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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의 교육사상 재검토 Ⅰ. 머리말 | |||||||
Ⅳ. 문도론(門徒論)
사실은 문도교육의 일반적 관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1496년(연산군 2) 가을, 성균관 대사성 반우형이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제자의 예를 갖추어 찾았다. *註53) 이때 김굉필은 반우형이 자신보다 겨우 다섯 살 아래이고 벼슬은 자신보다도 높으니, 벗을 한다면 할 수 있으나 스승이라는 것은 불가하다며 청을 물리쳤다. 이에 반우형은 “도가 있는 곳에[道之所存] 스승이 있다[師之所存]”는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을 인용하면서 거듭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우려 때문이었다. 김굉필은 당시 선비들의 풍습이 동한(東漢)시대의 풍습과 닮아 있는데다가 장차 뜻밖의 화변이 닥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선뜻 가르침에 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굉필은 반우형의 성의가 확고한 것을 알고서, 몸을 다스리며 사물에 응접하는 방법(律身接物之方) 18조를 담은 <한빙계(寒氷戒)>(1496)를 제시하였다.*註54 유생들이 벼슬자리를 탐하고 한 번 벼슬길에 나가게 되면 학업을 중단하는 심각한 현실이기도 했다.*註55 이러한 인간세태와 교육현실에서 김굉필은 제자를 자청한 반우형에게 자신을 수양하며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 18조를 <한빙계>라 명명하여 제시하고 스스로도 이를 따라 앎과 삶의 세계를 경계해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한빙계>에는 김굉필의 교육사상 일반과 문도교육에 관한 지향이 잘 반영되어있다.
1498년, 반우형은 유배간 스승을 만나기 위해 평안도 희천을 찾았다. 김굉필은 정색을 하며 “왜 옷을 걷고 물에 들어서며[何其搴裳赴水] 섶을 안고 불에 들어왔는가[抱薪入火]. 즉시 돌아가라[卽旋邁]”고 물리쳤다. 이에 반우형이 눈물을 흘리며 “북풍이 싸늘하고 눈발이 날리는데[北風蕭冷雪飛揚] 책 상자를 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負笈安歸]. 길이 또한 멀기도 하다[路且長]. 추연 때문에 서리가 내리고 우공 때문에 가뭄이 들었다는 말 모두 헛말이구나[秋霜于旱皆虛語]. 밤낮으로 하늘을 쳐다보지만 저렇게 푸르기만 하다[日夜看天但彼蒼]”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註57 이에 대해 김굉필은 “어찌 저 푸른 하늘에 원망을 돌리겠는가[詎能歸怨彼蒼蒼]”라며 오히려 반우형을 위무하였다.*註58 그 뒤에도 반우형은 매년 봄가을마다 문안을 드렸다.*註59 행적은 스승의 가르침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보기 어렵다. 반우형은 연산군 재위시에 성균관 대사성(1495. 12. 3),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1504. 3. 9), 한성부 좌윤(1504. 5. 9), 한성부 우윤(1504. 5. 28), 대사헌(1505. 6. 22) 등의 직위에 올랐다.*註60 반우형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 신분을 유지한 채 정국공신(4등)에 올랐다.*註61 반우형은 여러 대신들과 함께 “폐왕(연산군)은 종사의 죄를 얻어 호칭을 강등하여 군(君)이 되었으니, 상장(喪葬) 의식에 왕례(王禮)를 다시 쓸 수가 없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에 대한 사관의 지적은 신랄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바른 세상, 좋은 세상에 대한 기대는 간절했다. 하지만 반정공신들은 좀처럼 구태를 씻어내지 못했다. 그들 자신이 연산군의 폭정을 묵인・방조・협력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자면 거짓 공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4년 뒤에, 조광조도 반우형의 처신을 문제삼았다. 조광조는 반우형에 대해 대사헌으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에 녹공되었음을 지적하고, 녹공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공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잘 가려서 공권(功券)을 맑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註63) 반우형은 도학이라는 기준과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당시 그의 정치적 행적에 비추어 볼 때 도덕성에 하자가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우형의 행적으로 보아 그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아들 조광조(1482∼1519)가 김굉필의 배소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다. 조광조는 이때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의 추천서를 지참하였다. 