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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계 |
朱文公家禮 |
四禮便覽 |
의성 김씨댁(1992) |
진성 이씨댁(1993) |
가례전 |
쌍계․사규삼․ 늑백․채극 |
쌍계․사규삼(중치막)․늑백․채극 |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
초가례 |
관․심의․ 대대․리 |
관건․심의․ 대대․구 |
상투․치포관․ 심의 |
상투․유건․심의 |
재가례 |
모자․조삼․혁대․혜 |
모자․조삼․혁대․혜 |
유건․도포 |
흑립․조삼 |
삼가례 |
복두․공복(난삼)․혁대․화 |
복두․난삼․대․화 |
흑립․청도포 |
탕건․흑립․조삼 |
관례는 혼례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관례를 치르고 여성의 계례 역시 혼인 날 아침에 치루어지는 것이 관행이었다. 신부는 얼굴을 곱게 씻고 ‘구루무’와 박가분(朴家粉)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기도 했으며, 또 ‘월연지’라고 하여 붉은 종이나 치마감 남은 것을 잘라 이마에 붙였다고 한다.
신부가 입을 원삼이나 족두리, 낭자 등은 신랑집에서 은반지, 은비녀 등의 패물과 함께 혼수함(상답․호남)에 넣어 보내 주기도 하고, 없으면 문중의 것을 사용했다. 그것도 없으면 마을 공동의 것을 빌려서 사용하는데 그것조차 없을 때에는 시댁에서 보내온 ‘한불 우티감(초록저고리감․분홍치마감)’과 ‘두불 우티감(노랑저고리감․남색치마감)’으로 임시방편의 ‘나삼(羅衫)’을 만들어 입었다. 이때는 혼수감을 쌌던 종이를 손에 끼워 한삼 대용으로 사용했는데, 상당히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한편 신부는 머리를 올려 쪽을 짓고 용봉잠을 찌르고 족두리를 쓰는데 족두리 뒤쪽에는 도투락댕기(큰댕기)가 고정되어 있다. 족두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궁중의 첩지머리와 비슷한 형태의 ‘귀쌍다리’를 머리에 얹어 귀를 싸듯이 감아 내려 낭자 다리(月子)랑 합해서 커다란 쪽머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큰머리’ 또는 ‘낭자머리’라고 했다. 그리고 속속곳, 바지 또는 ‘중우’라는 홑바지를 입고 단속곳을 입은 후 다홍치마를 입고 분홍 속저고리에 초록 저고리를 입었다.
한편 갓과 도포를 차리고 집을 떠난 신랑은 신부집에 당도하기 전에 다른 집에 들러서 ‘사모관대’를 갖추고 신부집으로 간다. ‘사모관대’라 함은 쌍학 등의 흉배 달린 단령에 각대를 두르고 목화 신은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사모 밑에는 남바위 등의 모자를 쓰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사모의 뿔 하나를 빼버리면 그 신부는 소실이 되었다는 웃지 못할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혼례를 치른 신랑은 신부집에서 새로 마련해 놓은 옷 일습을 갈아입는다. 초야를 지낸 후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얼마간을 친정에서 머물다가 시댁으로 가게 되는데 이를 ‘신행’이라고 한다.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에 낭자머리를 하고 당혜를 신고 가마를 타고 간다. 신부는 시댁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의식인 현구고례(見舅姑禮), 즉 폐백을 드리게 되는데 원삼과 족두리 차림을 했다.
구식혼례는 점차 신식 결혼식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60년대 이후 이러한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면서, 사모관대, 원삼 차림의 신랑 신부보다는 웨딩드레스에 신사복 차림의 신랑 신부 모습을 흔히 보게 되었다.
