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박병렬
수십 계단을 공처럼 구르고 튀어 올라 몸 실은 전철 안
이쪽 칸과 저쪽 칸의 열려진 문으로
그물무늬비단뱀 같은 길이 길게 뻗어 들어오고 있었다
휘어진 곳에서 토막토막 잘려 일부는 사라졌다가
곧은 곳에서 이어져 다시 꿈틀거리며 나타나는 길,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틈새로 보이는 길은
낡은 푯말조차 찾을 수 없는 아득한 오솔길이었다가
신호등이 대낮에도 삼색으로 반짝이는 신작로이었다가
그 길 허공에는 꽃을 찾아 맴돌고 있는 나비처럼
인생의 손잡이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역을 지날 때마다 나선 나무들이 심어지고
가시덤불 가득한 숲속으로 접어들자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온몸을 파고들어
나비가 움찔하며 멈춘 날갯짓에 손잡이가 달아난 탓일까
나는 살얼음 위의 팽이처럼 서서
균형을 잡으려고 빙글빙글 돌다가 종착역이 아닌
푸른 별의 이름을 가진 작가의 역에 튕겨 내리자
또 다른 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백꽃
박병렬
박물관 같은 사무실 모퉁이에 앉아
점심시간도 잊고 창문 너머를 보아요
저쪽, 금병산은 발 뻗고 잠결에 취한 코끼리
원창고개 쪽으로 얼굴을
실레마을 쪽으로 다리와 꼬리를 내려놓고 있는데
점순이가 코끼리 다리를 타고 비탈을 내려와
발바닥을 간지럽히지만 꼼짝하지 않아요
박물관 바닥을 뚫고 솟구치듯 피어난 한 그루의 동백꽃은
붕새 같은 날개 활짝 펼쳤어요
일벌이 꿀 독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오후
산자락이 달려와 알싸한 향기를 잔뜩 실어 가고
가지 사이사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닭들이 날개를 한 번씩 펼쳤다 접을 때마다
꽃잎 한 잎 한 잎 날아가 산등선을 넘어요
코끼리가 향기를 맡고 잠에서 깨어나
점순이와 나를 등에 태우고
실레마을 쪽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코에 입에 귀에 등에 옆구리에 다리에 꼬리에
동백 수십 그루 심고서
*박병렬∥한림대학교 커뮤니티교육원 시창작반.
제31회 전국박인환백일장 시부문 입상.
제30회 김유정기억하기전국문예작품공모 시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