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대간첩대책본부는 23일 하오 1시10분 북괴무장공비 21명이 인천 남구 송도 조개고개로 침투, 군인과 교전한 후 민간「버스」를 빼앗고 부평과 소사를 거쳐 하오 2시쯤 노량진 유한양행앞까지 진출, 긴급출동한 군경·예비군의 저지를 받아 이날 하오 2시40분 공비 5,6명을 제외한 무장공비가 「버스」안에서 자폭했다고 발표했다.
우리 군은 분산도주한 5,6명중 4명을 생포,나머지 공비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김재명촌문첩봉책본부장은 작전이 펴지고 있는 노량진·대방동 근처 주민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 소탕작전에 협조해주기 바라며 무장공비는 예비탁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권총·「카빈」등으로 무장했다고 말했다.
【임시취재반】무장괴한의 침투로 우리 경찰·예비군·민간인 등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했다.이들 괴한은 처음 송도를 떠나 옥수동 동사무스앞에서 50여발을 난사,김하성씨(43·옥수동)의 딸 순미양(4) 과 현역군인을 사살했고 이어 동인천번화가에서 다시 23∼30발을 난사,행인 6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이들은 계속 「버스」를 타고 서울쪽으로 가다가 추격하던 김창원순경(32·동인천경찰서기동대)과 신앙촌검문소에서 제지하던 유장희순경(35)을 사살했고 원퉁이고개에서는 긴급출동한 예비군 2명을 사살했다.
하오 2시2O분쯤 괴한들은 유한양행앞에서 「버스」가 가로수를 받아 정지하자 「버스」에서 내려 포위중인 군·경과 약 20분동안 교전하다가 하오 2시40분쯤 군·경에 쫓겨 괴한 15·16명이 다시「버스」 로 들어가 자폭했다.이때 「버스」안에 있던 민간인차림의 3명은 폭사했다.
한편 경기도경은 관하전경찰과 예비군을 동원,ㅇㅇ군과 합동작전으로 토벌중이다.
이날 사건이 나자 경찰은 서울서쪽관문인 영등포구 고척동 만탄교앞과 개봉동입구 검문소, 문래동,도림교앞 등의 도로를 차단,인천쪽으로 가는 차량의 통행을 일체 금지시키고 있다.이 때문에 각 요소에는 수백대의 차량이 밀렸고 비상경계로 완전무장한 경찰관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인천서 서울로 들어가는 경인가도의 일신산업앞에는 근처 공군부대에서 출동한 공군수개 소대와 예비군등이 「트럭」등 차량을 징발,차도를 봉쇄하고 무장괴한침투에 대비하고 있다.
8월 24일
인천앞바다 실미도에 수용중이던 공군관리하의 특수범24명이 23일 아침6시쯤부터 무장난동을 일으켜 경비원23명중 14명을 사살하고 섬을 탈출, 인천 송도로 상륙하여 민간인「버스」를 두번이나 뺏어타고 부평·소사를 거쳐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앞까지 들어오는 도중 총기를 난사, 경찰관1명과 민간인6명등 7명을 죽이고, 군·경·민간인 18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난동을 빚었다. 이들의 난동은 한때 무장공비로 오인되어 전군·경에 비상령이 내리는 등 혼란을 빚었으나 하오2시40분 난동자들이 자폭함으로써 수습됐다. 특수범들의 난동으로 실미도의 경비원 23명중 14명이 사살뒤고 1명이 부상했으며 4명이 실종했고 난동자2명이 탈출시 사살되어 경비원과 난동자등 쌍방32명이 죽고 4명이 실종, 7명이 부상했다. 이밖에 경찰관1명과 민간인 6명이죽고 14명이부상했다.
정내혁국방부장관은 23일 하오6시40분 실미도의 군특수범 24명이 고도격리에 불만, 23일상오 6시공군관리병력 14명을 사살하고 어선순복호를 뺏어타고 섬을 탈출, 하오 1시10분 인천앞 송도에 상륙,「버스」를 뺏어타고 서울까지 들어와 14명이 자폭했다고 발표했다.
