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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삼태극
티베트 불교사원의 현재*1)
-사원생활의 실태조사를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최근 한국에서는 중국의 서장西藏 자치구(티베트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의 풍속 및 관습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민속학을 비롯한 학계뿐만 아니라, MBC나 KBS 등과 같은 방송국에서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1)을 직접 제작 방영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방송국이 제공해주는 영상 덕분에 일반인들조차도 몽골 및 티베트지역(티베트 불교사원의 생활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이러한 경향의 배경에는 1992년에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체결함에 따라 중국에 관한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게 된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즉 관광을 목적으로 한국인의 중국 왕래가 자유로워지고2) 여행자의 숫자도 증가함에 따라 관광정보만이 아니라 문화교류도 적극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경우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92년부터 중국으로부터 정보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약 2년간의 정착과정을 겪다가, 1994년 무렵에는 중국 붐이 조성될 정도로 중국과의 정보소통이 원활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1972년에 국교를 회복했으나, 그 당시만 해도 티베트는 개방되지 않은 상태였다.3) 그러나 1985년에 네팔에서 육로를 통해 서장西藏 자치구로 들어갈 수 있는 우호다리가 개통되었으며, 같은 해 높은 시청률을 올린 NHK의 ‘실크로드’가 방영됨에 따라 일본 내에 중국 붐이 조성되면서 티베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을 방문하는 일본관광객의 수가 급증한 것도 위에서 언급한 1985년을 기점으로, 그 2년 후인 1987년 무렵이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티베트 및 몽골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부쩍 높아진 배경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양국 모두 매스미디어, 특히 텔레비전 보도에 따른 정보 유입과 관광에 따른 중국지역의 관광활성화라는 2가지 요소가 티베트 및 몽골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나라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유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오늘 발표에서는 이러한 오보誤報, 특히 티베트불교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현재 알려진 티베트불교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2가지 정도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티베트 불교경전은 중국, 한국, 일본의 한역漢譯 경전과는 달리 인도에서 직접 유입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전반에 형성된 티베트 문자에 의해 14세기에는 대장경大藏經의 산스크리트어 완역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는 오랜 기간 ‘라마교’로 칭해져 왔다. 이처럼 ‘티베트불교’를, 불교와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에 티베트를 조사한 유럽(영국 및 독일)의 탐험조사대가 티베트불교를 ‘Lamaism’으로 잘못 번역한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혹독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어 있는 지역이기에 자연히 이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발흥하기 이전인 토번吐番 왕조시대에 당나라의 문성文成 공주가 646년에 티베트의 송쩬감포 대왕(629-649)과 혼인을 하였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송쩬감포가 ‘대왕’이 아니라 ‘대신大臣’으로 격하되어 있다.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 통치하고 있는 관계로 극히 정치적인 의도에 따른 정보 조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사회주의체제와 종교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탓에, 이러한 중국 내의 티베트에 관한 정보 조작은 중국의 체제와 티베트불교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시대가 급변하여 티베트 및 몽골 주변의 상황에 대한 다량의 정보가 유입되고 있어도 이들에 관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란 무척 힘들다. 위에서 예로든 바와 같이 이러한 원인은 다음의 2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외부와의 접촉이 별로 없는 탓에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자연환경에 의해 ‘비경秘境’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잘못된 정보가 생성 혹은 조장되는 경향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체제와 종교의 공존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조사도 무척 힘들다. 티베트 및 내몽골은 중국의 사회주의체제 아래 놓여 있으며, 몽골국 역시 사회주의체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인해 티베트불교의 실태를 온전하게 파악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이긴 해도, 티베트 불교사원의 풍속 및 관습 등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지조사를 감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까닭에 나는 1985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티베트와 몽골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티베트 불교사원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해왔다. 