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貞夫人安東張氏遺蹟碑
석보면 원리에 세워진 정부인 안동 장씨 유적비는 1989년 9월에 정부인의 업적을 후세에 알려 올바른 여성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貞夫人安東張氏遺蹟碑文
貞夫人 安東張氏는 高麗太祖 貞弼의 後裔인 敬堂 興孝를 父親으로 하고 僉知 權士溫의 女를 母親으로 하여 一五九八年 宣祖
三一年 十一月 二四日에 安東 金溪里에서 誕生하셨다.
어릴 때부터 才行이 뛰어나 遠近에 稱頌이 藉藉하였는데 十九歲 되던 해에 載寧 李氏 家門에 繼室로 出嫁하니 夫君은 곧 麗末節士
茅隱 午의 後裔인 石溪 時明이시다.
出嫁하신 지 六四年동안 오직 敬과 誠으로 舅姑를 奉養하고 君子를 받들며 七男三女를 훌륭하게 길러내었으며 李氏家門 三代에
四不遷位가 모셔지게 된 것은 夫人의 功이 至大하셨기 때문이다.
晩年에 第三子인 葛庵 玄逸의 士林薦으로 吏曺判書에 올랐는데 典例에 따라 朝家에서 貞夫人의 敎旨가 내렸다.
一八六十年 肅宗 六年 七月 七日에 이곳 石保村에서 逝去하시니 享年이 八三歲 였다.
夫人은 天賦가 聰明慈孝하시고 恒常 聖賢의 말씀을 쫓아 樂善孝義 하시어 媤家 舅姑와 親庭 父母를 위한 誠孝가 極盡 하셨다.
出嫁前 親家 母親의 病救療에 남다르시더니 出嫁後에도 安東 寧海 二百里 길을 咫尺같이 나들며 盡誠하셨다.
親家父親 敬堂이 六旬에 喪配하시고 後嗣가 없게 되자 親庭에 자주 들러 奉養 하시는 한편 父親께 諫請해서 繼室을 맞게 하여
三男一女를 두게 하였으며, 또한 敬堂이 別世하신 後에는 繼母一率을 媤家 側近으로 데려와 生計를 보살피고 男妹들의 娶嫁까지
돌보아 親家의 香火를 잇게 하였으니 父母에 대한 孝行과 同氣間의 友愛가 이토록 至極하셨다.
夫君을 섬김에 있어서는 恒常 貴賓처럼 尊敬하고 每事를 諮問 받아 內助하였으며, 잦은 移住로 生計가 困難였으나 조금도 怨尤의
빛이 없었고 媤父 別世로 夫君의 三年 廬墓 中에 數十眷口를 統率하여 모든 家事를 規範에 맞게 잘 處理하셨다.
懷妊 中에는 不潔한 飮食을 들지 않으시고 不淨한 자리는 避하시는 등 몸가짐은 반드시『列女傳』의 訓戒에 쫓아서 胎敎 하셨으며
子女들을 慈愛함이 또한 至極 하셨으나 敎誨함이 甚嚴하셨는데 언제나 孝悌忠信과 敬과 義를 强調하셨다.
前室 光山 金氏의 子女를 보살핌에 있어서도 己出과 다름없이 撫育하시는 등 多子女를 啓導한 功이 이처럼 至大하시 더니 마침내
저 退溪 學統의 正脈을 傳授 한 太儒 存齋 徽逸, 葛庵 玄逸, 恒齋 嵩逸 을 비롯한 世稱 七賢子를 두셨으며,肖孫에 密庵 栽, 顧齋 槾
과 같은 碩學을 두시었으니 이 어찌 偶然일 수 있으며 兩程夫子를 낳은 侯夫人이 무엇이 부럽다 하리요.
婢僕을 부리되 親子女처럼 여겨 病苦時는 親히 看護하시며 비록 잘못을 저질러도 憤怒한 音聲과 顔色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타일러 感服케 하시니 洞里 下人 들이 모두 夫人宅 婢僕이 되지못함을 恨으로 여겼다.