아버지 조원강이 양희지에게 부탁하여 받은 추천서에는 ‘화를 끼치는 선물[載禍相餉]’로 여기지나 않을는지 염려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註64) 김굉필과 조광조의 만남에 대해 “시속 사람들이 모두 책망했지만[時人羣誚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耳若不聞]”고 한 장면 묘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註65) 이는 정치적 난관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코자 했던 제자의 자세가 잘 드러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김굉필은 17세의 조광조를 제자로 받아들여 그에게 도학을 전수하고 원대한 학문적 성취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註66) 정치역학을 감안한다면 김굉필의 문도교육이 대대적・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성리의 도를 토론할 여유와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註67) 조광조는 중종에게 희천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도학의 흐름과 기준을 세웠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과 학맥에 유의한다면, 조광조에 대한 장면에 스승 김굉필에 대한 평가가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과 소재 노수진은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평안도 희천은 스승 김굉필과 제자 조광조의 도학이 전수된 고장이다. 이에 희천 유생들이 평안도 감사 김계휘에게 제안하여 1576년(선조 9)에 양현사가 설립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조광조에 의해 크게 존숭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발단은 바로 김굉필에게 있었다. 이이는 양현사에 대한 기문(1577)에서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승관계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이가 양현사의 유풍과 유교를 강조하면서 당대의 현실을 규정하여 “스승은 안석에 기대어 편안히 놀고 제자들은 뒷방에서 희롱이나 하며 향사례는 행하지 않고 향교의 뜰에는 풀이 우거져있고 문묘를 곁눈질로 보기를 빈집과 다름없이 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은 시사적이다. 일찍이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몇 년 동안 희천에 머물렀던 조광조에 대해 “시속 사람들이 모두 책망했다”고 한 사실과 다를 바 없는 교육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양현사는 후일 상현서원으로 승격되었다.*註72) 상현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창건되었으며, 김굉필과 조광조의 위패를 모셨다. 1720년(숙종 46)에 사액을 받았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이승언은 일찍이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승언의 아들 이장길과 이장곤은 김굉필에게 수학하였고, 이장배는 김굉필의 둘째 사위였다. *註73) 이장길은 인물됨이 준수하여 재주가 많았고 젊었을 적에 학행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심지어 인물 평가에 까다로웠던 남효온도 이장길을 지조가 굳고 곧아 잡스럽지 않다고 칭찬할 정도였다.*註74) 하지만 이장길은 후일 권신들을 추종, 아부하면서 잘못된 길로 빠졌다. 이장길은 진사 출신이면서도 무과로 발신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장길은 무과로 발신한 후로는 연산군이 총애하는 궁녀[嬖姬]와 결탁하고 임사홍을 추종하였으며, 심지어 동생 이장곤이 유배지 거제에서 망명하자 체포에 나서 제수의 손발을 묶는 등 패악을 저질렀다. 지방수령으로 나가서는 악정을 자행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배반이었다. 이장길은 1504년(연산군 10) 9월 8일 의성현령에 임명되었다. 이장길에 대한 사관의 사평은 다음과 같다.
이장길은 1507년(중종 2)에 중종반정 공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무고로 인해 평안도 벽동의 관노가 되었다. 그 뒤 심정(沈貞)의 심복이 되어 1521년에는 평안도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되었다. 1631년 심정의 몰락과 함께 고향으로 쫓겨났다. 내세우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일찍이 이장길과 관련하여 “이장길은 [李長吉] 아마 따로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恐別有他人] 잘못하여 장길이 된 것이다 [而誤作長吉]”라는 구절이 눈에 띤다.*註76)
김굉필의 문인으로 알려진 이장길이 그러한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했을 리 없다는 정서가 반영된 기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장길은 따로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장길을 주제로 한 정곤수와 이황의 대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황은 이장길의 변신과 악행을 가르침의 배반이자 인격의 파탄이라 규정했다.