5. 성인 남녀의 평상복
1) 남자 복식
(1) 관모
남자는 결혼을 하면 상투를 틀고 망건을 썼다. 반가에서는 집안에서 사방건이나 정자관을 썼으며 탕건을 쓰기도 했다. 외출시에는 갓을 썼고, 비가 올 때는 갓 위에 갈모라고 하는 기름종이 모자를 썼다. 갈모는 갓을 덮을 정도의 주름잡은 우산 형태의 모자로서 부채처럼 접어 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사용하였다. 또 겨울에는 풍차(풍뎅이)라고 하는 털을 댄 방한모를 쓰고 갓을 그 위에 썼다. 단발령 이후에는 사철 중절모를 쓰게 되었으며 겨울에는 목도리(목테)를 둘렀다.
(2) 바지․저고리 등
봄·가을철엔 명주나 무명의 박이 겹저고리와 바지를 입거나 무명 ‘주우․적삼’을 입었다고 하는데 주우·적삼의 ‘주우’는 중의(中衣), 즉 홑바지를 뜻하며 적삼은 홑 저고리를 뜻하는 말이다. 날이 더워지면 삼베 주우․적삼을 입거나 ‘몽당 중우’라고 하는 짧은 바지에 반팔 옷을 입기도 했으며 후에는 삼베나 모시로 만든 ‘조끼 적삼’이라는 개량옷을 입기도 했다. 겨울에는 누비 바지․저고리나 솜을 둔 핫바지․저고리를 입었고 가난한 이들은 얇은 옷을 겹쳐 입기도 하였다. 색상은 대체로 소색 즉 흰 색상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외에 회색이나 보라색 등도 즐겨 사용하였다.
한편 조끼와 마고자는 일제 시대부터 입혀지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도 조끼를 입었는데 주머니가 있어 소지품들을 지니고 다닐 수 있어서 편했다고 한다.
(3) 출입복
근래까지도 입혀지고 있는 두루마기는 1884년 의복 간소령에 의해 도포 대신 출입복으로 입혀지게 되었다. 두루마기는 두루막과 후루막이라는 것으로 구별되기도 하는데 두루마기가 홑옷임에 반해 후루막은 겹옷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봄․가을철엔 무명이나 광목, 당목 등의 겹두루마기, 주항라 두루마기 등을 입었고 여름철엔 모시나 안동포 등과 같은 시원한 홑두루마기를 입었다. 또 겨울엔 핫두루마기, 무명 안을 넣은 명주 두루마기, 비단 두루마기 등이 입혀졌다. 짙은 색상의 양복감으로 만든 ‘기지 두루마기’는 해방을 전후해서 입혀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두루마기보다 격이 높은 도포는 지금도 의례복으로 착용되고 있다. 이 옷은 소매 넓은 두루마기와 비슷하지만 ‘매미자락(매미차락․매미찰)’이라고 하는 뒷자락이 하나 더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포의 커다란 두리소매는 ‘콩테기 달린 소매’라고 부른다.
또 다른 출입복으로 ‘큰 두루마기(행의)’라는 것이 있었다. 이 옷은 ‘두랭이 ’또는 ‘두래이’라고도 하는데, 모양은 두루마기와 같으나 소매가 넓고 도포와 같은 뒷자락이 없다. 거친 삼베로 만들어서 상주(喪主)가 외출할 때 패랭이(패리)나 방립(방갓)을 쓰고 이 옷을 입었다.
2) 여자 복식
(1) 두식 및 장신구
미혼여성의 귀땅머리는 초야를 지낸 후 비로소 성인의 쪽머리가 된다. 쪽머리는 조선조 후기에 정착된 것으로, 비녀로 고정시키고 댕기로 장식하였는데 남편이 있는 젊은 부인들은 빨강 댕기를, 중년 이상의 부인들은 자주색 댕기를 들였다. 개화기에 쪽머리는 파마머리로 대체되었는데 특히 안동 여성들은 쪽머리를 오랫동안 고수하여 파마를 뒤늦게 받아들였다.
한편 머리쓰개로는 천의(처네)라는 것이 있었다. 동정까지 단 치마형태로, 주로 반가의 부인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얼굴가리개 종류는 일제 시대에 양산이 등장하면서 차츰 사라졌다. 겨울철에는 조바위(조바우)를 많이 썼다.
