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7r1aoQemzwQ
창세기 강론 25
창세기 5:1-20
아담의 계보
- 두 번째 톨레도트 -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이유는 그를 통해 나타나는 죄의 영향력과 그 죄가 어떻게 강력하게 하나님을 향한 반항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라멕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심으로 가인과 같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약의 표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냥 “셋”이라는 아들을 추가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그 다른 씨란 오실 후손을 겨냥한 것이었다. 즉 아벨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담아서 주신 아들이 곧 셋인데 셋을 통해 오실 메시아를 주신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에노스”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였는데 이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호와에 대한 계시는 모세 때에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자면 여호와라고 불렀다기보다 언약의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인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 이름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름을 지어주고 부른다는 것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는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으로 비참하고 병들어 있는 상태에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증거를 ‘톨레도트’로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5장이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1절). “계보”라고 번역된 말이 ‘톨레도트’이다. 여기서 아담은 정관사가 없는 아담으로 사람을 아담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다음 절에서 밝혀 준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1절b-3절).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일컬으셨더라’라고 번역해야 맞다. “그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였으니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는 다 아담이고 그 낳은 아들은 죄인인 아담과 같은 자기 모양이고 자기 형상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지만 4장에서 가인의 후손을 “낳고”라고 할 때는 ‘칼동사’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단순 능동태’이고 5장의 “낳고”라는 표현은 ‘히필동사’로 ‘사역 능동태’이다. 단순 능동태는 단순한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인에 의해 후손을 낳는다는 의미로 부모에 의한 동물적 출산이라고 할 수 있고, 사역 능동태는 하게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한 은혜적 출산이다.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칼동사)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세 아들을 낳았으니(히필동사)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 6:10)
하나님의 관심은 셋을 통한 계보에 있다. 4:17-24에서 드러난 가인의 계보와 5:1-32에서 드러난 셋의 계보는 분명히 다르다. 두 계열을 똑같이 열 명으로 언급하였으나 가인의 후손은 인간의 생물학적 출산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셋 계열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한 계보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는 창세기에서 ‘톨레도트’를 사용하여 잊어버려도 괜찮은 것, 덜 중요한 것부터 짧게 먼저 기록하였다. 열 세대가 넘게 퍼져나간 한 족보에서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계보가 추적되고 있으며, 오직 마지막 부분에서만 이 수직적 계보가 수평적인 것으로 된다. 매 세대에 관한 설명마다 일정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 “A는 ○세에 B를 낳았고 B를 낳은 후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 시기에 죄의 성질과 결과를 충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하여 은혜의 역사가 의도적으로 제한되어 베풀어졌다. 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우며 그 영향력이 어떤지 충분히 계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는 베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셋 계열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아담의 계보는 흔히 죽음의 계보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두 계열의 대표적인 사람은 세 번째 위치에 있는 ‘에녹’과 ‘에노스’이며, 또한 일곱 번째 위치에 있는 ‘라멕’과 ‘에녹’이다. 이 두 사람을 강조함으로 두 계열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대조하여 밝히 드러내 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후손을 낳은 나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하였는데 아담이 130세 이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아는 바 대로 130세에 셋을 낳기 전에 가인과 아벨만 낳았다는 것인가? 성경이 셋을 낳은 나이를 밝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인의 후손을 낳은 것과 셋의 후손을 낳은 것을 분명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아들을 낳은 때를 밝히고자 함이 아니라 아들을 낳은 나이, 그 시점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의도적으로 아들을 낳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나이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드러내실 아들로 허락하셨다는 뜻이다. 계보를 대조한 것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셋의 가문에 등장된 인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하여 생존하였다. 그것을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이 “지내며”(4, 7, 10, 13, 16, 26절)라는 말인데 히브리어로 ‘하야’이다. ‘~이 되다, ~이 일어나다, ~이 발생하다, ~이 살아나다’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이미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는 말씀에서 “생령이 되니라”라고 할 때 ‘네페쉬 하야’라는 표현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세상을 살면서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로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을 통해 이렇게 말씀한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하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하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1-6)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롬 8:11, 14)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창세기 5장은 죽음의 계보이다. 그러나 그 계보 안에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죽음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아담의 계보는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여주고 생명을 나타내는 계보이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서의 첫 장에서 새로운 역사로써의 ‘톨레도트’인 “낳았더라”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한다. 그러므로 돌레도트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서 이어지는 계보, 그것이 바로 언약 안에서 완성된 계보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표현한 것은 단순히 자기 자랑이나 자기 복음에 의해 낳은 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낳은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관계를 말씀한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1-2)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8-10)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믿음 안에서 낳은 진리의 내 아들 디모데’라는 말이다. 오네시모 역시 로마의 감옥에서 낳은 자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하나님 왕국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202301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