이를 위해 나는 사회주의체제 아래에 놓여 있는 티베트 불교사원을 조사했으며, 비교연구라는 관점에서 종교 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인도와 네팔지역의 티베트 불교사원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티베트 불교사원의 실제 상황을 검토하고자 한다. 각 항목별 개괄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1>의 영역에서는, 티베트 및 티베트불교에 관해 기존의 문헌이나 보도를 통해 제공된 잘못된 인식을 검토 및 수정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티베트 사람과 티베트 측의 견해를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면면히 활동을 지속해 온 티베트 불교사원의 실상에 대한 현지조사의 결과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 글에서 조사대상으로 삼고 있는 지역은, <2>에서는 티베트 본토이며, <3>은 몽골지역에 대한 내용이다. 한편 인도지역은 사회주의체제가 아닌 관계로 <4>의 영역에서 별도로 다루었다. <2><3><4>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현지조사에서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구성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의 티베트 문화연구소 및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에 의해 발표된 최신 자료를 참고로 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주된 테마인 ‘정보와 실태의 차이’에 대해서는 <5>의 영역에서 다룰 예정인데, 여기서는 일본에서 행해진 보도내용과 실제 상황을 비교․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1980년대 후반의 상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1> 티베트불교에 관한 기본 지식
일반적으로 티베트불교를 거론할 경우, 이를 ‘라마교’로 칭하면서 불교와는 다른 종류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불교의 일파’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교과서에서도 불교와는 다른 별도의 종교로 구분해왔다. 그러나 티베트불교는 발상지 인도(지금의 네팔 영토)에서 직접 유입된 불교이다. 티베트불교는 13세기 이후, 티베트 본토뿐만 아니라 유라시아대륙에까지 포교되었다. 티베트 불교문화권에 해당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티베트 불교사원을 확인해보면, 북쪽으로는 현재 러시아연방에서 몽골국, 남쪽으로는 네팔, 부탄, 인도 북부의 시킴, 라닥크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여기서 말하는 티베트 본토란, 현재 중국 서남부의 서장西藏 자치구, 청해성靑海省과 사천성四川省의 서쪽 1/2지역을 포함한 범위를 가리킨다. 예전 티베트에서는 지금의 서장 자치구를 U-tsang, 청해성을 amdo, 사천성을 kham이라는 행정단위로 구분하고 있었다(첨부지도 참고).
이들 지역이 1950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됨에 따라 자치구 및 성省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면서 중국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이처럼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1959년에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인도의 다람살라에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가 세워졌다. 그리고 티베트 독립운동은 티베트 내에서만 아니라 망명정부 및 해외로 진출한 티베트인들에 의해 지속되었는데, 특히 인권문제라는 관점에서 미국 상원의회에서도 거론되기도 했다.
언어와 문자는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지폐에는 중국어(漢語) 이외에 티베트어, 위구르어, 몽골어가 병기되어 있는데,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당연히 중국어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티베트어는 회화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를 표기할 수 있는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1991년부터 단계적으로 티베트어 수업이 행해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학교 교육에서는 중국어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불교사원에서는 티베트어로 된 경전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역漢譯 불전은 없다. 식자율識字率을 살펴보면, 남성 66%와 여성 84%라는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자료가 있으나, 이 비율이 티베트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 아니면 중국어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교육 분야에서는, 1985년 티베트 대학이 설립되었으나 본격적인 교육활동보다 중국어 및 티베트어를 배우기 위해 입학하는 외국인 유학생에 의해 주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2> 티베트 본토의 불교사원 실태
4천500개 정도가 있었다는 사원 중에서 약 99%가 문화대혁명 이전인 1950년대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현재 45개 정도의 사원만이 활동하고 있다. 승려의 숫자도 예전에는 15만 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1천4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현재 사원과 달라이 라마의 궁전 시설 등의 중수공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데, 공사를 마친 티베트 불교사원이나 궁전 등은 입장료를 지불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원도 종교적 목적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견학시설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세라寺, 드라퐁寺, 간덴寺 등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3대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각 실室을 구경할 때마다 촬영요금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죠캉(大昭寺)은 이미 중수공사를 마친 상태였는데, 공사에 소요된 비용은 관광수입을 통해 충당했다고 한다.