한편 반가에서는 머리치장으로 옥비녀나 금비녀 등 사치스러운 것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서민들은 대부분 은 비녀나 백동 비녀를 사용하였고 근래에 들어 금비녀를 꽂게 되었다. 참빗과 얼레빗으로 잘 빗은 머리에는 동백기름이나 피마자 기름을 발라서 맵시를 냈다. 특별히 단오에는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관습도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구루무나 박가분을 어지간해서는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쌀뜨물에 녹두가루 비누를 이용하여 피부를 가꾸었다고 한다.
(2) 저고리
새색시는 초록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다가 첫 아이를 낳은 후에는 남색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년이 되어서는 주로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었으며, 특히 저고리에는 남편이 살아 있으면 자주 고름, 아들이 있으면 남색 끝동을 달아 부인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경우, 평생을 소복을 하는 것이 과거에는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모습은 차츰 사라졌다.
여성의 저고리는 남성의 저고리와는 달리, 길이나 소매넓이의 변화가 심했다. 1800년대 말부터 1920년대까지는 당코깃에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은 옷이 유행했다. 이를 ‘예저고리’라고 불렀다. 저고리가 한창 짧았을 때는 가슴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허리띠(헐띠․젖막이)를 둘렀다. 가슴을 조이는 역할까지도 했던 허리띠는 짧은 저고리를 입는 여성들의 필수품으로서 계절에 따라 겹이나 누비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저고리가 길어져서 남자의 것과 비슷해지면서 젊은 부인들에게는 긴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는 것이 유행했으며, 소매는 점차 넓어져서 과거의 좁은 소매에서 붕어소매(붕애소매)로 변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저고리 길이는 다시 짧아지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치마
치마는 ‘큰치마’ 또는 ‘자락치마’라고 하여 자락을 여며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일을 할 때엔 그 치마 위에 앞치마를 둘렀다. 개화기 이후에는 여학생복에서 시작된 통치마가 신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안동 여성의 자락치마는 오른꼬리로 입는 것이 통례였다. 서울의 경우와는 상반되는데, 서울에서는 오히려 천한 사람들이 오른꼬리 치마를 입었다. 그러나 오른꼬리 착장방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왼꼬리 치마는 조선 후기에 보편화된 착장 방식이다. 따라서 안동은 전통적인 착장방식인 오른쪽 꼬리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4) 두루마기
조선 중기까지 여성들은 겉옷으로 장의를 입었으나 후기에는 입기보다는 머리에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여성들이 출입이 증가하면서 방한용으로 남성과 같은 두루마기를 입기 시작했다. 검정이나 회색 등의 모본단, 당목 등으로 많이 지어 입었고 안은 명주를 넣고 얇게 솜을 두기도 하였다.
(5) 속옷
일반적으로 하의는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류(바지, 고쟁이, 주우), 단속곳(단의․단애), 겉치마 순으로 입었다. 상의는 적삼, 속저고리, 저고리 순으로 입는다. 속옷의 종류는 많은 것 같지만 겨울이나 외출 또는 혼례 등에 성장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보통은 하의의 경우 바지류 하나만을 입거나 또는 속속곳에 바지를 겹쳐 입는 정도였고 상의도 여름철의 경우에는 적삼 하나만을 입기도 했다.
하의의 속옷 중 다리속곳은 ‘서답(가지미, 월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항시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의 경우, 제일 안에는 속속곳이라는 세 폭의 넓은 속곳을 입었고 그 위에 부리가 좁은 속바지류(바지․고쟁이)를 입는 것이 하의의 일반적인 착용법이었다. 그리고 속곳은 일반적으로 오른쪽 옆을 터서 여미는 것에 반해, 바지는 주로 앞뒤로 터서 뒤로 여미는 형태를 많이 착용하였다. 특히 겹으로 만든 바지는 ‘바지’라고 하고 홑으로 만든 것은 ‘고쟁이’ 또는 ‘중의(중우, 주우, 주)’라고 했다.