정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인천 앞바다 보미도에 수용격리중이던 특수범들은 이날 상오 6시 경비병 23명을 감금, 14명을 사살하고 4명을 바다에 빠뜨린뒤(경비병 3명만 생존)10t급 순복호를 뺏어 타고 탈출했다. 이때 난동자2명이 사살됐다.
하오1시10분 이들은 송도에 상륙, 인천시내「버스」를 뺏어타고「조개고개」검문소에서 검문군인과 1차교전, 2명이 죽고 3명이 중상 검거된 채 하오2시10분께 서울영등포 유한양행앞까지 진입, 「버스」충돌사고로 더 이상 갈 수 없게되자 「버스」안에서 자폭, 14명이 죽고 3명은 부상한 채 검거, 소탕됐다 정장관은 말했다.
국회는 24일하오 내무·국방위연석회의에 오치성내무장관·정내혁국방장관을 출석시켜 공군관리 특수범난동사건의 경위를 추궁했다.
정내혁국방장관은『공군관리의 특수범들이 장기간 섬에 있었기 때문에 욕구불만이 축적되어 난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난동발생이유를 설명하고『실미오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7시간만에야 알게된 것은 특수범들이 섬 안의 무전시설을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연석회의의 질의답변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일환의원(신민)질의= ①군당국이 보고를 늦게받은 이유는 무엇이며, 이러한 경비태세라면 1개대대규모가 서울사방에서 침입해올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②실미도특수범이 4년간이나 외출을 못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데 이번사고의 원인이 있지않은가 ③처음 무장간첩으로 발표해서 국민에게 불안감을 준데 대해 해명하라.
▲김상현의원(신민)질의=①실미오의 무전시설이 일시에 파괴될 정도라면 경비업무에 헛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②당국이 난동자들을 공비로 발표했다가 특수범이라고 번복발표함으로써 북괴가 이를 악이용한 우려가 있으며 이때문에 우리의 대「유엔」외교에도 큰 차질이 올 것이다. 이같은 오도된 보도가 대내외적으로 큰손실을 가져왔다고 보지않는가.
▲정국방답변= ①실미도는 무인도여서 무전시설이 파괴된 후 육지와 연락이 두절되어 7시간동안이나 특수범의 행동을 알 수 없었다. ②특수범들이 섬에 격리수용된 것은 4년보다 짧은 기간이고 가끔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나 관리에 문제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진상조사 후 관련자를 엄중문책할 것이다. ③무장간첩으로 오인한 것은 이들의 행동이 무모하고 대담해서 현장을 보기전까지는 간첩의 소행으로밖에 판단되지 않았다.
이렇게 잘못 판단함으로써 대내외에 충격을 준데 대해 책임을 느끼며 정부가 공비로 발표했다가 사실을 확인한 후에 특수범으로 정정발표한 것은 솔직한 행동으로 국민과 국의에서 이를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④실미도의 무전시설은 정규적으로「체크」해서 연락이 안될 때는 항공경찰등의 방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종전에 몇차례나 무전고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조치를 취하지않았다.
민간인
▲사망 6명
▲부상 14명
계 20명
경찰
▲순직 1명
▲부상 2명
계 3명
육군
▲부상 1명
공군
▲순직 14명
▲부상 1명
▲행방불명 4명
계 19명
난동자
▲폭사 또는 사살 18명
▲부상 6명
계 24명
총사망자 21명
부상자 18명
행방불명 4명
총 계 43명
대간첩봉책본부는 난동사건이 나자 23일하오3시 『인천송국에 배괴무장공비 20여명이 상륙,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앞에 이르러 군경의 저지를 받아 16명이 자폭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정내혁국방장관은 하오6시35분『이사건은 서해의 공군관매하의 특수범들의 집단난동사건』이라고 번복발표했다.
