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과 범천의 대화, 청원경(請願經) 5
세존께서는 붓다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신 뒤에 범천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열어라. 범천이여, 내가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은 법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자 범천 사함빠띠는 생각했다. ‘세존께서 진리를 설하실 것을 내게 허락하셨다.’ 이렇게 알고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나서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범천 사함빠띠의 청원으로 드디어 세존께서 현존하는 인류사에 처음으로 성스러운 법을 펴는 것을 선포하셨다. 이로써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시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께서 드디어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계의 31개의 존재에게 가르침을 펴시기로 한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라는 것은 세존에 의해서 열반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는 뜻이다. 열반으로 가는 문을 아마땃사 드와라(amatassa dvāra)라고 하는데 반열반에 들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다시 죽을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불사의 문이라고 한다. 불사의 문은 죽지 않는 문, 죽음이 없는 문이다. 이것이 사성제 중에서 열반이라는 멸성제를 성취한 것으로 깨달음의 완성을 뜻한다. 이때 불사(不死)는 태어났는데도 죽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다. 생이 있으면 반드시 노사가 있다. 누구도 태어남을 원인으로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열어라.’라고 했을 때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믿음을 새롭게 열라고 하신 세존의 말씀이시다. 소가 저녁이 되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가 아침이 되면 울타리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 믿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벽이다. 이제 내가 죽지 않는 불사의 문을 열었으니 자기 믿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새로운 법을 받아들이려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시다.
이 말씀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세존께서 자기 믿음에만 머물지 말고 그 믿음에서 벗어나 법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열라는 요청이시다. 요약하면 세존께서는 내가 불사의 문을 열었으니 각자 믿음이라는 항아리가 있으면 자기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법을 담아가라는 말씀이시다. 이때 너의 믿음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세존께서 너의 믿음을 버리라고 강요할 정도면 일반적인 존재들에게 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특별한 말씀이시다. 세존께서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믿음을 열라는 말씀은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믿음을 확립하라는 뜻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믿음을 버리라고 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가 생기면 처음부터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세존께서 계신 당시에도 인도에 내가 붓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가 지녀온 믿음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열고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다음에 ‘내가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은 법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처음에 법을 펴지 않기로 한 것은 존재들이 법이 미묘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염려하신 것이다. 여기에 곁들여 자신의 몸과 피로함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세존께서 이런 염려를 함으로써 범천 사함빠띠가 법을 청하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세존의 이런 망설임을 알고 사함빠띠는 범천에 이 사실을 알리고 수많은 천신들과 함께 세존께 와서 청법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천신들의 청법으로 세존의 가르침이 삼계에 두루 전해진 것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역대의 모든 붓다께서 출현하셨을 때마다 반드시 범천이 법을 청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법을 청하는 경전의 내용이 지금 여기에 소개되는 상윳따 니까야에도 있고 율장 대품에도 있다. 율장 대품에는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법을 청하는 내용이 훨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두 경전의 내용이 차이가 있는 부분은 율장 대품에는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세 번이나 법을 청했다. 그러나 상윳따 니까야 범천경에서는 한번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율장 대품에서는 세존께서 법을 펴시면서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마라’고 하셨다. 하지만 상윳따 니까야 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열어라.’라고 하셨다.
먼저 경전결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존께서 가르침을 펴실 때는 모두 마가다국의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빨리어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빨리어를 사용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빨리어는 문자가 없다. 그래서 세존의 말씀이 암송으로 전해졌다. 당시 세존께서는 브라만과 왕족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있는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빨리어를 사용하셨다. 그래서 경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암송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다음에 경전 결집을 할 때 상윳따 니까야는 가사빠 존자의 제자들이 주로 참여하여 결집에서 결정된 내용을 암송으로 전했다. 그러나 율장 대품은 우빨리 존자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결집에서 결정된 내용을 암송으로 전했다. 그러므로 경전결집을 주도한 아라한이 다르고 또 제자들이 다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차이로 어느 것은 간략하게 다루었고 어느 것은 상세하게 다룬 부분이 있다. 많은 경전 중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 것은 세존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도 있지만 결집에서 생기는 중복을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차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혜에 대한 부분은 모두 똑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지혜와 상관없이 학문적 능숙함으로 하는 것이다. 삼장법사라고 해도 방대한 경전의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다.