이렇듯 티베트 본토에 자리하고 있는 불교사원에서는, 매년 증가하는 관광객이나 외부 취재 등과 같이 중국공산당이 대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경우에만 본격적인 사원활동과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59년 3월 10일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의 다람살라에 망명한 날을 기념하여 매년 티베트 각지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티베트 독립운동이 벌어지는데, 특히 1989년에 발생한 데모는 대규모에 달했다. 그 결과 티베트에는 중국공산당군에 의한 계엄령이 발포되었으며, 1992년까지 외국인의 티베트 관광여행 방문이 기본적으로 금지되었다. 나는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인 1991년에 관광 가이드북을 집필하기 위한 취재목적이라는 특별 허가를 얻어 티베트에 갔는데, 당시 티베트 불교사원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사원에서 거주하는 승려들의 생활은,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기상 시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음) 버터차 등을 마신 후에 독경을 하고, 오전 10시 무렵에 아침 식사를 한다. 메뉴는 비교적 간단한 참파(thanpa : 라이보리 가루)와 야크(yak)라는 동물에서 얻어진 기-(ghi : 버터)를 반죽한 것을 먹는다. 그 후 각자가 맡은 일을 하는데, 이를테면 사원 보수나 청소 등의 작업을 한다. 오후가 되면 독경을 한차례 행하고, 저녁 식사(티베트 본토에서는 주로 야채볶음 등과 같은 요리였음)를 하고 취침에 들어간다. 체류기간이 짧았던 탓에 각 사원별 생활의 차이 및 사원 조직과 하이어라키(hierarchy) 등에 관해서는 언급할 수 없지만, 라마(승려)에 따르면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티베트 본토를 비롯한 각지의 티베트 불교사원에서도 이와 동일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원 운영 등의 경제적 상황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약간의 지원금이 있으며, 그 외의 비용은 신도들의 보시에 의한 현금수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보시로는 현금 외에 침針 등의 현물도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 14세의 사진은 중국당국이 엄중한 관리를 하고 있어 소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간혹 외국인 관광객으로부터 얻은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다만 달라이 라마와 관련된 사진 등 티베트 관련 물품을 외국인 여행자가 승려에게 건네주다가 중국공안당국에게 발각되면 외국인과 승려 모두가 처벌 대상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듯 티베트 본토에 있는 불교사원은 중국당국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면면히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3> 몽골지역 티베트 불교사원의 현재
여기서 말하는 몽골지역이란, 몽골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몽골 자치구를 총칭한다. 내몽골 자치구를 비롯하여 몽골국의 티베트 불교사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체제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사원 운영과 활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고 있다. 몽골국에서는 울란바트로의 간당寺, 카라코룸의 에르덴주,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에서는 바오토우(包頭)의 우당묘(五當召) 및 후허트(呼和浩特)의 시리투조우 등이 유명한 티베트 불교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몽골국에서는 1989년에 취한 개방정책의 일환으로서 몽골의 독자적 문화, 전통문화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몽골의 티베트 불교사원과 승려들에게 있어 중국의 정책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1992년에 신헌법이 채택됨에 따라 국명, 국기, 국장國章도 새롭게 제정되었다. 언어정책도 티베트 본토와는 달리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오랜 기간 사용해온 키릴문자에 의한 몽골어의 음전사법音轉寫法과 본래의 세로문자에 의한 몽골어 교육이 적극 행해지고 있다. 세로문자에 의한 몽골 민화 등의 서적 출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불교사원의 중수공사 등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개방정책에 의해 경제가 혼란상태에 빠져 인플레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3년에 가이드북 집필을 위한 취재차 몽골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인플레현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유소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자동차가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시장에서도 빵이나 담배 등을 구입하기 위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점마다 물건이 바닥나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금전등록기 옆에는 저액 지폐들이 벽돌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교사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사원 보수작업이 지체되면서 각 사원들은 보시를 요청하는 광고지를 붙이기도 하고, 사원에 재적하는 승려 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한편 몽골국의 경우에는 매스미디어의 취재나 촬영에 대해서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어서 당일이라도 정부 허가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중국처럼 사원에 군대나 공안들이 감시를 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에서는 관광지화된 유명한 사원을 구경할 경우에도 공안의 감시가 있으며, 중국정부(공산당 지방정부위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
