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치료의 효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미국의 심리학자 페니 베이커. 그의 책 <표현적 글쓰기>에서 흥미로운 글쓰기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가상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서 써 보는 것이다.
페니 베이커는 자신의 경험을 글쓰기로 털어놓는 것이 가치 있는 것처럼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건강에 좋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참 신기하게도 이에 대해서 연구를 한 그룹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멜라니 그린버그와 그 동료들은 한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적이 없는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글을 쓰도록 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가상의 트라우마 사건을 쓰도록 지시받았다. 놀랍게도 이런 가상의 심리적 외상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졌다.”
-페니 베이커, <표현적 글쓰기>
이어서 그는 네 가지 가상 트라우마 경험을 제시한다. 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선택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나의 삶과 가장 거리가 먼 것, 즉 나나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적 없는 트라우마 경험을 선택할 것.
자신에게 실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사건에 대해서 쓴다면 감정적으로 압도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허구'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2. 그 다음,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상상해 본다. 한 10분간 긴장을 풀고 마음 속에서 장면을 만들어 보고 감정도 느껴본다.
3. 이제 20분 동안 그 일이 나에게 정말 일어난 것처럼 그 일에 대해 글을 써 본다. 이 사건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경험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20분이 다 될 때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페니 베이커가 제시한 4가지의 사건 중 1번을 선택해서 써 봤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15년 동안 살았던 당신의 집이 불타서 잿더미로 변한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의 모든 소유물, 옷, 귀금속, 사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게다가 죄가 없는데도 경찰은 당신을 방화범으로 체포한다. 결국 풀려났지만 당신은 사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처음에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면서 신을 원망하는 문장이 써졌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시련을 주십니까, 신이시여. 왜 하필 저입니까?"
경찰에 가서 난 방화범이 아니라고 진술했지만,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됐고 혹여나 내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일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 집 대출금은 어쩌지? 이 집이 팔리기는 할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쓰다가 어느새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 쓰고 있었다. 내가 상실한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슬퍼했다.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제야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 같이 사는 사람과 나의 반려견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엔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며, 신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준 뜻을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써졌다.
"너무 너무 힘들고 슬프지만, 또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 이게 삶인 걸까?"
다 쓰고 나서 내가 쓴 글을 보니
1)내가 삶의 속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보였다. 나는 삶을 기본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감사할 일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2)또 삶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보였다. 신의 뜻을, 고통의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이걸 보고 나서 무릎을 쳤다. 아, 나는 삶에 다른 고통이 들이닥쳐도 이런 방식으로 삶을 대하겠구나 싶었다. 왜 가상의 트라우마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게 효과가 있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가상의 트라우마 사건을 버텨낸 그 힘이 당신이 직접 겪은 트라우마 경험도 버텨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가상의 트라우마 사건에서 당신이 배우고 찾은 의미를 당신이 경험한 트라우마 사건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 생존자를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구상 중인데, 한 꼭지로 꼭 넣어보고 싶은 글쓰기이다. 직접 나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아서 안전하면서도, 내가 가진 힘과 나에게 주어진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글쓰기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