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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남으로 내려 가자 / 그곳 모란이 활짝 핀 곳에 / 영랑이 숨쉬고 있네~ / 음악이 흐르는 그의 글에 / 아 내 마음 담고 싶어라 / 높푸른 하늘이 있는 그곳 /아, 영원히 남으리 영랑과 강진.’
1979년 대학가요제 입상곡 ‘영랑과 강진’에 나온 가사다. 이곳 출신 김종률이 짓고 부른 노래다. 그의 강진 찬가(讚歌)는 영랑의 많은 시처럼 살갑고 영롱했다. 예로부터 인문학도들이 강진을 단골 답사장소로 여겨온 것도 그런 시심을 음미하고 싶었을 터이다. 하지만 강진에 ‘영랑’만 있지 않았다. 조선후기 대학자 ‘다산’이 있고, ‘차’가 널려 있고, 여전히 ‘고려청자’와 ‘옹기’를 빚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전라도병영’이 있고, 제주로 가는 뱃길 ‘마량포구’ 등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유의미한 역사적 유물과 유물이 지천에 널려 있다. | |
조선시대 전라도~제주도 공식 뱃길이 열린 마량 포구, ‘해질녘’이 장관이다. 다리는 2007년 개통된 고금대교다. |
강진읍 전경. 농촌마을이었던 이곳에도 아파트 등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가 강진만이다. |
‘역사적 인물’로 대반전에 나선 강진
강진은 영암·장흥·해남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서쪽 월출산(해발 809m)을 병풍 삼아 군데군데 200~500m대 산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 아래 강진읍을 비롯해 옴천·작천·성전·군동·병영·대구·칠량·도암·신전·마량 등 1읍 10면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수는 291개 마을, 거기서 주민 4만2067명(2011년 6월말 현재)이 산다.
강진에는 1967년까지만 해도 13만여명이 살았으나 이후 내내 한해도 빠짐없이 인구수가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런데 2004년 11월 황주홍 군수 취임 후 ‘인구 늘리기 작전’이 본격화됐다. 드디어 2009년 11명, 지난해에는 무려 460명이 늘어났다. 올해도 그 이상 증가가 기대되고 있다. 갖가지 출산장려 시책과 외지인 귀농작전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강진군은 인구증가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강진이 그 옛날의 영화를 꿈꾸며 비상에 나서고 있다. 그것은 ‘대반전’으로 불릴 만하다.
‘다산 러브스토리’ 등 지적세례 흐뭇
뭐니 뭐니 해도 ‘관광자원’이 그 밑천이다. 으뜸은 역시 ‘다산’(茶山)이다. 정약용, 그는 경기 남양주 출신이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1801년, 꼭 39세 때였다. 그는 강진 유배생활 10년 동안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작 600여권을 썼다. 그가 거닐며 머문 곳은 모두 명소가 됐다. 첫 거처인 강진읍성 동문밖 주막집 바깥채 사의재((四宜齋)에서부터 그는 후세 공직자들의 사표가 될 만한 언행을 남겼다. ‘생각·용모·언어·동작이 올바른 이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그는 주막집에서 일하던 표씨부인과 인연을 맺고 홍림이라는 딸까지 낳았다. 그의 ‘러브 스토리’는 현지에서 듣는 것이 더 실감난다. 현재 이곳에는 그 옛날처럼 파전·동동주 등을 파는 토속음식점이 차려져 있다. | |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 등 불후의 저술 600여권을 쓴 다산초당. 주변에 ‘丁石’ ‘천일각’ 등의 그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
다산제 중 유배재현 행사. 매년 5월 귀양생활을 하면서도 민초들을 돌보고, 학문을 가르쳤던 정약용을 기리는 행사다. |
꼿꼿하면서도 현실적이었던 사나이. 정약용은 그랬다. 그리고 이곳 단칸방 사의재에서 초기 유배 시절 4년을 보내며, 후에 그가 이룩할 빛나는 학문적 업적의 기초를 세운다. 탐관오리들에게 핍박받는 민초들을 직접 목격하며 한숨을 쉬던 것도 이곳이었다. 사의재 시절 그가 지은 시를 보면 그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폭설에 갇혀 /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도암면 귤동마을 뒷산 다산초당. 그가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을 했던 곳이다. 원래는 초가여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일제 때 붕괴된 후, 50년대 후반 목조기와로 복원됐다. 현판 글씨는 추사체를 모아 판각한 것이다. 바로 옆에 집필실로 썼던 동암(東菴), ‘18제자’ 등 문하생들이 밤새워 토론하던 공간 서암(西庵)이 있다. 초당 서쪽 뒤편에는 그가 직접 바위에 쓴 ‘丁石’(정석)이 남아 있다. 동암에서 조금 오르면 천일각이 있다. 함께 내려오면서,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격한 마음을 달래던 곳이다. 200년 전 그의 흔적을 다산초당 아래 다산유물전시관에 모아뒀다. 매년 5월 그의 높은 기개와 나라사랑을 기리는 축제 ‘다산제’가 열리고 있다.