중국 내에서 티베트 자치구와 내몽골 자치구를 비교해보면, 중국공안의 감시는 내몽골 쪽이 비교적 느슨한 편이다. 조사기간 중, 외국인에게는 개방금지지구로 지정된 헤이허에 있는 멜겐寺가 주최하는 행사에 허가를 얻지 않고 참가했는데, 촬영을 하는 도중 중국공안당국에게 발각되었다. 다행히도 내몽골대학 교수에게 나의 감시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내몽골의 경우에도 서부 쪽으로 가면 정식 허가를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한편 몽골지역에 있는 티베트 불교사원의 경우 생활주기는 다른 지역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승려가 육식을 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평소 양고기를 먹는 것이다. 또한 사원의 승려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식육용 양고기를 도살하는 시간은 해가 뜨고 나서 오전 동안으로 특별히 정해져 있다. 이것은 불교신앙과는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13세기 몽골지역에 티베트불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있어온 관습이라고 한다. 또한 몽골국에서는 티베트불교의 정당이 결성되어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4> 인도지역 티베트 불교사원의 현재
<2>와 <3>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 및 몽골지역에서는 사회주의체제로 인해 20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불교사원이 탄압을 받아왔다. 인도 카시미르 분쟁에서 드러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대립구조 등과 같이, 비록 종교의 이상적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국가 정책으로서 종교에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해온 인도의 티베트 불교사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인도의 티베트 불교사원은 인도 각지에 산재해 있는데, 이 중에서 티베트인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서벵갈州와 시킴州, 티베트 망명정부가 자리하고 있는 히마찰 프라데시州 등, 주로 인도 북부지역에 집중해 있다. 당연히 네팔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들 지역의 티베트 불교사원을 방문하는 중에 서벵갈州의 다지린에 있는 어느 곰파(gompa : 절)에서 묶을 기회가 있었다. 이 절은 1명의 전생자(轉生者)와 100명 이상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형사원으로서 이를 thuputen ssangya choring라고 한다. 아침의 독경 → 식사 → 봉사활동과 사원수리 → 식사 → 독경 → 취침으로 짜여진 생활주기는 다른 지역의 티베트 불교사원과 거의 동일하다. 이 절에는 3세부터 중학생 정도까지의 어린 승려도 다수 생활하고 있으며, 오후 시간대를 이용하여 일반 공립학교의 교과과목에 해당하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이를테면 곱셈 등을 10×10까지 암기하는 등).
한편 인도답게 두 끼의 식사 메뉴는 카레이다. 그러나 육식은 전혀 하지 않으므로 카레를 만들 때도 가지, 콩, 무, 감자 등을 번갈아 사용한다. 또한 티베트 본토에서 주식으로 삼고 있는 참파는 먹지 않는다. 티베트 본토보다도 1천 미터 아래에 위치한 저지대이기 때문에 굳이 참파 재료로 이용되는 라이보리를 재배할 필요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시내에는 티베트 출신 승려 이외의 일반 티베트인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모모(momo : 고기만두)나 둡파(thukpa : 우동) 등과 같은 티베트 음식을 파는 식당도 꽤 많다. 따라서 승려들이 이들 음식을 먹을 경우에 섭취하게 되는 육식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게 허용하는 편이다.
인도의 티베트 불교사원은 지역과 공생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를테면 네팔, 인도, 부탄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승려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신도들도 여권을 지니지 않고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다만 절을 방문하거나 순례목적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에서만 가능). 실제로 내가 머물고 있던 절에서는 부탄으로부터 많은 신도들이 방문하여 기도행사를 행한 적도 있었다. 또한 지역 유지들은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일 경우에도 티베트 불교사원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티베트 난민캠프에서 얻어지는 물품 판매이익을 학교교육이나 사원에 기부하는 등의 공생적 시스템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원을 개방하는 등의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지조사를 위한 조사대상으로서는 기꺼이 개방하고 있으며, 특히 신도들에게는 아주 수월하게 개방해주는 공생적 스타일이 인도에 있는 티베트 불교사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5> 티베트불교에 관한 ‘정보’와 ‘실태’의 차이에 대하여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버린 이상, 중국 측의 보도와 티베트 측의 주장에 자연히 차이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티베트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외부세계에서 정확히 파악하기란 무척 힘들다. 이 글의 <1>에서 티베트의 영토에 관해 언급했듯이, 원래의 티베트 본토 즉 우짱(티베트 자치구), 암도(靑海省), 캄(四川省의 서쪽 1/2영역)을 포함한 총면적은 220만㎢이다. 이것은 중국 총면적의 1/4에 해당한다. 또한 중국 측의 주장에 따르면, 한민족 이외에도 55종류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때 중국 측이 사용하고 있는 ‘小數民族’이라는 용어로 인해, 우리는 마치 티베트인이 ‘小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실제 600만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이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 이는 스웨덴의 인구보다 약간 적으며,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의 인구보다 많은 숫자이다.