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한번 청법을 한 것과 세 번 청법을 한 것은 결집하는 제자들에 의해 다를 수도 있지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 한번으로 그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인도에서는 반드시 세 번씩 물어보는 전통이 있다. 왕이 세 번을 물어도 답변을 하지 않으면 즉결처분을 했다. 이런 사회적 관습 때문에 청법을 세 번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도 경전 결집 자들에 의해 내용이 채택되거나 채택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빨리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얼마정도는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경전번역은 직역으로 할 경우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반드시 주석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또 경전번역을 의역으로 할 경우에는 뜻이 왜곡되어서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어떠했거나 율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면 세존의 말씀인 것은 분명하다. 상윳따 니까야와 율장에서 세존과 사함빠띠가 대화하신 내용 중에 다른 부분도 생략되어 있는 것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도에서 제사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인도에서 지내는 제사는 힌두교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민속신앙으로 아주 오랜 전통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을 해탈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해탈을 목카(mokkha)라고 하는데 해방, 구원, 벗어남이라는 뜻이 있다. 목카(mokkha)를 산스크리트어로는 목샤(mokṣa)라고 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해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안다. 인도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계급은 제사를 지내야 해탈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도에서는 해탈을 범천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안다. 브라만 자체를 범천의 신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를 지낼 때 수많은 동물의 목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한다. 범천이 동물의 피를 먹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제사를 지내는 대신에 보시로 바꾸게 하셨다. 보시는 선업의 공덕을 쌓는 일이지만 살생은 악업을 쌓는 일이다. 세존과 절친하게 지냈던 꼬살라 왕에게도 제사를 지내지 말고 대신 제사를 지내는 재물을 보시하도록 하셨다. 꼬살라 왕은 처음에는 제사를 지냈지만 나중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꼬살라 왕은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사를 지냈지만 나중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런 일로 사람들은 꼬살라 왕에게 믿음과 어리석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정치를 하려면 어리석음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꼬살라 왕은 처음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려고 보시를 했다. 하지만 꿈에 나타난 영가 때문에 나중에는 죽은 자를 위한 회향으로 보시를 했다. 세존께서는 꼬살라 왕에게 보시를 해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꼬살라 왕은 승가에 어마어마한 보시를 했다.
인도에서는 6년마다 한번 열리는 제사에서 20만 마리의 동물을 죽여서 마을과 나라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제사로 인해 광란의 살생의 장이 펼쳐졌다. 당시 이런 살생의 문제가 가장 큰 죄악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셨다. 사악한 천신은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선한 천신은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살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신의 과보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천신의 노여움을 사는 과보도 피할 수 없다.
다음으로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나서 그곳에서 사라졌다.’라고 했을 때 오른 쪽으로 세 번 돌았다는 것은 인도에서는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 번 도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졌다고 할 때는 빛이 사라진 것이다.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찾아왔을 때도 빛으로 오고 사라질 때도 빛이 사라진다.
이것으로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세존과 범천 사함빠띠의 대화가 끝난다. 하지만 주석서에서는 세존께서 과연 누구에게 처음 설법을 하실까 살펴보신 기록이 있다. 이런 내용이 율장 대품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 뒤에 세존께서는 누구에게 처음으로 이 법을 설할 것인가를 살펴보셨다. 과연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보셨다. 그러자 출가하신 뒤에 처음으로 만났던 무색계 3선정인 무소유처천의 경지에 이른 알라라 깔라마(Ālāra Kālāma)가 떠올랐다. 그러자 한 천신이 모습을 감춘 채 세존께 알라라 깔라마가 7일전에 죽었다고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도 신통한 지혜로 보시니 그가 7일전에 죽었음을 아셨다. 그리고 알라라 깔라마는 큰 지혜를 갖춘 자인데 그가 이 법을 들었으면 곧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세존께서는 다시 생각하셨다. 이제 누구에게 이 법을 처음으로 설할 것인가를 살펴보셨다. 과연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보셨다. 그러자 출가하신 뒤에 두 번째로 만났던 무색계 4선정인 비상비비상처천의 경지에 이른 웃다까 라마뿟다(Uddaka Rāmaputta)가 떠올랐다. 그러자 한 천신이 모습을 감춘 채 세존께 웃다까 라마뿟다가 어제 밤에 죽었다고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도 신통한 지혜로 보시니 그가 어제 밤에 죽었음을 아셨다. 그리고 웃다까 라마뿟다가 큰 지혜를 갖춘 자인데 그가 이 법을 들었으면 곧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인연이란 참으로 이런 것이다. 두 분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을만한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알라라 깔라마는 죽은 뒤에 무색계 3선정의 무소유처천에 화생으로 태어나서 지내고 있었다. 또 웃다까 라마뿟다는 죽은 뒤에 무색계 4선정의 비상비비상처천에 화생으로 태어나서 지내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빛으로 나투어서 무색계에 가실 수 있었지만 가시지 않았다. 무색계의 존재에게는 법을 펴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색계는 움직임 없이 오랜 세월을 선정의 상태로 몰입하여 지내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붓다의 법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다시 생각하셨다. 이제 누구에게 이 법을 처음으로 설할 것인가를 살펴보셨다. 과연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보셨다. 그러자 지금까지 함께 고행을 하던 다섯 비구가 떠올랐다. 세존께서는 지금 다섯 비구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살펴보셨다. 붓다의 눈으로 다섯 비구를 보니 바라나시 근처에 있는 이시빠타나에 있는 녹야원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우루웰라에서 다섯 비구가 있는 바라나시로 떠나셨다.