변절하지 않은 지식인, 영랑 김윤식
이곳 출신 영랑 김윤식도 다산 못지않은 팬들이 많다. 읍내 탑동마을에는 그의 생가가 1985년 복원돼 있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다. 이곳에서 주옥같은 ‘한국 서정시’가 탄생했다. 국문학도나 문학가 지망생들이 날마다 줄지어 찾는다. 매년 4월말~5월초, 그의 생가 앞마당에 모란이 활짝 필 무렵, 영랑문학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그의 시처럼 ‘5월 어느 날’이면 ‘모란이 뚝뚝 떨어진다’. 후세들은 영랑백일장, 시낭송대회, 미술대회 등을 열어 그의 시정을 이어가고 있다. 가을엔 돌담의 빨간 담쟁이넝쿨이 시심을 지피게 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생가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 드넓은 강진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그는 열일곱 살이던 1919년 휘문의숙(휘문고) 재학 때, ‘독립선언문’을 강진으로 들고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일제 때는 일본유학을 그만두고 돌아온 후 정지용·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했다. 이후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내놓고 반대하기도 했다. 변절하지 않은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것은 더욱 그를 돋보이게 한다. 한국무용의 전설적인 스타 최승희와 연인 사이였다.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도 강진 출신
한국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 ‘강진 출신’이다. 헨드릭 하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들어왔다. 효종 4년(1653년)이었다. 그는 14년 동안 억류생활 중 무려 7년간을 강진 병영에서 살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억류됐던 것이다. 병영면 성동리 일대에 자리한 ‘전라병영성’은 그를 붙잡아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은 조선조 500년간 호남•제주 일대 육군을 호령하던 총지휘부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일부가 불타고, 곧 이은 갑오경장 때 새로운 군제가 시행되면서 호남 최대 군사기지가 폐쇄됐다.
하멜은 그때 자신의 경험을 담은 ‘하멜 표류기’(하멜보고서)를 지어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등을 유럽에 처음 알렸다. 이 책은 그가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증거로 쓴 것이다. 책에는 강진 얘기가 수두룩하게 나온다. 병영 일대의 스님들과 교류, 기근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의 실상, 자신을 감시하던 병사들과의 인연 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강진군은 그의 고향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 1998년 자매결연을 했다. 하멜기념관도 지었다. 그의 동상이 섰고, 네덜란드 상선이 그때 싣고 다녔던 실제 대포와 고지도, 한국 나막신의 원형이 된 네덜란드 나막신 등 볼거리가 많다. ‘그의 일기’도 원본을 복사해 전시하고 있다. 곁에는 커다란 네덜란드 풍차가 건립돼 얘깃거리를 더한다.
이 마을 골목에는 네덜란드식 돌담길이 눈길을 끈다. 층별로 돌을 어긋나게 쌓아만든 돌담이다. 하멜 일행은 기근으로 관에서 먹을 것을 대지 못하자, 담장을 쌓는 등 품팔이를 하면서 힘겹게 억류생활을 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가 고향식으로 쌓은 돌담길이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
영랑생가. 한국 서정시의 대가가 태어난 곳.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 앞마당 모란이 필 무렵 영랑축제가 영랑문학제가 열린다. |
하멜기념관 옆 네덜란드 풍차와 동상. |
‘청자’와 ‘옹기’의 산실, 강진의 품위를 높인다
강진은 고려청자의 고향이다. 청자는 중세예술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문화재다. 고려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청자. 드디어 11세기 말 형태와 문양이 독창적으로 정립됐다. 그 중에서도 강진 도요지는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굽는 곳이었다. 12세기엔 상감청자 이외에 철화청자, 진사청자 등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가 등장하면서 꽃을 피워냈다. 그러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백자가 들어서면서 시나브로 청자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진에는 고려청자 가마터 188곳이 남아 있었다.
고려시대 최대 청자 도요지, 강진을 역사에서 건져낸 것은 우리가 아닌, 일본사람들이었다. 고려청자가 타의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청자를 빚어내려면 무엇보다 흙이 중요하다. 그 다음이 빛깔을 살려내는 유약이다. 그러나 그 비법이 조선시대 들어 끊기면서 ‘수수께끼’가 돼버린 것이다. 강진 산 청자는 현재 국보 14점, 보물 6점으로 올라 있다. 서남해에 침몰됐던 청자보물선은 모두 강진 청자를 싣고 가던 중 화를 당했다. 그 명품을 만들어낸, ‘도공의 후예’ 강진사람들은 달랐다. 50여 년간 구슬땀을 흘린 끝에 1978년 마침내 고려청자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가마터가 밀집돼 있던 대구면 일대에 일 년 내내 ‘1300℃ 불’이 타오르고 있다.