정내혁국방부장관과 김두만공군참모총장은 군죄수탈영난동사건에 책임을 지고『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말하고 23일하오 박정희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여야는 공군관리지수범들의 살상난동사건을 중시, 24일 국회의장실에서 김종비국무총리·정내혁국방장관등을 불러 정부측 보고를 들은 뒤 내무·국방연석회의를 열고 사건경위와 책임소재를 추궁했다. 공화당은 이 사건이 군지수범의 관리소홀에 의한 것으로 보고 국방장관·공군참모총장의 인귀으로 수습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신민당의 김홍일당수는『실임정치의 실현을 위해 내각의 총사퇴가 불가피한 사태』라고 주장, 신민당은 인책범위를 국방장관이상으로 확대할 기세다.
신민당은 국방위에서 조사단을 구성, 사건진장을 조사한 뒤 김진비총리에게 책임을 물을 방침이다.
김종필총리와 정내혁국방장관은 이날 국회의장과 여야간부들이 참석한 의장당회의에서 이번사건이 국민에게 충격을 준데 대해 사과했다. 김총리는『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데 대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국민 앞에 죄송할 따름이며 국회의원 여러분 앞에 면목이없다』고 말했다.
정내혁국방장관은『책임을느끼고 이미 사의를 표했다』고 말하고 난동자의 신분과 사건경위를 설명했다.
공화당은 사건의 심각성에 비추어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인귀은 이미 사표를 낸 정국방장관과 김두만공군참모총장선에 국한시킬 방침이다.
길전식사무총장은『인공문제보다는 사태를 신속히 처리하고 국민에게 준 충격을 씻는 것이 당면문제』라면서『인책범위는 사건처리후에 결정할 문제지만 이미 사표를 낸 국방관계자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당은 24일 원내대책위윈회를 열고 정부관리특수범들의 난동사건의 경위와 원인을 절저히 밝혀내 정부관계자들을 인책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신민당은 이 사건을 국가의 기본길서뿐 아니라 군기강을 뒤흔든「애난사태」로 규정하고 사건의 경위를 들은 뒤 책임소재를 규명, 인책범워를 제시키로 했다고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김수문대변인이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김홍일당수는『이사건의 책임은 어느 장관1명만 질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귀천정치를 하는 민주가가에선 내각총사퇴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야는 이번사건의 경위와 배경을 조사하기 위한 국방·내무위합동조사단의 구성문제도 검토했다.
국회는 국방위원과 내무위원으로 공군관리하의 특수 범 난동사건 조사단을 구성, 26일부터 조사활동에 나선다.
국방·내무위 연석회의는 25일 이틀째 대 정부 질의를 끝내고 난동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이를 신속히 저지하지 못한 방위상의 문제점등을 조사하기 위해 공 화 5영, 신민 4명 도합 9명으로「조사소위」를 구성했다. 이 진상 조사단은 26일부터 31일까지 6일간 관계기관의 증언을 청취한다.
조사위원은 민기식(위원장), 문창탁 권오병 김숙현 정무식(이상 공 화), 이철승 이세규 김수한 채문식 의원이다. <24일 문답요지 별정>
교신두절 왜「체크」안 했나…특수범 부상자 사살 설 있다|소위 자칭한 김종철은 민간인…자폭 아닌 폭사였다
게재일 : 1971년 08월 25일 [1면] 글자수 : 2923자
조 일환 의원(신민)질의=특수 범들이 섬을 탈출해서 서울에 침입할 때까지 7시간40분 동안 경비진은 뭘 했는가. 도대체 무장공비로 발표했다가 특수 범의 소행으로 정정 발표한 것은 국제적 망신이었다.
▲정래혁 국방장관 답변=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실 미 도에서 사건이 발발한지 7시간이 넘도록 이를 몰랐던 것은 폭도들이 섬의 무전시설을 맨 먼저 파괴했기 때문이며 무장간첩으로 오인했던 것은 현장을 볼 때까지는 이들의 행동이 너무 대담하고 공비의 소행 같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한 것이다.
