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와 왕부지 모두 배움과 익힘을 강조하며 사람답게 사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배움과 익힘의 경중관계에서는 둘 다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선후관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데 먼저 주희는 배움이 먼저고 행함이 나중이다고 하며 먼저 본을 받고 깨달아 이를 토대로 행하는 것으로 이 둘을 구별하면서 긴밀히 연결시켰다. 반대로 왕부지는 그 둘은 필요에 의해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익힘, 곧 때에 맞게 실천하는 것 역시 배움의 범주에 해당된다고 하며 이 둘은 처음부터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 역시 왕부지를 지지하는 바이며 기(氣)란 날마다 운행함으로 매일 바뀌기 때문에 안일하게 바라봐서는 안된다. 삶의 근원적인 원리를 익혀 때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 <집주>에서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는 것을 본받아야 선을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는데 때에 맞게 익힘이란 옛 것을 배워 새것을 안다는 것으로 단지 옛 것을 익히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가령, ‘효’라는 가르침은 부모를 공경하고 늘 살피며 부모를 향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날마다 운행하는 기는 매일같이 달라지는데 막상 자식은 안일하여 본성을 새롭게 생성하지 못한다면 때에 맞지 않는, 즉 부모가 원치 않는 효를 행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효의 가르침 중에 물질적 공양도 효에 속하지만 그것이 부모가 원치 않았을 때, 즉 때에 맞지 않게 실천했을 때는 효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온전한 ‘효’란 무엇일까 바로 부모의 기를 매일 같이 살피고 질을 소통하여 때에 맞는 행실을 실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옛 것을 배웠다고 해도 기를 살피지 않고 행한다면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니 옛 것, 곧 근원을 익혀 때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날마다 하늘에 명을 받아 본성을 새롭게해야 하며 이러한 태도는 매일의 성실함,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근원적인 원리를 토대로 변화하는 기에 맞춰 소통하는 삶이 진정한 익힘이며 곧 배움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