강진군은 7~8월에 강진청자축제를 연다. 해마다 정부가 2개를 뽑는 ‘대한민국 대표축제’에 선정될 정도로 내용이 튼실하다. 청자빚기 체험과 국제학술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또 해마다 유럽·미국·남미를 도는 고려청자 순회전도 열고 있다. 1997년 대구면 사당리에 청자박물관을 지었다. 이곳에선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청자토요경매가 열린다. 생활자기인 ‘옹기’도 강진산이 으뜸이다. 플라스틱의 등장으로 한 때 주눅들었던 옹기가 웰빙시대를 맞아 당당히 대접을 받고 있다. 칠량면 봉황마을이 옹기의 산실이다. 꽃병, 술병, 콩나물시루, 떡시루, 유골함, 초꽂이 등잔 등 온갖 크고 작은 옹기가 선을 뵈고 있다.
따뜻한 기온·풍성한 먹을 거리, ‘스포츠 겨울 훈련기지’로 떴다
강진군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스포츠 마케팅’으로 한해 200억 원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겨울 같지 않은 기온, 넓은 들녘과 ‘해산물 보고’인 강진만, 때 묻지 않은 산에서 나는 먹을 거리가 ‘선수단’을 불러 모은다.
2005년 놀리기 일쑤인 종합운동장을 개보수한데 이어 운동장 2개를 더 지었다. 여기다 축구장(7면), 베이스볼 파크, 육상트랙, 테니스장(10면), 태권도체육관 등이 속속 들어섰다. 모두 국제 경기를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다. 이 덕분에 지난해만 해도 전국에서 1,056개 팀이 강진에서 겨울을 났고, 연중 각종 전국대회가 23개나 열린다. 축구·야구·테니스·사이클·베이스볼·태권도…. 지방대회도 17개다. 이렇게 해서 228억 원 소득을 올렸다. 올해는 300억 원 이상을 예상되고 있다. 선수들이 몰려오면서 식당이나 숙박업소가 연중 호황을 누리고 있다.
‘축제’ 그리고, ‘산해진미’, ‘강진 남행’은 행복하다
다산제와 영랑문학제, 강진청자축제 외에도 마량미항축제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매년 추석 무렵이다. 마량은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잇는 공식항로였다. 수군기지가 있었고, 한반도 최남단 봉수대가 있었다. ‘가깝고 멀었던’ 완도군 고금면과 마량 사이에 2007년 고금대교가 놓였다. 고금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통합지위부가 설치됐다. 전쟁 끝 무렵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이 100일간 안치하기도 했던 곳이다. 마량포구의 해질녘은 한 폭의 ‘명화’같다. | |
축제에 온 관광객들이 숭어잡이 체험을 하고 있다. 매년 추석 무렵 열린다. |
매년 7월말~8월초 탐진강 둔치에서 열리는 은어축제 뱃놀이 장면. 은어와 메기잡이 체험도 재미있다. |
두 지역 사이 바다는 해산물이 넉넉하다. 우럭, 광어, 농어, 놀래미, 전복, 숭어, 전어, 참게 등 사시사철 물때 맞춰 고기가 뭍에 오른다. 바지락, 꼬막, 조개 등 패류도 많다. 이를 밑천 삼아 한 판이 벌어진다. 해마다 숭어잡이 체험, 바다낚시대회, 떼배 입항체험, 음악공연 등이 열린다.
탐진강 은어축제는 7월말 8월초에 열린다. 군동면 탐진강 둔치에서다. 은어는 강진의 특산물이다. 진상품이었단다. 은어맨손잡이, 메기잡이, 줄배타기 체험이 즐겁고, 강변영화제·탐진음악제가 곁들여진다.
강진만 풍어제는 9월에 열린다. 도암면 망호선착장 인근 해역이다. 이곳 전어는 천하일미(天下一味)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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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남도답사 1번지’ 가는 길은 좀 멀다. 서울서는 남쪽 땅끝까지 가야 한다는 맘으로 남행을 해야 한다. 서울·인천·충청권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편하다. 자동차나 고속도로로 일단 목포까지 간 후, 국도 2호선을 타고 영암을 거쳐 강진읍까지 간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4시간40분이 걸린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5차례 버스가 뜬다. 대구·경북 지역은 88고속도로, 전북권은 호남고속도로를 각각 타고 광주로 들어간 후 광주~나주~영암~강진 국도를 탄다.
부산에서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순천까지 간 후 국도 2호선을 보성·장흥을 거쳐 타고 가면 된다. 4시간 30분 거리. 하루 22회 왕복한다. 내년 4월 광양~목포 고속도로(106.8㎞)가 완공되면 한결 다가가기 쉽다. | |
KTX를 이용하려면 용산~목포(3시간 10분), 용산~나주(3시간) 구간 티켓을 끊어야 한다. 목포와 나주에서 내려 시외버스나 렌터카를 타면 된다. 항공편은 김포~광주 편을 이용하면 된다. 물론 광주에서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 |
- 글 배명재 / 경향신문 기자
- 경향신문 사회부를 거쳐 1993년부터 광주에서 광주시청, 전남도청, 경찰서 등을 출입하고 있다. 다문화가정과 섬 문화, 중국 사회와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인 절반 이렇게 산다-비정규직 800만 시대’를 공동취재해 2009년 한국기자상를 받았다.
자료협조 강진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