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8 :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수군 2차 출격)
04.08.21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의 출동이었다.
당초에는 6월 4일 출동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에 연락하여 3일까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월 27일 원균으로부터 일본수군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 계획을 앞당겨 전라좌수군의 단독출전이 되었다.
2차 출동에서부터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注:이 기록에 관해서는 1차 출동시 전투편성에 돌격장이란 직책이 있었던걸로 봐서 1차 출동시에도 거북선이 출동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1.사천 해전(5월 29일)
일본전함 10척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은 전라좌수영 함대는 우수영과의 약속보다 앞서 판옥선 23척, 협선 15척으로 함대를 편성하고 좌별장 우후 이몽구와 같이 5월 29일 새벽에 수영을 출발하였다.
남해 노량으로 가는 도중 경상우수영 판옥선 3척 이끌고 대기하고 있던 원균과 섬진강 하구의 하동 부근에서 합류하였고, 일본수군이 사천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함대를 이동시켜 사천을 향해 항해하고 있을 때 일본전함 한 척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전부장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나아가 격파하여 서전에 사기를 북돋았다.
사천만(泗川灣)에 도착하여 보니 일본군은 형세가 험준한 곳에 수백명씩 진을 치고 대항할 태세였으며, 바다에는 1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灣의 입구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바다가 얕고 벌써 썰물이라 판옥선같은 큰 배가 쉽게 돌진할 수 없고, 날도 어두워져 일단 함대를 뒤로 물린 채 공격을 삼가하였다.
실질적인 연함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의 헛점을 노려 적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적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함대를 천천히 후퇴시켰다.
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나와 이순신 장군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일본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배에 타고 조선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저녁 조수도 밀려들어 큰 배도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조선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드러내었다. 적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각종 총통들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에서는 불꽃이 피어 올랐다.
일본수군은 처음보는 신병기에 겁을 먹고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와중에 권준, 어여담, 배홍립, 정운, 김완,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 송성, 이웅화등의 다른 판옥선들도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은 앞서 다른 해전보다 치열하여 이순신은 전투 중에 왼쪽어깨에 조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이후 수년동안 고생하게 된다.
전과로는 적함 12척을 격침시켰다.
날이 저물어 사천만 모자랑포로 이동해 그날 밤을 보냈다.
2. 당포해전(6월 2일)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하여 6월 1일 정오쯤에 고성땅 사량도에서 도착하여 하룻밤 휴식을 취하였다.
밤 사이 일본수군이 당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2일 아침 8시경에 사량도를 출발하여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니 적선 21척(대선 9척,중소선12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고 약 300여 명의 일본군들은 (역시^^;;)육지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注:이 당시 일본수군은 전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약탈을 위해서 남해안 근방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전투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배는 포구에 정박시켜 놓은 다음 뭍에 올라 노략질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공격 신호와 함께 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포구안으로 진격하였는데 적함 중 판옥선 크기에 누각이 있는 대선이 있었는데, 붉은 비단휘장을 들어친 대장의 배로 누각 안에서는 적장이 꼼짝도 않고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다.
먼저 거북선이 공격하여 대장군전으로 배에 구멍을 내고, 귀두로 충파를 하니 적함이 흔들리는 사이에 중위장 권준이 적장을 활로 쏘아 맞히고, 바다에 떨어진 그의 목을 우척후장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베어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갈팡질팡 겁을 내어 도망치는데 총에 맞고 화살에 맞은 자들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적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육지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때 대선 20여 척이 많은 소선을 이끌고 거제도에 닿았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고, 추격을 포기하고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나오자 일본함대는 5리쯤 되는 곳에서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주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진주 창선도로 물러나 숙영을 하고 3일 아침 출항하여 개이도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적함을 찾지 못하고 고성 고둔포에서 숙영했다.
4일 당포앞바다로 이동하여 적을 찾고 있었는데, 정오쯤에 전라우수영 이억기가 이끄는 함대(판옥선 25척)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전라좌,우수영,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를 편성하게 되어, 판옥선 총 51척(전라좌수영 23척, 우수영 25척, 경상우수영 3척)의 대함대가 편성되었다.
3.당항포 해전(6월 5일)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수군은 하루동안 작전회의를 하며 착량포에서 숙영했다.
5일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김모등 백성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당포에서 달아난 적함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에 있다고 알려왔다.
이동 중 일본전함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발견하고 선두의 정운등이 달려가 격침시켜 버렸다. 이 일본전함들은 진주성근처을 노략질하다
그곳을 지나던 유숭인의 기병대에 발견되어 쫓겨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조선수군에게 걸려든 것이었다.(진해 해전)
당항포에 이르러 그 곳 지형을 살펴본 즉 포구가 20여리나 깊숙히 들어가 있으나 그 폭이 넓어서 전선이 들어갈만 하므로 먼저 척후선을 보냈더니 적이 있다는 신호로 신기전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포구어귀에 남겨 두어 후미를 경계토록하고, 당항포에 이르니 적선 26척(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13척)이 포구안에 정박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배는 3층누각이 있었고 검은 휘장 안에 장수인 듯한 자가 앉아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거북선을 앞세우고 뚫고 들어가 3도 전선이 교대로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으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하자, 이순신은 작전을 바뀌어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약간의 탈출로를 만들어 주자 일본군은 기함을 호위하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연합함대는 다시 적을 포위하고 협격하였다.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각종 총통들과 신기전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들이 격침되었다. 곧 적의 대장선이 불길에 휩싸이고 적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적함 25척을 격침시켰다. 1척이 남아 있었으나 그대로 둔 채 철수했다.
넓은 바다에서 군사들을 휴식케 하고 밤을 보내며 부장 이순신으로 하여금 강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남은 적함 1척이 탈출을 시도할 때 요격하도록 하였다.
6일 새벽 탈출을 시도하던 적함은 조선전함의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전투가 끝난 9시 경에 일본전함을 불태우고 있는데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등이 뒤쫓아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니 모두 50여구나 되었다.
4.율포 해전(6월 7일)
고성 정을우장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천성, 가덕근방 을 수색하던 중, 적선1척이 율포에서 부산으로 향하다가 조선수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율포 바깥 바다에서 대선 3척은 나포되고, 대선 2척과 중선1척은 격침되었다.
8일 거제도 송진포, 9일에는 가덕도 천성, 가덕까지 수색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10일 미조항으로 귀항해 각각의 수영으로 개선하였다.
2차출동에서 조선군 피해는 전함손실은 없고, 전사 11명, 부상47명의 손상을 입었다.
다섯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함 72척이 격침되었고, 전상자는 1만명으로 추정된다.
(注:일본군 전상자의 추정은 일본전함 한 척당 약 100명을 탄 것으로 추정해서 계산한 수치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상당수 육지에 있었고, 전투가 끝났을 때는 육지를 통해 도망갔기 때문에 정확한 전상자수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1만명의 수치는 약간 축소한 것이죠. 다른 기록에는 약 3만명 정도까지 나옵니다.
참고로 2차 출동 후 이순신이 조정에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적군의 귀 88개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히사가 포함되어 있다(당항포 해전에서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