可憐한 隣人과 鰥寡孤獨을 대함에는 賑恤賙饋를 내 몸과 같이 하시니 모두 夫人에 대한 冥報가 願이라 하였다.
日常의 衣食은 簡淡完潔했을 따름이요, 世俗의 芬華珍異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夫人 은 婦職만 닦았을 뿐 아니라 古今事變에도
通達하셨거늘 마침 淸軍이 來侵하여 稱臣을 强要하자 恥辱을 느끼시고 國威未振하여 北伐 못함을 慨然히 痛嘆하시는 등 當身의
識見은 實로 高尙하셨다.
夫人은 겨우 十餘歲에 元會運世의 理論을 側聞하고도 通曉하실 만큼 才操가 非凡하셨고 文藝에 있어서도 天才的 才能이 있어 詩
九篇, 書 一篇, 遺墨 三篇을 남기셨는데 詩는 그 密度나 水準에 있어 果然 白樂天을 따를 만하고 草書또한 能하
시어 當代 名筆인 鄭淸風子조차도 그 筆勢의 豪勁함에 놀라 이는 東國人의 書法이 아닌 다 中國人의 手蹟이라고 評價하였다.
飮食調味에도 出衆하시어 夫人의 所著인 閨壺是議方은 現今 朝鮮朝 傳統料理硏究의 指針書로 評價되고 있으며,日本에까지 飜刊
되고 있다. 特히 夫人이 世人들에게 推仰을 받게 되는 것은 女性으로서의 謙讓과 婦德을 갖추셨기 때문이다.
또한 夫人은 天賦의 才能으로 十歲前後에 學藝가 이미 哲人의 境地에 접어들었으나 出嫁後로는 이를 감추고 오로지 婦德만 닦으셔
서 그 絶異한 詩才나 學問과 筆法은 夫君조차도 몰랐으며 平素 子與孫들에게는 訓戒하시기를 大學者이신
웃어른들이 계신데 내가 어찌 學問을 論할 수 있으랴.“英雄이 함부로 拔劍하면 盜賊의 累를 입고 君子가 함부로 붓을 놀리면 名下
에 큰 汚點을 남기느니라. 앞날에 驕奢와 蠻勇이 없도록 銘心하라.”하셨다.
夫人의 이같은 志行은 萬古의 敎訓이라 하겠다.돌이켜 보건대 夫人께서는 學識과 德行이 凡人과는 比할 바가 아닌 絶人의 境地에
있으면서도 女性이기 때문에 숨기고 自制하시며 오직 犧牲的으로 三從之道를 따라 至誠으로 舅姑를
받들었으니 孝悌가 出天하셨고 恭敬으로써 君子를 섬겨 夫君의 學道를 도우셨으니 賢夫人 이요, 慈愛와 規誡로써 子女를 養育하여
바른 길로 誡導하셨으니 賢母요 偉大한 敎育者이셨으며 仁愛로 婢僕을 다스리며 賙恤로써 隣人을 돌보셨으니 훌륭한人格者이셨다.
실로 夫人의 德行은 萬世人類의 師表가 될지어다. 이토록 崇高하신 夫人의 淑德懿行이 일찍이 世上에 드날리지 않았던 것도 兒女子
의 表彰이 分數가 아니라는 當身의 謙讓 때문이었으리라. 거룩하신 夫人의 德行을 萬世토록 기리고자 삼가 옷깃을 여미고 敢히
拙文으로 讚頌하면서 暫時 夫人所作의 蕭蕭吟으로 無我의 詩情에 젖어 보고 싶구나.
창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부슬부슬 빗소리 자연스럽네.
자연스런 빗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스럽네.
(窓外雨蕭蕭 蕭蕭聲自然 我聞自然聲 我心亦自然)
一九八九年 九月 日大韓民國 國史編纂委員會委員長 朴永錫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