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학박람회 참가 후기(上)
무엇보다도 해를 입히지 마라 (First, Do No Harm)
지난 달에 전라남도 장흥에서 열린 통합의학박람회를 다녀왔다.
흔히들 통합의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낯설게 생각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통합의학은 이제 큰 흐름이 되고 있다.
요즘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통섭’이라는 주제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것처럼,
의학이라는 영역에서도 생화학을 기반으로 한 현대 의학에 과학적 검증을 거친
대체의학적인 요법들을 받아들여 개개인에게 최선의 솔루션을 제시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다.
수학에서 잘게 쪼개는 미분을 한 후에 결국 다시 적분을 통해 면적과 부피를 측정하는 것처럼
의학을 포함한 과학의 영역은 그동안 전문화, 세분화의 과정을 거쳐 미분의 극한에 도달한 것 같다.
그 결과 성과 못지 않게 다양한 부작용을 경험한 끝에 쪼개져 있던 영역들을
다시 합치는 통합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통합의학은 단순히 합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인 측면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신체적인 질환만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 전체를 봐야한다는 것이며
자연적인 치료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히포크라테스는 “First, Do No Harm(무엇보다도, 해를 입히지 마라)”이라며
효과적인 치료 이전에 안전한 치료가 더 중요함을 강조했다.
무언가를 함에 있어 해가 득보다 크다면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치료 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위가
혹시나 환자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지 항상 주의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치료도 환자의 내면에 있는 자연치유력을 키워
스스로 병을 극복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는 없기에, 외부에서 약이든 수술이든
무언가를 더 해 주는 것이 혹시라도 자연치유력에 해를 끼칠 수 있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히 통제하고 완벽하게 낫게 만들기 어려우니
누군가를 치료하려는 사람은 늘 겸손하고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을 보아야하는 이유
서울대학교 치유과학센터와 함께 통합의학 박람회장에 설치된 5개의 분야 중에서
자연치유관이라는 테마관을 1주일간 맡게 되었다.
서양의학을 전공하고 통합의학을 추구하는 네 명의 의사들이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해독,
몸을 바로 세우는 운동, 음식 치료 등의 주제를 맡아 하루씩 담당하기로 하였고
나는 그 중 음식 치료를 중심으로 통합의학적 평가와 처방, 교육을 진행했다.
하룻동안 40여명의 환자분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사례들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해볼까 한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서성이던 한 할아버님이 무언가 말씀하실 듯, 하실 듯하면서
내 주변을 맴도시길래 “편하게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라며 운을 띄워봤다.
안 여쭤봤으면 죄송했을 정도로 ‘물은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소화가 잘 안 되는데 왜 그러냐’,
‘은행은 몇 개를 먹어야 되는 건가’ 등등 82세 할아버지의 진지한 질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렇게 지면에 옮겨 놓으니 ‘별 문제 아닌 걸로 뭘 이렇게 고민하시나’라고
넘겨도 되는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분 자신에게만은 꼬깃꼬깃 품 속 깊이 접어 놓은 지폐 조각처럼
남들에게 말은 못 하고 늘 혼자 간직해오던 문제임에는 틀림 없었다. 나 역시 진지해진다.
물은 원하시는 때 드시면 된다고 말씀드리니 무언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시다.
식사 중이나 식사 전 한 두 시간 이내에 물을 드시면 위액을 희석시켜 소화가 잘 안 될 수 있으니
이왕이면 그때는 피하시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니 어르신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르신의 질문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셨는지 좀더 적극적으로 본인의 증세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
이것 저것 여쭤보다 보니 어르신은 아침에 찬 물을 먹는 게 좋다고 해서 따라하기 시작하셨고
소화가 더 안 되는 것도 새로운 습관을 시작한 시기와 비슷했다.
왜 이렇게 물 드시는 데 집착하시나 질문을 이어가다 보니
‘그러고 보니 물을 마시면서 소화가 잘 안 된 것 같다’며 스스로 답을 찾으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번엔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어르신의 증세에 대해 꼬치꼬치 여쭤 보니,
현미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최근에 식사 때마다 100% 현미로 된 밥을 드시고 계셨다.
현미밥 붐이 일면서 현미를 드시는 분들이 많다.
현미의 장점만을 얘기하라고 하면 아마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수두룩하리라 생각한다.
섬유소와 미네랄, 비타민과 필수 지방산을 함유하고 있는 껍질과 씨눈을 제거해버린 백미보다
껍질을 살려둔 현미가 영양소 면에서 우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미의 성분 중 파이틱산은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의 흡수를 막는다.
현미는 장 안에 있는 찌꺼기들을 쓸어내어 청소하는 기능이 크기에, 과식과 가공식품 섭취로
쉴 틈이 없는 현대인의 장 건강을 도와주는 기특한 식품이기도 하지만
영양소의 흡수를 방해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고령의 어르신, 성장기의 어린이들 중 특히 마른 경우에는
현미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백미와 섞던가, 일부 껍질을 깎아낸 오분도미, 칠분도미를 활용하던가,
현미를 발아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음식만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의 상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약이 모든 사람에게 약이 아닌 것처럼 음식도 좋다는 것을 꾸역꾸역 따라 먹는 것이 건강을 위한 답은 아니다.
통합의학박람회에서 바짝 마르신 몸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좋다는 말을 따라
현미를 드시며 소화가 안 된다고 호소하시는 수많은 어르신들을 보니 그동안 통곡을 먹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해왔던 나의 말과 글이 살짝 미안해질 정도였다.(계속)
@ 이경미 : MediSolution 대표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통합의학 전문의. 요리하는 의사.
서울대학교 의학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병원 가정의학과 임상 강사를 역임하였고
차의과대학교 대체의학 석사, 통합의학의 세계적인 중심인 미국 애리조나 대학교 통합의학 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울대학교 보완통합의학연구소에서 연구위원을 역임하였고
현재 통합의학에 기반한 웰니스 컨설팅을 제공하는 창조적 1인 기업 MediSolution의 대표이다.
한때 외국계 제약 회사에 근무하면서 약을 중심으로 한 의료 시스템의 한계를 목격한 후
보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음식을 통한 질병 예방과 치료에 주력하며 이에 대한 강의와 코칭 및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KBS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 지방 > < 항노화 해독 밥상> < 건강수 > < 건강수프 > 등
다수에 출연하여 약이나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주변의 식재료를 통해
어떻게 건강을 지키고 질병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풀어나가는 역할을 하였다.
국내 최초 메디컬 팟캐스트 [ 비온뒤 ] 에 방송 '힐링푸드 아카데미'를 연재하고 있으며
차의과대학교에서 '통합요법의 이해'라는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계원예술대학교 수신재에서 도시 농부, 디자이너, 요리사, 의사가 협업하는
새로운 시도인 < 도시농업과 디자인 아카데미 >를 통해 건강과 음식, 텃밭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와 요리 시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학과 졸업 / 애리조나 대학 통합의학 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보완통합의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 조선일보 '이경미의 힐링 푸드' 중에서 -
입력 : 2014.12.04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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