이황은 스승 김굉필-제자 이장길의 관계를 일찍이 스승 정자-제자 형서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지적, 비판하였다. 형서는 정자의 제자였는데, 나중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간인(奸人)으로 전락하였다. 최응룡이 이황에게 “형서는 스승 문하에서 죄를 지었는데[邢恕得罪於師門] 그래도 그 제자로 꼽혔으니 [而猶列弟子] 무슨 까닭입니까[何也]”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황은 “후세의 배우는 이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所以警後世學者也]”고 답하였다.*註78) 형서는 아주 오랫동안 정자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간사한 생각 하나[一念之邪]’ 때문에 문득 소인이 되고 말았음을 지적하고, 후세의 배우는 이들이 특히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지조 없이 이득에 따라 권력의 주변(司馬光, 章惇, 蔡京)을 기웃거렸다. 형서는 의리가 이욕을 이기지 못한 까닭에 그와 같은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김굉필의 제자 이장길의 경우에도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며, 이를 후세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경계하고 그와 같은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김굉필의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 성과가 제대로 축적되지 못한 현실에서, 당대의 정치・사상・학문체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교육사상에 대한 논의체계를 구축하는 작업이 과제로 주어져있는 셈이다. 연구의 결핍상황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현실에서 지적・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굉필의 교육사상 연구에는 도학의 전수, 성리학적 앎과 삶과 교육, 그리고 교육활동의 완결로서의 문도론 등이 논의범주로 설정될 수 있다. 결핍상태를 정당화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인물・사상 연구를 표방한다면, 연구를 위한 종적・횡적 자료의 섭렵, 분석과 종합, 이에 대한 해석과 논의작업을 통해 문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의 삶의 현실과 앎의 맥락을 제대로 구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특정 자료에 국한된, 편향된 지점에 머무는 주제를 다루면서 이를 교육사상 그 자체, 전체처럼 운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굉필에 관한 연구에서는 그 절제된 어법에 담긴 교육사상의 성격과 의미를 읽어내는 연구 동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김굉필시대의 교육상황을 당대의 사상지형에 대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풀어가는 작업도 해결 과제이다. 정도로 김굉필의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는 특정 지점에서 좁은 궤적을 반복해서 맴도는 현실에 놓여있다. 이 과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추후 학제간 연구를 통한 연구의 확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김굉필의 교육사상, 그 본연을 제대로 밝히고 이를 해석 대상으로 삼는 일은 항차 한국교육사상사의 대계를 목표로 할 때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덧붙이자면, 당대에 대한,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와 성찰이 없이는 지금-여기의 교육문제와 관련된 문제의식도 보여주기 어렵다. 김굉필과, 그의 시대에 절실했던 교육 관련 문제를 연구하는 일이 지금-여기의 우리의 앎과 삶과 교육의 문제를 규율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할 때, 김굉필의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본연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다. |
참고문헌 『退溪全書』. 『龜巖集』. 『高峯集』. 『牛溪集』. 『栗谷全書』. 『寒岡集』. 『重峯集』. 『旅軒集』. 『惺所覆瓿稿』. 『敬亭集』. 『宋子大全』. 『葛庵集』. 『順菴集』. 『與猶堂全書』. 『林下筆記』. 『小學』. 『孝行錄』. 『三綱行實圖』. 『東文選』. 『承政院日記』. 『國朝寶鑑』.
손인수, 『한국교육사상사』, 재동문화사, 1964. 이상호, 「영남학파의 『소학』중시가 가진 철학적 특징과 교육적 함의」, 『국학연구』18, 2011,pp.39-69. 이원재, 「조선시대 『소학』교육의 현실」, 『교육학연구』44(3), 2006, pp.31-56. |
*註53) 반우형은 김굉필을 찾아 스승의 예로 받들기 전해인 1495년(연산군 1)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燕山君日記』燕山君 1年(1495) 12月 3日). 燕山君10年(1504) 3月 9日. 공이 있는 이들을 처음에 101명으로 올리려다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추가한 104명으로, 다시 권균, 김준손, 반우형, 김무, 이곤을 재추가하여 109명을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공신 등급은 처음 1~3등으로 나눌 계획이었으나 인원이 늘면서 1~4등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中宗實錄』中宗 1年(1506) 9月 2日, 9月 8日). 「寒暄堂金先生神道碑銘幷序」.
사이이기 때문에 김굉필의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한 남효온이 김종직-김굉필 결별설을 유포한 인물인데다가 김굉필의 제자 이장길을 지조가 굳고 곧은 인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를 가볍게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기대승은 “남효온의 높은 절개는 한 세상을 크게 감동시킬만하지만 그 의논에는 혹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별도로 상고하여 바로잡는 일이 없다면, 선현에게 누가 되게 하고 후학을 의심하게 함이 또한 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한 바 있다(『高峯集』卷3, 「答龜巖書」). 남효온의 이장길에 대한 호평은 기대승의 지적처럼 남효온이 “의논에 있어서는 혹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지켜볼 수 있을 때( ∼1492)까지의 이장길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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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출처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제22호(2012년 12월) 박균섭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조교수 / 전자우편kspark@kn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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