특수 범들의 관리에 문제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나 전연 외출 외박을 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상현 의원(신민)질의=섬의 무전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더라면 미리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정 장관은 인천 상 륙 후 4차 방어가 1시55분이라면서 또 자신이 이 보고를 들은 시각이 1시55분쯤이라 했는데 왜 보고가 이렇게 늦은가.
▲정 국방 답변=이 섬의 무전은 하루 몇 차례 정규「체크」하도록 되어 있어 아침부터 교신이 안되었으나 부차적 통신방법이 없었고 종전에도 몇 차례 고장난 일이 있어서 항공정찰도 안 했다. 정부가 공비로 잘못 발표했다가 솔직히 시인하고 다시 정정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공비소행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세규 의원(신민)질의=나는 사건당일 하오3시쯤 난동 자들의 소속부대까지 상세히 알고 국방부에 알려줬는데 국방장관은 정정할 때까지 3시간 동안이나 이들을 공비라고 우긴 이유는 무엇인가.
대방동 현장에 출동한 수도경비사소속 모 대위가 아직 꿈틀거리는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해서 숨지게 했다는데 알고 있는가.
▲김수한 의원(신민)질의=막는다는 사람들이 난동「버스」의 번호와 차종도 모르고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경찰기동타격 대는 몇 시에 정보를 받아 출동했으며 군과의 연락은 어떻게 했나. 생존한 김종철 소위가 기자들에게 한말로는 6l년에 소위로 임관되어 군번까지 있는 군장교가 아닌가.
정 국방 답변=그날 하오2시쯤 합참의장으로부터 난동 자들이 공군관리하의 특수 범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현장확인이 중요했다. 그래서 현장으로 달려가 공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 청와대에 보고했다.
발표가 늦은 것은 문구를 수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모 부대 대위가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이며 조사 후 밝히겠다. 현장출동이 늦은 것은 사실이며 그 이유는 비공개회의에서 밝히겠다.
생존한 김종철은 장교로 임관된 사실도 없으며 군인이 아니다. 공항입구를 차단한 일은 있으나 공항을 폐쇄한 일은 없다.
▲조윤형 의원(신민)질의=실 미 도와의 통신두절경위를 밝혀라.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답변=하오 2시쯤 소사에 무장공비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들었고 조금 후 이들이 송도에서 배를 타고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때 직감적으로 느껴진 것이 실 미 도여서「체크」하라고 했더니 교신이 안 된다고 보고 들었다.
즉시 관계자가「헬리콥터」로 현장을 확인토록 했으며 국방부로 연락했으나 장관이 없어 합참의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자세한 시간은 비공개회의에서 밝히겠다.
▲김수한 의원(신민)질의=장관은 아침부터 교신이 안됐다고 하고 총장은 2시 반에 안됐다고 했는데 어느 쪽이 맞는가.
▲김 참모총장 답변=실 미 도와의 교신은 우리와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오류 동 통신소를 거치며 2시 반「체크」를 했더니 아침부터 안 된다고 했다.
▲김재명 대 간첩대책본부장 답변=사건당일 괴한이 범선을 타고 상륙했다. 20여명의 무장공비가 군·경과 교전중이라는 보고를 들었다.
뒤이어 이들이「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방면으로 질주하면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검문 경관을 사살했다는 보고를 듣고 공비가 아니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자 자폭했다는 보고를 받고 무장공비라고 생각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일념으로 빨리 한다고 한 것이 그렇게 됐다.
오치성 내무 답변=노량진서 방위과장인솔로 처음 출동한 15명의 기동 타격 대는 특수 범이 탈취한 차량의 종류와 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난동「버스」가 통과한 순간이어서 위협사격만 했다.