고쟁이의 한 종류로 ‘살창고쟁이’가 있다. 허리둘레를 따라 10곳 이상을 두 치 폭에 한 뼘 길이의 직사각형을 도려내고 감쳐서 구멍을 낸 앞뒤로 트인 속바지이다. 현재 8․90세 이상의 할머님들이 젊었을 때 입으셨다고 하니 1930년대 정도까지 노인들 사이에서 입혀졌던 옷임을 알 수 있다. 시집살이가 수월하라고 이 옷을 신부에게 입혔다는 말씀과 시집가서 새색시가 예를 갖추느라고 여러 벌의 속옷을 갖추어 입어서 덥기 때문에 친정에서 입혀 보냈던 옷이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고생스러운 시집살이를 상징하는 옷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 더위를 견디기 위해 젊은 여성들은 헐렁한 속곳을 입고 발목에 대님을 묶어, 하나만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바지 위에는 다시 속속곳과 형태가 같고 약간 큰 단속곳을 입는 경우가 있었다. 요즈음의 속치마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이 옷은 반가에서 상시 착용하기도 했지만 서민층에서는 혼례 때와 같이 성장을 할 때 입었던 옷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통치마가 유행하면서 속옷은 간소화되어 갔다. 속속곳는 사라졌고 앞뒤로 트인 고쟁이 대신에 뒤만 트이고 허리 오른쪽에서 여미어 입는 ‘개량 고쟁이’가 등장했다. 그 위에 단속곳을 입거나 인조 속치마를 대신 입게 되었다.
3) 기타
(1) 장신구
남성은 바지 허리에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해서 고운 수를 놓은 귀주머니나 담배쌈지를 차고 다녔다. 개화기에는 안경이나 회중시계도 중요한 남성용 장식품 중의 하나였다. 여성들은 노리개로 은장도나 바늘겨리를 차고 장식적인 목적과 동시에 실용적인 목적을 만족시켰으며, 아들 낳기를 원하는 아낙은 고추노리개 등을 차기도 하여 주술적인 목적도 충족시켰다. 또 ‘옷고름 가락지’라고 하여 손가락 굵기의 은 쌍가락지를 고름에 끼워 노리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장신구는 아니지만 추위와 더위에 대처하기 위해 팔에 끼우는 ‘토시’라는 것이 있었는데, 남녀에게 모두 있었으나 안동 지방에서는 주로 남성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름에는 말총이나 죽(竹), 등(藤)으로 만든 토시를 손목에 끼워 통풍이 잘 되도록 했고 겨울에는 무명 겹토시나 솜토시 또는 토끼털 등을 댄 토시 등을 끼어 따뜻하게 하였다.
(2) 버선과 신발
남녀 모두 무명 겹버선이나 핫버선 등을 계절에 따라 신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버선 없이 맨발로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여성들은 발이 작은 것을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발에 꼭 끼는 버선을 신었는데 반가에서는 항상 핫버선을 신어 발모양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리고 닳아서 떨어진 버선을 깁는 일은 여성들의 고된 일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기운 버선을 ‘새김버선’ 또는 ‘새금버선’이라고 했다. 버선 기울 때 버선볼에 금을 새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사대부들은 버선 신은 발에 가죽신(깢신․깍신)이나 고운 미투리(메투리)를 신었다. 서민은 출입에 ‘육날 미투리’를 신었다고 하는데 출입시에만 신었기 때문에 1년 정도는 너끈히 신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에는 짚으로 거칠게 엮은 ‘네날 짚신’을 신었다. ‘육날’이다, ‘네날’이다라는 것은 신발 바닥에 경사의 수가 몇 개인가를 설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네날보다는 육날이 고급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나무로 만든 나막신도 있었는데 비올 때는 물론, 다른 신발이 없는 경우에는 평상시에도 흔히 신고 다녔다고 한다. 여성들의 경우, 반가 여성들이나 혼례를 치루는 신부는 당혜(단혜․단녀․비단혜)라는 고운 신을 신거나 고운 짚으로 짜고 색실로 장식한 ‘꽃신’을 신기도 했다.
