸 등이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추대해 새 왕이 되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는 천수(天授)라고 정했다. 하지만 난관이 많았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궁예를 추종하던 반대파의 저항이 거셌고, 지방의 호족이 날로 득세하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지방 호족들의 존재는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세우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게다가 후백제의 견훤 역시 호시탐탐 국경을 침략해 왔다.
후삼국 통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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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민생 안정을 돌파구로 선택했다. 복잡한 대외 관계는 일단 접어 둔 채 신라 말기부터 문란해진 토지 제도를 바로잡았다. 궁예 치세에 높아진 조세도 경감했다. 민심이 왕건에게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는 하나씩 새로운 정책을 실현해 나갈 수 있었다. 호족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각 지역 호족 출신 여성들과 정략적으로 혼인했고, 그 자손을 국가 인재로 등용하며 우대했다. 29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린 것은 이 때문이다. 민란과 반발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이듬해 1월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그가 내세운 정책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는 융화, 북진, 숭불 정책을 건국 이념으로 삼아 강조했다. 지방의 호족은 회유했고, 서경을 개척해 여진을 공략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러면서 불교를 호국 신앙으로 삼아 전국에 절을 세워 불교를 장려했다.
왕건은 신라에는 친화 정책을, 후백제에는 적대 정책을 썼다. 920년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즉각 구원병을 보낸 일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후백제의 군사력은 고려보다 훨씬 강했다. 양국은 특히 경북 안동 일대에서 자주 부딪쳤다.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장악해야 고려와 신라의 교류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양국의 물리적 충돌은 930년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 부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비로소 끝이 나기 시작했다. 이후 일은 쉽게 풀렸다. 935년 견훤이 아들의 난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려로 도망쳐 왔고, 신라 왕까지 자진 항복했다. 결국 왕건은 이듬해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에서 최후의 접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훈요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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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어 남겼다. 후대 왕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교훈을 정리한 글이다. 왕건이 통일 직후에 새 왕조의 도의와 신하가 지켜야 할 절의를 정리해 직접 썼다는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통일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의 업적으로는 북진 정책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고구려 멸망 이후 방치된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도시로 키웠고,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을 토벌했으며 안변 이북의 옛 고구려 땅도 일부 회복했다. 또한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그 지도층과 백성을 받아들여 차별하지 않고 관직에 중용했다.
태조 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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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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