이상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범천 사함빠띠와 청법에 관한 대화를 나눈 내용이다. 그런 뒤에 처음으로 법을 펼 사람을 찾아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를 생각하셨지만 그들이 이미 죽은 뒤라서 다섯 비구를 향해서 떠나신 것까지의 내용이다. 여기까지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법을 펴시기로 한 부분이다.
다시 살펴보면 이 경이 시작될 때 육사외도로 불리는 이교도 여섯 분들의 가르침으로 이 세상이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것을 보셨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대로 둘 수 없음을 아시고 법을 펴신 것이다. 이 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덕이 많은 사람은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멀리서도 산 위에 있는 큰 바위를 볼 수 있는 것처럼 공덕이 있으면 어디에 있는 것이나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세존께서는 붓다가 되신 최고의 공덕이 있으셨기 때문에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계를 두루 보실 수 있으셨다. 원래 인연이란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말하는 인연은 모두 공덕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인연이 있다고 할 때는 공덕이 있어서 생긴 선한 인연이다. 공덕이 없으면 선한 인연이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인연이 있으면 붓다께서 멀리 계셔도 볼 수가 있어서 붓다께서 계신 곳을 향해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께서 기원정사에 계셨지만 공덕이 있는 사람은 여기저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공덕의 힘으로 붓다께서 계신 곳을 향해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공덕이 있는 천신도 세존께 찾아와 법문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다.
이 세상은 되는 것이 있고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인간계는 원하면 얻을 수 있지만 천상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세계는 모두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계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천상에서는 도과를 성취하여 깨달음을 얻고 싶어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 자기가 원하면 도과를 성취하여 자유롭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붓다의 법은 삼계에 모두 전해지기는 해도 깨달음은 인간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다. 자기가 원하는 깨달음은 오직 인간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중심으로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붓다께서 무엇이나 다 가능한 곳에서 법을 설하셨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나 다 되는 정신세계가 바로 인간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천신들도 인간으로 태어나신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천신들도 선업의 공덕이 없으면 붓다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을뿐더러 설령 가르침을 듣는다고 해도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성향이 모두 같지만 오직 인간만 도과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세존께서는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여섯 가지 기질과 두 가지로 성향으로 나누셨다. 두 가지 성향은 선업의 과보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성향을 가진 바우야(bhavya)와 악업의 과보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나쁜 성향을 가진 아바우야(abhavya)로 분류하셨다. 이로써 법은 항상 있지만 이런 차이로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성향이 인간에게도 있고 천상에 있는 모든 천신에게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물론이고 천신도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서 깨달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또 설령 나쁜 성향인 아바우야(abhavya)라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키는 선업의 공덕을 쌓으면 그 과보로 언젠가 도과를 성취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세존의 가르침은 인간을 중심으로 펴신 가르침이라서 우리가 알기로는 다섯 비구만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때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천신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런 내용은 결집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수많은 천신들이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인간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전 결집은 경전을 통해서 인간들이 깨달음을 얻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경전 결집을 할 때 경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내용이 있지만 인간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만 모아서 암송을 한 것이 바로 경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존의 가르침이 인간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세존의 불법이 지속되는 시기는 오천년으로 알려졌다. 이 불법은 오직 인간들에 의해서 이어져야 한다. 사실 인간계에서 오천년이지만 천상에서는 몇날 며칠에 불과한 날이다. 세존께서는 삼계에 이 법을 설하셨지만 이것을 이어가는 존재는 오직 인간이라서 인간을 중심으로 이 법이 설해진 것이다.
세존의 이러한 성스러운 법을 번뇌로 가득한 이 세계에 네 가지 연꽃으로 비유하여 표현하셨다. 그래서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불상의 하단에 연꽃 좌대를 받칠 때는 오직 아라한의 경우에만 허용한다.
어떤 사람이 세존께서 지나가신 발자국이 특이한 것을 보고 세존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당신이 신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나는 신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다음에 당신이 건발바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나는 건달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다음에 당신은 귀신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나는 귀신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다음에 당신은 인간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화가 나서 그러면 당신이 인간도 아니고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붓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다른 사람과 붓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존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사람들은 번뇌가 가득 찬 존재고 나는 번뇌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하셨다. 나는 연꽃처럼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꽃을 피우고 다시 물속의 번뇌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붓다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