경찰은 23일 하오1시쯤 경기 영2-3612호「택시」운전사가 동 인천 서에 신고, 처음 알았으나 단순한 접촉사고로 신고됐다.
이어 하오 1시10분쯤 민간인이 인천서 보안과에 신고하여 즉시 기동타격 대를 출동시켰고 25분에는 도경에 보고, 도경은 부평서·33사단과 치안 국에 연락했다.
▲이철승 의원(신민)질의=이번 사건으로 방위태세에 문제점이 허다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기회에 군 내부를 샅샅이 점검할 용의는 없는가.
모 대위가 유한양행 앞에서 아직 살아있는 난동 자들에게 총질한 것은 공비로 알고 한 것인가, 공비로 만들려고 한 것인가. 도망간 난동 자와 실 미 도에서 행방불명된 경비병은 어떻게 되었나.
▲채문식 의원(신민)질의=사건당일 장관은 하오 2시40분에 현장에 나가 사태를 본 결과 공비가 아닌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3시10분 대 간첩대책본부가 공비의 침투로 발표한 것을 보면 미리부터 간첩의 소행으로 속이려던 것이 아닌가.
▲정 장관 답변=대 간첩작전은 간첩대책본부가 24시간 보고를 접수해서 지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난동자 중 도망자는 1명도 없으며 실종된 실 미 도의 경비병중 2명의 시체가 발견되어 사망경비병은 14명으로 늘어났다. 난동 자들을 완전 파악하기 전에 공비로 발표한 것은 억지로 간첩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고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해야겠다는 긴급성에서 나은 것이다.
「버스」내의 폭발은 난동 자들이 여러 곳에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 「핀」을 뽑아들고 있다가「버스」가 가로수에 충돌하는 바람에 4, 5발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
특수 범 난동의 조사소위 구성
게재일 : 1971년 08월 25일 [1면] 글자수 : 302자
신민당의 김재광 원내총무는 8일 상오 김홍일 당수에게 총무직 사표를 냈으나 김 대표는 원내대책위의 협의를 거쳐 이를 반려했다.
그러나 김 총무의 사표 제출 이유가 최근 잇따른 총무단에 대한 원내반발, 김 총무가 중심이 된 지자제위 구성에 대한 반발 등 파벌간의 대립이 얽혀있고 김 총무와·국방·내무위소속의원과의 반목이 생겨 문제해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김 총무는 사표제출의 이유로ⓛ국회국방·내무위의 군 특수범 난동사건 조사처리에 있어 신민당소속 조사위원들이 총무단의 지시를 어기고 여야단일보고서 작성에 합의해주었고 ②자신이 위원장으로 되어있는 지방자치제실시 촉구 투위의 활동 및 지자법 개정시안에 대해 당내에 잡음이 있어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는 더 이상 총무직을 수행해 나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홍일 당수는 이날아침9시 국회원내 총무실에서 긴급원내대책위를 소집, 김 총무의 사표처리를 혐의한 끝에 실미도 군 특수범 난동에 대한 내무·국방 조사위의 보고서에 내무장관의 인책까지 포함시키는 별도의 보고서를 내도록 하는 대신 총무사표는 반려키로 했다.
보안사령관 경질 강창성 소장 임명
게재일 : 1971년 09월 21일 [1면] 글자수 : 75자
「8·23사태」가 발생했을 때「공비의 침입」으로 잘못 발표했다가「군 특수 범의 난동」으로 정정 발표한 것은『사실이 밝혀진 이상 모든 것을 소상히 발표하라』고한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새해 예산안을 다룬 23일 하오의 정부-여당 연석회의 때 박대통령자신은 회의를 계속 주재하면서 김종필 총리에게 사태 수습을 지시, 이에 따라 김 총리는 김정렴 비서실장 방에서 관계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를 종합하여「공비침입」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
김 총리는 현장을 다녀온 정래혁 장관 및 심흥선 합참의장,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약 2시간에 걸쳐 관계서류까지 일일이「체크」, 실 미 도에 있던 특수 범들임을 확인한 뒤에야 이를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인데「판단」에 신중을 기하는 바람에 정정 발표는 늦어졌던 것이라고.