일제 시대 검정 고무신이 생산되면서 배급을 받거나 마을에서 뽑기를 하여 얻어 신기도 했었는데 당시로는 상당히 귀한 것이었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미루나무로 만든 ‘게다’라는 신을 신기도 했다.
(3) 노동복
서민의 경우 노동복이라는 것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헌 옷이나 무명, 무삼베옷을 편하게 입었다. 비가 올 때는 도롱이(도랭이․도래이․도리)를 등에 둘렀는데 짚으로 만든 ‘짚도리’와 띠풀로 만든 ‘띠도리’가 있었다. 벼짚이나 보리짚으로 만든 것은 비에 젖으면 무겁기는 했지만 따뜻해서 좋았고 띠풀로 만든 것은 비에 젖어도 가벼워서 좋았다고 한다. 또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지삿갓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삿갓 모양의 대나무 틀에 유지를 잘 펴바르고 색지로 박쥐 문양 등을 오려 붙여 장식을 한 고운 것도 있었다.
6. 수의와 제복
‘죽음옷’, ‘호상옷’ 또는 ‘저승옷’이라고도 불리우는 수의는 예로부터 새 옷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평상시의 옷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는 흰색의 삼베나 명주만을 사용하게 되었고 특히 연로한 부모님이 계신 경우, 윤달에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미리 장만해 둔 수의에 벌레가 일면 새로 짓는다고 하는데 벌레를 막기 위해 천장 대들보에 걸어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의 수의로 만들어 놓는 옷에는 도포와 두루마기, 바지․저고리, 중의․적삼 등이 있고 여자의 경우는 원삼, 저고리, 속저고리, 치마, 속치마, 단의, 고의 등이 있다. 그 외에 멱목, 엄, 악수, 버선, 신, 천금, 지욕, 오낭 등을 남녀 공통으로 준비하는데 집안의 형편에 따라 준비하는 내용물은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지금은 거의 장의사에서 마련해 놓은 것을 가격에 맞추어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머리에 통두건을 쓰고 도포나 두루마기를 입는다. 성복제(成服祭)를 지낸 상주는 참최복이나 재최복을 입는데, 이를 제복 또는 성복이라고 했다. 머리에는 굴건을 쓰고 삼과 짚으로 꼰 수질과 요질(터드레)를 두르고 다리에는 행전을 쳤다. 또 부친상에는 대나무 상장(喪杖)을 들고 모친상에는 버드나무 상장을 들어서 부상과 모상을 구별하였다. 이렇게 입고는 부친상에 3년상 또는 모친상에 기년상을 지냈다. 또 상중에 상주가 외출을 해야 할 때는 죄인이 해를 볼 수 없다고 하여 패랭이(패리․피리)나 방립(방갓)을 쓰고 두랭이(큰 두루마기, 행의)를 입었다.
탈상 후 기제사나 시제, 향사 등에는 유건이나 갓에 도포 또는 두루마기를 입고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7. 맺음말
이상으로 안동과 관련된 문헌자료나 유물, 제보 자료 등을 엮어 안동사람들의 의생활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안동의 전통복식문화는 또 다른 전통문화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유지․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미래의 안동문화 속에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통시적 흐름을 추정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역사적 전개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개화기 이후에 대한 내용으로 한정하였다. 또 제보자들의 제보내용에도 개인차가 컸기 때문에 정리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결론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제안하고자 한다.
전통복식에 대한 조사 결과, 과거의 양반문화와 상민문화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복식문화 역시 반상의 차이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집안마다 예법이나 상황에 의해 의생활의 내용과 수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 등에 의해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복식문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따라서 의생활 문화의 내용 자체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크게 작용하는 생활문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동 지역과 다른 지역과의 변별성을 제시하기란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든다. 안동포와 같은 직물생산과 토속성이 강한 복식용어가 지역적 특성을 드러낼 뿐이다. 다른 연구결과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의복의 외형적인 면에서는 지역적인 특징을 찾아내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분석해 본다면 의복의 세부적인 형태나 바느질 방법, 유행을 수용한 시기, 복식의 용도, 주술적 의미 등에서 차이가 밝혀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출처 : 안동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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