특히 티베트에 관한 보도 중에서 현재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중국공산당군의 티베트 침공에 관한 내용인데, 당시 1970년대는 티베트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탓에 일본에서는 티베트에 관한 정보를 중국으로부터 직접 얻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주장하는 “구태의연한 티베트의 농노제를 중국공산당이 해방시켰다”라는 내용에 바탕하여,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해방’이라는 취지 아래 집필된 서적이 출판되기도 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어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대해 취해온 정책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대외개방정책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일본에서도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침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 글의 앞부분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의 저널리즘이 티베트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중국의 티베트 침략’이 아니라, ‘비경秘境’을 간직하고 있는 희귀하고 색다른 문화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인권문제’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비난하는 보도를 행해왔다. 1987년 일본에서는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테레비 아사히(朝日)’의 ‘뉴스 스테이션’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관한 비판적 내용이 보도되었는데, 이때 강력한 압력(추측하건대, 여당 정치단체 혹은 중국정부)이 가해짐에 따라 다음날 방송에서 보도정정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맺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에서는 티베트 문제를 다루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다. 티베트의 정치적 측면보다 문화적 측면이 자주 거론되는 원인도 바로 이러한 압력 및 정치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티베트의 문화적 측면을 다룰 때도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를테면 ‘비경秘境’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색적인 장면만을 촬영하여 퀴즈프로그램 등을 통해 방영함으로써 티베트에 대한 이미지를 조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티베트는 ‘희귀하고 색다른 문화가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티베트지역․몽골지역․인도․네팔 등의 티베트 불교문화권을 수차례에 걸쳐 방문했는데, 소니(SONY) 전자제품을 갖고 싶어하고, 티셔츠를 입고 락을 즐겨 듣는 극히 평범한 젊은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처럼 연구자들이 현지조사를 수행할 경우, 대상지역의 ‘보편성’과 ‘새로운 움직임’이라는 양면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광범위한 티베트 불교문화권을 방문하면서 느낀 나의 소감이기도 하다.
▣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개별 지역에 대한 심층적 조사보고가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을 폭넓게 다룬 까닭은 티베트를 연구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티베트 불교문화권을 이해하면서 각 지역의 차이를 비교고찰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체적 파악을 통해 개별 지역의 특징을 찾아내는 것이 티베트 연구를 위한 나의 궁극적 목적이다.
티베트는 1989년 계엄령이 발포되고 나서 1991년에 서방측 기자로서 방문하면서 학회발표, 조사보고, 집필, 강연 등을 행해왔다. 따라서 이글은 이러한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몽골지역은 1987년 중국유학 중에 내몽골에 대한 신문기사를 집필하기 위해 수집한 취재자료 및 1995년 다이쇼(大正)대학 몽골불전연구회에서 발간한 ‘내몽골 서부지구 학술조사’에 수록한 내용을 토대로 삼았다. 그리고 외몽골(몽골국)에 관해서는 1993년 가이드북 취재 및 티베트 문화연구소회보에 실은 원고를 참고했다.
인도와 네팔지역에 관한 내용은 1990년에 행한 조사 자료를 토대로 삼은 것이다.
티베트의 최신 정보는 티베트 문화연구소의 협력을 얻어 티베트 망명정부가 발행하는 신문 및 뉴스레터를 참고했다.
이글을 작성하는 중에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티베트 캄지방(四川省) 나론현의 승려(라마)에게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며, 초고에 대해서도 유용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및 자료>
山口端鳳 チベット下(東京大學出版會 1988)
中村元 東洋人の思惟方法4(春秋社 1986)
ペマ․ギャルポ チベット入門(日中出版 1987)
高山龍三 失われたチベット人の世界(日中出版 1990)
英國議會人權擁護グループ報告 チベット白書(日中出版 1989)
「ラマ敎ではありませんチベット仏敎です」(TCC 1988)
チベット文化硏究會會報(TCC 1992) 山口勝弘 「チベット最新事情」
チベット文化硏究會會報(TCC 1994) 山口勝弘 「モンゴルのチベット佛敎寺院」
地球の步き方 40チベット編(ダイヤモンド 1991)
地球の步き方 40チベット編(ダイヤモンド 1993)
* 번역:김미영(안동대 국학부).
1)일본의 경우 외부 제작회사가 만든 티베트 관련 프로그램을 방송국이 구입하여 방영하는 방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방송국이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2)한국 비교민속학회에서도 티베트를 방문하여 현지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1992년 비교민속학 제8집(1992)에 티베트에 관한 특집 논고들이 실려 있다.
3)중국의 대외정책에 의해 외국인 방문이 허용된 것은 1979년이다. 참고로 티베트 자치구는 1985년에 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