『저는 이번 난동사태에 대해 백 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의 사표가 수리되고 평소에 존경하는 유재흥 씨가 신임장관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정래혁 전 국방장관은 24일 국회 국방·내무위 연석회의에서 의장들의 질문에 답변하다 하오 6시20분 비공개회의로 들어가기 직전 해임통보를 받고 퇴임인사를 했다.
이날 연석회의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례할 만큼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는데 1백 여명의 보도진 외에도 공화당의 장영순·박태원, 신민당의 김재광·이중재·한건수·이택돈·김한수·노승환 의원 등이 방청했다.
약 열흘 전부터 예고·연기·재 예고를 거듭한 김홍일 신민당 대표위원의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은 최근의 특수 범 난동사건·남-북한 적십자회담을 비롯해서 물가문제까지 모든 문제를 다룬 탓인지 초점이 흐려진 인상.
「프린트」된 회견내용은 김수한 대변인의 솜씨로 다듬어진 듯 김 대변인이 평소 즐겨 쓰는「중대사태」「즉시철회」「위정자의 독선과 강요」「정략적 악용」「고식적 탄압」등 강경한 수식어가 다채롭게 나열돼 있었다.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부정부패추방입법계획을 묻자 김 대표는『그런 안은 있으나 성안되지 않았다』는 등 부연 설명도 거의 없었다고….
백두진 국회의장은 거가 없거나 서울에 집이 없는 초선의원들에 대해 주택 및 차 구입에 편의를 보아주도록 사무처에 지시.
이에 따라 국회사무처당국은 집 없는 의원들에게는 서울시가 지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하고 승용차도 할부구입 방법을 교섭 중.
한편 국회간부들의 새차구입계획은 백의장의 거절로 의장 차는 새「캐딜락」으로 바꾸지 않기로 하고 부의장용「벤츠」600 2대(2천7백82만원)구입 계획은 예산만 따 놓은 채 주춤한 형편이며 양당 총무·상임 위원장용「뉴·크라운」인 18대만 구입을 마쳤다.
대통령 특명 군 검열 단(단장 김희덕 중장)은 25일 8·23 특수 범 난동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8명의 조사위원으로 구성된 검열 단 조사반은 공군특수 범 및 부대관리상의 문제점과 난동 자들이 서울까지 진입할 수 있었던 수도권방위의 허점 등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유재흥 국방장관은 군 검열 단 조사반의 조사결과에 따라 2,3일 안으로 문책범위를 가리어 군법회의 등에 회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특수 범 난동 자 각 군 공개 요구
게재일 : 1971년 08월 30일 [1면] 글자수 : 457자
국회 특수 범 난동사건조사단은 30일 공군정보부대에 출장, 살아남은 난동 자와 경비병들로부터 비공개로 진술을 들었다.
조사단은 생존자의 진술을 통해 특수 범 관리를 소홀히 했던 점과 특수 범들의 욕구불만이 생긴 이유 등을 규명하고 신민당의 이세규 의원은 난동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도록 국방장관에게 요구했다.
조사단은 이어 난동 자들을 실 미 도에서 인천까지 태워다 준 선원과 조개고개에서의 교전상황을 목격한 민간인의 증언을 들어 31일에 조사보고서를 작성키로 했다.
조사보고서는 그 동안의 현지조사와 관계자들의 증언내용을 중심으로 ①특수 범 관리소홀 ②난동 자들이 서울까지 침입할 수 있었던 수도권 방위의 허점 ③대 간첩 대책본부가 이 사건을 공비의 소행으로 오판했던 점등을 지적하고 68년에 있었던「1·21」사태와 이번 8·23사건을 거울삼아 경비태세를 강화하도록 정부에 대한 건의를 담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